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Bonn)의 어둠과 천재의 서곡 (1770–1792)
1막: 혹독한 서주(序奏)
1780년, 신성 로마 제국(Holy Roman Empire)의 쾰른 선제후국(Electorate of Cologne) 수도인 본(Bonn)의 비좁은 집.
어둠이 짙게 깔린 방 안, 창밖으로는 라인강(Rhine River)의 차가운 습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여덟 살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년 12월 17일 세례 기록이 전해지는 독일 태생의 작곡가)은 낡은 건반악기 앞에 앉아 있었다.
"다시! Allegro! 힘차게!"
아버지 요한 판 베토벤(Johann van Beethoven, 궁정의 테너 가수이자 건반악기 교사)의 목소리는 술에 절어 있었다.
요한은 아들의 두드러진 재능을 알아차리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의 어린 시절 성공을 재현시키기 위해 루트비히를 혹독하게 몰아붙였다.
베토벤은 실제보다 한 살 적은 여섯 살 신동으로 선전되어 공개 연주회에 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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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트비히 판 베토벤 |
루트비히는 지칠 대로 지쳐 눈을 비볐다.
그의 주위에는 파이퍼(Tobias Friedrich Pfeiffer, 건반악기 교사) 같은 스승들도 있었는데, 불면증 환자였던 파이퍼는 때때로 잠자고 있는 루트비히를 건반 앞으로 끌어내기도 했다.
“아버지, 손가락이 굳었습니다.”
“신동이 굳다니! 모차르트의 정신을 받으려면 잠 같은 나약함은 잊어야 한다! 내가 궁정에서 연금(年金)을 얼마나 받는지 아느냐? 온 가족이 너 하나만 바라보고 있다!”
이 시대의 음악가들은 대부분 귀족이나 궁정의 후원(Patronage)에 의존하고 있었다. 베토벤의 집안 역시 할아버지 루트비히(Ludwig van Beethoven, 궁정의 카펠마이스터) 대부터 음악가 집안이었지만, 아버지 요한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수입이 불안정했다.
이 때문에 어린 루트비히는 일찍부터 가족의 생계를 짊어져야 했다.
루트비히는 묵묵히 건반을 눌렀다.
그는 하이든(Joseph Haydn)과 모차르트의 고전주의적 형식(Classical Style)을 답습하며 배웠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었다.
1783년에 출판된 세 개의 초기 피아노 소나타(WoO 47)에서 이미 그의 대담한 재능이 엿보였다.
“네페(Christian Gottlob Neefe, 베토벤의 작곡 스승) 선생님 말씀으로는, 나는 곧 이 궁정을 떠나 빈(Vienna, 오스트리아의 수도)으로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더 큰 물에서 배워야 한다고요.”
“흥! 빈이라고? 모차르트의 후광이 남아있는 곳. 네가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두고 보자. 어서 연습이나 해!”
1789년, 결국 요한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궁정에서 강제 퇴위되었고, 그의 연금 절반은 가족 부양을 위해 루트비히에게 직접 지급되었다.
루트비히는 이 무렵 폰 브로이닝(von Breuning, 베토벤에게 정신적 안정을 제공한 귀족 가문) 가문을 만나 독일 문학과 고전 문학을 접하며 교양을 쌓았고, 그곳에서 평생의 친구인 베겔러(Franz Gerhard Wegeler, 젊은 의대생)를 만났다.
그의 음악 세계는 어머니 마리아(1787년 사망)의 죽음과 아버지의 몰락이라는 개인적 비극 속에서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다.
2막: 빈(Wien)을 향한 발걸음
1792년 11월, 루트비히는 쾰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란츠(Maximilian Franz, 베토벤의 후원자)의 도움으로 빈으로 떠났다.
프랑스 혁명(French Revolution)의 여파가 유럽 전역을 뒤흔들고 있던 격동의 시기였다.
본(Bonn)을 떠나기 전, 그의 후원자 중 한 명이었던 발트슈타인 백작(Ferdinand von Waldstein)이 베토벤에게 메모를 건넸다.
그 안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맹렬한 노동의 도움으로 당신은 하이든의 손에서 모차르트의 정신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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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트슈타인 백작: 1800년 경 |
빈에 도착하자마자 루트비히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이제 모차르트가 사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빈에서, 그 거장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기대 속에 발을 디뎠다.
