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지동설: ‘별에서 온 소식’부터 종교재판까지 (Galileo Galilei)


지동설, 그리고 불멸의 유산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물리학자, 수학자)의 삶은 17세기 유럽, 격변하는 과학 혁명의 한가운데 놓인 한 인간의 고뇌와 투쟁이었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지식인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의 천 년 묵은 권위와, 종교적 교리로 굳어진 세계관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의 일생은 진리를 향한 뜨거운 열정과, 인간적인 야망, 그리고 시대의 한계와 권력의 억압 속에서 피어난 비극적 영웅 서사였다.


피사의 샹들리에와 가난의 굴레

1. 쇠락한 가문과 피사의 불만꾼

1564년 2월 15일,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피렌체 공화국 피사 시(Pisa, 現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 피사 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몰락 귀족 가문 출신이었으나, 그가 태어났을 무렵에는 가세가 기울어 극심한 경제적 궁핍에 시달렸다. 

아버지 빈센초 갈릴레이(Vincenzo Galilei, 의류 교역업자이자 유명한 류트 연주가/음악 이론가)는 호전적인 기질을 가졌으며, 아들의 운명에도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빈센초는 아들에게 집안의 재정난을 극복할 수 있는 고수익 직업인 의사(醫師)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1640년경에 그린 갈릴레이 초상화


1581년, 아버지의 바람대로 갈릴레오는 피사 대학(Università di Pisa) 의학부(醫學部)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해부학 실습보다는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 당시의 과학)과 수학(Mathematics)에 끌렸다.


어느 날, 미사를 위해 피사 대성당(Cattedrale di Pisa)을 찾은 갈릴레오의 눈에 천장에 매달린 청동 샹들리에(Chandeliers, 성당의 커다란 등)가 들어왔다. 

바람에 흔들리며 깜빡이는 촛불. 

갈릴레오는 자신의 맥박(pulse)을 시계 대신 사용하여 샹들리에가 한 번 왕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주기)을 측정했다. 

놀랍게도, 흔들림의 폭(진폭)이 줄어들어도 그 주기는 변함이 없었다.


[1581년 피사 대성당]

갈릴레오: (자신의 손목을 짚으며 중얼거린다.) "일곱, 여덟, 아홉... 아니, 저 긴 왕복이나 짧은 왕복이나 맥박 수가 변하지 않아. 진폭은 변해도 주기는 불변이라니! 진자의 등시성(The isochronism of the pendulum)... 아버지는 나에게 돈을 벌어줄 직업을 원하시지만, 이 세상의 언어는 숫자로 쓰여 있다는데, 어찌 거부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발견은 그를 현대 물리학의 창시자(Founder of modern physics)로 만드는 첫걸음이었다. 

그는 이 원리를 이용해 맥박계(Pulse meter)를 고안하기도 했다. 

결국 갈릴레오는 아버지를 설득해 의학 대신 수학과 과학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는 경제적 궁핍을 이기지 못하고 4학년 때 대학을 중퇴하고 만다.


피사 대학 시절부터 갈릴레오는 동료 교수들과 끊임없이 논쟁을 벌여 ‘논쟁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낡은 사상을 양처럼 고분고분 받아들이는 동료들을 신랄하게 조롱했다.


2. 과장된 전설과 낙하 운동의 진실

가장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그가 피사의 사탑(Leaning Tower of Pisa, 기울어진 종탑)에서 무게가 다른 두 공을 떨어뜨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무거운 물체가 먼저 떨어진다)을 공개적으로 반박했다는 것이다.


[1590년경, 피사]

(광장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자들(Aristotelian philosophers)과 호기심 어린 시민들이 모여있다. 갈릴레오가 피사의 사탑 꼭대기 난간에 서 있다.)

갈릴레오: (아래를 향해 크게 외친다.) "선배 교수님들! 물체는 그 무게로 인해 빨리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기의 저항(air resistance)이 없다면 모두 같은 가속도(acceleration)로 낙하합니다! 수천 년간 내려온 고대 그리스의 지혜(Ancient Greek Wisdom)가 여기서 무너지는 순간을 보십시오!"

철학자 폰치: (아래에서 고개를 쳐들고 비웃는다.) "자네, 갈릴레이! 저 작은 돌멩이가 저 큰 포환(砲丸)과 함께 떨어진다고? 궤변(sophistry)이로군!"


