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씨앗: 양반 사생아, 서양을 만나다 (1875년 ~ 1904년)
1. 망자의 후예와 몰락의 태동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平山, 황해도에 위치한 고을)의 한 양반 가문에서 아이가 태어났다.
이름은 승만(承晩).
그의 집안은 조선의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의 장남인 양녕대군(讓寧大君, 태종이 폐위시킨 세자)의 후손임을 자부했지만, 이미 조선 말기의 몰락한 양반 가문에 불과했다.
이승만은 뼈대만 남은 가문의 기대와 함께 유교적(儒敎的) 사상을 배우며 자랐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이경선(李敬善)은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고, 어린 이승만은 가난 속에서 훈장(訓長)에게 한학(漢學)을 익혀야 했다.
이승만 성장 배경의 핵심은 이처럼 거대한 과거의 그림자와 궁핍한 현실의 간극이었다.
이승만 사생아 논란은 그의 초기 삶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비록 공식적으로는 양반 가문의 적자로 기록되었지만, 일부 전승과 비판적 사료에서는 그의 어머니가 첩(妾)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러한 출생의 불안정성(논쟁)은 훗날 그가 스스로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과도하게 집착하는 정치적 성향의 뿌리가 되었다는 해석도 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남들보다 더 큰 성공과 인정을 갈망할 수밖에 없었다.
1894년, 스무 살 청년 이승만은 낡은 유교 사상을 버리고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다.
그가 향한 곳은 서울 정동(貞洞, 당시 미국과 서양 선교사들이 모여있던 근대화의 중심지)에 위치한 배재학당(培材學堂,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신식 교육기관)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근대 교육과 영어(English)를 접하며 서양의 자유민주주의 개념을 처음으로 깨닫는다.
그는 영어를 빠르게 습득했고, 이는 훗날 독립운동가 이승만의 외교 활동 기반이 된다.
그는 구시대를 거부하고 신세계의 지식에 목마른 개화파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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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이승만 |
2. 혁명의 열망: 독립협회와 한성감옥
배재학당을 졸업한 후, 청년 이승만은 당시 조선 사회를 개혁하려는 열망으로 가득 찬 지식인들과 교류했다.
그는 박영효(朴泳孝, 개화파 거물 정치인)와 잠시 관계를 맺고 내무대신 비서로 일했으나, 갑신정변의 잔재와 관련된 정치적 갈등으로 박영효가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이승만의 정치 활동은 잠시 주춤한다.
그의 진정한 정치적 무대는 독립협회(獨立協會, 서재필 등이 주도한 자주 독립과 민주 개혁을 목표로 한 단체)였다.
이승만 독립협회 활동은 그의 초기 정치 이념을 형성했다.
그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독립협회가 주최한 대규모 민중집회)에 적극 참여하며 민중의 힘을 깨달았고, 조선의 자주독립과 자유민주주의 도입을 주장하는 격렬한 연설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연설은 서양식 논리와 조선의 애국심이 결합되어 대중을 열광시켰다.
그러나 당시 대한제국 황실은 이러한 민중 운동과 개혁 요구를 위협으로 간주했다.
1898년,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되면서 이승만 역시 역모(逆謀) 혐의로 체포된다.
이승만 투옥은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한성감옥(漢城監獄, 당시 조선의 주요 감옥)에 갇힌 청년 이승만은 고문과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다.
그는 옥중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동료 수감자들에게 성경(聖經)을 전파하며 지도력을 발휘했다.
특히 이 감옥 생활은 그의 종교적 신념을 더욱 확고히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은 여기서 약 5년(1899~1904)의 수감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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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복 차림의 이승만 |
3. 옥중 투쟁과 독립정신
이승만 한성감옥 시절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그가 집필한 저서, 『독립정신(獨立精神, 서양의 민주주의 사상을 조선의 현실에 맞게 설명한 정치 논설집)』이다.