그는 곧 하이든에게 대위법(Counterpoint)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거장의 성격은 사뭇 달랐다.
베토벤은 규범에 얽매이지 않으려 했고, 하이든은 형식적이고 전통을 중시했다.
베토벤은 또한 살리에리(Antonio Salieri, 이탈리아 성악 작곡 스승)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았으며, 슈판치히(Ignaz Schuppanzigh, 바이올린 스승) 밑에서 바이올린을 배우기도 했다.
베토벤은 귀족들의 살롱(Salon, 사교 모임 장소)에서 연주가와 즉흥 연주자로서 명성을 쌓았다.
1795년 그의 첫 빈 연주회는 성공적이었으며, 특히 세 개의 피아노 삼중주(Op. 1)의 출판은 재정적인 성공을 가져왔다.
그는 고전주의 음악의 3대 거장(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중 한 명으로 빠르게 자리매김했다.
“자네는 정말 대단해, 루트비히. 피아노 앞에서 자네는 괴물 같아. 특히 그 즉흥 연주는 말이야. 하지만 자네의 그 불같은 성격은 좀처럼 길들여지지 않는군.” (리히노브스키 공작(Karl Lichnowsky, 베토벤의 주요 후원자))
베토벤은 까탈스럽고 불같은 성격(괴팍한 천재)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귀족들의 후원을 받으면서도 주종 관계를 거부하고 재정적 자립을 추구했으며, 자신의 예술가적 권위를 강조했다.
이는 귀족의 취향에 맞추어 곡을 쓰던 기존 음악가의 역할과는 혁명적인 차이였다.
3막: 월광(月光) 아래의 속삭임
1801년, 베토벤의 나이 서른하나.
그의 음악적 성숙은 초기 소나타들에서 빛나고 있었다.
특히 1799년 출판된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Pathetique, Op. 13)은 "성격의 강인함, 감정의 깊이, 독창성의 수준"에서 이미 그의 이전 작품들을 능가했다는 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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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베토벤 1801년 |
그러나 그의 사생활은 복잡했다.
그는 브룬스비크(Brunswik) 가문의 딸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던 중, 요제피네 브룬스비크(Josefine Brunswik, 훗날 요제프 다임 백작과 결혼)와 깊은 사랑에 빠졌다.
비록 신분의 차이로 결혼은 불가능했지만, 베토벤은 그들의 관계를 이어가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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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제피네 브룬스비크 |
그해 후반, 그는 줄리에타 귀차르디(Julie Guicciardi, 피아노 학생)를 만났다.
줄리에타는 요제피네의 사촌이었다.
“백작부인(줄리에타 귀차르디), 이 곡을 당신께 바칩니다.”
1802년 출판된 피아노 소나타 14번 올림다단조, 작품번호 27-2, 일명 <월광 소나타>였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소나타 형식에서 벗어나(환상곡 풍 소나타), 완만한 1악장, 경쾌한 2악장, 급속한 3악장으로 진행되는 ‘서파급(徐破急)’의 구성이었다.
“루트비히 선생님, 이 몽롱하고도 고요한 첫 악장은 마치 달빛이 루체른 호수(Lucerne Lake) 물결에 비치는 작은 배 같아요.” (훗날 음악 평론가 루트비히 렐슈타프(Ludwig Rellstab)가 붙인 유명한 평).
<월광 소나타>라는 별칭은 베토벤 사후 5년 뒤 렐슈타프에 의해 붙여진 것으로, 베토벤 생전에는 <환상곡 풍 소나타>로 불렸다.
베토벤은 이 곡이 너무 인기가 많아지자 학생 체르니(Carl Czerny)에게 "나는 확실히 더 나은 것을 썼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베토벤은 이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결혼에 대한 행복한 기대를 가졌으나, 줄리에타가 다른 귀족과 결혼하며 관계가 끝났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헌정 뒤에는 더욱 어두운 비밀이 있었다.
베토벤은 1798년경부터 청력 상실(난청)을 겪기 시작했던 것이다.
4막: 절망의 유서
1802년 가을, 베토벤은 주치의의 권유로 빈 외곽의 작은 마을 하일리겐슈타트(Heiligenstadt, 오늘날 빈의 일부)로 요양을 떠났다.
그의 귀에서 끊임없이 들리는 심각한 이명(耳鳴)은 그를 괴롭혔고, 대화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당시 베토벤의 난청 원인은 매독, 티푸스, 납 중독(Lead poisoning) 등 여러 설이 있었다.
