암살범과 추적자: 백범 김구 암살 사건, 끝나지 않은 이야기
두 개의 시선, 하나의 진실
1949년 6월 26일,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총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범 안두희의 총탄에 스러진 것입니다.
이 사건은 한 명의 '암살범'과, 그의 뒤를 13년간 끈질기게 쫓은 한 명의 '추적자'라는 두 개의 시선을 통해 비로소 그 실체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암살범 안두희와 추적자 권중희, 두 사람의 눈을 빌려 그날의 진실을 향한 끈질긴 여정을 따라갑니다.
때로는 암살범의 입으로, 때로는 추적자의 집념으로 재구성되는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역사의 심판대 위에 오른 한 사건의 복잡하고도 아픈 내면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1부: 경교장의 총성
1. 안두희의 시선: "그날, 나는 역사의 방아쇠를 당겼다."
훗날 법정에서, 나는 그날의 내 행동을 이렇게 정당화했다.
1949년 6월 26일, 그날의 공기는 유난히 무거웠다.
나는 육군 포병 소위이자 서북청년회 단원이었다.
정복을 차려입고 경교장으로 향하는 내 마음은 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비서진에게는 간단히 문안 인사를 드리러 왔다 말하고 1층에서 잠시 기다렸다.
마침내 선생이 계신 2층 서재로 안내되었다.
먹 향이 은은한 서재에서 선생은 붓글씨를 쓰고 계셨다.
나는 선생께 "옹진 전투에 나가게 되어 마지막으로 인사 여쭙고 선생의 포부를 듣고 싶어 왔습니다"라고 말을 건넸다.
선생은 불쾌한 표정으로 "세간에 낭설이 많은데 너까지 와서 이러면 남들이 색안경을 끼고 볼 테니 돌아가라"고 하셨다.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정당과 언론계 모두 선생께서 공산당과 악수한다고 합니다. 오늘 꼭 선생님의 본심을 알고야 돌아가겠습니다."
이 말에 선생은 대노하시며
"에이, 고약한 놈! 나에게 반동하는 놈은 국가와 민족의 반역이다!"라고 소리치셨다.
그 순간, 나는 확신했다.
'틀림없이 선생은 국가의 반동이다. 국가를 위하여 선생을 죽이는 것이 좋겠다.'
내 손으로 이 장애물을 치워야 한다고, 그것이 군인의 길이라고 단정했다.
불과 2, 3초의 짧은 순간이었지만 결심은 굳었다.
나는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 들고 눈을 감은 채 방아쇠를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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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교장에서 암살당한 김구 |
2. 시대의 증언: 왜 백범은 표적이 되었나?
안두희가 '우발적 단독 범행'이라 주장했던 이 사건의 배경에는 당시 대한민국의 첨예한 정치적 대립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백범 김구는 여러 세력에게 불편하고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 단독 정부 수립 반대
백범은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이 민족의 영구적인 분단을 고착화시킬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는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분단을 막기 위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 남북 협상 추진
이승만 정부의 노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통일 정부 수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1948년 북한의 김일성, 김두봉과의 회담에 참여하는 등 남북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이는 당시 반공 이데올로기를 국시로 삼았던 정권에게는 용납하기 힘든 행보였습니다.
• 친일파 청산 요구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의 요직과 기득권층에는 일제강점기 경찰, 군인 출신의 친일 세력이 대거 포진해 있었습니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강력한 친일파 척결을 주장했던 백범의 존재는 이들에게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3. 안두희의 시선: "나는 영웅인가, 죄인인가."
사건 직후 나는 경교장을 빠져나가다 붙잡혀 헌병사령부로 연행되었다.
조사를 받고 군사재판에 넘겨져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세상은 나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재판정 주변에는 "애국자 안두희를 석방하라!"는 반공 청년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법정에서는 내 행동이 '표창받을 일'이라는 변론까지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기징역은 15년으로, 다시 10년으로 감형되었다.
그리고 1년도 채 되지 않아 6.25 전쟁이 터졌다.
나는 형 집행정지로 풀려나 군에 복귀했고, 심지어 옥중에 있던 몸으로 소위에서 소령까지 2계급 특진하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논쟁)
전쟁이 끝나자 나는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되었다.