(갈릴레오는 두 개의 공을 동시에 놓는다. 관중들은 숨을 죽인다. 공들은 거의 동시에 땅에 닿는다.)

철학자 폰치: "말도 안 돼! 분명 사탑의 높이가 충분하지 않았거나, 바람 때문일세!"


그러나 이 유명한 일화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전승)

이는 갈릴레오의 제자였던 빈첸초 비비아니(Vincenzo Viviani, 갈릴레오의 전기 작가)가 스승의 위대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지어낸 ‘문학적 장치’일 뿐이라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이미 16세기 네덜란드 수학자 시몬 스테빈(Simon Stevin, 네덜란드의 수학자/물리학자)이 비슷한 실험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갈릴레오가 실제로 위대했던 점은, 사고 실험(Thought experiment)을 통해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고, 경사면 실험(Inclined plane experiment)을 통해 정량적(quantitative) 연구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사고 실험 - 갈릴레오의 방백(傍白)]

"만약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대로 무거운 물체가 빨리 떨어진다면, 느리게 떨어지는 가벼운 공과 빨리 떨어지는 무거운 공을 줄로 묶어 떨어뜨릴 때 무슨 일이 생길까? 가벼운 공은 무거운 공의 속도를 늦추고, 무거운 공은 전체 속도를 빠르게 만들 것이다. 그런데 두 공을 묶으면 원래 무거운 공보다 더 무거워진다. 그렇다면 더 빨리 떨어져야 한다! 하지만 결론은 원래의 속도보다 느려진다. 무거운 것이 가벼운 것보다 느리게 움직인다는 이 모순! 논리적 추론만으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틀렸음이 명백하다!"


갈릴레오는 낙하 속도가 무게에 의존하지 않으며, 낙하 거리가 시간의 제곱에 비례하는 시간 제곱 법칙(Time squared law)을 발견했다. 

이러한 실험과 수학을 결합한 근대적인 과학적 방법론(Scientific Methodology)이야말로 그의 최대 업적 중 하나이다.


3. 가족 부양과 베네치아에서의 좌절

1591년, 아버지 빈센초가 세상을 떠나자 장남이었던 갈릴레오에게는 가족 부양의 경제적 책임이 무겁게 지워졌다. 

여동생들의 혼수(marriage dowry) 비용 때문에 몇 년간 모은 월급을 털어야 했고, 그의 경제적 궁핍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는 더 나은 직장, 특히 높은 연봉과 안정적인 지위를 원했다.


1592년, 갈릴레오는 베네치아 공화국(Republic of Venice, 연구의 자유가 보장된 해상 무역 공화국) 근방의 파도바 대학(Università di Padova) 수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여기서 18년간 재직하며 기하학(Geometry), 천문학(Astronomy), 군사기술(Military Technology) 등을 가르치고 연구했다.


이 시기, 갈릴레오는 베네치아 시민인 마리나 감바(Marina Gamba, 갈릴레오의 동거인이자 세 자녀의 어머니)를 만나 사실혼(common-law marriage) 관계를 유지하며 1남 2녀를 두었다. 

그는 마리나와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가문의 재정적 부담과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1605년 파도바의 갈릴레오 자택]

마리나: "갈릴레오. 벌써 버지니아(Virginia, 장녀, 훗날 마리아 첼레스테 수녀)가 다섯 살, 리비아(Livia, 차녀, 훗날 아르찬젤라 수녀)가 네 살이에요. 빈센초(Vincenzo, 아들)도 곧 태어날 텐데, 우리 관계는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요?"

갈릴레오: (눈을 피하며 연구 노트를 뒤적인다.) "마리나, 우리의 삶은 보통 사람들의 틀에 갇힐 수 없소. 당신과 아이들을 위한 경제적 지원은 당연히 할 것이오. 하지만 내게는 세상의 비밀을 밝힐 사명이 있소. 결혼은... 불필요한 속박일 뿐이오. 나는 당신에게 안정을, 아이들에게 교육비를 제공할 것이니, 걱정 마시오."


