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에서 황제로 성장한 한고조 유방의 리더십과 초한전쟁 완전복기 (Liu Bang)


건달의 시대 

기원전 3세기 말, 중국 대륙은 진(秦)나라의 가혹한 폭정 아래 신음하고 있었다. 

오랜 전국시대(戰國時代)의 혼란을 끝낸 진시황(秦始皇)은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며 중앙 집권적 전제 군주제를 완성했으나, 법가(法家)에 기반을 둔 법률은 지나치게 엄격하여, 백성들은 사소한 잘못에도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했다. 

이 시대의 한복판, 패현(沛縣: 현재의 장쑤성 쉬저우시) 풍읍(豊邑: 패현의 한 지역) 중양리(中陽里)라는 평범한 마을에서 한(漢)나라를 열게 될 사내, 유방(劉邦: 성은 유, 이름은 방, 자는 계. 막내라는 뜻이며 즉위 전에는 '유계'로 많이 불림)이 태어났다.


유방의 출신지 패현 중양리


유방의 가문은 농부 출신으로, 부친은 태공(太公: 유씨 댁 어르신이라는 존칭), 모친은 유온(劉媼: 유씨 댁 안주인이라는 존칭)이었으며, 위로 형 유백(劉伯)과 유중(劉仲)이 있었다. 

유방이 태어날 때 그의 어머니가 연못가에서 붉은 용(龍)이 몸 위에 올라오는 꿈을 꾸고 그를 낳았다는 전설이 있으며, 이는 훗날 한나라가 화덕(火德: 붉은색)으로 일어났다는 상징과 연결되었다. (전승)

그의 외모 역시 범상치 않아, 콧날이 높고 이마가 넓어 용의 얼굴을 닮았으며(융준용안, 隆準龍眼), 수염이 멋있었고, 심지어 왼쪽 넓적다리에는 72개의 반점(斑點)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이는 창업 군주의 비범함을 강조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논쟁)


유방의 젊은 시절은 한량(閒良), 즉 협객(狹客: 주색에 빠져 가업은 뒷전인 사람)이었다. 

그는 생계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왕온(王媼)과 무부(武負)라는 주막에서 매일 외상술을 마셨는데, 신기하게도 그가 술을 마시고 잠을 청하면 몸 위에 용의 기운이 서리고, 주막의 매상이 몇 배로 올라 술집 주인들은 외상 장부를 찢어버리곤 했다. 

그는 놀고 먹기만 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형수(유백의 아내)는 이런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겨 그가 친구들을 데려와 밥상을 차리라고 하면 냄비를 일부러 긁는 시늉을 하여 손님들을 돌아가게 만들기도 했다. 

이렇듯 유방은 젊어서부터 주변 동네 건달들을 끌어모으는 인망(人望)과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다.


한고조 유방 (청나라 시기 그려진 상상화)


그의 인간관계는 매우 폭넓었다. 

패현의 하급 관료인 소하(蕭何: 법률에 밝았음)와 조참(曹參: 현청 옥리 출신), 그리고 개고기 도살업자 번쾌(樊噲: 훗날 유방의 동서가 됨) 등과 어울렸다. 

심지어 그는 사수정(泗水亭: 진나라의 가장 작은 지방 행정 단위인 '정'의 우두머리)의 정장(亭長: 오늘날의 파출소장 정도의 말단 관리) 벼슬을 얻기 전까지 조(曹)씨라는 여인의 기둥서방 노릇을 하고 있었으며, 이 사이에서 훗날 제도혜왕(齊悼惠王)이 되는 유비(劉肥)를 낳았다.(논쟁)


유방이 정장이 된 후, 그는 진나라의 수도 함양(咸陽)으로 부역을 떠났을 때, 진시황(秦始皇)의 위풍당당한 행차를 보고 깊이 감탄하여 나지막이 읊조렸다.

"오호라! 대장부(大丈夫)라면 실로 저래야 하지 않겠는가!"

이는 라이벌 항우(項羽)가 같은 행렬을 보고 "저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말겠다!" 라고 증오를 드러낸 것과 극명하게 대비되는데, 유방은 황제라는 지고지순한 권위를 동경했으나, 항우는 그 권위를 전복시키고 싶어 했다는 점에서 둘의 근본적인 성격 차이를 보여준다. 

유방은 이후 대나무 껍질로 만든 죽피관(竹皮冠)을 만들어 쓰고 다녔는데, 황제가 된 이후에도 계속 착용했다.


진시황제

여후와의 만남과 운명

유방의 삶이 뒤바뀌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선보(單父: 지금의 산동성 선현) 출신 여공(呂公: 여씨 어르신)이 원수들을 피해 패현으로 이주해 온 것이다. 

여공은 당대의 명사로, 패현의 현령과도 친분이 있었다. 

여공의 집들이 연회가 열리자, 패현의 유지들과 관리들이 여공에게 잘 보이기 위해 축의금(하례금)을 바쳤다. 

현의 서기(書記)였던 소하(蕭何)가 하례금 걷는 일을 맡아, 1,000전(錢) 미만은 대청 아래에 앉게 했다.


잔치가 무르익을 무렵, 평소 몸에 한 푼도 지니지 않았던 건달 유방(劉季)이 나타나 당당하게 외쳤다.

유방: "이 어르신(乃公)은 하례금 1만 전을 내겠다!"

여기서 유방이 자신을 '나(자신)'를 가리키는 속어로 "이 어르신" 혹은 "네 아버지" 정도의 어감을 가진 '내공(乃公)' 또는 '이공(而公)'이라고 호칭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는 황제의 어투라기보다는 건달 우두머리의 어투에 가까웠으며, 현대의 "이 형이", "이 엉아가"와 같은 허세 섞인 표현과 비유될 수 있다.


아무것도 없는 유방이 '1만 전'을 외치자, 관상 보는 것을 즐겼던 여공은 깜짝 놀라 문 앞까지 나와 유방을 맞이했다. 

여공은 유방에게서 '앞으로 큰 인물이 될 왕기(王氣)'를 감지했다. 


유방의 사정을 잘 알던 소하는 여공에게 조용히 다가가 빈정거렸다.

소하: "유계(劉季: 유방)라는 작자는 본래 허세만 가득하고, 큰소리만 치지 정작 이루는 것은 없습니다. (虛言不實)"


하지만 유방은 당당한 태도로, 접대를 사양하는 기색도 없이 귀빈석에 앉아 술을 즐겼다. 

술자리가 끝날 무렵, 여공은 유방을 남겨두고 자신의 딸 여치(呂雉: 훗날의 여후)를 그에게 시집보내겠다고 제안했다.


여공: "나는 평소 관상을 보기를 좋아했는데, 당신처럼 인상 깊은 관상은 처음이오. 귀하기가 하늘에 비할 데 없을 것 같소."


여공의 부인(장모)은 노발대발했다. 

현령(縣令)이 청혼했을 때도 거절했는데, 하필이면 저런 '놈팽이(유계)'에게 딸을 주냐며 화를 냈으나, 여공은 "아녀자가 무슨 일을 알겠소!" 라며 무시하고 딸 여치를 유방에게 강제로 시집보냈다. (여공은 유방의 관상을 제대로 본 셈이다)

여공은 둘째 딸인 여수까지 번쾌(樊噲: 개고기 도살업자이자 유방의 부하)에게 시집보냈다.