최근 연구에서 납 중독설이 유력하게 제기되는데, 그의 머리카락에서 정상인의 100배가 넘는 납 수치가 검출되었으며, 당시 와인의 감미료로 사용되던 아세트산 납 등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또한, 귀경화증(otosclerosis, 전음성 난청) 특성상 사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아도 피아노의 고음부 진동은 느낄 수 있었다는 일화가 있어 귀경화증 설도 유력하다.
루트비히는 폰 브로이닝 가문의 친구이자 의사인 베겔러에게 편지를 썼다.
“사람들에게 ‘더 큰소리로 말해 주시오, 소리쳐 달라구요. 나는 귀가 안 들린단 말이오!’ 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아! 다른 누구보다도 온전해야 할 청각을 잃어가고 있다.”
베토벤은 심각한 절망에 빠져 있었다.
청각 장애는 음악가에게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고, 이는 그의 사회생활과 직업적 능력 모두에 치명타였다.
그는 자살 충동까지 느꼈다.
1802년 10월 6일, 베토벤은 두 동생 카를과 요한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유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작성했다.
이 문서는 베토벤의 사망 후인 1827년에야 발견되었다.
“나를 붙잡은 건 오직 ‘예술’이었다. 내가 사명을 다하지 못한 채 이 세상을 저버려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 비참하고 안타까운 삶을 지탱하고 있는 불안정한 육체는, 아주 조그만 변화에도 나를 최선의 상태에서 최악의 상태로 몰아붙이고 있다. ‘인종(忍從)’. 내가 인생의 안내자로 삼아야 할 것은 인종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했다. 참으려는 나의 결심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는 동생들에게 이렇게 덧붙였다.
“너희들의 아이들에게는 덕성(德性)을 가르쳐라. 덕성만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다. 결코 돈은 그렇게 할 수 없다. 내 경험으로 말하는 것이다. 비참함 속에서도 나를 지켜주는 것은 내 덕성뿐이었다. 내 목숨을 스스로 끊지 않을 수 있었던 용기는 예술과 덕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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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일리겐슈타트 유서의 첫 페이지 |
이 유서는 베토벤이 개인적인 고난을 예술을 통해 극복하고, '영웅적'인 자세로 운명에 맞서기로 결심한 분기점이었다.
베토벤은 이 시기에 베겔러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운명의 멱살을 잡으십시오. 그것은 확실히 나를 완전히 짓밟지 않을 것입니다.”
베토벤의 이 유명한 문구는 오늘날 불굴의 의지나 운명 개척의 상징으로 자주 인용되며,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인간 승리의 서사를 대표하는 구절이 되었다.
영웅주의의 확립과 고뇌의 멜로디 (1803–1812)
5막: 새로운 길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빈으로 돌아온 베토벤은 완전히 다른 작곡가로 변모했다.
그는 스스로 “나는 여태까지 작품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전혀 새로운 길을 갈 생각이다”라고 선언했다.
이는 베토벤의 중기, 즉 '영웅적 시기(Heroic Period)'의 시작이었다.
이 시기의 음악은 영웅주의와 투쟁을 표현하는 대규모 작품들로 특징지어진다.
1803년, 베토벤은 교향곡 3번 내림마장조, 작품번호 55 <영웅>의 작곡을 시작했다.
이 작품은 원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진정한 자유의 투사입니다. 왕정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민중의 시대(민주주의)를 열어 줄 인물입니다."
베토벤은 정치, 이념적으로 왕정이나 철권통치를 싫어했으며, 유럽의 수많은 국가가 민주주의와 왕정의 갈림길에 서 있던 시대에 나폴레옹을 '위대한 영웅'으로 숭배했다.
그러나 1804년, 나폴레옹이 스스로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베토벤은 격렬하게 분노했다.
“그도 결국 범인(凡人)이었군! 스스로를 황제로 칭하다니! 이제 그는 모든 인간의 권리를 짓밟는 폭군이 될 것이다!”
베토벤은 <영웅 교향곡>의 원고 표지에 적었던 '보나파르트'라는 이름을 거칠게 긁어 지워버렸다.