이 시기는 갈릴레오의 인간적인 갈등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연구 경력을 위해 사실혼 관계를 숨겼고, 특히 딸들에게는 평생 결혼을 통한 사회생활의 기회를 박탈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별에서 온 소식과 권력의 냄새

4. 망원경의 개량과 베네치아 시연

1609년, 갈릴레오는 네덜란드(Netherlands)의 렌즈 제조업자 한스 리퍼쉬(Hans Lippershey, 망원경을 처음 발명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가 망원경을 발명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갈릴레오는 즉시 개량에 착수하여 조잡한 3배율 망원경을 20배율까지 (나중에는 30배율까지) 끌어올렸다.


[1609년 8월 21일,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

(베네치아 총독(Doge, 베네치아 공화국의 최고 통치자)을 포함한 원로원 의원들(Senators)이 광장의 가장 높은 종탑(Campanile di San Marco)에 올랐다. 갈릴레오가 그들 앞에 선다.)

총독: "갈릴레이 교수, 자네가 가져온 이 '비장의 기술(Secret technique)'이 우리가 맨눈으로 볼 수 없는 배를 볼 수 있게 한다지?"

갈릴레오: (고배율 망원경(High-powered telescope)을 건네며 자신감 있게 말한다.) "총독 각하, 이것은 해상 공화국(Maritime Republic) 베네치아의 미래입니다. 망원경을 통해 보이지 않던 적군을 위험에 처하게 하거나, 항의할 때 쓸 수 있는 첨단 무기(Advanced Weapon)입니다. 먼 바다의 배가 이러저러한 특징을 가지고 접근할 것이라 '예언'하면, 잠시 후 정말로 배가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이 실재(Reality)를 비추는 도구임은 육안으로 확인 가능합니다."


원로원 의원들은 망원경을 통해 멀리 있는 배를 보고 놀라며 감탄했다. 

갈릴레오는 이를 통해 높은 보수와 안정된 지위를 얻으려 했으나, 곧 이 '첨단 무기'가 베네치아 시내에서 팔리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의 월급 인상은 취소되었다. (자신의 아이디어를 독점적으로 유지하려는 시도가 실패했으며, 베네치아의 후원을 얻는 데 순수하게 과학적이지 않은 기만술을 사용했다)

갈릴레오는 낙담했지만, 그의 시선은 이미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1609년, 파도바 자택]

갈릴레오: "망원경의 진정한 용도는 멀리 있는 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미지의 세계를 알고, 우주의 진실을 탐구하는 것이오! 이제 이 망원경을 하늘로 돌려야 할 때요."


5. '별에서 온 소식'과 메디치가의 후원

1609년 후반부터 1610년 초에 걸쳐, 갈릴레오는 인류 최초로 망원경을 이용한 조직적인 천체 관측(Astronomical observation)을 시작했다.

첫 번째 충격은 달(Moon)이었다. 

갈릴레오가 교육받았던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Ptolemy, 지구 중심설을 체계화한 고대 천문학자) 세계관에서 천상계(Celestial Sphere)는 제5원소(Aether)로 이루어진 영원하고 완벽한 구체여야 했다.


갈릴레이의 초창기 굴절 망원경 (1609 ~ 1610)


[1610년 1월, 관측 노트]

(갈릴레오는 달의 표면을 스케치한다.)

갈릴레오: "이것 좀 보게. 달의 표면이 매끈하지 않아! 깊은 계곡(valley)과 우뚝 솟은 산(mountain)이 보이는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완벽한 구(Perfect Sphere)가 아니잖아! 천상계와 지상계(Terrestrial Sphere)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기존 철학에 스크래치(Scratch)가 나는 순간이다."


두 번째이자 결정적인 충격은 목성(Jupiter)이었다. 

갈릴레오는 목성 주변에서 작은 네 개의 점을 발견했다. 

매일 밤 관찰하니, 이 점들은 목성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며 이동했다. 

이것이 바로 갈릴레이 위성(Galilean Moons)이라 불리는 이오(Io), 유로파(Europa), 가니메데(Ganymede), 칼리스토(Callisto)이다.


갈릴레오: "모든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돌아야 한다는 지구 중심설(Geocentrism)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증명할 증거를 찾았어! 목성을 중심으로 도는 천체들이 존재한다니!"


1610년, 갈릴레오는 이 놀라운 관측 사실들을 모아 책을 출간했다. 