여치(呂雉)는 유방의 정실부인이 되었다. 

그녀는 대담하고 야심만만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유방이 건달 시절 사고를 치고 도망 다닐 때 대신 형벌을 받고 옥살이를 하는 등, 헌신적으로 내조했다. 

여치는 유방의 아들 유영(劉盈: 훗날 혜제)과 장녀 노원공주(魯元公主)를 낳았다.


고황후 여치 (여태후)

유방은 정장(亭長) 벼슬을 얻고, 진나라의 수도 함양에 있는 여산(驪山)으로 죄수들을 호송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당시 진나라 법은 매우 엄격하고 가혹했다. 

죄수들은 여산에서 진시황릉(秦始皇陵)을 만드는 고통스러운 노역에 끌려가야 했는데, 폭우 등으로 기한을 맞추지 못할 경우 책임자는 물론 죄수들까지 참수되거나 가혹한 벌을 받았다. 

이 때문에 죄수들은 도중에 하나둘씩 달아나기 시작했다. 

책임자였던 유방은 이대로 가다간 여산에 도착할 때쯤 모두 도망쳐 자신 역시 죽음을 면치 못할 상황임을 알았다.


유방은 행렬을 멈추게 하고 술을 진탕 마셨다. 

밤이 되자, 그는 남아있던 죄수들에게 말했다.

유방: "가고 싶은 대로 가라. 나도 도망칠 테니까."

유방은 죄수들을 모두 풀어주었고, 그들 중 약 10명 정도가 오히려 그의 화끈한 면모에 감명을 받아 유방을 따르기로 했다.


신화적 에피소드: 백사참(白蛇斬)

유방은 따르는 무리와 함께 한밤중에 이동했다. 

앞서 가던 사람이 돌아와 "앞에 큰 뱀이 길을 막고 있으니 되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보고했다. 

술에 취한 유방은 호탕하게 소리쳤다.

유방: "장사(壯士)가 길을 가는데 그깟 뱀이 뭐라고!"

유방은 앞으로 가더니 칼(훗날 적소赤霄라는 국보가 됨)로 뱀을 베어 죽여버렸다. 

잠시 후, 뱀이 죽은 자리에서 노파가 통곡하고 있었다.

노파: "어떤 사람이 내 아들을 죽여서 그렇다. 내 아들은 백제(白帝: 흰색, 진나라를 상징)의 아들인데, 뱀으로 변해 있다가 방금 적제(赤帝: 붉은색, 유방과 초나라를 상징)의 아들에게 참살당했다."


노파는 홀연히 사라졌고, 이 이야기를 들은 유방은 내심 기뻐했으며, 따르던 사람들은 유방을 비범한 인물로 더욱 경외하게 되었다. 

이 일화는 한나라가 진나라를 멸망시킬 운명임을 암시하며, 훗날 유방이 거병할 때 붉은색을 숭상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한고조 유방의 백사참


도피 생활과 정치적 자산 축적

유방은 이 사건 이후 진시황이 '동남쪽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고 여겨 순행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을 잡으려는 것이라 생각해 망탕산(芒碭山: 연못가 근처 암석 사이)에 숨어 지냈다.

신기하게도 그의 아내 여후(呂后)는 유방이 숨어있는 곳을 항상 귀신같이 찾아냈다. 

유방이 그 이유를 묻자,

여후: "당신이 머무는 곳 위에는 항상 운기(雲氣)가 서려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소문은 패현의 자제들에게 퍼져, 유방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비록 도피 생활이었으나, 유방은 자신의 존재를 신비화하고 인망을 높이는 정치적 자산을 축적한 것이다.


유방이 도피하는 동안, 진나라는 시황제 사후 2세 황제(二世皇帝) 호해(胡亥)가 조고(趙高: 환관)에게 국정을 맡기고 폭정과 방종에 빠져 있었다. 

결국 기원전 209년,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대택향(大澤鄕: 하남성 출신)에서 난을 일으켰다. 

진나라의 가혹한 법(정해진 기한 내에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면 목을 벰) 때문에 징용된 인부들이 죽음을 피하고자 봉기한 것이었다. 

진승은 장초(張楚)라는 나라를 건국했고, 전국 각지의 백성들은 진나라 관리들을 때려 죽이며 봉기에 동참했다.


오광 진승의 난

유방의 고향인 패현의 현령(縣令) 역시 두려움에 떨며, 백성들의 인망이 높았던 유방을 얼굴 마담으로 내세워 함께 봉기하려고 번쾌(樊噲)를 시켜 유방을 돌아오게 했다.


하지만 유방이 돌아오자, 현령은 마음을 바꿔 성문을 걸어 잠그고 유방을 막았다. 

현령은 유방과 친했던 소하(蕭何)와 조참(曹參)까지 죽이려 했으나, 소하와 조참은 성벽을 넘어 도망쳐 유방에게 합류했다. (소하와 조참은 원래 진나라 관리였으나 유방을 추대하는 것이 민심을 모으는 데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유방은 현령을 규탄하는 내용을 적은 글을 성내로 쏘아 보내며

유방: "현령 그놈을 잡아 죽여야 패현이 무사하다!"

고 외쳤다. 

성 안에서 반란이 일어나 현령을 때려 죽였고, 사람들은 유방을 우두머리로 추대했다.


유방은 처음에는 거부했다.

유방: "천하는 혼란하고 군웅이 싸우는데, 나 같은 사람을 선택했다가는 한 번에 패하리라. 다른 사람을 택해야 한다."

하지만 소하와 조참은 반란이 실패했을 경우의 책임이 두려웠고, 유방의 지지도가 워낙 높았으므로 그를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현령 자리를 강권했다.

소하와 조참: "공께서 아니면 이 난세를 이끌 적임자가 없습니다!"

일각에서는 유방이 내심 좋으면서도 사양하는 척만 했을 뿐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오랜 도피 생활에 지쳤던 그에게 현령 자리는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을 것이다. 

결국 유방은 패현의 우두머리, 패공(沛公: 패현을 다스리는 자)이 되었다.


패공이 된 유방은 황제(黃帝)와 치우(蚩尤)에게 제사를 지내고, 자신의 상징색인 붉은색(적제) 깃발을 내걸었다. 

그는 소하, 조참, 번쾌 등과 함께 3,000여 명의 군사를 모아 주변 지역을 공격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이 무렵 유방이 거병한 기원전 208년, 진승의 장초 세력은 진나라 명장 장한(章邯)에게 격파당하고, 다른 옛 6국의 후손들이 각지에 독립 왕국을 세우며 천하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옹치(雍齒)의 배신

유방은 풍읍(豊邑)의 수비를 옹치(雍齒)에게 맡기고 자신은 설현(薛縣)을 치러 나갔다. 

옹치는 본래 유방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때 위나라(魏)의 잔존 세력이었던 주불(周巿)이 사자를 보내 풍읍을 위나라 땅이니 항복하라고 협박했다. 

