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폭풍 속의 100시간: 현대전의 서막을 연 걸프 전쟁
1. 서막: 불타는 사막의 야망
1. 전쟁의 불씨
1990년, 세계는 냉전의 종식을 축하하고 있었지만, 중동의 사막에서는 새로운 폭풍이 잉태되고 있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즉 걸프 전쟁의 서막은 단 하나의 사건이 아닌, 여러 갈래의 증오와 야망이 얽혀 만들어낸 비극이었다.
첫째, 8년간 이어진 이란-이라크 전쟁의 상흔이 깊었다.
이라크는 1,00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부채를 떠안았고, 그중 140억 달러는 쿠웨이트에 갚아야 할 빚이었다.
사담 후세인은 이 빚을 탕감받고자 했으나, 쿠웨이트는 이를 거절하며 양국의 갈등은 깊어졌다.
둘째, 검은 황금, 석유를 둘러싼 갈등이 폭발 직전이었다.
이라크는 쿠웨이트가 OPEC(석유수출국기구)의 생산 할당량을 무시하고 석유를 증산해 유가를 떨어뜨린다며 분노했다.
더욱이 이라크는 쿠웨이트가 국경 지대인 루메일라 유전에서 '경사 시추(slant drilling)' 기술을 이용해 자국의 석유를 도둑질하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마지막으로, 영토에 대한 뿌리 깊은 야망이 있었다.
후세인은 오스만 제국 시절 쿠웨이트가 이라크 남부의 바스라 행정구역에 속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쿠웨이트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다.
또한, 폭이 16~17km에 불과한 좁디좁은 해안선을 확장하여 페르시아만으로 나아가는 출구를 확보하려는 지정학적 욕망도 전쟁의 주요 원인이었다.
2. 후세인의 치명적 오판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침공해도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치명적인 오판을 내렸다.
이는 단순한 희망이 아닌, 왜곡된 세계관에 기반한 확신이었다.
그는 이란으로부터 걸프 왕정들을 지켜낸 것은 자신이며, 쿠웨이트의 부는 그 대가로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라고 믿었다.
1989년 사우디아라비아와 맺은 불가침 조약은 쿠웨이트 침공에 대한 암묵적 동의라고 멋대로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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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라크 5대 대통령 사담 후세인 |
그의 집무실에서 오갔을 법한 대화는 그의 자신감을 엿보게 한다.
사담 후세인: "미국인들은 이란과의 전쟁에서 우리를 지지했소. 우리가 쿠웨이트를 차지하는 것쯤은 눈감아 줄 것이오. 그들은 기술자이지, 전사가 아니니까."
타리크 아지즈 외무장관: "소련도 자국 문제로 바쁩니다. 분명 우리 편에 서서 미국을 견제할 것입니다."
후세인의 믿음은 두 가지 시대착오적 착각에 기반했다.
첫째, 그는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서방의 지원을 확대 해석했다.
당시 서방은 이슬람 혁명을 일으킨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이라크를 지원했을 뿐, 후세인 정권 자체를 신뢰한 것은 아니었다.
둘째, 그는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급변한 국제 질서를 전혀 읽지 못했다.
냉전 종식으로 초강대국 시대가 끝나고 다극화 시대가 열렸다고 믿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소련은 미국의 군사 행동을 견제할 힘도 의지도 없었고, 미국은 유일 초강대국으로서 훨씬 더 큰 행동의 자유를 갖게 되었다.
후세인은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스스로 빠져들고 있었다.
2. 침공: 1990년 8월 2일, 새벽의 총성
1. 완벽한 기습
1990년 8월 2일 새벽 2시, 이라크의 최정예 공화국수비대 소속 함무라비, 메디나, 타와칼나 3개 기갑사단을 포함한 10만 대군이 국경을 넘었다.
전쟁을 예상치 못했던 3만 명의 쿠웨이트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라크군은 헬리콥터 강습 부대로 주요 공항을 점거하고 해군으로 해상을 봉쇄하며 쿠웨이트를 순식간에 외부 세계와 단절시켰다.
