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왕, 누마 폼필리우스의 신성한 통치
폭풍 후의 고요
-기원전 716년, 로마 왕국 외곽, 쿠레스-
사색의 숲과 사비니의 현자
밤의 장막이 로마(Roma, 로물루스가 건국한 신흥 도시국가)의 초기 불안정함을 감추고 있었다.
폭력적인 건국자 로물루스(Romulus, 로마의 초대 왕이자 전쟁의 신 마르스의 아들로 추앙받는 인물)가 갑자기 사라진 후, 로마는 일 년간의 인테르레그눔(Interregnum, 왕이 없는 섭정 기간)에 빠져 있었다.
원로원(Senate, 초기 로마의 최고 자문 기관) 의원들이 5일씩 번갈아 가며 왕의 권한을 행사했지만, 로마인(Romani)과 사비니족(Sabines, 로마에 통합된 고대 이탈리아 부족) 파벌 간의 갈등은 도시를 분열시켰다.
한편, 티베르 강(Tiber, 로마를 가로지르는 강) 동쪽, 사비니족의 도시 쿠레스(Cures, 누마가 거주하던 사비니족의 도시) 외곽.
인적이 드문 신성한 숲 속, 잔잔한 샘물 소리가 들려왔다.
누마 폼필리우스 (Numa Pompilius, 폼포니우스의 아들로, 로마 건국일인 기원전 753년 4월 21일에 태어난 사비니족 귀족)는 조약돌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사치를 멀리하고, 절제와 경건함으로 일생을 보낸 인물이었다.
그의 나이 약 마흔(40).
이미 머리에는 사색의 흔적인 흰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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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만들어진 누마 폼필리우스 데나리온(은으로 만든 작은돈) |
그의 곁에는 타티아(Tatia, 로물루스의 공동 통치자였던 티투스 타티우스의 외동딸)를 잃은 슬픔이 깊이 배어 있었다.
타티아와의 13년간의 결혼 생활 후, 누마는 세속적인 삶을 버리고 이 시골로 은둔했었다.
어둠 속에서 흐릿한 형체가 나타났다.
물의 님프(Nymph, 요정) 에게리아 (Egeria, 누마에게 종교와 법률을 가르쳤다고 전해지는 신화 속 존재)였다.
그녀는 달빛을 받은 샘물처럼 영롱했다.
"평화의 길을 걷는 자여, 로마의 그림자가 그대의 고요함을 찾았소."
에게리아가 속삭였다.
누마는 고개를 들었으나 놀라지 않았다.
그는 오랫동안 밤마다 그녀와 상담하며 도시의 신성한 의례(sacred rites)를 제정하는 방법에 대해 배웠다고 주장했다. (전승)
"내가 추구하는 것은 법(ius)과 경건(pietas)이오. 로물루스(Romulus)의 도시(City)는 전쟁과 약탈로 세워진 곳이오. 그들은 군대를 이끌 왕을 원하지, 사제(Priest)를 원하지 않소."
누마가 말했다.
"로마는 이제 전쟁의 기술뿐만 아니라, 평화의 기술도 배워야 하오. 신들께서 그대에게 전쟁의 문을 닫고, 영혼의 문을 열어줄 사명을 주었소."
에게리아가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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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마에게 지시하는 님프(에게리아) |
사비니 현자의 왕위 계승
-기원전 715년, 로마-
사절단의 방문과 왕위 거절
쿠레스의 작은 사비니 마을에 로마 원로원 의원 두 명을 포함한 사절단이 도착했다.
그들은 누마의 아버지 폼포니우스(Pomponius)와 사비니족 친척들, 그리고 누마의 사위가 될 인물(초대 폰티펙스 막시무스 Numa Marcius)의 아버지 마르쿠스(Marcus)의 설득에 힘입어 이곳에 왔다.
로마 사절단 대표인 루키우스 발레리우스(Lucius Valerius, 가상의 인물)가 무릎을 꿇었다.
"누마 폼필리우스 님, 원로원은 폐하를 로마의 왕으로 선출했습니다. 로마인과 사비니인 모두 폐하의 지혜와 경건함이 도시를 통합할 것이라 믿습니다."