옹치는 이에 넘어가 풍읍 관내를 홀라당 주불에게 바쳐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유방은 격노하여, 병을 얻을 정도로 몸이 상하면서까지 풍읍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킬 수 없었다. 

유방에게 옹치의 배신은 개인적인 모욕이자 군사적 좌절이었다.


유방은 이후 경구(景駒: 임시 초왕)에게 의탁하여 군사를 빌렸고, 이 무렵 장량(張良: 한나라 귀족 후손으로 시황제 암살에 실패한 지략가)을 만나게 된다. 

장량은 유방의 뛰어난 경청 능력에 감명받아 그에게 눌러앉아 조언을 구했고, 유방은 장량의 계책을 척척 알아들었다.


역사상 최고의 전략가 장량

유방의 지상 과제는 배신자 옹치를 응징하고 풍읍을 탈환하는 것이었으나, 풍읍 출신 부하들에게 고향 이웃을 도륙하도록 명령하기 곤란한 점이 있었다. 

결국 유방은 최강의 세력으로 성장하던 항량(項梁: 초나라 귀족 출신)을 찾아가 기병 100여 명만 거느린 채 5,000여 명의 병사를 빌렸다. 

이 병력을 바탕으로 풍읍을 공격해 마침내 함락시켰고, 옹치는 위나라로 도주했다.


이후 항량은 초나라 회왕(懷王: 훗날 의제) 웅심(熊心)을 왕으로 추대했고, 유방도 후초(後楚)의 신하가 되었다.


군사적 능력에 대한 평가와 논란

유방은 종종 군사적으로 무능하다고 평가되지만, 이는 라이벌인 항우(項羽)나 부하인 한신(韓信)이 워낙 천재적이었기 때문이며, 실제로는 공성전, 수성전, 야전 등 다양한 전투를 70회 이상 치르며 대부분 승리한 역전의 사령관이었다. (논쟁)

특히 장량과 한신 영입 이전, 그의 휘하 부하들(개백정 번쾌, 곡소리꾼 주발, 마굿간지기 하후영 등)이 대부분 한미하고 재능이 평범한 수준이었음에도 유방은 이들을 지휘하여 진나라 관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항량이 장한(章邯)의 기습에 전사하자, 유방은 무안후(武安侯)에 봉해지며 탕(碭)군의 군대를 지휘하게 되어, 일개 평민 출신에서 공식적인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서진(西進) 명령과 관중 왕의 약속

초나라 회왕(義帝)은 진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관중(關中: 함양 일대)에 먼저 입성하는 자를 그 지역의 왕으로 삼으리라"고 선언했다.

항우는 장한과의 거록대전(巨鹿大戰)에서 대승을 거두는 임무를 맡았고, 유방은 관대하고 남을 용납하는 성품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험난한 무관(武關: 관중의 남부 관문)을 통해 서쪽으로 진군하여 함양으로 가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유방은 항우보다 훨씬 쉬운 경로를 배정받았지만, 항우가 진나라 주력군을 붙들어 놓았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회왕이 애초에 잔혹한 항우 대신 관대한 유방에게 관중 왕을 주려 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유방은 진군하며 역이기(酈食其: 고양 출신 술주정뱅이 유생)를 만났는데, 유방은 그를 처음에는 무례하게 대하며 유학자들을 싫어하는 태도를 보였다.


유방의 성격적 결점: 오만함과 용인술

유방은 양다리를 떡 벌리고 앉아 두 여자에게 발을 씻기며 역이기를 맞이하는 무례함을 보였다.

역이기: "무리를 모아 의병을 일으켜 무도한 진나라를 멸하기 위해서는 장자(長子: 어른)를 거만한 태도로 맞이하심은 옳지 못합니다!"

역이기의 직언에 유방은 즉시 발 씻기를 멈추고, 벌떡 일어나 옷깃을 여미며 역이기를 윗자리에 모셔 조언을 구했다. 

유방은 겉으로는 사람을 하찮게 대했지만, 올바른 간언을 듣는 순간에는 웬만하면 노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대범함이 있었다. 

이것이 유방의 뛰어난 용인술(用人術) 이었다.


역이기

유방은 장량(張良)과 다시 합류하여, 남양 태수 여의(呂齮)가 지키는 완성(宛城)을 포위했다. 

유방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서진하고 싶었으나, 장량은 "후방에 적을 남기는 건 좋지 않다"고 충고했다. 

유방은 완성을 세 방향에서 포위했으나, 여의는 항복하면 학살당할까 두려워 저항했다.


이때 진회(陳恢)라는 인물이 유방에게 간청했다.

진회: "항복을 받아준다면 다른 성들도 앞다투어 복종할 것이나, 싸워서 이기려면 피해가 크고 시간을 낭비하다가 공께서는 관중왕의 약속을 잃을 수 있습니다."

유방은 그의 충고를 받아들여 항복을 권했고, 여의를 비롯한 성주들은 앞다투어 유방에게 투항했다. 

이는 유방이 항우와 대조적으로 항복에 관대하며, 약탈을 지양한다는 평판을 널리 쌓는 계기가 되었다.


함양 입성과 약법삼장(約法三章)

기원전 207년 10월, 유방의 군대는 마침내 패상(覇上: 함양 근방)에 이르렀고, 회왕이 약속한 대로 천하의 그 어떤 제후들보다 가장 먼저 진나라 수도 함양 근방에 도달했다.

당시 진나라는 2세 황제 호해(胡亥)가 시해되고, 환관 조고(趙高)마저 자영(子嬰: 진의 왕)에게 처단된 후였다. 

진왕 자영(子嬰: 스스로 황제 칭호를 버리고 진왕을 칭했음)은 흰 수레를 타고 목에 밧줄을 매고서, 황제의 옥새(玉璽)와 부절(符節)을 바치며 유방에게 항복했다. 

이로써 최초의 통일 제국 진나라는 건국 15년 만에 멸망했다.


부하들은 진왕 자영을 처형하여 폭정에 대한 울분을 풀자고 주장했으나, 유방은 단호히 거부했다.

유방: "회왕께서 나를 관중으로 보낸 것은 내가 관대하고 남을 용납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소. 이미 항복한 사람을 죽인다면 앞일이 상서롭지 못할 것이오."


유방은 자영의 목숨을 보장하고, 호화로운 진 황실의 금은보화나 궁녀들에게 일절 손을 대지 않고, 군대를 패상으로 철수시켜 함양 백성들이 약탈이나 폭행을 당하지 않게 배려했다. 

다만, 소하(蕭何)만이 진나라 승상부와 어사부의 율령도서(律令圖書)와 호적부 등 모든 문헌을 싹쓸이하여 보관했다. 

이 정보는 훗날 유방이 초한전쟁에서 항우보다 한발 앞서 나갈 수 있는 핵심 기반이 되었으며, 소하의 탁월한 행정 능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유방의 행정참모. 문종후 소하

유방은 함양의 호걸과 노인들을 모아 약법삼장(約法三章)을 선언했다.