이름은 라틴어로 《시데리우스 눈치우스(Sidereus Nuncius)》-한국어로 ‘별에서 온 소식’ 또는 ‘별들로부터의 소식’-이다. 

이 책은 유럽 전역에 센세이션(Sensation)을 일으켰고, 갈릴레오는 가장 ‘핫한’ 과학자로 떠올랐다.


갈릴레오는 이 책을 피렌체의 명문가이자 자신의 옛 가정교사 학생이었던 코시모 2세 데 메디치(Cosimo II de' Medici, 토스카나 대공국의 제4대 대공)에게 헌정했다. 

그는 목성의 네 위성을 ‘메디치 성(Medici Stars)’이라고 명명하며, 메디치 가문의 문장(Symbol)과 결합시키는 계산적이고 정치적인 행동을 취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의 Sidereus Nuncius 상세 페이지

[1610년, 피렌체 메디치 궁정]

갈릴레오: "대공 전하(His Grand Ducal Highness)! 제가 발견한 이 네 개의 별들은 마치 전하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소국의 통치자와 같습니다. 이 별들은 메디치 가문(Medici Family)의 영광을 영원히 하늘에 새길 것입니다. 제가 전하의 수학자 겸 철학자(Mathematician and Philosopher)가 되어 영원히 전하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당시 대학 사회에서 수학자(Mathematician)는 천문학을 논할 수 없는 하위 계층이었으며, 철학자(Philosopher)의 봉급은 수학자의 8배에 달했다. 

갈릴레오는 이 정치적 거래를 통해 엄청난 수입과 함께 지적 권위를 얻었고, 1610년 파도바 대학(연구의 자유는 있지만 보수가 적은 공화국)을 떠나 로마 교황청의 영향력이 강한 토스카나 대공국(Grand Duchy of Tuscany) 피렌체(Florence) 궁정으로 둥지를 옮겼다.


6. 금성의 위상과 진실에 대한 고집

피렌체로 이주한 갈릴레오는 지동설(Heliocentrism,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했다. 

그는 금성(Venus)이 달(Moon)처럼 위상 변화(Phase changes)를 겪는다는 것을 관측했다. 

금성이 둥근 모양일 때는 작게 보이고, 초승달처럼 얇아질수록 크게 보였다.


[1610년 후반, 피렌체의 갈릴레오 서재]

갈릴레오: "금성이 지구와 가까울수록 크기가 커지고 얇아지는군. 멀어질수록 작아지고 둥글어지고... 프톨레마이오스(Ptolemy, 지구 중심설을 주장한 학자)의 모델(Model)로는 금성이 초승달 모양만 보여야 하는데! 금성이 지구 주변을 돌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금성은 지구가 아닌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1610년 갈릴레오에 의해 관측된 금성의 위상


이러한 발견은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지동설을 주장한 폴란드 천문학자)의 태양 중심 모델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증거였다.


1611년, 갈릴레오는 로마(Rome, 교황청의 중심지)를 방문하여 교황 바오로 5세(Pope Paul V)를 접견했고, 당대 최고의 예수회(Jesuit, 가톨릭교회의 학술 수도회) 학자들에게 망원경 시연을 통해 자신의 관측 결과를 인정받았다. 

당시는 교황청 내부에서도 지동설이 과학적 근거가 있다면 성경 해석을 수정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반대 세력,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적 세계관을 고수하는 학자들과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는 강경파(Hardliners)들은 갈릴레오를 이단(Heresy)으로 몰아 공격하기 시작했다. 

1614년, 도미니코회 수도자 토마소 카치니(Tommaso Caccini, 도미니코회 수도자)는 갈릴레오를 이단 혐의로 종교재판소에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1615년 로마, 논쟁 중]

갈릴레오: "자연(Nature)은 하느님(God)의 충실한 명령 집행자입니다. 성경(Bible)과 자연은 모두 성스러운 말씀에서 비롯되었으며, 성경은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지 과학을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거짓이 있을 리 없으나,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이 간혹 잘못하는 것뿐입니다!"

강경파 신학자: "자네의 주장은 종교 개혁(Reformation)의 개신교(Protestantism)와 다를 바 없네! 일개 자연철학자가 교회의 권위(Authority of the Church)가 독점한 성경 해석의 영역을 침범하려 드는가!"