완벽한 기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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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웨이트를 침공하는 이라크군 탱크들 |
2. 다스만궁의 비극
이라크 특수부대의 칼날은 쿠웨이트 왕궁인 다스만궁으로 향했다.
쿠웨이트 국왕 자베르 3세의 동생인 셰이크 파드 알 아흐마드 알 사바는 왕족을 안전하게 피신시킨 후, 남은 병력을 이끌고 끝까지 저항했다.
그는 압도적인 병력과 전차로 밀고 들어오는 이라크군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그의 죽음은 쿠웨이트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3. 점령과 약탈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19번째 주'로 강제 병합하고 조직적인 약탈을 자행했다.
쿠웨이트 박물관의 귀중한 유물들은 바그다드로 실려 갔고, 병원에 있던 필리핀 간호사들은 집단 성폭행을 당하는 끔찍한 범죄의 희생양이 되었다. (논쟁)
심지어 침공 당일 쿠웨이트에 착륙했던 영국항공 149편의 승객과 승무원들은 인질로 잡혀 군사 시설의 '인간 방패'로 이용되었고, 이 과정에서 성추행과 강간 사건까지 발생했다. (논쟁)
이라크의 점령은 단순한 군사 행동이 아닌, 문명에 대한 야만적 폭력이었다.
3. 반격: 사막의 방패, 그리고 폭풍
1. 세계가 뭉치다: '사막의 방패' 작전
이라크의 만행에 국제 사회는 분노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영국, 프랑스,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등 35개국이 참여하는 다국적군이 결성되었다.
'사막의 방패 작전(Operation Desert Shield)'이 시작된 것이다.
작전의 1차 목표는 이라크의 추가적인 남하를 막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를 방어하고, 동시에 쿠웨이트 해방을 위한 군사력을 증강하는 것이었다.
흥미롭게도 이라크와 같은 바트당이 집권하던 시리아까지 다국적군에 합류했는데, 이는 독재자 하페즈 알아사드와 사담 후세인 간의 오랜 경쟁 관계가 작용한 결과였다.
2. 눈물의 증언, 거대한 논란
당시 미국 내에서는 베트남 전쟁의 악몽으로 인해 반전 여론이 거셌다.
이 여론을 뒤집은 것은 '나이라 알 사바'라는 15세 소녀의 충격적인 증언이었다.
1990년 10월 10일, 그녀는 미 의회 청문회에 출석해 눈물로 호소했다.
"저는 이라크 병사들이 병원으로 무장을 한 채 들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아기들을 인큐베이터에서 꺼내더니 죽도록 차가운 바닥에 던져버렸습니다. 너무나 끔찍했습니다."
이 증언은 TV로 생중계되며 미국 전역을 뒤흔들었고, 참전 여론에 불을 지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충격적인 진실이 밝혀졌다.
나이라는 주미 쿠웨이트 대사의 딸이었으며, 침공 기간 동안 쿠웨이트에 있지도 않았다.
이 증언은 미국의 여론을 움직이기 위해 치밀하게 기획된 프로파간다였음이 드러나며 거대한 논란을 낳았다.
이는 이 전쟁이 총과 포탄뿐만 아니라, 대중의 인식을 지배하기 위한 정보전의 성격을 띠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3. '사막의 폭풍'이 휘몰아치다
1991년 1월 17일, 다국적군은 '사막의 폭풍 작전(Operation Desert Storm)'을 개시했다.
F-117 스텔스 폭격기가 바그다드 상공에 유령처럼 나타나 방공망을 유린했고, 페르시아만에 정박한 함대에서는 토마호크 순항 미사일이 불을 뿜었다.
AH-64 아파치 헬리콥터는 이라크의 레이더 기지를 파괴하며 하늘의 길을 열었다.
이 모든 과정은 CNN을 통해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중계되었다.
사람들은 마치 비디오 게임 화면을 보듯, 정밀 유도 폭탄이 목표물에 정확히 꽂히는 장면을 목격했다.
전쟁은 '비디오 게임 전쟁'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나이라의 증언처럼 강력하지만 실체와는 거리가 있는, 위생적으로 편집된 이미지를 통해 대중에게 소비되었다.