누마는 단호했다.
"나는 전쟁을 모르는 자요. 나는 군사적 영광을 싫어하오. 로마는 아직 호전적인 (warlike) 도시요. 나 같은 평화주의자는 그들의 피에 대한 갈증을 채워줄 수 없소."
"그것이 바로 저희가 폐하를 원하는 이유입니다!"
발레리우스가 소리쳤다.
"로물루스가 전쟁으로 기틀을 닦았다면, 이제는 평화로 그 기틀을 굳건히 할 때입니다. 전쟁과 평화, 두 기술을 모두 갖춰야 로마가 강성해질 수 있습니다." (이는 후대에 리비우스(Livy, 로마 역사가)가 로물루스와 누마의 상보적 관계를 강조하는 핵심 논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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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제국의 역사가 리비우스 |
아우구리(Augury)와 신의 승인
누마는 왕위를 수락하기 위한 마지막 조건을 제시했다.
"나는 로마인과 사비니족, 그리고 하늘의 승인을 받아야만 왕위에 오르겠소."
그들은 로마의 아우구르(Augurs, 새의 비행을 관찰하여 신의 뜻을 해석하는 사제)를 통해 유피테르(Jupiter, 로마 신들의 왕)의 조짐을 살피는 의식(divination)을 수행했다.
이는 당시 로마에서 필수적이고 중요한 절차였다.
로마의 신성한 언덕 위. 아우구르는 하늘을 응시하며 신탁을 구했다.
마침내, 거대한 독수리가 날아와 그들 머리 위를 선회하며 길조(favorable omens)를 보였다.
"길조입니다! 신들께서 폐하의 통치를 승인하셨습니다!" 아우구르가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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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선형 지팡이 리투우스를 들고 있는 아우구르 |
로마와 사비니 시민들은 열광적으로 누마를 환영했다.
누마는 마침내 왕권을 상징하는 휘장들(tokens of power)을 받아들이고, 로마의 두 번째 왕으로 즉위했다 (기원전 715년).
평화의 선언과 경호대 해산
누마의 첫 번째 행보는 상징적이었다.
그는 로물루스가 항상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300명의 개인 경호대인 켈레스(Celeres, "신속한 자들"이라는 뜻)를 해산시켰다.
근위대장 마르쿠스(Marcus, 가상의 인물)가 충격에 빠진 얼굴로 물었다.
"폐하! 로물루스께서도 항상 경호대를 두셨습니다. 이는 왕의 안전을 위한 필수 요소입니다!"
누마는 엄숙하게 답했다.
"나는 검(Sword)이 아닌 경건함(Pietas)으로 통치할 것이오. 폭력에 의존하는 자들을 내 곁에 두는 것은, 곧 내가 폭력을 두려워한다는 증거요. 짐은 신의 가호와 백성의 믿음으로 보호받을 것이오." (이 행동은 후대에 누마의 겸손함이나 평화 정책, 혹은 충성심에 대한 의문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자기 방어적 행위 등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신성한 로마의 기틀
폰티펙스와 베스타의 도입
누마는 호전적인 초기 로마인들의 관심을 전쟁에서 내치(內治)와 종교적 의례(religious rituals)로 돌리는 데 주력했다.
"우리가 강해지기 위해서는, 내부에서부터 질서를 잡아야 한다. 우리가 신들을 두려워하면, 인간의 갈등은 줄어들 것이다."
1. 폰티펙스 막시무스 (Pontifex Maximus): 누마는 로마의 모든 공적, 사적인 종교 의례를 감독하는 최고 사제직인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 최고 사제) 직위를 창설하고, 자신의 사위인 누마 마르키우스(Numa Marcius)를 초대 폰티펙스로 임명했다. 그는 마르키우스에게 자신의 모든 신성한 의례, 책, 인장을 맡겼다. 이는 왕이 전쟁으로 자리를 비울 때에도 종교적 기능을 수행할 상주 사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2. 베스타 처녀 사제 (Vestal Virgins): 누마는 알바 롱가(Alba Longa, 로마 건국 신화와 관련된 라티움의 고대 도시)에서 베스타(Vesta, 가정, 가족, 화로의 여신) 숭배와 함께 처녀 사제 제도를 로마로 들여왔다.