그는 자신의 지적 권위를 이용하여 신학자의 영역까지 침범하려 했고, 논쟁을 즐기는 성격 때문에 스스로 로마의 분위기가 우호적이지 않을 때도 논쟁을 계속하여 적을 만들었다.


결국 1616년, 로마 교황청 검사성성(Holy Office)은 지구가 움직인다는 견해를 포기하라는 의견을 내놓았고, 갈릴레오는 이를 따르겠다고 약속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저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는 금서 목록(Index Librorum Prohibitorum)에 올랐다.


교황의 배신과 진리의 순교

7. 우르바노 8세와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

갈릴레오는 자신의 의견을 펼칠 때만을 기다렸다. 

1623년, 그와 친분이 두터웠던 마페오 바르베리니(Maffeo Barberini, 추기경)가 교황 우르바노 8세(Urban VIII)로 선출되었다. 

갈릴레오는 새 교황이 자신을 후원해 줄 것이라 확신했고, 설레는 마음으로 로마로 향했다. 


교황은 갈릴레오를 환영했다.

갈릴레오는 교황에게 천동설과 지동설을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비교하는 책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1624년 로마, 교황 접견실]

갈릴레오: "성하(Your Holiness), 두 세계 체계를 대화 형식으로 비교하는 책을 쓰고자 합니다. 진실은 공정한 비교를 통해 스스로 드러날 것입니다."

우르바노 8세 (교황): "갈릴레이, 자네가 지동설과 천동설을 비교하는 책을 쓰는 것은 괜찮네. 다만, 지구의 움직임이 '사실(Fact)'인 것처럼 보여줘서는 안 되네. 결국 인간의 지혜로는 우주의 본질을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신의 전능함(Omnipotence of God)을 인정하는 결론을 내야 할 것이야."


갈릴레오는 허락을 받고 5년 동안 집필에 몰두했다. 

그 결과 1632년에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Dialogo sopra 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가 세상에 나왔다.


책은 세 명의 인물, 즉 갈릴레오의 입장을 대변하는 살비아티(Salviati, 지동설 지지자), 중립적 시민 역할을 하는 사그레도(Sagredo, 대화 중재자),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대변하는 심플리치오(Simplicio, 천동설 지지자)가 토론하는 방식으로 쓰였다.


[심플리치오의 어원]

심플리치오(Simplicio)는 이탈리아어로 ‘단순한(Simple)’ 혹은 ‘어리석은(Foolish)’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해석되었다. 

갈릴레오는 이 캐릭터를 통해 천동설을 옹호하는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를 멍청하고 비합리적인 인물로 묘사했으며, 교황 우르바노 8세가 갈릴레오에게 제시했던 ‘인간은 신의 전능함 때문에 우주의 본질을 알 수 없다’는 결론을 심플리치오의 입을 통해 말하게 했다.


교황은 이 책을 자신에 대한 노골적인 풍자이자 배신으로 간주하고 격노했다.


8. 종교 재판과 진정한 죄목

갈릴레오는 1633년, 일흔에 가까운 고령의 나이로 로마 종교재판소(Roman Inquisition)에 다시 올랐다.


로마 종교재판에 직면한 갈릴레오


[종교 개혁의 여파]

당시 유럽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종교 개혁가)의 개신교 혁명(Protestant Revolution)으로 인해 가톨릭 교회의 권위가 심하게 도전받고 있었다. 

교황청은 성경 해석의 권위를 개인에게 부여했던 개신교의 주장에 극도로 민감했고, 갈릴레오가 과학적 발견을 근거로 성경 해석에 개입하려 한 것은 교회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비쳤다. (논쟁)


[갈릴레오의 진짜 죄목: 지동설이 아닌 '원자 이론']

일부 학자들은 갈릴레오가 재판을 받은 진짜 이유는 지동설(Heliocentrism)이 아니라, 그의 저서 《시금자(Il Saggiatore)》에서 언급했던 원자 이론(Atomism)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 이론(본질과 형상)은 가톨릭 교리 중 성체성사(Eucharist,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교리)를 정당화하는 근거였는데, 갈릴레오의 원자 이론은 이 근본 교리를 위협하는 매우 위험한 주장이었다. (논쟁)


[1633년 종교재판 심문]

심문관: "갈릴레이, 자네는 1616년 코페르니쿠스 학설을 옹호하거나 가르치지 않겠다고 약속했네. 그런데 이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는 명백히 지동설을 '사실(Truth)'로서 주장하고 있네. 자네의 교만함(Arrogance)과 교황 성하에 대한 모욕(Insult)은 용서받을 수 없네!"

