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설(蘭雪), 스물일곱 송이 붉은 연꽃
인물 소개
• 허초희(許楚姬) (후일 허난설헌, 蘭雪軒): (1563~1589) 조선 최고의 천재 여류시인. 시대와 불화하며 불행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으나, 주체적인 자의식을 가졌던 인물.
• 허엽(許曄): (초당, 草堂) 허초희의 아버지. 학식과 덕망이 높았으며, 자녀들을 차별 없이 가르친 개방적인 인물. 동인의 영수.
• 허봉(許篈): (하곡, 荷谷) 허초희의 둘째 오빠. 12살 차이로, 초희의 재능을 인정하고 후원한 정신적 지주.
• 허균(許筠): (교산, 蛟山) 허초희의 남동생. 6살 차이로, 홍길동전의 저자이자, 누이의 시집을 간행하여 세상에 알린 인물.
• 김성립(金誠立): (안동 김씨, 安東金氏) 허초희의 남편. 명문가 출신이나, 아내의 재주에 열등감을 느끼고 외도했으며, 가정에 소홀했던 인물.
• 이달(李達): (손곡, 蓀谷) 허봉의 친구이자 허초희, 허균 남매의 스승. 서얼 출신으로 신분 차별의 아픔을 겪었으며, 허초희의 저항 정신에 영향을 줌.
• 시어머니 송씨 부인: 김성립의 어머니. 시문을 짓는 며느리가 집안에 ‘망조’를 들게 한다며 구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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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초의 향기, 얼음꽃을 피우다
1. 초당의 자유로운 가풍 (강릉 초당)
1570년, 강릉(江릉) 초당(草堂)의 집안은 조선 팔도 어디에서도 보기 드문 자유로운 학문의 분위기로 가득했다.
초당 허엽(許曄)은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지냈으며 동인(東人)의 영수가 될 정도로 명망이 높은 대학자였으나, 딸이라고 글공부에서 소외시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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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난설헌 표준영정 |
어린 초희(楚姬, 허난설헌의 본명)는 오빠들(허성, 허봉)과 남동생(허균)과 함께 천자문(千字文)부터 시작해 시(詩)를 익혔다.
당시 조선 사회는 여성이 글을 읽고 시를 쓰는 행위를 ‘덕성을 그르치는 행위’로 보았으나, 허엽의 집안은 달랐다.
이는 아버지 허엽의 개방적인 교육철학, 즉 양성평등(兩性平等)을 몸소 실천한 결과였다.
여덟 살의 초희는 이미 신동(神童)으로 불렸다.
“아이고, 우리 초희가 벌써 이리 빼어난 문장을 지었단 말인가!”
허엽(아버지, 초당 허엽)은 연거푸 감탄하며 딸을 바라보았다.
초희가 지은 작품은 바로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이었다. (광한전은 신선 세계의 궁궐, 백옥루는 그 누각. 상량문은 건물의 대들보를 올리며 짓는 축원문).
“보배로운 일산이 공중에 매달려 있으니 구름수레는 색의 경계를 벗어났고, 은빛 누각이 해에 비치니 노을 기둥은 티끌세상이라는 단지 속을 벗어났다.”
초희의 상상력은 지상의 티끌 세상을 벗어나 신선 세계(仙界)로 향하고 있었다.
이 시문은 후일 정조(正祖) 임금조차 감탄했을 만큼 명문이었다.
초희의 문학적 기반을 다져준 것은 오빠 허봉(許篈)이었다.
허봉(둘째 오빠)은 12살 어린 누이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당대 최고의 시인 중 한 명인 손곡 이달(李達)을 스승으로 모셨다. (손곡 이달은 양반 아버지와 기생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서얼(庶孽)로,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신분제(身分制)의 벽에 막혀 좌절한 인물).
이달의 문하에서 초희는 단순한 서정시를 넘어선 저항시와 사회 비판 의식을 배웠다.