현대 하이테크 전쟁의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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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막의 폭풍 작전 |
4. 후세인의 마지막 도박: '스커드 사냥'
공중 폭격에 수세로 몰린 후세인은 마지막 도박을 감행했다.
그는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를 향해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했다.
아랍 국가들의 공적인 이스라엘이 전쟁에 개입하면, 이집트나 시리아 같은 아랍 연합국들이 다국적군에서 이탈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이에 다국적군은 패트리어트 미사일로 스커드를 요격하는 한편, 영국의 SAS와 미국의 델타포스 등 최정예 특수부대를 이라크 사막 깊숙이 투입했다.
이동식 발사대(TEL, Transporter Erector Launcher)를 찾아 파괴하는 '스커드 사냥'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특수부대의 활약으로 후세인의 도박은 실패로 돌아갔다.
5. 지상전: '사막의 기병도'와 '죽음의 고속도로'
39일간의 공중 폭격 이후, 2월 24일 다국적군은 100시간의 지상전에 돌입했다.
'사막의 기병도 작전(Operation Desert Sabre)'은 군사 역사상 가장 대담하고 성공적인 기동전의 하나로 기록된다.
1. 헤일 메리 기동 (Hail Mary Play): 이 작전의 핵심은 현대판 '망치와 모루' 전술이었다.
미 해병대와 아랍 연합군이 쿠웨이트 정면에서 이라크군 주력을 붙잡아 두는 '모루' 역할을 하는 동안, 노먼 슈워츠코프 장군은 진짜 '망치'를 휘두를 준비를 했다.
바로 미 7군단(US 7th Corps)을 주축으로 한 거대한 기갑부대를 사우디-이라크 국경의 텅 빈 사막으로 수백 km나 우회시키는 대기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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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부하들과 농담을 주고 받는 노먼 슈워츠코프 장군 |
이라크 지휘부는 광활하고 길 없는 사막을 군단급 부대가 항법 장비 없이 기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었지만, 다국적군은 당시 최신 기술이었던 GPS를 활용해 불가능을 현실로 만들었다.
이라크 공화국수비대의 허를 찌르며 후방에 나타난 다국적군은 그들을 완벽하게 포위 섬멸했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73 이스팅 전투(Battle of 73 Easting)'는 전설로 남았다.
당시 기갑대위였던 허버트 맥매스터(H.R. McMaster)가 이끄는 부대는 소수의 M1A1 에이브람스 전차로 압도적인 수의 이라크 T-72 전차 부대를 궤멸시켰다.
이는 단순히 장비의 우위를 넘어, 훈련과 전술의 완벽한 승리였다.
이라크의 수출용 T-72는 1970년대 수준의 구식 포탄을 사용해 M1A1의 장갑을 뚫지 못했고, 반면 M1A1의 열화우라늄탄은 T-72를 종잇장처럼 꿰뚫었다.
2. 죽음의 고속도로 (Highway of Death): 쿠웨이트시티에서 이라크로 퇴각하던 이라크군 차량 행렬은 고속도로에 갇힌 채 다국적군 공군의 집중 폭격을 받았다.
파괴된 차량과 불탄 시신이 뒤엉킨 도로는 '죽음의 고속도로'라 불리며 전쟁의 참상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일각에서는 전쟁범죄라는 비판이 제기되었으나, '항복'이 아닌 전투력을 보존하며 '퇴각'하는 군대에 대한 공격은 국제법상 합법적인 군사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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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의 고속도로 |
4. 종전: 100시간 만의 허무한 결말
지상전 개시 단 100시간 만인 2월 28일,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일방적인 종전을 선언했다.
다국적군의 전사자는 292명에 불과했지만, 이라크군은 최대 5만 명이 전사하고 8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전쟁은 다국적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이른 종전 결정은 현장 지휘관들에게 깊은 좌절감을 안겼다.
노먼 슈워츠코프 장군은 백악관의 정전 명령에 격하게 반발했다.
그의 '망치'가 이라크 공화국수비대의 잔존 부대를 완전히 분쇄하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결정으로 함무라비 사단을 포함한 최소 4개의 공화국수비대 정예 사단이 포위망을 뚫고 이라크로 탈출하는 것을 허용하고 말았다.