그는 감옥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몰래 종이를 구하여 펜을 들었다.
이 책은 이승만 독립운동의 사상적 기틀이 되었으며, 대한민국 건국 이념의 뿌리가 된다.
『독립정신』에서 이승만은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 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역설했다.
그는 조선의 몰락 원인을 사대주의와 부패에서 찾았으며, 강국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국민 스스로가 주권을 가지고 깨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책은 훗날 해외 교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승만의 지도력을 인정받게 만드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독립정신』은 옥중 집필에 착수했고, 1904년에 황성신문 연재를 거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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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옥중에서 탈고하여 1910년, LA에서 간행된 이승만의 저서 |
이승만의 첫 번째 결혼은 1890년대 초, 전통적인 중매로 이루어졌다.
그의 첫 부인은 박씨(朴氏)였으며, 아들 이태산(李泰山 호적상의 이름은 이봉수(1899~1906))을 낳았으나, 불우한 환경과 오랜 옥고(獄苦)로 인해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다.
아내는 그의 옥바라지를 했지만, 이승만이 서양 문물과 새로운 종교에 심취하는 동안, 두 사람의 삶의 방식은 너무나 멀어져 있었다.
훗날 이승만이 미국으로 떠나면서 이 관계는 사실상 파경에 이르렀다.
이승만 가족사는 이처럼 격동의 근대사를 반영하며 비극적으로 시작되었다.
4. 비밀 외교와 미국행
옥중에서 풀려난 후, 이승만은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의 먹잇감이 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당시 러일 전쟁이 임박하면서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그는 1904년, 고종(高宗, 대한제국의 황제)의 비밀 특사(密使) 자격으로 미국행을 결심한다.
그의 공식적인 임무는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를 만나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미국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비밀 외교 시도는 현실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이미 일본과의 협상(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준비하고 있었고, 조선의 독립에 대해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승만의 외교 독립 노선은 현실적 힘의 논리 앞에서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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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라 태프트 밀약 |
이승만 미국 망명은 단순히 외교 임무 수행을 넘어, 그에게 있어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했다.
그는 낡은 조선의 굴레와 족쇄를 벗어던지고,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보고 배운 자유민주주의의 본고장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설계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품었다.
그는 1904년 12월,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그의 나이 스물아홉.
그는 자신이 40년 후에야 고국 땅을 밟게 될 줄은 알지 못했다.
독립운동가 이승만의 오랜 망명 생활이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프린스턴의 투사: 망국의 지식인, 세계를 향한 외침 (1905년 ~ 1945년)
5. 아메리카의 학위와 외교 독립 노선
1905년, 이승만은 미국에 도착했다.
그의 첫 외교 임무는 실패로 끝났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고,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되면서 미국은 이미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용인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이승만 독립운동의 첫 시련이었다.
이 좌절을 딛고, 이승만은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힘은 군사력이 아닌 지식과 외교력이라고 믿었다.
이승만 미국 유학은 그의 지적 토대를 완성했다.
그는 혈혈단신으로 조지 워싱턴 대학교(George Washington University, 미국의 명문 사립대)에 입학했고, 학사 학위를 최단 기간에 마쳤다.
이어서 그는 하버드 대학교(Harvard University, 미국 동부의 최고 명문대)에서 석사 학위를, 그리고 마침내 1910년,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 아이비리그 명문대이자 당시 총장이 우드로 윌슨이었음)에서 국제법 및 정치학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이승만 프린스턴 박사학위 취득은 동아시아 지식인으로서 서구의 최고 학문을 정복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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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프린스턴대학교 박사학위 취득. |
이승만 박사의 학문적 성취는 독립운동가로서 그의 권위를 높여주었다.
그는 독립운동 노선을 무장 투쟁보다는 외교 독립 노선으로 굳혔다.
