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슈, 시코쿠, 규슈 세 주요 섬으로 둘러싸인 내해(瀬戸内海) 바람이 섬 골짜기를 타고 내려왔다.
오미시마(大三島, 오늘날 에히메현) 미야우라 포구의 등불이 흔들렸다.
대산기신사(大山祇神社·Ōyamazumi Shrine, 유서깊은 신사)의 경내에 북소리가 울렸다.
젊은 여자가 붉은 겉옷을 갑옷 위에 여몄다(전승).
“나는 미시마 명신(三島明神 신들을 일컫는 이름)의 츠루히메다.”
밤바다의 물결이, 그 목소리를 칼끝처럼 반사했다(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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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미시마의 오야마즈미 신사 두 번째 토리이 / Second torii at Ōyamazumi Shrine, Ōmishima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위키미디어 공용 |
츠루히메(온나무샤(여성무사), 전승)는 신사의 대축(大祝·오호리, 우지신 제사장 가문)인 오호리 야스모치(大祝安用·Ōhōri Yasumochi, 신사 대궁사)의 딸로 태어났다고 전한다(전승).
아명은 전하지 않는다.
대신 “남자아이보다 강골, 활쏘기·창술이 빠르다”는 문장만이 남아 있다(전승).
형제 중 장남 안샤(安舎), 차남 안보(安房)가 전장을 맡고, 아버지는 신역을 지키는 관습이었다.
그녀의 훈련은 마당에서 시작해 배 위에서 완성되었다고들 말한다.
바람 읽기, 물살 가늠, 노 젓는 속도에 맞춘 장창(長槍)과 도래식 대낫·오나기나타(大薙刀 일본의 전통 장병기)의 리듬(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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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우치 요시타카가 오야마즈미 신사에 봉납한 일본도 / Tachi donated by Ōuchi Yoshitaka to Ōyamazumi Jinja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위키미디어 공용 |
시대는 센고쿠(戦国 1467년~1615년).
서쪽의 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가 세력을 넓혔고, 이요(에히메현)의 고노 씨(河野氏)와 그 일문, 그리고 내해의 무라카미 수군(村上水軍·Murakami Kaizoku)은 해로를 틀어쥔 채 맞섰다.
아이를 달래는 자장가에도 “물살이 바뀐다”는 말이 끼어드는 시절이었다.
섬에서 전쟁은 먼 땅의 얘기가 아니라 조류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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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라카미 수군 무장 카게치카 / Murakami Kagechika (naval leader)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1541년(덴분10년), 오우치 측의 수군 장수 시라이 후사타네(白井房胤)가 접근했다(전승).
장차 신관을 이을 차남 안보가 진대(陣代·현장 총괄)로 나서고, 섬의 배들이 수면 아래 암초의 결을 따라 선회했다.
첫 물러섬 뒤, 츠루히메가 붉은 겉옷을 갑옷 위로 걸치고 쾌속정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전승).
“유흥객이 배를 댔다” 착각한 적을 향해, 그녀는 화로(焙烙)와 화살불을 던지고, 적장 오하라 나카쓰카사노조 타카코토(小原中務丞隆言)를 사로잡거나 베었다는 서술까지 붙는다(전승).
그날 밤, 포구는 파도 소리 대신 쇳소리로 담장을 메웠다(전승).
그녀에겐 곁을 지킨 사람이 있었다.
오치 야스나리(越智安成, 같은 집안의 무장·연인).
전투가 끝나면 둘은 포구 장부에 배 배치와 물때를 함께 기록했고, 그 일을 하며 가까워졌다(전승).
섬에서는 혼례 날짜도 바다 사정에 맞췄다.
약속은 닻줄 같아서 조금만 느슨해도 배가 떠밀렸다.
츠루히메의 약속도 그랬다(전승).
내해의 전쟁은 두 번, 세 번 반복됐다.
16세 츠루히메가 앞장서 오우치 측 수군을 물리쳤다는 기록이 고향의 전승집과 대축가 문서 단편에 걸쳐 흩어져 있다(전승).
그녀는 “이름을 먼저 밝히고 칼을 든다”고 했다.
신의 사자이자 섬의 딸이라는 신분 선언.
그 말은 아군에겐 북소리, 적군에겐 조짐이었다(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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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우치(大内) 씨 가문 문장 / Mon (crest) of the Ōuchi clan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SVG). 위키미디어 공용 |
1543년(덴분12년), 오우치는 다시 왔다.