갈릴레오: (고령에 건강이 나빠 재판소에서 의자에 앉아 심문을 받는다.) "제가 지동설을 부당하게 옹호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풍자하기 위해서 그렇게 쓴 것입니다. 저는 진심으로... 천동설을 부정하는 일체의 의견을 부인하고 저주하며, 교회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모든 것을 혐오할 것입니다!"


갈릴레오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신의 이론을 부정해야 했다. 

그는 지동설을 철회하도록 강요받았고, 다음과 같이 맹세했다.

“저는 진심으로 코페르니쿠스 이론과 이단,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다른 어떤 실수든 혐오하고 저주하며 겸허할 것입니다.”

그는 결국 유죄 판결을 받고 종신 징역형(Life sentence)을 선고받았으나, 고령과 건강 문제, 그리고 메디치 가문(Medici Family, 여전히 강력한 후원자)의 적극적인 후원 덕분에 감옥행 대신 평생 가택 연금(House Arrest)으로 감형되었다.


9. 그래도 지구는 돈다

종교재판장을 나서는 순간, 갈릴레오가 혼잣말로 “에푸르 시 무오베(Eppur si muove,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읊조렸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전승)

이 말은 진리를 향한 과학자의 꺾이지 않는 신념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이 말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이 말이 기록된 것은 그가 죽은 지 한참 후인 18세기 중반, 스페인 화가가 그린 그의 초상화 하단에 적혀 있던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갈릴레오가 실제로 이 말을 했다면, 그는 즉시 재판소에 다시 끌려가 사형당했을 것이다. 

이 일화는 후대에 갈릴레오를 ‘종교적 반지성(Religious anti-intellectualism)과 싸운 과학의 순교자(Martyr of science)’로 영웅화하는 과정에서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


[비겁함과 야망]

갈릴레오의 행동은 과학의 순교자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자신의 안위와 연구 환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저항하기보다 권력에 굴복하는 길을 선택했다.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그의 희곡 《갈릴레이의 생애(Life of Galileo)》에서 갈릴레오를 “사심 없는 순수한 과학자가 아니었다”고 묘사하며, 진리를 외면하고 자신의 지식을 권력에 바친 과학자의 윤리적 과실을 강하게 비판했다.


브레히트의 갈릴레오(Galileo of Brecht): "내가 만약 저항했더라면 자연과학자들도 히포크라테스 선서(Hippocratic Oath) 같은 것을 발전시킬 수 있었을 테지. 자신들의 지식을 오로지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만 적용한다는 맹세 말일세!"

갈릴레오는 진리를 향한 열정만큼이나, 세속적인 성공과 안정적인 연구 환경에 대한 인간적인 야망(Human Ambition)이 매우 강했다.


아르체트리의 어둠과 불멸의 업적

10. 아르체트리 연금과 마지막 역작

1633년 재판 이후, 갈릴레오는 피렌체 근교의 아르체트리(Arcetri, 피렌체 근교의 작은 시골 마을)에 있는 자신의 별장(Villa)에서 종신 가택 연금 상태로 남은 생을 보냈다.


이곳은 그의 두 딸, 마리아 첼레스테 수녀(Sister Maria Celeste, 본명 비르지니아 갈릴레이)와 아르찬젤라 수녀(Sister Arcangela, 본명 리비아 갈릴레이)가 살았던 산 마테오 수녀원(San Matteo Convent)과 가까웠다.


특히 장녀 마리아 첼레스테는 독실한 신자로 수녀원 생활에 잘 적응했고, 11년 동안 아버지와 124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갈릴레오에게 정신적 위안을 주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재판으로 인해 고통받을 때, 그를 위해 수녀원 규칙을 무시하고 직접 바느질을 해서 옷을 지어 보내는 등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했다.


갈릴레오의 큰 딸 비르지니아의 초상화로 추정되는 작품.