이달은 송시(宋詩) 대신 당대 최신 흐름인 당시(唐詩)를 가르쳤는데, 이는 훗날 초희의 시가 중국 문단에서 각광받는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다.
초희는 스승의 삶을 보며 신분제(身分制)라는 사회적 차별에 대해 깊이 비판적 인식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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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난설헌의 생가. 강릉 초당 |
2. 규방을 닫는 시대의 흐름
초희가 성장하던 조선 중기 선조 연간은 가부장적 유교 질서가 급격히 강화되던 시기였다.
고려 시대까지 이어져 온 처가살이(장가) 풍속이 폐지되고, 여성이 남편 집에 들어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시집살이(親迎)가 도입되었다.
이러한 제도 변화는 세종(世宗) 때 시작되어 허초희가 결혼할 무렵인 선조(宣祖) 대에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여성의 삶을 뿌리째 흔들었다.
또한 재가 금지(再嫁禁止)(남편 잃은 여성의 재혼 금지)와 서얼 차별제 등은 여성과 서얼 계층에게는 국가 폭력과 다름없는 정책이었다.
조선 조정은 사회 기강 확립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상은 보수파의 비위를 맞추고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여성 억압을 도구로 사용했다.
이로 인해 남편이 죽으면 따라 죽으라는 ‘은장도 열풍’이 불기도 했고, 딸을 시집보내며 혼수(婚需)까지 마련해야 하는 시집살이가 달가울 리 없었다.
초희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가문의 중시하는 풍조에 따라 혼인이 결정되었다.
갇힌 난새와 비단 휘장 속의 고독
3. 원치 않은 혼인과 외로운 규방
1577년, 15세의 초희는 안동 김씨(安東金氏) 가문의 김성립(金誠立)과 혼인했다.
김성립의 집안은 5대조가 문과 급제한 명문가였지만, 초희는 이 혼인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썰과 논란: 초희는 남편 될 김성립을 몰래 훔쳐보기 위해 남장(男裝)을 하고 예비 시댁을 찾아갔다는 민간 설화가 전해진다.)
김성립은 아내 허초희보다 한 살 위였으나, 그녀의 천재성에 미치지 못했다.
초희의 아버지, 오빠, 동생 모두 천재성을 보였기에, 초희의 눈에 김성립은 "평범해 보이는" 남편이었을 것이다.
“내 어찌 하필이면 수많은 남자 중에 김성립(金誠立)을 만났을까.”
그녀가 평생 세 가지 한탄(三恨) 중 세 번째로 꼽은 이 탄식은, 결혼 생활의 불행을 상징했다.
결혼 후 허초희는 친영제(親迎制)의 직격탄을 맞으며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여자가 시문(詩文)이나 짓고 남편을 돌보지 않으니, 이 집안에 망조(亡兆)가 들었다!”
시어머니(송씨 부인)는 시(詩)를 쓰는 며느리에게 병적일 정도로 끔찍하게 굴며, 모든 탓을 며느리에게 돌렸다.
남편 김성립(金誠立)은 아내의 뛰어난 재주에 열등감과 질투심을 느꼈고, 가정에 소홀한 채 술과 기생질(路柳墻花)에 빠져 밖으로 겉돌았다.
그는 과거 급제에 번번이 낙방하여 처가의 명성에 비해 초시(初試) 8등급에 그치기도 했다. (다만 후일 김성립은 28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정9품 홍문관 저작(弘文館 著作)에 오르는데, 이는 당시 평균보다 빠른 나이였다. 허균(동생)은 천재였기에, 그의 기준에서 김성립을 "재주와 외모가 뛰어나지 못한" 인물로 혹평한 측면도 있다.)
4. 사랑과 질투, 적극적인 애정관
초희의 고독은 깊어갔지만, 그녀는 조선시대 여성이 감히 표현할 수 없었던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애정관을 시(詩)에 담아냈다.