누마의 집무실.
그는 베스타 처녀 사제 후보자 두 명을 앞에 두고 있었다. (초기에는 두 명이었으나, 후대에 세르비우스 툴리우스(Servius Tullius, 로마의 6대 왕)에 의해 네 명, 이후 여섯 명으로 늘어났다)
"베스타의 성화(Sacred Fire)는 로마의 심장이자 안전을 상징한다. 이 불이 꺼지는 날은 로마가 위험에 처하는 날이다."
베스타 처녀 사제들은 30년 동안 봉사하며 순결(chastity)을 지켜야 했다.
대신 그들은 당시 로마 여성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특권(법적 독립성, 재산 소유, 유언장 작성 권리)을 누렸다.
"이 법률은 여성들에게 독립적인 권리를 부여합니다. 이는 남성 사회의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 아닙니까?"
원로원 의원들이 우려했다.
"여성의 순결과 봉사는 로마의 안전과 직결되며, 이는 신성한 행위요. 신의 종에게 세속적인 법을 따르도록 강요할 수는 없소."
누마가 답했다.
베스타 처녀 사제가 순결을 잃는 것은 도시의 생존을 위협하는 죄로 간주되어, 그녀는 피를 흘리지 않고 산 채로 매장(buried alive)되는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
반면, 그들에게 주어진 높은 사회적 지위와 특권은 고대 로마 여성들에게 허용된 가장 큰 자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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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1세기(기원전 43~39년) 아우레우스, vestalis라고 쓰여져 있는 착석한 베스타 신녀 |
3. 플라멘(Flamines)과 살리이(Salii): 누마는 유피테르(Jupiter), 마르스(Mars), 그리고 신격화된 로물루스(Romulus)인 퀴리누스(Quirinus)를 섬기는 세 명의 주요 플라멘(고위 사제)을 임명했다.
특히 유피테르의 고위 사제인 플라멘 디알리스(Flamen Dialis)는 렉스 사크로룸 (Rex Sacrorum, 제의를 위한 왕) 다음 가는 고위직이었다. 하지만 이 직위는 수많은 금기 사항과 제약(restrictions)에 시달렸다.
플라멘 디알리스는 금속을 만지거나, 말을 타거나, 시체를 볼 수 없었다.
도시 밖에서 밤을 지새울 수도 없었으며, 매듭이 있는 옷을 입는 것도 금지되었다.
이 규정들의 목적은 그를 문자 그대로 '유피테르의 끊임없는 사제'(Jovi adsiduum sacerdotem)로 만들어, 사제직 의무에만 전념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엄격한 제한은 인도유럽어족 문화에서 유래한 고대의 청정 개념을 반영한다.)
누마는 또한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전해지는 신성한 청동 방패 앙킬레(Ancile)를 보존하기 위해, 살리이(Salii, 마르스 신의 사제단)를 만들어 11개의 완벽한 복제품(replicas)을 제작하게 했다.
이는 원본을 훔쳐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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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신 마르스의 청동 방패 앙킬레 |
평화의 문, 야누스 신전
누마의 평화적 통치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건축물은 야누스 신전(Temple of Janus, 평화와 전쟁의 상징)이었다.
이 신전은 로마 시의 길인 아르길레툼(Argiletum, 로마 포룸 기슭의 도로) 기슭에 세워졌다.
야누스 신은 두 얼굴을 가진 신으로 묘사되었는데, 한 얼굴은 동쪽을, 다른 한 얼굴은 서쪽을 향해 있었다.
이 신전의 문은 로마가 전쟁 중일 때는 열리고, 모든 이웃 국가와 평화를 확보했을 때만 닫혔다.
누마는 타티아를 잃고 은둔했던 시기에 전쟁과 폭력의 공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전쟁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전쟁을 선언하고 종결하는 절차를 신성하게 만들고자 했다.