[1634년, 아르체트리 별장]

마리아 첼레스테: (수녀원 담장 너머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아버지, 제가 만든 옷이 따뜻하십니까? 교황청이 아버지의 몸은 가둘지언정, 아버지의 정신까지 가둘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아십니다."

갈릴레오: (시력이 점점 약해지는 눈으로 딸을 바라본다.) "마리아 첼레스테... 나의 가장 사랑하는 딸(The dearest daughter)... 네 편지가 나를 지탱하는 유일한 빛이구나. 내 영혼의 안식처. 너희들이 세상의 굴레에 휩쓸리지 않게 하려 수녀원에 보냈건만... 결국 내가 세상의 굴레에 갇히고 말았구나."


하지만 마리아 첼레스테는 1634년, 아버지가 가택 연금된 지 얼마 되지 않아 34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갈릴레오는 이 비극적인 상실 속에서 외로움을 견뎌야 했다.


[갈릴레오의 형제 관계: 남동생 미켈란젤로]

갈릴레오에게는 작곡가(Composer)인 남동생 미켈란젤로 갈릴레이(Michelangelo Galilei, 갈릴레오보다 11살 어림)가 있었는데, 이들은 사이가 좋지 못했다. 

그 이유는 미켈란젤로가 형에게 너무 많은 돈을 빌렸기 때문이었다. 

갈릴레오는 평생 가족의 재정적 부담(여동생들의 혼수, 자녀들의 부양, 동생의 빚)에 시달려야 했다.


11. 근대 역학의 탄생

육체의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도 갈릴레오는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 고립된 기간 동안 마지막 역작을 쓰기 시작했다. 

교황청의 검열(Censorship)을 피하기 위해 이 책은 1638년 네덜란드(Netherlands, 당시 학문의 자유가 상대적으로 높았던 지역)에서 출간되었다. 

그 이름은 《두 가지 새로운 과학에 대한 논술(Discourses and Mathematical Demonstrations Relating to Two New Sciences)》이다.


이 책은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적 물리학을 완전히 논파하고, 근대 역학(Modern Mechanics)의 기초를 다졌다.


1. 낙하 운동 법칙(Law of falling bodies): 물체의 낙하 속도가 질량(무게)에 의존하지 않고, 일정한 가속도(Constant acceleration)로 움직인다는 것을 경사면 실험을 통해 정립했다.

2. 관성 운동 법칙(Law of Inertia): 외부의 힘이 없으면 물체는 일정한 속도로 계속 운동한다는 성질, 즉 관성(Inertia)을 발견했다. 이 개념은 훗날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영국의 물리학자/수학자)의 고전 역학(Classical Mechanics)의 기초가 되었다.

3. 포물선 운동 법칙(Parabolic motion): 수평 방향의 등속 운동(Inertia)과 연직 방향의 등가속도 운동(Falling)을 동시에 적용하여, 투사체(Projectile)의 운동 경로가 포물선(Parabola)을 그린다는 것을 밝혀냈다.


갈릴레오가 묘사한 포물선 운동.


이 책은 ‘물체의 운동 법칙을 소개하는 최초의 근대 역학 교과서’로 평가받는다. 

갈릴레오의 연구는 중력(Gravity)의 개념을 포섭하지 못했고, 행성의 궤도를 원(Circle)으로 고집하는 등 한계가 있었지만, 수학과 실험을 통해 자연 현상을 기술하는 근대 과학의 방법론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었다.


12. 쓸쓸한 종말과 후대의 평가

1638년, 갈릴레오는 노환으로 시력(Sight)을 완전히 잃었다. 

어둠 속에서 고통스럽게 남은 생을 보냈다.


1642년 1월 8일, 갈릴레오는 아르체트리에서 7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죽기 직전, 그는 두 제자(Students)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쓰러져 유언(Last Words)조차 남기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토스카나 대공(Duke of Tuscany, 메디치 가문)은 그의 업적을 기려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Santa Croce Basilica,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 등 위인들의 무덤이 있는 곳) 본당에 묻고 성대한 기념비를 세우려 했다. 

하지만 로마 교황청은 이를 거부했다. 

교황청은 갈릴레오를 평범한 시민으로 부속 성당에 묻고 아무런 비석도 세우지 말라고 강요했다.