(논란:김성립이 기생집에 있다는 헛소문이 퍼지자) 초희는 술과 안주를 보내며 시를 써 보냈다.
“낭군자시무심자(郎君自是無心者, 낭군께선 이렇듯 다른 마음 없으신데), 동접하인종반간(同接何人縱半間, 같이 공부하는 이는 어찌 된 사람이길레 이간질을 시키는가).”
이 글은 남편의 친구들을 향한 경고이자, 아내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문장이었다.
또 다른 시 「채련곡(採蓮曲)」에는 남녀의 솔직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물 저쪽에 낭군이 보이자 연밥 따 던지고서 (逢郞隔水投蓮子), 혹시 누가 봤을까봐 반나절을 부끄러워했네 (或被人知半日羞).”
이 시는 연못가 처녀가 마음에 둔 낭군에게 연밥을 던지며 사랑을 표현하는 내용이다.
여인은 연밥을 던지며 사랑을 고백하고, 그 사랑의 감정은 순간적인 욕망이 아니라 깊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반나절을 부끄러워했네'라는 구절에서, 그녀는 겉으로 드러내기 힘든 감정을 담담하게 풀어낸다.
이는 당시 여성으로서 억압받고, 자신을 억제해야 했던 현실 속에서, 자신만의 사랑을 발견하고 드러내려는 그녀의 소박하지만 강렬한 의지를 보여준다.
물에 던져진 연밥처럼, 그녀의 마음도 그가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희망 속에서 떠올랐다.
(당시 유자(儒者)들의 비판) 이수광(李睟光, 동시대 인물)은 초희의 시가 ‘너무 방탕하여’ 난설헌집에 실리지 못했다고 평했으며, 남녀의 애정을 표현한 시들을 음란하거나 방탕하다고 비난했다.
조선 유교 사회에서 여성이 성적 결정권이나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칠거지악(七去之惡)으로 통제되는 금기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희는 자신의 질투심마저 시에 솔직하게 담았다.
먼 길 떠나는 남편에게 비단을 주며, “아깝지 않지만 남의 옷은 만들지 말아줘. (不惜作君袴, 莫作他人裳)”
“길가에 버려져도 아깝지 않지만, 새 연인에게만은 달아주지 마세요. (不惜棄道上, 莫結新人帶)”
이는 유자(儒者)들에게 금기시되던 질투를 넘어선 주체적 자아의 표현이었다.
스물일곱 송이 부용꽃, 비운의 절규
5. 연이은 불행과 삼한(三恨)의 탄식
결혼 생활 내내 김성립(남편)은 아내에게 정을 주지 않고, 초희는 뼈저린 외로움과 시어머니의 모진 시집살이를 견뎌야 했다.
그녀의 유일한 위안은 시를 쓰는 행위였다.
불행은 결혼 후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1580년, 아버지 허엽(許曄)이 경상도 관찰사 직에서 해임되어 상주(尙州)에서 객사(客死)했다.
이후 허초희는 아들과 딸을 연이어 잃었다.
딸이 죽은 후 2년 뒤인 1582년, 아들 김희윤(金喜胤)마저 잃었다.
게다가 임신 중이던 뱃속의 아이까지 유산되는 참담한 일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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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당 허엽 영정. |
사랑하는 자녀들의 무덤은 광주(廣州) 땅 선산(先山)에 나란히 세워졌다.
초희는 자식을 잃은 슬픔을 「곡자(哭子)」라는 시에 담아냈다.
曲子(곡자)
去年喪愛女 (거년상애녀) 지난해에는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今年喪愛子 (금년상애자) 올해에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네.
哀哀廣陵土 (애애광릉토) 슬프디 슬픈 광릉 땅이여 (광주 땅 안동 김씨 선산)
雙墳相對起 (쌍분상대기) 두 무덤이 나란히 마주보고 서 있구나.