이 사건은 베토벤이 추구했던 이상주의와 현실 정치의 괴리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교향곡은 결국 "위대한 사람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작곡된(Sinfonia eroica, composta per festeggiare il sovvenire d'un grand'uomo)"이라는 부제와 함께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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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폴레옹의 이름이 베토벤에 의해 긁어내져 있다. |
6막: 폭풍우와 운명의 문 두드림
이 시기에 작곡된 피아노 소나타 17번 라단조, 작품번호 31, No. 2는 그의 새로운 실험 정신을 담고 있었다.
이 소나타가 <템페스트>라는 별칭을 얻게 된 것은 그의 비서였던 쉰들러(Anton Schindler, 베토벤의 전기 작가)의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쉰들러가 이 소나타의 해석을 묻자, 베토벤은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희곡 <템페스트>를 읽어보라고 권유했다는 것이다.
이 곡은 중기 소나타 중 하나로, 서주부를 가진 제1악장, 발전부가 없는 변형된 소나타 형식의 제2악장, 반복적인 리듬 형식의 제3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제1악장의 레치타티브(Recitative, 오페라의 대화처럼 자유로운 리듬) 선율은 낭만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제3악장의 16분음표 연속 리듬은 "빠르게 지나가는 기사의 말발굽 소리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1807년에서 1808년에 걸쳐, 베토벤은 교향곡 6번 <전원>과 함께 교향곡 5번 다단조, 작품번호 67 <운명>을 병행해 작곡했다.
<운명 교향곡>은 베토벤의 음악 중에서도 가장 치밀하게 설계된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곡의 주제는 바로 '고뇌를 통해 환희에 이른다(암흑에서 광명으로)'는 베토벤의 철학이었다.
제1악장의 도입부, 그 유명한 "짜자자잔"(혹은 "따다다단") 네 개의 음표.
이 짧은 동기(Motive)가 전 악장을 꿰뚫는 주도 면밀한 구성은 후세 작곡가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이 동기는 팀파니(Timpani)를 통해 시종일관 울려 퍼지며, 베토벤이 말년에 청력을 잃은 상태에서 작곡했기에 더욱 드라마틱하게 다가왔다.
<운명>이라는 부제는 일본에서 붙여져 동양권에서 널리 쓰이지만, 서양권에서는 '다단조 교향곡'으로 불렸다.
쉰들러는 이 네 음에 대해 "운명은 이처럼 문을 두드린다!"라고 베토벤이 말했다고 주장했으나, 쉰들러의 기록 중 상당수가 날조된 것으로 여겨지기에 논란의 여지가 크다.
그의 제자 체르니(Carl Czerny)는 이 음형이 빈의 프라터 공원(Prater)에서 들은 노랑촉새의 노랫소리에서 나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대중은 극적인 '운명의 문' 이야기를 선택했다.
"노랑촉새든, 운명이든 무슨 상관인가? 이 음들이 고뇌의 울림인 것은 확실하다. 운명이 내 문을 두드린다면, 나는 그 운명의 목을 조를 것이다!" (베토벤의 내면의 독백).
<운명 교향곡>의 초연(1808년 12월 22일, 테아터 안 데어 빈)은 혹독했다.
4시간 이상의 긴 연주회, 난방도 없는 극장, 1회만 있었던 리허설, 그리고 관객의 부족.
결국 초연은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1년 반 뒤, 이 곡은 열광적인 찬사를 받기 시작했다.
1810년 E. T. A. 호프만(E. T. A. Hoffmann, 작가이자 평론가)은 이 곡을 극적인 이미지로 설명하며 베토벤을 "낭만주의 음악"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칭송했다.
<운명 교향곡>의 성공 이후, 베토벤의 "5번"이라는 숫자는 후대의 작곡가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으며, 브루크너, 차이코프스키, 말러 등은 모두 제5교향곡에서 걸작을 남겼다.
작은 소품, 거대한 운율 — 〈엘리제를 위하여〉(1810)
1810년 봄, 베토벤은 거대한 교향의 파고 사이에서 뜻밖의 소품 하나를 남긴다.
바로 바가텔 a단조 WoO 59, 오늘날 〈엘리제를 위하여〉로 알려진 곡이다.
세 박자(3/8)의 흔들림 위로 오른손이 미–레#–미로 속삭이며 시작한다.
왼손의 아르페지오가 잔물결처럼 받치고, A–B–A–C–A의 간명한 순환이 미세한 감정의 굴곡을 만든다.