나의 행위는 국가를 위한 '의거'였고, 나는 죄인이 아닌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다고 믿었다.
이처럼, 역사의 한 페이지는 한 명의 '애국자'와 한 분의 '민족 지도자'의 죽음으로 채워지는 듯했다.
하지만 진실은 그렇게 간단히 묻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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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살범 안두희 |
2부: 벌받지 않은 자와 뒤쫓는 자
4. 권중희의 시선: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음을 증명하리라."
젊은 시절, 나는 '백범일지'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거인의 삶 앞에서 숙연해졌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접했다.
백범 선생을 시해한 안두희가 제대로 된 처벌은커녕, 군납 사업으로 큰돈을 벌며 호의호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미국으로 이민까지 준비한다는 기사를 보고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정의가 땅에 떨어진 현실 앞에서 나는 결심했다.
이대로 역사의 죄인을 놓아둘 수는 없다고.
1983년, 나는 생계 수단이었던 기원 문을 닫고 안두희를 내 손으로 심판대에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나의 남은 인생을 바쳐야 할 소명이라 믿었다.
그렇게 13년에 걸친 끈질긴 추적의 길에 나섰다. (전승: 연도·기간은 회고에 따른 대략적 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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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적자 권중희 선생 |
5. 안두희의 시선: "과거는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석방 후 나는 군납 사업으로 큰 부를 쌓았다.
강원도에서는 납세액 3위를 기록할 정도였으니, 세상은 나에게 성공을 허락한 듯 보였다.
하지만 과거는 결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끊임없는 테러 위협 속에서 숨어 살아야 했다.
6개월에서 1년마다 이사를 다니고, 아내의 이름으로 주민등록을 하며 철저히 은신했다.
나의 삶은 부유했지만 동시에 불안과 공포가 뒤섞인 이중생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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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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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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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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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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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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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양구에서 군납업을 하던 중 칼로 목을 찔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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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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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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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각목으로 구타당해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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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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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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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목으로 경기도 김포 자택의 유리창 10여 장을 파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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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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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송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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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촌동 자택에 침입한 노송구에게 각목으로 구타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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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권중희의 시선: "진실을 향한 집념, 법의 경계를 넘다."
안두희는 끈질기게 입을 닫았다.
법은 그에게 면죄부를 주었고, 시간은 그의 편인 듯했다.
더 이상 합법적인 방법만으로는 진실을 밝힐 수 없다고 판단했다.
1992년, 나는 마침내 마지막 수단을 쓰기로 했다.
안두희를 납치해서라도 그의 입을 열게 해야 했다.
새벽에 그의 집에 쳐들어가 그를 자루에 담아 차에 태웠다.
그리고 경기도 가평의 한적한 사슴 농장으로 끌고 갔다.
그곳에서 나는 마침내 그의 자백을 받아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승만 대통령을 직접 만났고, 김구를 살해하라는 암묵적인 지시를 받았다"고 실토했다.
그의 진술은 놀라울 정도로 구체적이었다.
당시 경무대(청와대) 접견실의 가구 배치나, 그 자리에서 마셨던 차 종류까지 뚜렷하게 기억해냈다.
꾸며낸 이야기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생생한 증언이었다. (논쟁)
하지만 다음 날, 안두희는 기자들 앞에서 모든 것을 뒤집었다.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이었다며 전날의 증언을 모두 부인한 것이다.
눈앞에서 진실이 다시 거짓의 탈을 쓰는 순간, 나는 깊은 허탈감과 분노에 휩싸였다.
한 개인의 집요한 추적으로 드러날 뻔했던 진실은 다시 안갯속으로 사라졌고, 역사는 또 다른 방식의 심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3부: 민중의 심판과 남겨진 의문
7. 끝나지 않은 추적, 또 다른 응징자
권중희의 외로운 싸움은 책 한 권으로 이어졌다.
그의 저서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는 평범한 버스 운전기사 박기서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그는 '민족정기를 해친 사람이 천수를 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직접 역사의 심판을 집행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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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투사 박기서 |
1996년 10월 23일, 박기서는 시장에서 4천 원을 주고 산 홍두깨 비슷한 40cm 크기의 몽둥이에 '정의봉(正義棒)'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그리고 인천에 있는 안두희의 아파트로 찾아가 80세 노인이 된 암살범을 그 몽둥이로 내려쳐 살해했다.