그의 이념은 서양의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기초하여 국제 사회의 도움을 받아 대한민국을 건국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프린스턴 시절, 이승만은 그의 스승이었던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훗날 제28대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는 훗날 이승만이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 독립 문제를 상정하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6.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과 탄핵 논란
1919년, 3.1운동의 열기가 전 세계를 휩쓸 때, 중국 상하이(Shanghai)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한국 독립운동을 이끌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승만은 워싱턴 D.C.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이는 그의 독립정신 저서와 미국 내에서의 활발한 외교 활동이 국내외에서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이승만 임시정부 활동은 곧 격렬한 탄핵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는 임시정부의 내부 운영보다는 미국에서의 외교 활동에 집중했고, 특히 1921년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서 사건이 결정적인 과실로 작용했다.
이승만이 미국과 국제연맹에 한국 독립 후 일정 기간 동안 국제적인 위임통치를 요청하는 문서를 보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무장 투쟁 노선을 지지하던 임시정부 내 강경파들은 격분했다.
이들은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주권을 스스로 포기하려 했다고 비판했다.
결국 이승만은 1925년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되었다.
이 사건은 독립운동가 이승만의 명성에 큰 상처를 남겼고, 훗날 그가 건국 후 장기 집권을 위해 중앙집권적 권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해석이 많다.
그는 독립운동 내부의 분열과 파벌 싸움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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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 결의안」과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
심판서」 민족문제연구소 |
7. 하와이에서의 고독과 프란체스카와의 만남
탄핵 이후, 이승만은 미국 본토를 떠나 하와이(Hawaii, 미국 태평양 지역의 섬)로 거점을 옮겼다.
하와이 이승만 시기는 그의 독립운동 자금 확보와 교육 사업에 집중된 시기였다.
그는 동지촌(同志村)과 한인 기독학원을 설립하여 한인 교포들의 결속을 다지고 미래의 독립운동 역량을 키우려 노력했다.
이승만 하와이 생활은 비교적 고독했지만, 그는 외교 독립론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다.
1933년, 제네바(Geneva, 스위스의 국제 도시)에서 열린 국제연맹 회의 참석 중, 쉰여덟 살의 이승만은 서른네 살의 오스트리아 출신 여성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 본명 프란치스카 콘스탄티아 도너)를 만난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정확한 장소·시기는 자료에 따라 ‘제네바(1933)’ 혹은 ‘미국(1933~1934)’로 다르게 전한다.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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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배우자 프란체스카 도너 리 |
이승만 프란체스카의 만남은 당시 한국 교포 사회에 큰 스캔들이었다.
이승만은 이미 첫 부인 박씨와 사실상 별거 중이었지만, 전통 사회의 관습상 이국 여성과의 재혼(1934년 미국 뉴욕에서 거행)은 파격 그 자체였다.
프란체스카는 뛰어난 지성과 헌신적인 사랑으로 이승만의 그림자처럼 평생을 동행했다.
그녀는 이승만 대통령의 개인 비서이자 정치적 조언자, 그리고 고독한 망명객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프란체스카는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웠고, 독립운동가로서의 이승만을 끝까지 지지했다.
그녀의 존재는 이승만이 격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대한민국 건국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던 정신적 지주였다.
8. 해방과 귀국 (40년의 침묵을 깨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이승만은 다시 한번 국제적 무대에 나설 기회를 잡았다.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 해방의 소식이 하와이 이승만에게 전해졌다.
이승만은 40년 동안이나 조국을 떠나 있었다.
그는 미국 군정 당국의 도움으로 대한민국으로 귀국하게 된다.
당시 미군정(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해방 후 한반도 남부를 통치한 미군의 정부)은 이승만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자 미국을 잘 아는 지도자라는 점에서 그를 선호했다.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은 해방 정국의 혼란 속에서 김포(金浦) 비행장에 내렸다.
그는 이제 독립운동가가 아닌, 대한민국 건국을 이끌어야 할 정치적 거물로 변신해 있었다.
그의 나이 칠순.