浪吟黃臺詞 (랑음황대사) 부질없이 황대사(黃臺詞) 읊조리면서
血泣悲呑聲 (혈읍비탄성) 애끓는 피눈물에 목이 메인다.
슬픔은 단순히 눈물로 흘러내리며 끝나지 않았다.
그 아픔 속에는 인생의 무상함과 함께, 이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사랑의 부재가 더해졌다.
'두 무덤이 나란히 마주보고 서 있구나'라는 문장에서,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고독과 아이들을 잃은 비통함은 마치 끝없는 어둠 속에 갇힌 듯한 느낌을 준다.
'광릉 땅'이란 구절 속에서, 그녀는 자식들의 무덤을 지나며 더 이상 그들을 만날 수 없다는 무서운 현실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이 시에는 흰색(白楊)이 유일한 색깔로 등장하여 죽음의 암울한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뱃속 아이까지 잃을 불길한 예감을 담고 있다.
1588년, 초희가 가장 의지하던 오빠 허봉(許篈)마저 객사(客死)했다.
허봉은 율곡 이이(李珥)를 탄핵했다가 귀양(謫居)을 갔다가 풀려났지만, 방랑하다 금강산 근방에서 요절했다.
이 연이은 불행 속에서 초희의 마음은 무너졌다.
초희는 생전에 세 가지 한탄, 즉 삼한(三恨)을 토로했다.
1. 조선에 태어난 것. (마음껏 뜻을 펼칠 수 없는 작은 땅덩어리).
2. 여성으로 태어난 것. (남성이라면 과거를 보고 관직에 나아가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
3. 남편 김성립과 결혼한 것.
허난설헌의 비극은 개인의 운명뿐 아니라, 여성 억압을 심화시킨 시대적 이데올로기 정책과 국가 폭력의 산물이었다는 분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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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여인의 일반적인 모습들. |
6. 좌절된 유토피아와 죽음의 예언
허초희는 현실의 고통과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글쓰기라는 지적 활동을 선택했고, 현실의 규범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던 삶을 신선 세계(仙界)에 대한 동경(遊仙)으로 표출했다.
그녀의 시집 난설헌집에 실린 213편의 시 중 무려 87편(혹은 128수)이 유선사(遊仙詞, 신선 세계를 노니는 노래)일 정도로, 현실 도피적인 경향이 강했다.
유선사는 현실에서의 결핍과 고통을 신선 세계라는 상상의 공간(판타지)에서 채우고, 억압받던 욕망을 자유롭게 펼치는 '개인 극장'과 같은 성격을 지녔다.
그녀는 스스로를 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謫仙意識)으로 여겼다.
하지만 유선사는 단순한 도피가 아니었다.
시어 통계 분석 결과, 선계의 이미지는 ‘이슬(露)에 젖음(濕)’의 상태로 나타나는데, 이는 유선 행위가 밤이나 새벽에 주로 이루어지며, 해가 뜨면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 덧없음(유한성)을 상징한다.
즉, 그녀의 꿈은 현실의 우위 앞에 무력했으며 ‘좌절된 유토피아’로 끝났다.
1589년 봄, 27세가 되던 해, 허초희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는 시를 남겼다.
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
碧海浸瑤海 (창해는 요해로 스며들고)
靑鸞倚彩鸞 (청란은 채란과 어울리는데)
芙蓉三九朶 (부용꽃 스물 일곱 떨기 늘어져)
紅墮月霜寒 (달밤 찬 서리에 붉게 지네)
‘삼구(三九)’는 27을 의미했다.
부용꽃(芙蓉花)이 서리(霜)를 맞아 붉게 떨어지는 것은, 만개하지 못한 채 요절(夭折)함을 뜻했다.
그녀의 나이 스물일곱, 그해였다.
임종 직전, 허초희는 집안 사람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내가 쓴 모든 시문(詩文)을 빠짐없이 태워(火) 없애다오.”.