이번엔 스오의 도 류호(陶隆房·오우치가문의 중신. 훗날 모리 다카후사/스에 하루카타로도 불림)가 수군을 이끌었다고 전한다(전승).
한낮의 조류가 서쪽으로 기울 때, 츠루히메의 오른팔이자 연인 야스나리가 전사했다(전승).
그 소식이 대전(大殿)으로 들어오자, 장남 안샤는 강화를 논했고, 섬사람들은 포구의 등불을 껐다.
그러나 츠루히메는 잔존 배를 모아 야습을 걸었다고 한다.
섬 앞 내해에 줄지어 정박한 적 함대를 향해, 밤물살의 그림자를 타고(전승).
그날 새벽, 바다 안쪽으로 밀려 들어왔던 적의 닻들이 육지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흔들렸다고 전한다(전승).
승리는 돌아왔다.
하지만 사랑은 돌아오지 않았다.
츠루히메는 삼도천(죽은 영혼들이 건너는 냇물)을 가르는 노래를 올리고, 신사에 참거(參籠)한 뒤, 포구에서 배를 띄웠다(전승).
“내 사랑은 미시마의 얕은 조개껍질 같아. 이름만 남아 나를 괴롭힌다.”
전해지는 사세구(辭世句 세상과 이별하며 남기는 짧은 시구)가 짧다(전승).
그렇게 그녀는 물 위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나이 열여덟(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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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츠루히메와 야스나리 동상 / Statue of Tsuruhime and Yasunari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위키미디어 공용 |
그러나 다른 설도 있다.
‘자결이 아니라, 고향 집으로 돌아가 기도와 금기를 지키는 삶을 살았다’는 판본(전승).
‘고향의 별궁(別宮) 계통의 대축(大祝·Ōhōri) 안충/야스다다(安忠)에게 시집갔다는 전승도 있다(전승).
한 사람의 죽음이 셋으로 갈라진다. 퇴장과 잔존, 결혼(논쟁).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은, 그녀의 마지막 말뿐이다.
그녀의 이름을 키운 것은 바다만이 아니었다.
갑옷 한 벌, 푸른 끈으로 장식된 곤이토 스소 스가케오도시 도마루(紺糸裾素懸威胴丸 일본의 문화재)가 대산기신사의 보물관에 남아 있다.
가슴이 도드라지고 허리가 잘록한 형태 때문에, “여성 전용 갑옷”이라는 해석이 붙었다(전승).
“츠루히메가 입었던 갑옷”이라는 설명 문장도 따라다닌다(전승).
그러나 이는 근대 이후의 해석이라는 반론이 있다.
여성 전용을 단정할 근거가 부족하며, 형태는 무로마치 말기 보병전의 기동성을 위한 설계일 수 있다는 의견(논쟁).
즉, 갑옷의 성별과 소유의 주체는 아직 결론이 아니다(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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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야마즈미 신사 전시 갑옷(서수 장식) / Armor on display at Ōyamazumi Jinja (No. 402)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1915 서적 도판). 위키미디어 공용 |
그녀의 이야기는 문학이 키웠다.
1960년대에 간행된 소설(작가:미시마 야스노리)이 “세토 내해의 잔 다르크”라는 별명을 전국에 퍼뜨렸고(전승),
지역 축제는 츠루히메라는 이름을 얼굴로 삼았다.
가을밤, 미야우라 항에 북이 울리면 아이들은 츠루히메 행렬을 보고 자란다.
배에 횃불이 켜지고, 붉은 겉옷과 창이 불빛을 잡는다.
전승은 그렇게 생활로 남는다.
이름의 힘은 섬의 구조와 닮았다.
오우치-고노-무라카미의 갈등선, 바람골과 내만의 소용돌이, 포구의 일·밤 교대.
섬의 사소한 규칙들이 해전의 성패를 가른다.
츠루히메를 둘러싼 문장들도 그랬다.
“누가 명령했고, 누가 밤바다를 택했는가.”
“남장을 했는가, 붉은 겉옷을 덧입었는가.”
작은 문장 차이가 기억의 물길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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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옷을 입은 츠루히메(전시 패널) / Painting panel of Tsuruhime in armour Japan Experience 기사 내 이미지 |
여기서 잠시 사람으로 돌아가 보자.
츠루히메의 하루는 전투만이 아니었다(전승).