작은 형식인데도, 베토벤 특유의 어둠–빛 대비가 선율의 여백에서 또렷하다.
이 곡의 표제는 처음부터 신비였다.
원본 악보는 전해지지 않고, 1867년 노일(L. Nohl)이 베토벤의 필사본을 바탕으로 사후 공개했다.
노일이 읽었다는 표제에는 “Für Elise am 27 April zur Erinnerung(4월 27일의 추억을 위해)”라 적혀 있었다고 한다. (전승)
‘엘리제’가 누구인지는 (논쟁)이다.
가장 오래된 설은 테레제 말파티(Therese Malfatti)로, 베토벤의 청혼 대상이었던 그녀의 이름 Therese를 노일이 Elise로 오독했다는 주장이다. (논쟁)
다른 설은 베토벤과 가까웠던 소프라노 엘리자베트(‘엘리제’) 뢰켈(Elisabeth Röckel)을 헌정 상대로 본다. (논쟁)
또한 율리아네(‘엘리제’) 베렌스펠트를 거론하는 견해도 있다. (논쟁)
확정적 문서는 없으므로, 곡의 헌정 상대는 미상으로 남겨 두는 편이 정확하다. (논쟁)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소품이 대작 사이에서 숨을 고르는 베토벤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 준다는 점이다.
살롱의 친밀한 공간, 사적인 이름, 그리고 집요한 동기의 회귀.
〈엘리제를 위하여〉는 거대한 이상을 노래하던 작곡가가 지극히 개인적인 애틋함을 어떻게 소리로 빚었는지를 증명한다.
7막: 이상과 현실의 충돌 - 괴테와의 만남
베토벤은 루돌프 대공(Rudolf, 오스트리아의 황제 막내 아들이자 베토벤의 후원자 및 제자)을 비롯한 귀족 후원자들로부터 연금을 받으며 재정적 자립을 추구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권위적인 체계를 싫어했다.
1812년, 베토벤은 보헤미아(Bohemia)의 온천 도시 테플리츠(Teplice, 현 체코)에서 당대 최고의 대문호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를 만났다.
베토벤은 괴테의 시에 매료되어 있었고, 그 만남을 주선한 것은 베티나 브렌타노(Bettina Brentano, 작가, 괴테의 친구이자 안토니 브렌타노의 사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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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테 |
그러나 둘의 만남은 베토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18세기 유럽의 사회는 귀족과 왕족이 여전히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베토벤은 예술가로서 자신의 가치가 귀족보다 우위에 있다고 믿었지만, 괴테는 시대의 형식과 권위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였다.
어느 날, 베토벤과 괴테는 산책 중 왕족들의 행렬을 마주쳤다.
“괴테 선생, 계속 걸으십시오. 진정한 귀족은 예술가입니다. 저들도 우리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길을 양보할 것입니다.” (베토벤)
하지만 괴테는 길가로 비켜서서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했다.
베토벤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행렬을 통과했다.
“나는 당신을 존경하고 당신의 작품을 존경하지만 당신은 그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존경심을 보였습니다.”
베토벤은 괴테에 대해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출판사(Breitkopf & Härtel, 독일의 유명 출판사)에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괴테는 시인이 되는 것보다 훨씬 더 궁정의 분위기를 좋아합니다.”
베토벤은 이념적으로 권위에 굴하지 않는 자유주의자였지만, 정작 본인이 경제적으로 귀족의 후원 없이는 살기 힘든 시대적 모순 속에 있었다.
이는 베토벤의 이상주의적 자존심과 현실적 생계 사이의 첨예한 갈등이 있었다.
8막: 불멸의 연인(Immortal Beloved)의 그림자
테플리츠에 머무르는 동안, 베토벤은 그 유명한 <불멸의 연인>에게 10페이지 분량의 연애편지를 썼다.
이 편지는 결국 수취인에게 보내지지 않았고, 베토벤 사후에 발견되어 오랫동안 수신자의 신원이 논란이 되었다.
음악학자 메이너드 솔로몬(Maynard Solomon)은 이 '불멸의 연인'이 안토니 브렌타노(Antonie Brentano, 프란츠 브렌타노의 아내)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1812년 말 빈을 떠나 베토벤과 다시 만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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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토벤이 "불멸의 연인"에게 보낸 편지의 1페이지 |
베토벤은 평생 결혼하지 못했다.