유방: "여기 계시는 어른들께서는 진나라의 가혹한 법으로 오랫동안 고통당해 왔습니다. 나는 여러분들과 단 세 가지 법을 약속합니다. 살인범은 사형(死刑), 폭행범은 태형(苔刑), 절도범은 징역(懲役). 나머지 진나라의 모든 법은 폐지하겠소."


이 조치는 백성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이 약법삼장은 후일 '간편한 법률'을 가리키는 격언이 되었다)

백성들은 유방이 진나라 왕이 되지 못할까 걱정할 정도였다.


최대의 위기: 홍문연(鴻門宴)

유방은 어떤 사람의 조언에 솔깃해져, 관중의 동쪽 관문인 함곡관(函谷關)을 막아 항우(項羽)가 관중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항우는 거록대전에서 진나라 주력을 격파하고 대군을 이끌고 서진 중이었는데, 유방의 이 행위는 항우의 어그로를 끄는 최악의 실책이었다. 

항우는 자신이 진나라를 멸망시켰음에도 관중 왕의 자리를 빼앗겼다고 판단하여, 영포(英布) 등을 시켜 함곡관을 돌파하게 했다.


항우의 막강한 군세(40만 명 주장)가 다가오자, 유방의 부하 조무상(曹無傷)은 "유방이 관중 왕 노릇을 하려 한다"고 항우에게 밀고했고, 항우의 책사 범증(范增: 유방을 경계하며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함)은 유방을 죽일 절호의 기회라고 주장했다. 

당시 유방의 군사는 10만 명(20만 명으로 부풀림)으로, 항우의 군대와는 전력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장량(張良: 유방의 책사)은 항우의 숙부 항백(項伯)의 도움을 받아, 유방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장량: "공(公: 유방)께서 항우를 이길 것 같았단 말입니까?"

유방은 경악하며 "나는 결코 항우와 대적할 수 없소. 어떻게 하면 좋겠소?" 라고 물었다.


결국 유방은 홍문(鴻門: 회동 장소)에서 항우를 만나 사죄했다. 

범증은 이 자리에서 유방을 암살하려 했으나, 번쾌(樊噲: 덩치 크고 용맹한 유방의 동서)와 장량의 기지로, 유방은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탈출했다. 

진영으로 돌아온 유방은 가장 먼저 배신자 조무상을 잡아 죽였다.


홍문연


좌천과 한왕(漢王) 봉책

홍문연(鴻門宴) 후, 항우는 함양에 입성하여 진나라 왕족과 관리 4천여 명을 대학살하고, 아방궁(阿房宮)과 진시황릉(秦始皇陵)을 불태우고 파헤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러한 항우의 잔혹한 행보(신안 대학살 포함)는 관중 백성들의 민심이 완전히 유방에게 기울게 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천하의 지배자가 된 항우는 서초패왕(西楚覇王)을 자칭하며, 제후왕들을 분봉했다. 

관중 왕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유방은 파(巴)·촉(蜀)과 한중(漢中)이라는 벽지로 좌천(左遷: 서쪽으로 옮긴다는 의미에서 유래)되어 한왕(漢王)으로 봉해졌다.


이 지역은 당시 유배지로 여겨질 정도로, 개발이 안 된 오지였으며, 절벽 수준의 높은 산맥으로 막혀 잔도(棧道)가 없으면 탈출 자체가 불가능한 감옥 같은 지형이었다. 

항우는 유방을 이곳에 가둬 늙어 죽게 만들 속셈이었다.


유방은 항우에게 대항하고 싶었으나, 소하(蕭何)가 "지금 감정에 휩쓸려 싸운다면 개죽음이나 다름없지만 뒷날을 기약하며 인내한다면 분명 기회가 올 것입니다"라고 설득하여 그 의견에 따랐다.

유방은 항우의 의심을 덜기 위해 장량(張良)의 조언에 따라, 파촉으로 가는 험한 길에 설치된 잔도(棧道: 절벽에 만든 길)를 모조리 불태워 항우에게 "나는 동쪽으로 다시 나갈 생각이 없다"는 제스처를 보였다.


유방을 따라 한중(漢中)으로 들어가는 3만 명의 군사들 대부분은 고향(풍·패)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유방은 절망에 빠졌다. 

그때, 승상 소하마저 달아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유방: (절규하듯) "소하마저 나를 버렸단 말인가! 양손을 잃은 것과 같다!"

하지만 소하는 도망친 것이 아니라, 치속도위(治粟都尉: 식량 담당 하급 장교) 한신(韓信: 훗날 한초삼걸 중 한 명)을 쫓아간 것이었다.


한신을 쫒는 소하

소하가 돌아오자, 유방은 화를 내며 물었다.

유방: "다른 장졸들이 도망쳤을 땐 뒤쫓지 않더니, 어찌하여 한신만을 뒤쫓았단 말인가? 거짓이로다!"

소하가 유방에게 말했다.

소하: "다른 장수들이야 쉽게 얻을 수 있지만 한신과 같은 인물은 누구와도 비길 수 없는 걸출한 사람입니다. 왕께서 만약 한중에서 계속 왕 노릇을 하시려면 한신을 쓸 바 없거니와, 만일 천하를 취하고자 하신다면 한신 말고는 그 일을 상의할 인물이 없습니다."


이 소하의 추천과 유방의 대담한 결단으로, 유방은 장량-소하-한신이라는 한초삼걸(漢椒三傑) 중 마지막 퍼즐 조각인 한신을 대장군(大將軍)이라는 파격적인 직위에 앉혔다.


한신은 유방에게 항우의 결점(독단적, 인색함)과 유방의 장점(용인술, 관대함)을 역설하며

한신: "항우는 부하들의 불만이 팽배해 있으니 동쪽으로 갈 기회는 반드시 옵니다. 관중의 삼왕(장한, 사마흔, 동예)은 인심을 잃었으니 관중은 간단히 함락되리라."

고 진언했다. 

유방은 한신의 말을 전적으로 수용했다. 

유방이 한중(南鄭)에 도착한 지 불과 4~5개월 만에, 기원전 206년 8월, 유방은 '암도진창(暗渡陳倉: 몰래 진창으로 돌아 나간다)'의 계책을 써서, 불태웠던 잔도가 아닌 우회로를 통해 항우가 봉분한 진나라 항장 출신 삼진왕(三秦王)인 옹왕 장한(章邯)을 기습 공격했다.


초한 전쟁의 개시와 팽성 대전

한신이 이끄는 한군은 장한의 군대를 잇달아 격파했고, 장한은 폐구(廢丘)에 포위되었다. 

한신은 삼진왕인 새왕 사마흔(司馬欣)과 적왕 동예(董翳)까지 항복시키며, 불과 몇 개월 만에 관중을 평정했다.

유방은 관중의 민심을 등에 업고, 동쪽으로 진군하며 여러 제후들을 규합했다. 


유방이 관중으로 들어가다

때마침 항우는 제나라(齊)의 전영(田榮)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느라 수렁에 빠져 있었고, 유방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유방은 항우에게 암살당한 후초(後楚)의 의제(義帝: 초 회왕 웅심)를 위해 3일장을 치러 명분(名分)을 확립하고, 제후 연합군을 모았다. 