그녀는 자신이 평생 쓴 글들이 가부장적 사회에서 어떻게 평가받을지 알고 있었고, 남성 중심의 문학사에 자신의 주체적 자아가 굴절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1589년 3월 19일, 허초희는 한성(漢城) 자택에서 시름 속에 눈을 감았다. 향년 27세.
(논란)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는 병사(病死)했다는 설과, 극심한 고통과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적 긴장 끝에 자살(강물에 몸을 던짐)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후대에 오고 갔다. (1차 사료가 없어 자살설은 추정이며, 극도의 정신적 스트레스가 사인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바다 건너 피어난 난설헌집
7. 허균의 노력과 한류(韓流)의 시초
허초희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문학적 재능을 가장 잘 이해했던 남동생 허균(許筠)은 누이의 시를 불태우지 않았다.
허균은 친정에 흩어져 있던 시와 자신이 외우고 있던 시 200여 편을 모아 『난설헌집(蘭雪軒集)』 초고를 만들었다.
이후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을 거치며, 허균은 명나라 사신 오명제(吳明濟)와 주지번(朱之蕃) 등과 교류하면서 누이의 시고(詩稿)를 전했다.
중국 사신들은 허초희의 시에 탄복했다.
주지번(朱之蕃)은 “티끌 밖에 나부끼고 나부껴 빼어나면서도 화사하지 않고, 부드러우면서도 뼈가 뚜렷하다”라고 극찬하며, 이 시집을 중국으로 가져가 1606년 명나라에서 간행하게 했다.
이로써 허초희는 조선 최초의 한류(韓流) 붐을 일으킨 베스트셀러 작가로 평가받게 되었다.
그녀의 시는 중국 문단에서 널리 퍼졌으며, 1711년에는 일본에서까지 간행되어 애송되었다.
하지만 정작 조선에서는 허균이 광해군(光海君) 때 역모죄로 능지처참(凌遲處斬)을 당하며, 집안이 몰락하고, 『난설헌집』마저 불태워지거나 금서(禁書)가 되었다.
결국 조선의 독자들은 중국과 일본을 거쳐 역수입된 시집을 통해 허난설헌을 만나는 얄궂은 상황이 벌어졌다. (조선에서 재간행된 것은 그녀가 죽은 지 103년 후인 1692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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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난설헌의 동생이자, 홍길동의 저자 허균 |
8. 후대 평가와 논란 (문학사적 위상)
허난설헌은 사후에도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 표절(剽竊) 시비: 이수광(李睟光) 등의 동시대 남성 문인들은 그녀의 일부 시가 고시(古詩)를 훔친 것이라며 표절 의혹을 제기했다. (후대 연구에서는 선대의 시구를 가져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점화(點化)나 도습(蹈襲)이라는 창작 관행으로 이해하며, 표절과는 다르다고 본다.)
• 덕행 비판: 홍대용(洪大容, 담헌)은 청나라 학자에게 “이 부인의 시는 훌륭하지만 그의 덕행은 시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하며, 시가 담긴 주체적 애정관과 현실 비판 의식이 유교적 덕행 규범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재평가와 긍정적 평가)
• 열사(烈士)의 기풍: 유성룡(柳成龍, 서애)은 그녀의 시가 사물을 보고 회포를 일으키며 시절을 근심하고 풍속을 민망히 여김에 “열사(烈士)의 풍모(風貌)가 있다”고 찬탄했다. (열사는 혼란기에 세상을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선비 정신을 가리킨다).
• 사회 비판 의식: 그녀의 시 「빈녀음(貧女吟)」이나 「축성원(築城怨)」 등은 가난한 백성과 소외 계층(군졸, 궁녀, 가난한 여성)의 고통을 노래하며 당시 사회의 빈부 격차와 모순을 고발했다. 이는 그녀가 단순히 개인의 한(恨)에 머물지 않고 시대와 풍속을 근심한 참 선비의 기품을 가졌음을 증명한다.