페티알레스 (Fetiales, 외교 및 전쟁 선포를 담당하는 사제단)가 창설된 이유였다.
전쟁 선포 절차는 누마의 후계자인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때 법으로 확립되었지만, 누마의 평화에 대한 염원에서 비롯되었다.
누마의 재위 기간 43년 내내, 야누스 신전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이는 로마 역사상 유일한 완벽한 평화의 시기를 상징한다.
| 로마 시대의 야누스 상. 바티칸 박물관 |
이 문은 누마의 재위 후 6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두 번만 닫혔다고 기록된다.
한 번은 1차 포에니 전쟁 후 기원전 241년 티투스 만리우스(Titus Manlius) 집정관 시절, 그리고 두 번째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가 악티움 해전(Actium, 기원전 31년)에서 승리하고 평화를 달성했을 때였다.
아우구스투스가 세 번 더 닫았다는 기록이 있지만, 누마 왕의 평화는 후대 통치자들의 주요 모범 사례(exemplum)가 되었다.
인간적 갈등과 사회 통합
에게리아와의 밀회와 스캔들
누마는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아내 타티아를 잃었고,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신화적인 님프 에게리아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전승)
원로원 회의장.
보수적인 사제들은 누마의 이 신화적 주장을 공공연히 비판했다.
폰티펙스 중 한 명인 폼포니우스(Pomponius, 가상의 인물)가 말했다.
"폐하, 신과의 직접적인 소통이라니요? 이는 폐하께서 미신(superstition)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통치하는 것이 아닙니까?"
누마는 차분하게 반박했다.
"로마인들은 전쟁과 약탈에 익숙해져 있소. 나는 그들의 호전적인 성향을 법과 경건함, 그리고 신에 대한 경외심으로 대체하고자 하오. 에게리아는 나에게 전쟁 대신 정의(justice)와 평화(peace)를 가르쳤소."
플루타르코스(Plutarch, 그리스 역사가)는 실제로 누마가 자신의 통치에 신성한 매력(divine allure)을 부여하고, 초기 로마인들의 호전성을 순화시키기 위해 이러한 미신을 활용했다고 시사한다.
이는 누마가 가진 최대의 정치적 무기이자, 보수파에게는 비판의 빌미가 되는 스캔들이었다.
그는 신성한 지혜를 독점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 피를 흘리지 않고도 로마의 문명을 발전시키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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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루타르코스 |
사회 개혁과 갈등 해소
로마는 건국 초기 로마인과 사비니족 간의 잠재적 갈등을 안고 있었다.
누마는 이 분열을 해소하기 위해 혁신적인 사회 개혁을 단행했다.
1. 길드(Guilds) 제도 도입: 누마는 로마 시민들을 민족적 구분(로마인 대 사비니족)이 아닌, 직업과 무역에 따른 직능별 길드 (corporations based on trade and profession)로 나누어 통합했다.
"자네는 금세공인이 아닌가? 그대는 목수이고. 그대들은 더 이상 '사비니족 금세공인'이나 '로마인 목수'가 아니다. 그대들은 '로마의 길드'에 속한 형제들이며, 각자의 의례와 협의회(assemblies)를 갖는다."
누마는 말했다.
이 개혁은 당시 로마 사회의 가장 큰 문제인 '민족적 갈등' (ethnic rivalry)을 '경제적 협력'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구조로 대체함으로써 해결하려 한 것이다.
2. 토지 분배와 테르미누스 숭배: 누마는 로마 주변 영토를 파기(pagi, 마을)로 나누고, 빈곤한 시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며 농업(agriculture)을 장려했다.
"굶주린 자는 폭력적인 충동을 억제하기 어렵소. 쟁기를 잡는 손은 칼을 잡는 손보다 인격을 함양(fostering character)한다."
그는 또한 테르미누스 (Terminus, 경계의 신) 숭배를 도입했다.
그는 각자의 토지 경계에 돌을 세우고 이를 테르미누스 신에게 봉헌하도록 명령했다.
"누구든지 경계석(boundary stone)을 파괴하거나 옮기는 자는 신에게 제물로 바쳐질 것이오. 이는 정의의 증인이며 평화의 수호자요."