유방이 모은 대군은 무려 560,000명에 달했다.


기원전 205년, 유방은 항우가 없는 초나라의 본거지 팽성(彭城: 현재 강소성 서주시, 초나라의 도읍)을 손쉽게 점령하고, 군사들은 승리에 도취되어 주연을 즐기며 군기가 느슨해졌다. 

이는 유방의 군사적 실책 중 하나인 팽성 전투(彭城大戰)의 서막이었다.

팽성(彭城)에서 유방 연합군이 방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항우는 불과 30,000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엄청난 속도로 회군하여, 방심하고 있던 한군을 밤중에 기습했다.


대규모 학살과 가족의 위기

숫적으로 19배나 열세였던 항우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한군을 개미처럼 밟아 죽였고, 한군은 제대로 반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공중분해되었다. 

곡수(穀水)와 사수(泗水)에서 10만 명, 수수(睢水)에서 또 10만 명이 떼죽음을 당했으며, 시체 때문에 강물이 흐르지 못할 지경이었다.(전쟁 서술 특성상 과장 가능성이 높다.)


유방은 이 엄청난 패배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겪고 황망히 도망쳤다. 

유방은 고향 패현(沛縣)에 들러 가족을 챙기려 했으나 이미 흩어진 뒤였다. 

도망치는 와중에 그는 길거리에 버려져 있던 아들 유영(劉盈: 훗날 혜제)과 장녀 노원공주(魯元公主)를 발견하고 자신의 수레에 태웠다.


초군(楚軍)의 추격대가 보이자, 당황하고 지친 유방은 수레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아이들을 마차 밖으로 발로 차 밀어 떨어뜨렸다.


유방의 마차를 몰던 마굿간지기 출신 하후영(夏侯嬰)은 깜짝 놀라 아이들을 다시 주워 태웠다. 

유방은 다시 추격대가 다가오자 아이들을 몇 번이나 던졌고, 하후영은 분노하여 유방에게 직언했다.

하후영: "한낱 짐승 새끼들도 제 자식 귀한 줄은 압니다. 그런데 폐하께선 도대체 뭐하시는 겁니까!"

유방은 자신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에, 아이들을 희생시키려 했다. 

하후영은 유방을 찌르려는 시늉까지 했지만, 끝내 아이들을 버리지 않고 유방과 함께 도망쳤다. 

이 사건은 유방의 비정하고 이기적인 가장으로서의 과실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다만 유교 윤리에서는 부모인 군주의 목숨이 더 중요하다고 보기도 했다).

결국 유방의 아버지 유태공(劉太公)과 정실 부인 여치(呂雉)는 항우에게 포로로 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장기전의 돌입과 이간책

유방은 겨우 도망쳐 형양성(滎陽城: 현재 하남성 형양)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항우는 팽성 대전의 대승에도 불구하고 유방의 잔당을 완전히 궤멸시키지 못하고, 형양에서 장기적인 공성전에 돌입해야 했다.

유방은 항우의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 도적 출신 팽월(彭越: 양왕으로 봉해짐)과 구강왕(九江王) 영포(英布: 이마에 먹물 문신이 있는 경형을 받아 '경포'라고도 불림)를 회유하여, 항우의 보급선을 끊게 했다.

이때 유방의 모략가 진평(陳平: 위무지의 천거로 수하가 됨)이 이간계(離間計)를 제안했다. 

진평은 유방에게서 받은 엄청난 금을 쏟아부어 "범증, 종리말 등 항우의 핵심 장수들이 유방과 내통하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항우는 이 간단한 술수에 넘어가, 유방에게 사자를 보냈을때 범증의 사자가 온 줄 알고 으리으리하게 대접하려다가, 항우의 사자임을 알고는 갑자기 평범한 음식을 내주며 모욕했다.

결국 항우는 범증을 의심했고, 격분한 범증은 항우 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 등창(背疽)이 나서 죽었다. 

항우는 자신이 가장 의지했던 범증 한 명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여 자멸의 길을 걸었다.


범증

다시 한번의 탈출

범증이 사라진 후에도 형양성에 대한 초군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고, 식량까지 부족해졌다. 

장군 기신(紀信)이 유방과 닮은 외모를 이용해 '가짜 유방'으로 위장하여 항복하고, 그 틈에 진짜 유방은 서문으로 탈출하는 계책이 성공했다.

항우는 속임수에 분노하여 가짜 유방인 기신을 불태워 죽였다.


유방은 관중에서 병력을 다시 모아, 항우를 유인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하여 영포(英布)와 함께 주둔하며 항우의 주의를 끌었다. 

항우가 유방과 결전을 벌이기 위해 남쪽으로 달려왔으나 유방이 도전에 응하지 않았고, 그 사이 팽월(彭越)은 초나라 후방을 다시 공격했다. 

항우는 팽월을 격파하기 위해 군사를 동쪽으로 이동시켰다.


항우가 자리를 비운 사이, 유방은 성고(成皋)에 주둔하던 초군을 격파하고, 오창(敖倉: 진나라가 비축한 곡창지대)의 양식을 확보하여 장기전을 벌일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유방은 오창을 얻음으로써 '하늘 위의 하늘(곡식)'을 손에 넣어야 한다는 역이기의 주장을 실현했다.


한신에 대한 불신과 견제

유방은 성고에서 항우에게 다시 포위되자, 하후영과 함께 간신히 탈출하여 한신(韓信)의 군영(修武)으로 향했다.

유방은 새벽에 한신의 침소에 몰래 들어가, 잠자고 있던 한신과 장이(張耳)의 군대 지휘권을 상징하는 인수(印綏)와 부절(符節)을 손아귀에 넣고, 순식간에 인사 배치를 끝내 군 통제권을 회수했다.


한신은 쉽게 자신의 군사력을 빼앗겼고, 유방에게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했다. 

이 사건은 한신이 용병술에는 천재적이었으나, 처세술은 거의 0점에 가까웠으며, 자신을 발탁해 준 윗사람(유방) 앞에서는 순종적이고 약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있다. 

또한, 한신의 군대는 유방이 보낸 조참, 관영 등의 측근들로 채워져 있었기에, 반역을 꾀할 기반 자체가 약했다.

유방은 한신에게 조(趙)나라 상국(相國)을 맡겨 제(齊)나라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한신이 제나라를 치는 과정에서, 이미 유방의 명을 받고 홀로 제나라를 설득하여 항복시킨 유학자 역이기(酈食其)를 한신의 참모였던 괴철(蒯徹 괴통이라고도 불림)의 꼬드김(혀로 항복시킨 역이기에 비해 한신의 공이 약함)에 넘어가 침공함으로써, 역이기는 분노한 제나라에게 삶겨져 죽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한나라는 제나라에 대한 완전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한신과 괴철(괴통)


제나라를 평정한 한신은 유방에게 "신을 임시 왕(가왕, 假王)으로 삼아주지 않으시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겠습니다" 라는 무례한 요구를 보냈다. 