그는 고향 땅을 밟는 순간, 자신이 꿈꿨던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해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해방 정국의 현실은 좌우(左右) 이념 갈등과 민족 분열의 소용돌이였고, 이는 그의 마지막 투쟁의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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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 20일 11시 미군정청 (일제 총독부, 후에 중앙청) 건물 앞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
40년 만의 귀국: 건국 전쟁과 6.25, 고독한 결단 (1945년 ~ 1953년)
9. 해방 정국의 영웅과 분단의 현실
1945년 광복 후,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 대립으로 인해 극심한 해방 정국의 혼란에 빠졌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주목받았지만, 그의 앞에 놓인 현실은 험난했다.
김구(金九, 임시정부의 지도자)와 여운형(呂運亨, 중도좌파 민족주의자) 등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도 국가 건설 방향을 두고 노선이 극명하게 갈렸다.
이승만은 일관되게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주의를 주장하며 단독 정부 수립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는 미군정을 설득하고, 남한 내의 보수 세력을 결집시켰다.
이승만 건국 과정은 좌우 이념 갈등의 정점이었다.
그는 대한민국이 공산주의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유엔(UN)의 감시 아래 남한만이라도 먼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김구 등 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민족주의자들과 충돌했다.
김구는 분단된 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북한과의 협상을 시도했지만, 이승만은 이를 현실을 외면한 낭만적인 주장이라 비판했다.
이러한 정치적 대립은 대한민국 초기의 분열을 상징했으며,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분단 고착화'라는 과실을 안겨주었다는 비판이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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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이승만 여운형 |
10. 대한민국 건국과 토지개혁의 결단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대한민국 건국을 선포했다.
헌법에 따라 대통령 중심제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그의 정치적 야망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대한민국의 초기 안정과 정통성 확보를 위해 중요한 업적을 이루어냈다.
가장 대표적인 이승만 업적 중 하나는 토지개혁(土地改革,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한 경제 정책)이었다.
이승만 토지개혁은 1949년부터 시작되어 한국 사회의 근간을 바꾸어 놓았다.
일제 강점기부터 이어져 온 지주(地主) 중심의 봉건적 토지 소유 구조를 해체하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여 농가 경제의 안정과 자작농(自作農) 체제를 확립했다.
이 개혁은 농민들의 지지를 확보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기틀을 강화하는 동시에, 훗날 대한민국의 눈부신 경제 성장의 기반이 되었다는 후대의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일부 친일파 지주들이 손해를 보지 않도록 보상하는 등의 과실과 논란도 뒤따랐다.
11. 6.25 전쟁의 위기와 고독한 지도력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남침하면서 6.25 전쟁(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이것은 대한민국 건국의 존망이 걸린 최대의 위기였다.
전쟁 발발 초기, 정부는 서울을 사수하겠다 공언했지만, 이승만은 곧 한강 다리를 폭파하고 부산(釜山)으로 피난을 감행했다.
이승만 피난 과정은 그의 과실 중 가장 큰 비판을 받는 지점이다.
서울 시민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피난을 떠났으며, 한강 다리를 폭파하여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냈다는 논란은 이승만 평가에서 지워지지 않는 오점으로 남았다.
이러한 초기 대응 실패는 이승만의 지도력에 대한 불신을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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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다리 폭파 / 길을잃은 피난민들 |
그러나 전쟁이 격화되자, 이승만은 전쟁 지도자로서의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미국과 국제사회의 군사·외교적 지원을 강력히 촉구했고, 이후 유엔 안보리 결의와 미국 결정을 통해 유엔군이 파병되었다.
이승만의 프란체스카에 대한 의존도는 전쟁 중에 더욱 높아졌다.
프란체스카는 통역과 문서 작성을 담당하며, 고독한 대통령의 정신적 버팀목 역할을 했다.