새벽엔 쉬다케(海菜 해조류)를 말리고, 낮엔 선수(船首 배의 앞부분) 자리 바꾸기 훈련을 시켰다고 한다.
아이들이 활시위를 당길 때, 그녀는 “먼저 바람”이라고 말했다. 화살이 아니라 바람(전승).
저녁엔 포구 장부의 물때를 맞춰 썼다.
이 기록 습관은 섬사람 누구에게나 있었다.
그녀의 연애담은 언제나 포구에서 끝난다.
밤에 배를 대기 좋은 홈통, 닻을 내리면 조류가 천천히 몸을 감싸는 곳.
그 자리에 야스나리가 섰고, 바다는 그 이름 위에 소금을 올렸다(전승).
영웅담은 사람을 상징으로 만들지만, 섬의 사랑은 사람을 생활로 만든다.
냄비, 노, 젓갈 항아리, 활의 심줄. 그 사이로 두 사람의 시간이 흘렀다(전승).
츠루히메를 전쟁의 아이콘으로만 읽으면, 놓치는 것이 있다.
섬의 여자는 항상 일했다.
노 젓고, 고기를 손질하고, 장부를 썼다.
그러다 창을 들었다.
그 순간만이 기록되고, 나머지는 집안일로 사라졌다.
츠루히메의 ‘창 든 순간’은 살아남았고, ‘노 젓는 시간’은 바다로 스며들었다(전승).
이름을 외치고 전장으로 달려나간 16세의 소녀를, 우리는 어떻게 기록해야 할까.
“섬을 지킨 영웅”으로만?
아니면 “전쟁이 소녀를 전장으로 밀어 넣은 구조”로도?
츠루히메의 이야기는 둘 다를 부른다.
전승은 서사를, 논쟁은 정확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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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관광 공식 페이지의 축제 스틸 city.imabari.ehime.jp |
오늘, 오미시마엔 츠루히메 축제가 열린다.
무대에 북이 울리고, 아이들이 갑옷을 입고 행렬을 지난다.
신사 앞 고목은 무로마치보다 오래 살았고, 보물관 유리장 안의 갑옷은 오늘도 사람을 끌어들인다.
관광 지도엔 츠루히메 공원이 찍혀 있고, 포구엔 작은 동상이 서 있다.
현대의 기억 정치가 가장 온화하게 작동하는 풍경이다. 지역 축제, 사진, 학예회같은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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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츠루히메 동상(미야우라 포구) / Tsuruhime statue at Miyaura Port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위키미디어 공용 |
그러나 질문은 남는다.
그녀는 정말 그렇게 싸웠는가(논쟁).
그 갑옷은 정말 그녀의 것인가(논쟁).
사랑은 정말 바다에서 끝났는가(논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문장 옆에 괄호를 두는 일이다. (전승)과 (논쟁).
그리고 그 괄호 틈새로, 섬의 바람과 북소리를 그대로 통과시키는 일이다.
츠루히메가 남긴 가치는, 내겐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먼저 바람을 본다.”
적보다 바람, 칼보다 물살, 영웅담보다 생활.
그 순서를 잃지 않는 태도.
그 태도가 있었기에, 그녀의 이름은 전설을 지나 현대의 축제까지 건너왔다.
그녀의 마지막을 하나만 고르는 대신, 나는 세 가지를 모두 적어 둔다.
바다에서 사라진 츠루히메(전승).
집으로 돌아와 기도에 묻힌 츠루히메(전승).
가문에 들어가 ‘대축의 아내’가 된 츠루히메(전승).
이 셋은 서로를 지우지 않는다.
섬의 바람처럼, 동시에 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사 마당에 선 한 아이가 묻는다.
“왜 이름을 외쳐요?”
대답은 짧다.
“내겐 그것이 자부심이거든.”
츠루히메가 그날 밤 외친 것은 자신의 이름이기도, 섬의 이름이기도 했다(전승).
이야기를 닫으며, 나는 이렇게 메모한다.
영웅은 역사에 남고, 전승은 생활에 남는다.
츠루히메가 택한 것은 둘 사이의 좁은 다리였다.
붉은 겉옷, 갑옷 한 벌, 빠른 배.
그것들이 섬의 풍경과 어울릴 때, 비로소 이야기는 사람이 된다.
이 글은 신뢰 가능한 사료·논문·공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은 (전승), 해석 갈림은 (논쟁), 어원은 (어원)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표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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