유방은 분통을 터뜨렸지만,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이 그의 발을 밟으며 (제지하며) "한신이 돌아서면 한에게 불리하다"고 만류하자, 유방은 순간적으로 태도를 바꿔

유방: "대장부가 왕이 되려면 진짜 왕이 되어야지 어찌 임시 왕이 되려 하는가!"

라고 호통치며 한신을 정식 제왕(齊王)으로 임명했다. (유방의 뛰어난 임기응변과 정치력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제나라 전투의 한신

광무 대치와 항우의 자멸

유방과 항우는 광무(廣武: 형양 근처)에서 수개월간 대치했다. 

항우는 보급선이 끊기고 군대가 피폐해지자, 유방의 아버지인 태공(太公: 인질로 잡혀 있었음)을 큰 도마 위에 올려놓고 삶아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막무가내식 작전까지 구사했다.

유방은 이에 희대의 패드립(패륜적 발언)으로 응수했다.

유방: "너와 나는 같이 회왕에게 명을 받고 의형제(義兄弟)를 맺었으니, 나의 아버지가 바로 그대의 아버지다. 반드시 삶아 죽이려거든 나에게 국 한 그릇이나 나누어주면 좋겠다!"

항우는 결국 이성을 잃었고, 유방은 이 대담한 언행으로 병사들의 사기를 올렸다.


항우는 다시 유방에게 1:1 대결을 제안했지만 유방은 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항우의 10가지 죄목을 열거하며 맹비난했다.

유방: (태도를 바꿔 단상 위에서) "첫째, 팽성(彭城)에서의 약속을 위반하고 나를 협박하여 파촉(巴蜀)으로 쫓아낸 죄! 둘째, 주군인 초 회왕(義帝)이 임명한 송의(宋義)를 살해한 죄! 셋째, 함양(咸陽)에서 대학살을 저지르고 아방궁을 불살라 진나라 보물을 착복한 죄! ... (중략) ... 아홉째, 의제(義帝)를 강남에서 살해하고 그 시체를 장강에 처넣은 죄!"

유방은 마지막으로

유방: "너 같은 작자는 내가 나설 것도 없이 죄를 지어 군역을 하는 천한 자들만 보내도 충분하다!"

고 항우를 모욕했다. 

격분한 항우는 쇠뇌를 쏘아 유방의 가슴을 맞혔다. 

유방은 쓰러질 뻔했지만, 부하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기지를 발휘하여

유방: "저 도둑놈이 내 발가락을 맞히네!"

라고 외쳤다. (이는 훗날 촉한의 건국자 유비(劉備)가 천둥소리에 임기응변한 것과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해하 대전(垓下大戰)과 최후의 승리

기원전 203년, 유방은 장량과 진평의 조언에 따라 홍구(鴻溝: 현재 하남성 카이펑 시 근처) 이서를 한(漢)나라 땅으로, 그 이동(以東)을 초(楚)나라 땅으로 하는 협약을 맺고, 항우는 포로로 잡고 있던 유태공(劉太公)과 여치(呂雉)를 유방에게 돌려보냈다.

항우가 협약을 믿고 군대를 해산하고 동쪽으로 돌아가자, 장량과 진평은 유방을 만류했다.

장량과 진평: "지금이야말로 항우를 끝장낼 수 있는 최후의 기회입니다!"

유방은 곧바로 군사를 돌려 항우를 기습했다. 

유방은 팽월, 한신과 합류하기로 했으나, 이들이 나타나지 않아, 고릉(固陵)에서 항우에게 다시 패배했다. 

유방은 장량의 조언에 따라 팽월과 한신의 봉지(封地 공신에게 내리는 영토)를 넓혀주기로 약속하고, 이들을 다시 회유하여, 마침내 해하(垓下: 안후이성 쑤이시 링비 현 근처)에서 연합군을 집결시켰다.


기원전 202년, 한신(韓信: 30만 대군)과 팽월, 영포 등의 연합군(총 60만 명 이상 추정)이 항우의 최후를 장식하기 위해 진격했다.


사면초가(四面楚歌)

해하 전투에서 패배한 항우는, 밤중에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楚歌)가 들려오는 심리전을 겪게 되었다.

한나라 군대가 고향 노래를 부르자, 남아있던 초군들은 고향이 이미 함락된 줄 알고 동요하며 뿔뿔이 흩어졌고. 항우는 결국 오강(烏江)에서 자결함으로써, 격렬했던 초한전쟁은 종결되었다.


유방은 해하 전투 승리 후, 서쪽으로 가던 도중 또다시 한신(韓信)의 진영으로 달려가 그의 군권(軍權)을 빼앗았고, 한신을 제왕에서 초왕(楚王)으로 옮긴 뒤, 회음후(淮陰侯)로 강등시켜 수도 장안(長安)으로 끌고 왔다. 

유방은 한신이 용병술은 뛰어나지만, 군대를 사병(私兵)처럼 사적으로 통제하지 못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항우의 장례식에서 유방은 울었다고 전해진다. (전승/논쟁)

이는 단순한 위선이 아니라, 자신의 최대 라이벌이자 시대를 함께 했던 영웅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었을 것이다.


황제 즉위와 통치 체제 확립

기원전 202년, 유방은 신하들의 끈질긴 추대 끝에, 마침내 황제(皇帝)의 자리에 올랐다.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고황제(高皇帝)이며, 일반적으로 한고조(漢高祖)라 불린다.

그는 개국공신들을 모아놓고 연회를 열어, 자신이 항우를 이기고 천하를 얻은 이유를 논했다.


유방: "여러분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려. 군막 안에서 계책을 짜 천 리 밖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나는 장량만 못하다.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달래며 식량 운송로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내가 소하만 못하다. 백만 대군을 통솔하여 싸워 승리하는 것은 내가 한신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인걸이지만, 내가 이들을 기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항우는 범증 한 사람도 제대로 쓰지 못했으니, 이것이 그가 나에게 사로잡힌 까닭이다."

이 유명한 말은 유방의 뛰어난 용인술과 리더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고사(故事)로 알려져 있다. (반면 항우는 혼자 힘으로 천하를 얻으려 했기 때문에(독지, 독력) 패망했다는 평가도 있다)


유방은 수도를 낙양(洛陽)으로 정하려 했으나, 유경(劉敬)과 장량(張良)의 조언에 따라 방어에 유리하고 국토 경영에 적합한 장안(長安)을 수도로 정했다.


정치 시스템: 군국제(郡國制)

유방은 진나라의 강력한 중앙집권제인 군현제(郡縣制)와 주나라의 봉건제(封建制)를 혼합한 군국제(郡國制)를 실시했다. 

중앙 직할령(군현제 지역)은 황제가 직접 다스리고, 주변 지역에는 자신의 공신이나 유씨 일족을 왕(王)으로 봉하여 통치하게 했다. 

이는 한나라 초기 혼란을 수습하고 광활한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방편이었지만, 훗날 제후 왕들이 반란을 일으킬 씨앗이 되기도 했다.

유방은 또한 황로사상(黃老思想)을 바탕으로 하는 무위지치(無爲之治: 백성을 피로하게 하는 정책을 세우지 않음)를 추구하며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정책을 펼쳤다. 