12. 정치적 강수와 한미동맹
6.25 전쟁 중, 이승만은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1952년 부산 정치 파동(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한 계엄령 선포 및 정치적 탄압 사건)은 이승만이 장기 집권의 야욕을 드러낸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는 국회가 간선제(間選制)를 통해 자신을 재선시키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 계엄령(戒嚴令)을 선포하여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발췌 개헌)을 통과시켰다.
이 사건은 이승만의 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첫 번째 과실이자, 독재의 씨앗이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전쟁이 휴전(休戰) 국면으로 접어들자,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미래 안전을 위한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그는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반공포로 석방(UN군 통제 하의 북한군 포로들을 일방적으로 석방한 사건)이라는 극단적인 카드를 사용하여,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였다.
이 강경책의 결과,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韓美相互防衛條約, ROK-US Mutual Defense Treaty)이 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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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8월 8일 한미상호방위조약 가(假)조인식을 지켜보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뒷줄 가운데) |
이승만 한미동맹 체결은 대한민국의 안보를 영구적으로 보장하는 업적이었지만, 동시에 미국의 영향력 하에 놓이는 외교적 종속이라는 비판도 피할 수 없었다.
이승만은 건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대한민국의 주권을 지켜냈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의 통치 방식은 이미 민주주의의 원칙에서 멀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추락하는 독수리: 혁명과 망명, 그리고 역사의 평가 (1954년 ~ 1965년)
13. 장기 집권의 야욕과 헌정 유린
6.25 전쟁 후,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영웅으로서의 권위와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라는 명성을 바탕으로 장기 집권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승만 독재의 그림자는 1954년 사사오입 개헌(四捨五入改憲, 초대 대통령에 한해 3선 제한을 철폐하기 위해 시행된 위헌적 개헌)에서 명확히 드러났다.
이승만은 헌법재판소의 개헌안 표결 결과를 수학적 꼼수를 동원해 강제로 통과시켰다.
'반올림'이라는 뜻의 사사오입을 통해 부결된 개헌안을 가결로 둔갑시킨 이 사건은 이승만 대통령이 스스로 민주주의와 헌정 질서를 훼손하는 상징적인 과실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3선에 성공하며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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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11월30일자 경향신문 1면 사사오입 개헌 |
장기 집권이 지속되면서 자유당(自由黨,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 내의 부패는 극에 달했고, 정적(政敵)에 대한 탄압과 언론 통제는 노골화되었다.
이승만 주변에는 프란체스카 여사 외에도 이기붕(李起鵬, 자유당 실세이자 이승만의 측근)과 같은 충성스러운 측근들이 모였지만, 이들은 이승만의 눈과 귀를 가리는 역할을 하며 대한민국 사회의 병폐를 심화시켰다.
이 시기 이승만은 고령으로 인해 정치적 판단력이 흐려지기 시작했다는 논쟁이 있다.
그는 프란체스카에게 더욱 의존했고, 그녀는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 역할을 넘어 사실상 국정 운영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의 사적인 공간은 점점 더 좁아졌고, 고독한 독재의 길로 접어들었다.
14. 3.15 부정선거와 혁명의 도화선
1960년, 이승만은 네 번째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그의 나이 여든다섯.
자유당은 이승만의 건강 문제와 대중의 피로감을 감지하고, 그의 당선을 위해 조직적인 부정선거(不正選擧, 불법적인 방법으로 선거 결과를 조작한 행위)를 계획했다.
이것이 바로 3.15 부정선거이다.
3.15 부정선거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상 최악의 과실이자 오점이었다.
공무원 동원, 투표함 바꿔치기, 40% 사전 투표 등의 노골적인 불법 행위가 전국적으로 자행되었다.
이승만 대통령 자신은 이러한 행위를 직접 지시하지 않았을 수 있지만(논쟁), 그의 장기 집권 욕심과 주변 측근들의 충성 경쟁이 빚어낸 필연적인 결과였다.
이승만 독재 체제의 끝은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부정선거의 결과가 발표되자, 마산(馬山)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터져 나왔다.