오늘날 '종착역', '최후의 지점'을 뜻하는 터미널(Terminal) 이라는 단어는 이 경계의 신 테르미누스(Terminus) 숭배에서 유래했다.
특히 매년 2월 23일에 열리는 경계 축제는 테르미날리아 (Terminalia)라고 불렸는데, 이는 종교적 한 해의 끝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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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계의신 테르미누스 |
달력 개혁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영향
로물루스가 만든 초기 로마 달력(Roman calendar)은 10개월(304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겨울은 무시되는 기간이었다.
농업 기반 사회였기에 계절과 동떨어진 이 달력은 혼란을 야기했다.
누마는 1년을 12개월(355일)로 나누고, 달의 주기에 맞추어 1월(Ianuarius)과 2월(Februarius)을 추가했다.
"전쟁의 신 마르스의 달인 3월(Martius)이 첫 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평화와 시작의 신인 야누스 (Janus)의 달, 1월이 한 해를 열어야 한다." (플루타르코스는 누마가 군사적 영향력보다 시민적 영향력에 우선권을 주기 위해 1월을 첫 달로 삼았다고 설명한다).
누마의 달력은 여전히 태양년(Solar year)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았고 (1년에 약 10일 부족), 윤달(intercalary month, Mercedonius)을 불규칙적으로 삽입해야 하는 문제를 남겼다.
이 윤달 삽입을 결정하는 권한은 후대에 폰티펙스 막시무스에게 주어졌는데, 이는 종종 정치적 이해관계 (political considerations)에 따라 악용되어, 원로원 의원들이 자신의 정적의 임기를 연장하거나 단축하기 위해 달력의 길이를 멋대로 조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혼란은 결국 기원전 46년,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후대의 로마 독재관)가 이집트 달력의 영향을 받아 율리우스력(Julian Calendar)을 도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율리우스 카이사르 자신도 젊은 시절 누마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플라멘 디알리스 직위를 맡은 적이 있었다.
영원한 평화의 좌절과 유산
금지된 지혜의 서적
누마는 자신의 신성한 가르침(주로 에게리아와 무사 여신들에게서 받은)이 담긴 '신성한 서적' (sacred books)을 저술했다.
그는 이 책들이 유물로 보존되기보다 국가 사제들의 '살아있는 기억' 속에 보존되기를 바라며, 자신의 무덤에 함께 매장해 달라고 요청했다.
(기원전 181년, 야니쿨룸 언덕 근처 - 먼훗날)
누마가 사망한 지 약 500년 후.
농부 L. 페틸리우스(L. Petilius)의 밭에서 굴착 작업 중 누마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두 개의 돌 궤짝이 발견되었다.
하나는 비어 있었고, 다른 하나에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된 두 묶음, 총 14권의 책이 담겨 있었다.
7권은 폰티펙스 법에 관한 것이었고, 나머지 7권은 철학 (philosophy)에 관한 것이었다.
발견자인 페틸리우스가 이 책들을 프라이토르(Praetor, 당시 로마의 고위 법무관) Q. 페틸리우스에게 가져갔다.
프라이토르는 책을 검토한 후 경악했다.
프라이토르 Q. 페틸리우스: "이 책들은 공개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로마의 종교적 관습과 위험하게 상충 (dangerous to religion)된다! 특히 그리스어로 된 철학서적은 우리의 믿음을 근본부터 흔들 것이다!"
원로원은 이 책들이 대중에게 공개하기에 부적절하다고 판단하여 즉시 코미티움(Comitium, 로마 포룸의 집회 장소)에서 불태우도록 명령했다.
이 조치는 당시 로마에서 번성하던 그리스 철학(특히 피타고라스 학파)의 사상이 보수적인 로마의 종교적 신념 및 국가 통제 시스템 (특히 점술 augury 및 예언 prodigies에 관한 믿음)과 충돌할 것을 두려워한 정치적 반동 (Catonic reaction)으로 해석된다.
누마가 남긴 지혜는 로마의 질서를 세웠지만, 그의 급진적인 철학적 사유는 후대의 정치 권력에 의해 금지되었다는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이다.