군사적으로는 완벽한 승리였지만, 후세인 정권을 제거하지 않고 그의 핵심 군사력을 온존시킨 정치적 결정은 '끝나지 않은 전쟁'의 씨앗이 되었다.
살아남은 공화국수비대는 전후 시아파와 쿠르드족의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12년 후 미국은 다시 한번 이라크를 침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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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프전쟁 지도 |
5. 전쟁이 남긴 것들: 씁쓸한 유산과 흥미로운 이야기들
• 걸프전 증후군: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 사이에서 만성 피로, 기억력 감퇴, 전신 통증 등 원인 불명의 질병이 집단적으로 발생했다.
이는 '걸프전 증후군'이라 불렸으며, 원인으로는 이라크의 화학무기에 대비해 복용한 신경가스 해독제, 해충을 막기 위해 대량 살포된 살충제, 그리고 전차 포탄에 사용된 열화우라늄탄 등이 지목되며 오늘날까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 한국군의 파병과 수난: 대한민국은 베트남전 이후 처음으로 국군의료지원단과 공군수송단 '비마부대'를 파병했다.
하지만 다국적군에 정식으로 포함되지 않아 열악한 대우를 받아야 했다.
에어컨이 나오는 건물에서 생활하는 다른 나라 군인들과 달리, 한국군은 모래폭풍이 부는 사막에 텐트를 쳤다.
약속되었던 '특별 수당'조차 지급되지 않아 장병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는데, 이는 한국군이 다국적군 소속이 아니었기에 수당 지급 주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는 국방부가 파병을 '해외 연수'로 분류해 예산을 전용하는 촌극을 통해 일부 해결되었다.
• 명칭의 유래: 전쟁이 벌어진 곳은 '페르시아만'이지만, 이 명칭을 둘러싼 이란과 아랍 국가들의 분쟁 때문에 '걸프 전쟁'이라는 이름이 정착되었다.
이로 인해 영어의 일반명사였던 'gulf(만)'는 페르시아만을 지칭하는 고유명사 'Gulf'처럼 쓰이게 되었다.
• 문화적 영향: 전쟁의 영향은 대중문화에도 미쳤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알라딘의 배경은 원래 이라크의 바그다드였으나, 전쟁으로 인해 가상의 도시 '아그라바'로 변경되었다.
한편, 1995년 오클라호마 연방청사 폭탄 테러의 주범인 티모시 맥베이는 걸프전 참전 용사로, 전쟁의 참상이 한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인 사례가 되었다.
• 세기말 아마겟돈 음모론: 1990년대 초, 세기말 분위기와 맞물려 한국 사회에서는 걸프 전쟁이 성경에 예언된 '아마겟돈', 즉 제3차 세계대전이자 인류 종말의 전쟁으로 번질 것이라는 음모론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불안감은 1992년 전국을 휩쓴 '휴거 소동'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6. 역사의 교훈
걸프 전쟁은 20세기 마지막 대규모 전쟁이자 21세기 전쟁의 예고편이었다.
이 전쟁이 현대사에 남긴 교훈은 명확하고도 복합적이다.
1. 첨단 기술이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꾼 최초의 '현대전'이었다.
스텔스, 정밀 유도 무기, GPS 등은 더 이상 소모적인 인해전술이 아닌, 효율적이고 외과수술적인 타격이 전쟁의 승패를 가름하는 시대가 왔음을 알렸다.
2. 냉전 종식 후 미국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임을 각인시켰다.
소련의 견제 없이 미국은 압도적인 군사력과 외교력을 동원해 국제 질서를 재편할 수 있음을 전 세계에 증명했다.
3. 압도적인 군사적 승리가 반드시 장기적인 전략적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국제 정세에 대한 후세인의 오판은 이라크를 파멸로 이끌었지만, 후세인 정권을 남겨둔 미국의 정치적 판단 역시 10여 년간의 불안정과 또 다른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전술적 완승과 전략적 실패의 가능성이라는 씁쓸한 교훈을 남긴 것이다.
걸프 전쟁의 포연은 30년 전에 걷혔지만, 그 모래폭풍이 남긴 상처와 교훈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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