그의 많은 사랑은 신분의 차이(줄리에타 귀차르디)나, 후원 가문의 압력(요제피네 브룬스비크) 등으로 좌절되었다.
그는 1810년 주치의의 조카딸이었던 테레제 말파티(Therese Malfatti)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결혼하면 행복해질 거라는 기대를 처음으로 했네.” (베토벤, 줄리에타에게 보낸 편지 중 발췌)
그러나 현실은 베토벤이 음악을 위해 홀로 고독과 싸워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이처럼 연인이자 뮤즈(Muse)였던 여성들과의 관계가 단절될 때마다 그의 음악은 더욱 깊은 고독과 투쟁의 서사를 담아냈다.
투쟁과 가족의 굴레 (1813–1820)
9막: 가족의 덫
1813년 이후 베토벤의 개인적인 모습은 퇴보하기 시작했다.
깔끔했던 그는 외모에 신경 쓰지 않았고, 기분의 흔들림이 심해 엄격하고 냉혹하다가도 친절하고 순진한 모습을 보이는 모순적인 성격을 보였다.
이 시기, 베토벤의 작곡 생산량은 급격히 감소했는데, 이는 청각 장애의 악화뿐만 아니라 복잡한 가족 문제 때문이었다.
그의 동생 카스파 안톤 카를(Kaspar Anton Karl, 베토벤의 둘째 동생)은 1815년 결핵으로 사망했다.
카스파는 아들 카를(Karl van Beethoven, 당시 9세)의 양육권을 베토벤과 아내 요한나에게 공동으로 맡긴다는 유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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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를 판 베토벤 |
베토벤은 조카 카를을 유일한 상속자이자 후계자로 생각하며 광적인 집착을 보였다.
그는 카를의 어머니인 요한나를 '부도덕한 여인'으로 혐오했고, 카를을 그녀에게서 떼어내기 위해 1815년부터 오랜 법적 분쟁에 휘말렸다.
“요한나, 감히 그 더러운 손으로 카를을 만지지 마라! 너 같은 여자가 카를을 망친다!” (베토벤)
“도련님! 카를은 제 아들이에요! 당신은 그 아이에게 억압적인 태도만을 보일 뿐입니다! 당신이 그의 아버지 행세를 할 권리는 없습니다!” (요한나)
이 법적 다툼은 수년 동안 베토벤의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시켰고, 그의 작품 활동을 중단시킬 정도였다.
법정에서 자신이 귀족 출생(nobility)임을 증명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1818년 단독 후견인 자격을 잃었다.
베토벤은 예술적 거인이었지만, 인간 관계와 가족 문제에서는 결함을 드러냈다.
조카 카를에 대한 그의 과도한 집착과 위압적인 태도는 카를에게 큰 정신적 고통을 안겨주었다.
카를은 결국 삼촌의 기대에 짓눌려 훗날 자살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1818년부터 베토벤의 청력은 더욱 악화되어, 그는 대화를 위해 필담장(筆談帳, Conversation Books)에 의존해야 했다.
이 필담장은 그의 말년 생활과 예술에 대한 귀중한 기록을 남겼지만, 훗날 그의 비서 쉰들러가 일부 내용을 위조하거나 파기했다는 의혹도 있다.
10막: 오페라 <피델리오>의 영웅적 승리
청력 상실과 가족 문제로 고통받는 와중에도, 베토벤은 그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Fidelio, Op. 72)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이 오페라는 무고한 정치범 남편 플로레스탄(Florestan)을 구출하기 위해 남장(男裝)을 하고 감옥에 잠입한 아내 레오노레(Leonore, 피델리오라는 가명 사용)의 이야기이다.
베토벤은 이 이야기에서 '정의의 승리와 숭고한 부부애'라는 자신이 추구하던 이상을 보았다.
“오페라란 하룻밤 구경거리(Opera Buffa)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정의, 용기, 숭고함, 애정, 영웅적인 기분이 모두 담겨야 한다.” (베토벤의 오페라관)
1805년 첫 초연은 프랑스군의 빈 점령으로 인해 실패했다.
베토벤은 1806년, 그리고 1814년까지 세 번의 개정 작업을 거쳤고, 심지어 네 개의 서곡을 썼다(레오노레 서곡 1, 2, 3번, 피델리오 서곡).
이는 완벽주의자 베토벤의 집념을 보여준다.