사투르날리아의 기억
누마는 로마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인 노예(slaves)에 대해서도 배려를 베풀었다.
"아들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결혼했다면, 아버지는 그 아들을 노예로 팔 수 없다." (이 법은 당시 아버지에게 절대적인 권한(patria potestas)이 있던 로마 사회에서는 이례적인 제한이었다.)
그는 또한 사투르날리아 (Saturnalia, 농신 사투르누스를 기리는 축제) 기간 동안 노예들이 주인과 함께 잔치를 즐기는 것을 허용했다.
누마: "이 축제는 사투르누스 시대 (Saturnian age)를 기억하기 위함이오. 그 시절에는 노예도 주인도 없었고, 모두가 친척이자 동등하게 여겨졌다고 하오."
오늘날, 12월에 열리는 크리스마스 시즌의 축제와 연휴 분위기는 이 고대 로마의 사투르날리아 축제 풍습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일부 학자들은 본다 (현대 학계에서는 사투르날리아가 이후 서양 축제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지만, 이 자료에서는 노예와 주인 간의 평등 사상에 초점을 맞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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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투안 칼레(프랑스의 화가)의 사투르날리아 |
43년간의 잠
기원전 672년.
누마 폼필리우스는 43년간의 평화롭고 경건한 통치(reign of peace and piety)를 마치고, 약 81세의 나이로 노환(old age)으로 자연사했다.
그는 화장 대신 매장을 요청했고, 야니쿨룸 언덕(Janiculum, 로마 시가지 서쪽에 위치한 언덕) 근처에 돌 관에 묻혔다.
그의 죽음은 로마 시민뿐만 아니라, 로마와 우호적인 이웃 국가들에게도 큰 슬픔을 안겼다.
평화의 왕과 전쟁의 유산
다시 열리는 문
누마가 눈을 감자마자, 로마의 분위기는 급변했다.
그의 뒤를 이은 세 번째 왕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Tullus Hostilius, 호전적인 성격으로 로마를 전쟁의 길로 이끈 왕)는 로물루스처럼 전쟁의 영광을 추구했다.
아르길레툼 기슭의 야누스 신전.
툴루스 호스틸리우스가 직접 거대한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은 43년 만에, 닫힌 후 두 번째로 열렸다.
쇠로 단단히 봉인되었던 문(iron-bound gates)은 무거운 소리를 내며 열렸고, 그 즉시 이탈리아 전역은 유혈 사태로 가득 찼다 (filled with the blood of the slain).
"평화의 아름다운 건축물은 교육이라는 시멘트가 부족하여 오래 서 있지 못했다." (이는 플루타르코스의 비판을 반영한다).
플루타르코스는 누마의 통치에 두 가지 주요 과실 이 있다고 지적했다.
1. 청소년 교육 시스템 부재: 누마는 폰티펙스 막시무스나 베스타 사제단 같은 종교 제도는 완벽하게 정비했으나, 스파르타의 리쿠르고스(Lycurgus)처럼 국가 주도의 체계적인 청소년 훈련 및 교육(rearing of boys and training of youths) 시스템을 만들지 않았다. 그는 아이들의 양육을 전적으로 아버지의 희망에 맡겼는데, 이는 통치 철학을 다음 세대에 '강력하고 침투적인 염료'처럼 주입하는 데 실패했음을 의미하며, 그 결과 그의 평화는 그가 죽자마자 사라졌다.
2. 부의 불평등 방치: 누마는 군사적 약탈을 금지했으나, 재산 취득(acquisition of wealth) 에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았다. 그 결과, 부의 불평등이 커지는 것을 막지 못했으며, 이는 후대에 로마를 괴롭힌 크고 심각한 악덕의 씨앗과 근원이 되었다.
후대의 재평가
누마의 유산은 그의 과실에도 불구하고, 로마 문명 전반에 걸쳐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다.
1. 경건함의 모범 (pius Numa): 공화정 말기와 초기 제정 시대, 누마는 '평화와 경건의 왕'으로 재조명되었다. 키케로(Cicero)는 누마가 법과 종교를 통해 로마의 혼합정체(mixed constitution) 발전에 기여하고 평화를 유지했음을 강조했다.