세금 부담을 크게 줄여 조세는 수확량의 15분의 1로 경감했으며, 요역(勞役: 징발되는 노역)을 싫어하여 면제권을 자주 부여했다. 

특히 농민 출신이었던 그는 노비가 된 사람들에게 해방령을 내려 자유를 주었다.

항우에 의해 파촉으로 보내진 일은 '좌측으로 옮긴다'는 뜻에서 '좌천(左遷)'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었다.


공신 숙청

천하가 통일된 후, 유방에게 가장 큰 위협은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는 이성왕(異姓王: 유씨가 아닌 성을 가진 왕)들이었다. 

유방은 통일 제국의 기반을 확고히 하고 권신들의 횡포를 막기 위해, 기나긴 숙청의 칼날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유방의 공신 숙청은 후대에 '토사구팽(兎死狗烹: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이라는 고사성어의 대표적인 사례로 남았다.

기원전 201년, 유방은 한신이 모반을 꾀한다는 고발을 듣고, 진평의 계책을 이용해 한신을 사로잡아 회음후(淮陰侯)로 강등했다.


기원전 196년, 조나라 상국 진희(秦豨)가 모반을 일으키자 유방이 친정(親征)을 나선 틈을 타, 여후(呂后)가 승상 소하(蕭何)를 통해 한신(韓信)을 장락궁(長樂宮)으로 꾀어내 참살했다. 

유방은 한신의 죽음을 듣고 겉으로는 슬퍼했으나, 속으로는 위협을 제거했다는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다.


같은 해, 양왕(梁王) 팽월(彭越) 역시 모반을 꾀했다는 밀고로, 여후에게 체포되어 촉(蜀)으로 유배되었으나, 여후는 팽월이 변두리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도중에 팽월을 주살하고, 그 시체를 소금에 절여 그릇에 담아 다른 제후들에게 보냈다.


이 끔찍한 경고를 받은 회남왕 영포(英布: 경포)는 다음 차례는 자신임을 확신하고 기원전 195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유방의 최후의 전쟁

유방은 이미 노쇠하고 건강이 좋지 않았으나, 영포의 반란 소식에 심신이 꺾여 처음엔 태자 유영(劉盈)에게 사령관을 맡기려 했으나, 여후의 만류와 신하들의 반대로 결국 자신이 친정(親征)에 나섰다.


영포는 유방을 비웃었다.

영포: "황상(유방)은 늙고 병들어서 싸움을 싫어하니 반드시 올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회음후(한신)와 팽월(彭越)은 이미 죽었으니, 나머지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

유방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영포의 정예군과 회추(會甀: 기 지역 서쪽)에서 대결했다. 

유방은 항우의 군대와 같이 정예하게 진을 친 영포의 군대를 보고 그가 미웠다. 

유방은 노여워하며 직접 무장한 채 최전선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며 싸웠고, 결국 영포의 반란군을 박살 내고 영포를 처형시켰다.

유방은 이 전투에서 눈 먼 화살(유시, 流矢)에 맞아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수도로 귀환하는 길에, 유방은 치료를 거부하고, 고향 패현(沛縣)을 들렀다.


대풍가(大風歌)

유방은 고향 사람들을 불러 연회를 열고,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축(筑: 악기)을 타며 대풍가(大風歌)를 직접 지어 불렀다.


유방: (노래하며) 

大風起兮雲飛揚 (대풍기혜운비양) 큰바람 일어나자 구름이 흩날리누나. 

威加海內兮歸故鄉 (위가해내혜귀고향) 온 세상에 위세 떨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나니, 

安得猛士兮守四方 (안득맹사혜수사방) 어떻게 하면 용맹한 군사(맹사)를 얻어 사방을 지킬련지.


유방은 이 노래를 아이들에게 따라 부르게 하다가, 강개(慷慨)한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 

이 노래는 유방이 천하를 얻은 현재의 영광과, 미래에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하는 불안감을 동시에 보여주는 명작이다.

유방은 고향 패현 사람들에게 대대로 납세와 부역을 면제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탕목읍, 湯沐邑). 

이는 그가 평생 혐오했던 요역(勞役)으로부터 고향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싶었던 마음의 발로였다.


가족 드라마: 태자 교체 실패와 홍곡가(鴻鵠歌)

유방은 말년에 화살 부상으로 병세가 깊어지자, 정실 황후 여후(呂后)의 소생이자 온순한 성격의 적장자 유영(劉盈: 혜제) 대신, 자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척부인(戚夫人: 유방의 첩)의 소생인 서자 유여의(劉如意: 조은왕)를 태자로 세우려 했다. 

유방은 유여의가 자신과 가장 닮았다고 여겼다.


유방은 개인적인 사심과 더불어, 아들 유영의 모친인 여후(呂后)에 대한 정치적 견제를 위해 이 일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는 적장자를 폐하고 서자를 세우는 하극상으로, 국가의 율법과 당대 사회의 상식을 훼손하는 행위였기에, 재상 주창(周昌)과 유학자 숙손통(叔孫通) 등 모든 대신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근심하던 여후(呂后)는 장량(張良)에게 조언을 구했고, 장량은 당시 은사(隱士)였던 상산사호(商山四皓)를 태자 유영의 보좌로 모시게 했다. 

유방은 자신이 불러도 오지 않던 명사들이 유영을 따르는 것을 보고, 태자 폐위를 결국 포기했다.


유방은 척부인을 위로하며 홍곡가(鴻鵠歌: 큰고니의 노래)를 불렀다.

유방: (노래하며) 

鴻鵠高飛 一擧千里 (홍곡고비 일거천리) 큰고니 한 번에 1,000리를 나는데, 

羽翮已就 橫絶四海 (우핵이취 횡절사해) 날개가 이미 자라 온 천지를 나는구나. 

雖有矰繳 尙安所施 (수유증격 상안소시) 화살이 있다 한들 어찌 쏘리오.


이는 태자 유영이 상산사호의 보좌를 받아 (날개가 자라) 이미 확고한 입지를 다져, 자신이 아무리 총애하는 아들 유여의를 세우려 해도 (화살이 있어도) 어찌할 수 없다는 자신의 무력함을 한탄한 노래였다.


유방은 유여의를 조왕(趙王)에 봉하고, 여후가 그 모자를 핍박할 것을 염려하여, 폐태자를 반대했던 충신 주창(周昌)을 조나라 재상에 임명하여 유여의를 보호하게 했다.


유방의 죽음과 여후의 보복

기원전 195년 4월, 영포의 난 진압 중 입은 화살 부상으로 인해, 유방은 장안(長安) 미앙궁(未央宮)에서 52세(만 나이)의 나이로 사망했다.

유방은 죽기 직전, 후임 승상으로 조참(曹參), 그 후임으로 왕릉(王陵)과 진평(陳平), 군사는 주발(周勃)을 지목하며, 천하를 이끌 재목들을 모두 염두에 두고 있었다. 


여후가 다음 후임을 묻자, 유방은 짜증을 내며

유방: "그 뒤는 당신이 알 바 아니오!"

라고 대화를 끊었다.