“이것으로 내 끈덕진 노력이 마침내 승리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베토벤, 1814년 최종 공연 대성공 후)
오페라 2막, 지하 감옥.
남편 플로레스탄이 아내 레오노레(피델리오)에게 포도주와 빵조각을 받는다.
교도소장 피사로(Pizarro, 플로레스탄의 정적)가 단도를 들고 플로레스탄을 죽이려는 그 순간, 레오노레가 뛰쳐나와 남장을 벗고 권총을 겨눈다.
"물러서라!... 이 사람의 아내부터 죽여라!" 바로 그때, 장관의 도착을 알리는 트럼펫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 극적인 순간은 베토벤의 ‘고난을 넘어선 구원’이라는 영웅적 서사의 절정이었다.
11막: 후기 현악 사중주 - 고독의 심연
1810년대 후반에 들어서 베토벤은 다시 바흐(J. S. Bach)와 헨델(G. F. Handel)의 작품 연구에 몰두했다.
이는 당시 낭만주의의 분파적인 경향에 저항하고, 고전주의 형식을 완성하는 동시에 대위법(Polyphony)적 깊이를 더하기 위함이었다.
러시아 귀족 니콜라이 갈리친(Nikolai Galitzin, 베토벤의 후원자) 공작의 의뢰로 작곡된 후기 현악 사중주(Late Quartets, Op. 127, 130, 131, 132, 135)는 베토벤의 마지막 주요 완성작이자, 그의 지적인 깊이와 형식적인 혁신이 응집된 걸작이었다.
이 곡들은 당대 청중과 음악가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공포"(슈포어(Louis Spohr, 작곡가))로 여겨지며 묵살당했다.
그러나 훗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특히 베토벤이 가장 완벽한 단일 작품으로 평가한 현악 사중주 14번 올림다단조(Op. 131)는 일곱 개의 악장(7개의 연결된 악장)이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었다.
슈베르트(Franz Schubert, 베토벤의 후배 작곡가)는 자신이 죽기 5일 전, 이 작품을 듣고는 깊은 감동 속에 이렇게 말했다.
“이후에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환희에 이르는 여정 (1821–1827)
12막: 합창 교향곡의 탄생
베토벤은 말년에 이르러 장엄미사(Missa Solemnis, Op. 123)와 함께 교향곡 9번 라단조, 작품번호 125 <합창>의 작곡에 몰두했다.
교향곡 9번은 고전주의 교향곡의 전통을 깨고, 제4악장에 독창과 합창을 포함한 성악을 사용한 획기적인 작품이었다.
이는 실러(Friedrich Schiller)의 시 '환희의 송가(Ode to Joy)'를 바탕으로, 인류애와 평화라는 베토벤의 이상주의적 사상을 담고 있었다.
1824년 5월 7일, 빈의 캐른트너토르 극장(Kärntnertortheater)에서 <교향곡 9번>이 초연되었다.
베토벤은 청력을 거의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지휘자 움라우프(Michael Umlauf) 옆에 서서 연주를 '진행'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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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른트너토르 극장 |
연주가 끝났을 때, 청중은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그러나 베토벤은 뒤돌아선 채 환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때 콘트랄토 가수 카롤리네 웅거(Caroline Unger)가 베토벤을 객석 쪽으로 돌려세웠다.
웅거: "선생님, 돌아보세요! 당신을 향한 박수입니다!"
베토벤은 그제야 눈으로 관객들의 떠들썩한 공명(共鳴)과 기립박수를 확인했다.
그는 눈물을 흘렸다.
음악을 듣지 못했지만, 그는 눈으로 자신의 예술이 대중에게 도달했음을 확인한 것이다.
<교향곡 9번>은 '어둠에서 밝음으로'라는 베토벤의 구성을 완성했을 뿐 아니라, 이후 낭만주의 작곡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바그너는 이 곡의 '시와 음악의 융합' 이념에 촉발되어 혁신적인 악곡을 탄생시켰고, 브람스는 이 거대한 산에 부담을 느껴 자신의 첫 교향곡을 완성하는 데 20년이 걸리기도 했다.
13막: 마지막 고난
베토벤과 조카 카를(Karl)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베토벤의 위압적인 태도에 지친 카를은 1826년 8월, 자살을 시도했다.