2. 아우구스투스의 롤모델: 특히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Augustus, 로마 제정의 창시자)는 누마를 중요한 모범 사례 (exemplum)로 삼았다. 아우구스투스는 스스로 '경건한 폰티펙스 막시무스(pius pontifex maximus)'로서의 유산을 확립하고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를 영속시키고자 했기 때문에, 누마의 평화와 경건함은 더욱 큰 가치를 지녔다.
3. 법률가 누마: 6세기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 I)는 누마를 로물루스와 함께 로마 국가의 창시자로 회상하며, 누마가 "법률을 통해 로마를 조직하고 발전시켰다"고 기록했다.
4. 형상 없는 신앙: 누마는 신을 인간이나 짐승의 형태로 표현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로마 건국 후 170년간 로마는 신전에 신의 형상이나 조각상을 두지 않았다. 이는 그의 영적이고 순수한 신앙관을 보여주며, 후대 기독교 철학자(클레멘스 알렉산드리누스)조차 누마가 모세 율법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누마 폼필리우스의 통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 로마 문명이 폭력적 탄생(로물루스)을 넘어 어떻게 내적인 질서와 도덕적 기반을 다졌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로마는 전쟁의 왕(로물루스)이 사라진 후, 평화의 왕(누마)을 선택했다.
이는 인류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누마는 검과 창 대신, 종교, 법률, 사회 제도 라는 보이지 않는 무기로 도시를 다스렸다.
그의 가장 큰 승리는 적을 물리친 전쟁이 아니라, 43년간 야누스 신전의 문을 닫아 내부의 호전적인 야만성을 극복한 평화 그 자체였다.
하지만 플루타르코스의 비판처럼, 아무리 숭고한 통치 철학이라도 다음 세대의 '교육' 을 통해 이식되지 않는다면 오래 지속될 수 없다.
또한 '정의롭지 못한 부의 축적' 에 대한 규제가 없다면, 평화로운 사회 질서는 언젠가 내부의 갈등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단순히 폭력을 멈추는 것을 넘어, 법과 제도를 통해 모두가 납득할 만한 공동의 질서 를 만들고, 그 질서를 영속시키기 위해 다음 세대에 지혜 를 물려주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한다.
누마의 평화가 잠시뿐이었다 할지라도, 그가 로마의 영혼 깊숙이 새겨 넣은 경건함(Pietas)과 정의(Justice)의 씨앗은 결국 수백 년 후 로마를 세계 제국으로 이끄는 정신적 기초가 되었다.
그것이야말로 전쟁을 모르는 왕이 남긴 가장 강력한 유산이었다.
본 글은 주류 연구 및 공식 자료를 우선으로 서사를 구성했습니다.
확인 가능한 사실을 중심으로 하되, 불확실하거나 가설적인 요소는 본문 안에서 [논쟁]/ [전승]으로 즉시 표기했습니다.
인물 내면이나 대화 등 극적인 장면은 최소 창작으로 사실의 흐름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만 사용되었습니다.
연대, 지명, 혈연 등 이견이 큰 대목은 보수적으로 기술하고 대표적인 견해를 병기했습니다.
오탈자나 사실 오류 제보, 추가 자료를 추천해 주시면 환영합니다.
The story of Numa Pompilius, the second king of Rome, reveals the peaceful and religious foundation upon which Rome was built after the violent reign of Romulus.
Numa, a Sabine noble, rejected military glory and instead sought to establish order and peace in Rome through divine laws and rituals.
He introduced significant religious reforms, including the creation of the Pontifex Maximus office and the Vestal Virgins, which ensured that religion played a central role in Roman life.
Numa's reign brought 43 years of peace, symbolized by the closure of the Temple of Janus.
However, his peaceful rule eventually faltered after his death, as Rome's military focus returned under his successor, Tullus Hostilius.
Despite his political shortcomings, Numa's legacy as a ruler of peace and piety deeply influenced Roman govern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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