현장에서 안두희는 두 손발이 끈으로 묶인 채 피범벅이 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피 묻은 '정의봉'이 놓여 있었다.
이른바 '민중의 심판'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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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봉 |
8. 권중희의 시선: "허망한 종결, 진실은 영원히 묻히는가."
안두희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기쁨보다 깊은 허망함을 느꼈다.
내 목표는 안두희 개인에 대한 복수가 아니었다.
그의 입을 통해 암살의 배후를 밝혀내고,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진실을 증언할 유일한 입이 영원히 닫혀버린 것이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늘 이렇게 말해왔다.
"안두희에게 보약을 먹여서라도 오래 살게 해 역사적 진실을 끝까지 파헤쳐야 했는데..."
그의 죽음은 사건의 비극적인 종결이었지만, 진실 규명이라는 나의 목표에는 가장 절망적인 결말이었다.
9. 역사의 기록: 배후는 누구인가?
안두희는 죽었지만, 수많은 증언과 자료들은 그가 결코 단독 범인이 아니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1995년 국회 진상조사보고서와 여러 증언을 통해 밝혀진 배후 세력의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 행동대 지휘 및 자금 지원
◦ 장은산 (포병사령관): 안두희의 직속상관으로 암살을 직접 지시.
◦ 김태선 (시경국장): 암살 행동대에 자금을 제공.
◦ 김지웅 (정치 브로커): 주요 기관을 드나들며 암살 계획의 전반적인 진행을 담당.
• 사건 은폐 및 비호 세력
◦ 전봉덕 (헌병 부사령관): 사건 발생 1시간여 만에 "안두희의 단독 범행"이라고 신속하게 발표하며, 사건의 배후를 은폐하려는 의도를 명확히 드러냈습니다.
◦ 채병덕 (육군참모총장): 군사재판부에 "10년만 구형하라"며 감형을 압박.
◦ 신성모 (국방장관): 피난지 부산에서 안두희를 만나 격려금 명목의 '수고비'를 전달.
• 최고위 배후 의혹
◦ 이승만 대통령: 안두희가 "직접 만나 암묵적 지시를 받았다"고 자백했으나 이후 번복했습니다.
하지만 암살범에 대한 이례적인 감형과 사면, 군 복귀 후 옥중 2계급 특진 등 파격적인 특혜는 최고 권력자의 비호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점 때문에 여전히 가장 유력한 배후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미완의 진실,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
암살범 안두희는 '민중의 심판'이라는 비극적 최후를 맞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인해 사건의 배후에 있던 거대한 권력의 실체와 진실은 끝내 명확히 규명되지 못한 채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습니다.
사건의 두 주인공은 너무나 다른 마지막을 맞았습니다.
안두희의 빈소에는 조문객 하나 없이 이름 석 자만 덩그러니 붙어 있었고,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졌습니다.
평생을 바쳐 진실을 쫓았던 추적자 권중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힌 채, 친척 농장의 소우리를 개조한 단칸방에서 궁핍 속에 쓸쓸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한 명은 역사의 죄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역사의 심판자를 자처했지만, 두 사람의 비극적인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무겁고도 끝나지 않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 글은 신뢰 가능한 사료·연구서·공개 자료를 바탕으로, 백범 김구 선생 암살 사건과 관련 인물들의 행적을 서사 형식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서술 과정에서 장면·대사·심리 묘사는 독자의 이해와 몰입을 돕기 위한 소설적 각색이 섞여 있으며, 논쟁이 있는 해석이나 배후 관련 부분은 하나의 가설·연구 견해로 보아 주셔야 합니다.
특정 인물·세력에 대한 평가는 다양한 연구자들의 시각 중 일부일 뿐 최종적 결론이 아니며, 독자 여러분께서는 “완결된 진실”이 아니라 계속 열려 있는 역사적 질문으로 함께 검토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The essay recounts the 1949 assassination of independence leader Kim Gu by army officer Ahn Doo-hee, the lenient punishment and protection Ahn received, and the 13-year pursuit by activist Kwon Jung-hee.
It closes with Ahn’s 1996 killing by citizen Park Ki-seo and asks what real justice means in modern Korean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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