• 페미니스트적 재조명: 조선 후기 김만중(金萬重, 서포)은 “해동(海東) 규수(閨秀) 중에 오직 난설헌만이 있을 뿐”이라 찬사를 남겼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는 신사임당(현모양처의 전형)과 대비되며, '나로서 존재하려 몸부림쳤던 여성'이자 한국적 여성주의자(페미니스트)의 모델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녀의 삶은 남성 중심 문학사의 은폐에 대한 문제 제기이자,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삶을 추구한 실존적 존재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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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그 선택의 순간]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샤르트르(Jean-Paul Sartre)는 “인생은 B(Birth, 태어남)와 D(Death, 죽음) 사이의 C(Choice, 선택)이다”라고 정의했다.
독일의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역시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내닫는 존재이며, 실존적 존재로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고 선택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허난설헌(許蘭雪軒, 허초희)의 짧고 불행했던 생애는 이 ‘선택(Choice)’의 준엄함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남성 위주의 봉건 질서가 요구하는 덕성(德性)만을 갖춘 여성(신사임당과 같은 현모양처의 전형)의 삶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의 재능과 주체적인 자의식을 통한 자기표현(自己表現)의 삶을 선택했다.
“내가 원하는 삶, 내가 하고자 하는 삶, 나를 증명할 수 있는 실존적인 삶”.
이 선택은 필연적으로 시대와 불화(不和)를 낳았고, 결혼 생활의 파탄, 자녀들의 요절, 고독과 비극이라는 좌절을 가져왔다.
그녀의 삶은 재주가 너무 과하면 복이 없다는 재승박덕(才勝薄德)의 비운으로 점철되었다.
하지만 허난설헌이 만약 시를 쓰지 않고, 억압적인 시대의 요구대로 조용히 덕성만을 갖추려 했다면, 과연 행복했을까?
필자는 "오히려 불행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녀는 시를 씀으로써 현실의 불우함과 고독을 승화(昇華)시킬 수 있었고, 좌절된 꿈을 ‘좌절된 유토피아(Utopia)’라는 형태로 문학에 영원히 새겨 넣었다.
허난설헌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인문학적 교훈은, 시대를 잘못 만나 좌절했을지라도 자신이 원하는 가치와 재능을 포기하지 않는 실존적 선택이, 구속된 삶을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인간다운 증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절규는 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 모든 시대의 억압받는 이들에게 자유로운 영혼의 불꽃처럼 남아있다.
본 글은 허난설헌(허초희)의 삶과 시에 대한 서사적 재구성입니다.
이 글은 주류 연구 및 1차·2차 사료를 우선으로 구성되었으며, 허난설헌의 삶을 사실 기반으로 전개합니다.
불확실하거나 가설적인 요소는 본문에서 [논쟁]/[전승]/[추정]으로 명확히 표기하였고, 극적 장면은 허난설헌의 삶과 정신적 고통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최소한으로 창작되었습니다.
허난설헌의 문학적 의미와 그녀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 서술된 내용입니다.
문학사적 위치와 후대의 평가에 대한 논란 또한 함께 다루었으며, 이 글은 허난설헌의 독립적인 존재감을 재조명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This article presents the life and poetry of Heo Nansulheon (Heo Chohee), a genius female poet from the Joseon Dynasty, whose tragic life was marked by personal struggles and societal limitations.
Born in 1563, she showed exceptional talent from a young age but faced severe repression due to her gender in a patriarchal society.
Despite this, she expressed herself through poetry, often critiquing societal norms and reflecting on personal despair.
Her poems, many written in defiance of conventional expectations for women, were later celebrated by her brother Heo Gyun.
However, her work was largely ignored in Joseon, only gaining recognition posthumously in China and Japan.
Nansulheon’s poetry, rich in existential reflection and critique of societal injustice, has been reevaluated as a testament to her struggle for self-expression and individuality in a restricted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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