카를은 다행히 살아남았고, 베토벤은 카를을 요양시키기 위해 그의 동생 요한(Johann, 약제사로 부유해졌으나 형의 도움에 인색했다)의 시골집(그나이젠도르프)으로 갔다.
베토벤은 청력을 잃은 이후 더욱 고독해졌고, 카를에게 자신의 모든 희망과 이상을 투영했다.
하지만 이는 예술적 영감으로 승화된 '숭고한 사랑'이라기보다는, 조카를 자신의 소유물로 간주한 집착이었다.
이는 카를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는 점에서, 베토벤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한 강한 비판을 피할 수 없다.
1826년 12월, 빈으로 돌아오는 길, 춥고 습한 날씨 속에서 베토벤은 폐렴에 걸렸다.
곧 간경변(Cirrhosis) 증상이 나타나 병상에 눕게 되었다.
그의 사인(死因)은 과도한 알코올 섭취로 인한 심각한 간 손상으로 밝혀졌다.
많은 친구들과 숭배자들이 병문안을 왔다.
그의 비서 쉰들러, 체르니(Carl Czerny, 제자), 훔멜(Hummel, 작곡가) 등이 그를 방문했다.
1827년 3월 24일, 베토벤은 쉰들러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박수를 쳐주게, 친구들, 희극은 끝났네.” (Applaud, friends, the comedy is over.) (전승)
3월 26일, 베토벤은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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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종 순간의 베토벤 1827년 3월 26일 |
베토벤은 음악가=예술가라는 개념을 확립하고, 고전주의의 형식을 완성함과 동시에 낭만주의의 새로운 문호(門戶)를 연 작곡가로 평가받는다.
그의 음악은 불굴의 의지와 인간 승리를 상징하며, 후세 음악가들의 교과서가 되었다.
14막: 영원한 유산
1827년 3월 29일, 빈(Vienna)의 배링 지역 공동 묘지(Währing Cemetery).
약 2만 명의 인파가 그의 장례 행렬에 참여했다.
이는 한 작곡가에게 바쳐진 경의로는 전례 없는 규모였다.
슈베르트(Franz Schubert)를 비롯한 36명의 성화 운반자(Torch bearers)들이 그의 관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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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토벤의 장례 행렬 |
베토벤은 살면서 평생 고독과 고통에 시달렸고, 귀족들의 후원을 받으면서도 그 권위에 맞섰으며, 난청이라는 운명과 싸웠다.
그는 사생활에서는 괴팍하고 결함 있는 인간이었으나, 그 모든 고난을 예술로 승화시켜 인류에게 '환희'라는 영원한 메시지를 남겼다.
그의 유골은 훗날 빈 중앙묘지(Vienna Central Cemetery)의 명예 묘역으로 옮겨졌다.
역사를 통해 배우는 교훈과 배울 점
베토벤의 생애는 고전주의(Classical)와 낭만주의(Romanticism)의 격변기(18세기 말~19세기 초)를 관통하는 드라마였습니다.
그의 삶은 예술적 천재성과 인간적 불완전성이 어떻게 공존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적 서사 그 자체입니다.
1. 운명과의 투쟁: 베토벤은 음악가에게 치명적인 청각 장애라는 운명 앞에서 좌절하고 자살 충동까지 느꼈으나, "예술"이라는 사명을 통해 다시 일어섰습니다. 가장 혹독한 역경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창조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줍니다. 그의 음악처럼, 인생은 '어둠에서 광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2. 예술가의 독립과 가치: 베토벤은 귀족 후원 시대의 마지막 음악가였지만, 그들의 권위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음악과 예술적 가치를 대중에게 독립적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산업적 예술가였습니다. 이는 창작자가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높이고, 시대의 흐름을 주도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3. 인간적 과실의 반성: 그의 조카 카를에 대한 집착은 사랑이 아닌 소유욕으로 변질되어 카를에게 깊은 고통을 주었습니다. 가장 고귀한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도, 사적인 관계에서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개인의 사생활에서의 덕성(德性)이 돈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 그의 유서처럼, 진정한 위대함은 예술적 성취뿐만 아니라 도덕적 성숙에서도 비롯됨을 배울 수 있습니다.
베토벤의 삶은 마치 <운명 교향곡>의 제1악장처럼, "따다다단" 하고 문을 두드리는 고통 속에서 시작되었으나, 결국 제4악장의 "환희의 송가"처럼 인류애와 승리의 노래로 마무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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