유방이 붕어하자, 여후(呂后)는 4일 동안 그의 죽음을 숨기고, 공신들을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하려 했다. 

하지만 역상(酈商: 역이기의 동생)의 경고를 듣고, 계획을 취소한 후, 유방의 죽음을 알리고 장례를 치렀다.

여후는 유방 생전에 태자 자리를 위협했던 척부인(戚夫人)에 대한 원한을 갚기 시작했다. 

척부인에게 머리를 자르는 곤형(髡刑)을 가하고, 감금시켜 쌀 찧는 형벌을 내렸다. 

여후는 주창이 방패막이가 된 조왕 유여의(劉如意)까지 소환하여, 유영(혜제)이 자리를 비운 사이 독살했다.


그리고 척부인에게 역사에 길이 남을 잔혹한 복수를 감행했다. 

척부인의 산 채로 수족(手足)을 자르고, 눈을 뽑고, 벙어리로 만들고, 돼지우리에 던져 넣어 '인체(人彘: 사람 돼지)'라고 불렀다.

인체(人彘)에 쓰인 '돼지 체(彘)' 자는 이 사건의 끔찍함 때문에 후대 사람들이 사용을 꺼려 사장되었다고 한다.

여후는 자신의 아들인 혜제(惠帝) 유영(劉盈)에게까지 인체를 보여주었는데. 참혹한 광경을 본 혜제는 충격에 빠져

혜제: "사람이 되어서 이럴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의 아들인 저 또한 무슨 염치로 천하를 다스리겠습니까."

라고 말한 후, 정치에 손을 떼고 술독에 빠져 살다가 23세의 젊은 나이에 붕어(崩御: 사망)하고 말았다.

혜제는 유방의 가족 중에서도 드물게 배다른 형제들을 지극히 아꼈던 인물이었기에, 이 사건이 그에게 준 충격은 컸다.


유방의 영향과 후대 평가

유방이 건국한 한(漢)나라는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을 합쳐 400년 이상 중국 대륙을 통치하며, 중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한족(漢族)'이라는 말의 기원이 유방이 세운 한나라에서 유래했을 정도로, 유방은 중국을 하나의 중국으로 만든 실질적인 계기를 제시한 인물이다.


유방은 평민 출신 황제라는 점에서 기존의 귀족 지배층과 구별되었고, 마오쩌둥(毛澤東)은 유방을 "봉건 황제 중에서 가장 대단한 사람"이라고 평가했으며, 그 이유를 '사람을 쓰는 것이 적합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유방은 우수한 군사적 경험, 고단수의 정치력, 그리고 인재를 적재적소에 쓸 줄 아는 탁월한 용인술을 갖춘 군주였다. 

그는 자신의 단점(오만하고 무례함)을 인정하고 시정할 줄 알았으며, 항우가 인색하여 부하들의 불만을 샀던 것과 달리, 유방은 공신들에게 보상을 아끼지 않아 충성을 얻었다.

또한, 유방의 후손들은 문경지치(文景之治)를 이룬 문제(文帝) 유항(劉恒)과 경제(景帝) 유계(劉啓), 그리고 중원 제일의 정복군주 무제(武帝) 유철(劉徹)을 배출하여, 유씨 황실은 중국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한고조 유방의 석상. 왼쪽은 소하, 오른쪽은 한신


리더의 그릇과 인간의 이중성

한고조 유방의 이야기는 난세(亂世)를 이끄는 리더의 '그릇'이 지닌 역설적인 힘을 보여준다. 

유방은 개인적으로는 술주정뱅이, 오만하고 무례하며, 심지어 자신의 자녀를 버리려 할 만큼 비정한 면모를 지닌, 도덕적으로 완벽하지 못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군주적 관점에서 그는 '다른 사람의 힘을 다 쓰게 하는 사람' (항우는 스스로의 힘을 다 쓴 사람) 이었다. 

유방은 자신의 부족함을 숨기지 않고, 소하, 장량, 한신이라는 당대 최고의 인재들을 과감히 중용하고, 그들의 책략을 전폭적으로 신뢰했다. 

이는 인재를 알아보고, 그들에게 권한을 주고, 공에 대해 보상을 아끼지 않는 분배의 정치력에서 비롯되었다.

역사는 종종 가장 도덕적인 인물이 아닌, 시대의 흐름을 읽고 대의(大義)를 실현할 줄 아는 현실적인 인물을 선택한다. 

유방의 성공은 인류가 오랜 기간 동안 갈망해 온 '평화'와 '안정'을 제공하겠다는 명확한 목표와, 이를 위해 자신의 자존심이나 사적인 감정(유학자 혐오, 옹치에 대한 복수심 등)까지 내려놓는 유연성에서 나왔다.

유방의 삶과 치세는, 인간의 도덕적 결함이 뛰어난 정치적 역량 및 용인술과 결합될 때, 역사적으로 거대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남긴다. 

동시에 그의 사후, 그의 배우자인 여후(呂后)가 척부인에게 가한 잔혹한 복수(인체)는 아무리 큰 업적을 이룬 군주라도, 가정 내의 질서와 후계 구도를 사사로운 감정으로 훼손할 경우, 그 폐해가 한 나라 전체의 안정(혜제의 죽음)과 인간성 상실(여후의 폭정)로 이어진다는 준엄한 교훈을 일깨워준다.

궁극적으로 유방의 성공은, 한 나라를 건국한 개인이 아니라, 난세 속에서 안정을 갈망하던 민중의 염원(약법삼장)과, 이 염원을 현실화할 수 있었던 당대 인재들의 집단 지성이 빚어낸 합작품이었다.


이 글은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전한(前漢) 초기 사료에 근거해 한고조 유방(劉邦)의 생애를 따라가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대사·심리·장면을 소설적으로 각색한 재구성본입니다. 

진(秦) 말 난세, 패현 건달 시절, 여치(呂雉)와의 혼인, 패공으로의 성장, 함양 입성 후 약법삼장, 홍문연, 한중으로의 ‘좌천’, 한신·장량·소하의 기용, 초한전쟁, 해하대전, 즉위와 공신 숙청, 여후(呂后)의 잔혹한 후일담까지 실제 연대는 유지했으나, 백사참(白蛇斬)·용꿈·72반점처럼 ‘군주 신성화’를 위한 장식 요소는 (전승)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 전투 규모·사상자 수·대사는 사료마다 차이가 있으므로 학술적 인용 시 원문 대조를 권합니다.


This narrative is a dramatized retelling of Liu Bang’s rise from a low-born, swaggering local leader in Pei to founding emperor of the Han. 

Based on Sima Qian’s Shiji and later Han histories, it keeps the core chronology—Qin decline, Pei uprising, Xianyang entry, Hongmen Banquet, exile to Hanzhong, Chu–Han war, final unification—but marks legendary parts such as the white-snake episode, prophetic dreams, and overdrawn casualty numbers as later embellishments. 

It also stresses his real strengths: recruiting Xiao He, Zhang Liang, Han Xin, rewarding merit, and outlasting Xiang Yu through flexibility and politics. 

It notes his flaws in family loyalty but balances them with statecraft, vision.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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