특히 마산에서 실종되었던 김주열(金朱烈, 고등학교 학생)의 시신이 최루탄이 박힌 채 발견된 사건은 국민적 분노를 폭발시키는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몰락은 시간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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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 열사의 시신 |
15. 4.19 혁명과 하야 (추락하는 독수리)
1960년 4월 19일, 대학생과 시민들이 부정선거 무효를 외치며 서울 거리에 쏟아져 나왔다.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학생 혁명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이 사건이 바로 4.19 혁명이다.
4.19 혁명은 대한민국 국민의 자유민주주의 수호 의지를 전 세계에 천명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승만은 처음에 상황을 오판하고 시위를 단순한 소요 사태로 치부하려 했다.
그러나 대학 교수단의 시국선언과 미국 정부의 압박까지 더해지면서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그는 프란체스카와 최측근들의 설득 끝에 최종 결단을 내린다.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방송을 통해 대통령직 하야(下野, 대통령직에서 물러남)를 발표했다.
그는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며 자신의 과실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듯한 모호한 태도를 취했지만, 그의 하야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켜낸 4.19 혁명의 위대한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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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
16. 하와이에서의 쓸쓸한 종말과 역사의 평가
하야 후, 이승만은 자신의 사저인 이화장(梨花莊)에서 칩거했다가, 곧 비행기를 타고 미국 하와이로 떠났다.
그의 하와이 망명은 40년 만에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던 그가 다시 타국 땅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는 비극적인 종말이었다.
이승만 하와이 생활은 병마와 고독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그는 대한민국의 변화를 지켜보면서도 다시는 조국 땅을 밟지 못했다.
1965년 7월 19일,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90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그의 시신은 한국으로 운구되어 국립묘지(國立墓地)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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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공항에 도착한 이승만 대통령의 유해 |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여전히 극명하게 엇갈린다.
공(功): 그는 대한민국 건국의 기초를 다졌고, 토지개혁을 통해 경제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6.25 전쟁의 위기 속에서 한미동맹을 체결하여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했다는 업적은 부인할 수 없다.
과(過): 그는 독립운동 시절의 임시정부 탄핵 논란부터 시작해 부산 정치 파동, 사사오입 개헌, 그리고 3.15 부정선거에 이르는 일련의 독재와 헌정 유린이라는 과실을 저질렀다.
그의 장기 집권 욕심은 결국 4.19 혁명이라는 거대한 국민적 저항을 불러왔다.
이승만은 시대를 앞서간 외교 독립론자였지만, 동시에 시대를 외면한 독재 군주였다.
그는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집을 짓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지만, 그 집의 기둥(민주주의)을 스스로 갉아먹은 '추락하는 독수리'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삶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시작과 함께 빛과 그림자, 영웅과 악당이라는 복잡한 이중성을 영원히 품고 있다.
본 글은 주류 연구/공식 도록/1차·2차 사료를 우선으로 서사를 구성했습니다.
확인 가능한 사실을 중심으로 하되, 불확실·가설적 요소는 본문 안에서 [논쟁]/[전승]/[추정]으로 즉시 표기했습니다.
인물 내면·대화 등 극적 장면은 최소 창작으로 사실 흐름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만 사용했습니다.
연대·지명·혈연 등 이견이 큰 대목은 보수적으로 기술하고 대표 견해를 병기했습니다.
오탈자·사실 오류 제보와 추가 사료 추천을 환영합니다.
Born 1875 to a yangban family, Syngman Rhee studied at Paichai, joined the Independence Club, and was jailed (1899–1904), drafting The Spirit of Independence.
In 1904 he moved to the U.S., studying at GWU, Harvard, and Princeton.
Elected president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in 1919, he was impeached in 1925. Exiled in Hawaii, he returned in 1945, led South Korea’s founding and a U.S. alliance in the Korean War, then turned authoritarian, fell in April 1960, and died in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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