[후대의 평가와 문화적 유산]

갈릴레오는 종신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지동설에 관한 그의 저작은 모두 불태워졌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개척한 과학적 진리가 언젠가 승리할 것을 알았을 것이다.


아이작 뉴턴은 갈릴레오가 사망한 해에 태어났으며, "만유인력의 법칙(Law of Universal Gravitation)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갈릴레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평가했다. 

그의 관성과 운동학 연구는 고전 역학의 기초가 되었다.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영국의 우주 물리학자)은 갈릴레오가 누구보다도 현대 과학의 탄생에 책임이 많다고 말했다.

갈릴레오는 ‘근대 관측 천문학의 아버지’, ‘근대 물리학의 아버지’, ‘근대 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불멸의 명성을 얻었다.


[교회의 사후 평가]

로마 교황청은 1757/1758년 지동설 일반 금지 완화, 1820년 검열 완화로 출판 허용 확대, 1835년 금서목록에서 관련 저작들이 최종 삭제되었고, 갈릴레이가 죽은 지 350년 후인 199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Pope John Paul II)는 갈릴레이 재판이 ‘주관적인 오류(Subjective error)’였음을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사죄했다.


갈릴레오의 이야기는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갈릴레이의 생애》를 비롯해 뮤지컬 《시데레우스》 등 여러 창작물의 소재가 되었으며, 퀸(Queen)의 명곡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에서도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등 대중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역사의 교훈과 배울 점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삶은 과학적 진리가 권위와 충돌했을 때 겪어야 했던 고난을 상징하지만, 그의 복잡한 인생은 단순한 선악 구도를 넘어선다. 

우리는 그의 삶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1. 권위와 논리의 분별 (Discerning Authority and Logic): 갈릴레오 시대의 교회와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는 맹목적으로 진리를 거부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지동설에 대한 ‘과학적 증거’(Proof)가 부족했기 때문에 이를 ‘가설(Hypothesis)’로만 가르치라고 요구했다. 오히려 갈릴레오 자신이 틀린 이론(조석 현상의 원인)을 맹렬히 고집하고, 성경 해석이라는 신학의 영역까지 침범하며 불필요한 적을 만들었다. 진리는 확고한 증거(Evidence)를 기반으로 제시되어야 하며, 감정이나 고집(Passion or Stubbornness)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2. 현실과 이상 사이의 균형 (Balance between Reality and Ideal): 갈릴레오는 궁정 후원(Patronage)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연구 환경을 극대화했다. 과학 혁명은 순수한 진리 탐구만으로는 불가능하며, 권력(Power)과 사회적 자원(Social Resources)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그 대가로 개인적인 삶(특히 사생아였던 딸들의 미래)을 희생시키거나, 교황과의 약속을 어기는 정치적 오판을 저질렀다. 과학적 윤리와 개인적 야망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게 한다.

3. 진리의 지속적인 탐구 (Continuous Pursuit of Truth): 재판정에서 자신의 이론을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갈릴레오는 가택 연금 상태에서 근대 역학의 초석이 되는 《두 새로운 과학》을 완성했다. 물리적인 억압이 지적 활동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실패하고 좌절했지만, 그의 연구는 수많은 후대 과학자들(뉴턴, 하위헌스 등)에게 영감을 주어 결국 승리했다. 이는 진리가 비록 일시적으로 억압받을 수 있을지언정, 지속적인 연구와 기록을 통해 결국 세상에 밝혀진다는 불멸의 교훈을 남긴다.


이 글은 신뢰 가능한 사료·논문·공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한 사실 중심 서사입니다. 

피사 사탑 투하, “그래도 지구는 돈다” 등은 (전승)으로 표기했고, 재판 동기·검열 경과 등 해석이 갈리는 사안은 (논쟁)으로 처리했습니다. 

오류나 빠진 부분을 발견하시면 댓글로 알려 주세요. 

곧 바로 반영하겠습니다.


Galileo (1564–1642) helped launch modern science. 

He studied motion, improved the telescope, and observed lunar mountains, Jupiter’s moons, and Venus’s phases, undermining geocentrism. 

His Dialogue (1632) angered Urban VIII; in 1633 he recanted and was kept under house arrest, yet wrote Two New Sciences. 

 Legends like the Pisa drop and “Eppur si muove” are later myths. Church bans eased later; his methods shaped Newton and physics.

이전최근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