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왕 (The Iron King) - 박태준의 배수진
1. 피와 흙의 시대 (1927년 – 1964년)
1960년대 후반,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다.
1965년 당시 한국의 1인당 GDP는 고작 108달러로, 이는 지금의 캄보디아(Cambodia)보다도 못한 수준이었다.
일제 강점기(Japanese colonial rule)와 6.25 전쟁(Korean War)을 겪으며 산업 기반은 황폐화되었고, 남아있는 것은 돌멩이와 사람뿐이었다.
겨우 옷이나 가발 등을 만들어 수출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시절, 국가 재건을 위해 다른 산업에 기초 소재를 제공하는 철강산업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박태준 (朴泰俊, 1927~2011, 포스코 창업자이자 초대 사장)은 1927년 경남 동래군 장안면 (현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의 작은 어촌 임랑리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님(박봉관(부), 김소순(모))은 그가 장차 큰 인물이 되라는 염원에서 ‘태준(泰俊)’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는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学) 기계공학과 진학을 목표로 정진하여 1945년 입학했으나, 광복(8·15 광복)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왔다.
1948년 21세의 나이로 부산의 국방경비대(National Defense Guard)에 입교하며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그는 박정희 (朴正熙, 당시 육군사관학교 1중대장 및 탄도학 교관, 이후 대통령) 대위와 사제지간(師弟之間)으로 만났다.
박태준은 탄도 궤적 계산에 필요한 수학적 지식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고, 이는 박정희 교관의 눈에 띄는 계기가 되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박태준은 선봉에 서서 화천수력발전소(Hwacheon Hydroelectric Power Plant) 방어 임무를 완수하는 등 용감하게 싸웠으며, 이 공로로 무공훈장(Military Merit Medal)을 세 개나 받았다.
이때 그의 가슴에 새겨진 신념이 바로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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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공훈장을 받는 박태준 |
이후 박태준은 청렴결백(淸廉潔白)한 군인으로 유명했다.
부정을 저지른 고춧가루 납품업자를 색출하고, 군내 상관의 압력도 거절하는 강직함을 보였는데, 이러한 성격은 당시 박정희 사령관에게도 알려져 인사참모로 발탁되는 인연으로 이어졌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 일어나자, 박정희는 박태준을 혁명 동지 명단에서 제외했는데, 이는 실패했을 경우 그의 처자(妻子)를 박태준에게 부탁하기 위함이었다.
박정희는 그만큼 박태준을 신뢰했다.
박태준은 예편(豫編) 후 1964년 12월 대한중석 (大韓重石, 현 대구텍, 당시 국가 달러 수입의 주요 창구) 사장에 임명되었다.
당시 대한중석은 적자(赤字) 덩어리였으나, 박태준은 1년 만에 회사를 흑자(黑字)로 돌려세우며 탁월한 경영 능력을 입증했다.
이는 당시 한국에서는 일종의 '경영 혁명'으로 간주되었다.
2. 운명적 특명 (1965년)
1. 청와대 집무실 (1965년 6월)
박정희 대통령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박태준에게 조국 근대화의 중대 계획을 털어놓는 인물)은 이미 대한중석에서 능력을 보여준 박태준을 청와대로 조용히 불렀다.
박정희: (단호한 목소리로) "태준이, 자네를 부른 이유를 짐작하겠나."
박태준: "각하(閣下)의 부르심이니, 조국 근대화에 관한 중대한 일이겠지요."
박정희: "맞아. 이 나라의 빈곤(貧困)을 타파하고 경제 부흥을 이루기 위해선 핵심 기간산업이 필수적이네. 석유는 수입하면 되지만, 철은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들어야 해. 철은 산업의 쌀 (産業의 쌀, 모든 산업의 기초 소재)일세."
박태준: (숨 막히는 긴장 속에서) "종합제철소 말씀이십니까? 그것은 막대한 자본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사업입니다. 현재 우리나라로서는..."
박정희: (말을 자르며) "경부고속도로(京釜高速道路)는 내가 직접 감독할 걸세. 하지만 종합제철(綜合製鐵) 은 자네가 맡아주어야겠네."
박태준: "제가... 제철 경험은 없습니다."
박정희: (책상 위의 지도를 가리키며) "나는 임자(任子)를 잘 알아.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어떤 고통을 당해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기 한 몸 희생할 수 있는 인물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어. 아무 소리 말아! 임자 뒤에는 내가 있어. 소신껏 밀어 붙여봐!"
박태준은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뢰와 격려를 등에 업고, 일생의 사명이라고 느꼈던 국가적 과업을 경건한 마음으로 시작했다.
박태준은 이 특명을 받음으로써 정치 자금을 한 푼도 내지 않고 포항제철 완성에만 집중할 수 있는 정치적 방패를 얻게 되었다.
3. 영일만의 신화, 꿈에서 좌절로 (1967년 – 1969년 초)
1967년 6월, 정부는 조강 연산 300만 톤 규모의 제철소 건설 예정지로 포항 (浦項, 경상북도 동해안의 작은 어촌)을 결정했다.
포항의 모래사장 (1968년)
포항은 황무지 같은 작은 어촌이었다.
1968년 4월 1일,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現 포스코) 창립식이 서울 명동 유네스코회관 3층에서 39명의 임직원(창설요원)들과 함께 조촐하게 거행되었다.
박태준: (창립식에서) "우리는 지금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위대한 첫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단 하나, 제철보국(製鐵報國) , 즉 좋은 철로 나라를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민족의 염원인 종합제철소 건설은 시작부터 난관의 연속이었다.
당시 한국은 자본, 기술, 경험, 심지어 부존 자원마저 없었기 때문에 일관제철소 건설은 현실과 동떨어진 꿈처럼 보였다.
자금 부족과 정국 혼란, 국내 여론의 반대 등으로 이미 다섯 차례에 걸친 제철소 건설 시도는 실패한 상황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자금이었다.
한국 정부는 선진국 컨소시엄인 KISA (Korean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 대한국제 제철 차관단)에 기대를 걸었지만, KISA의 모기업인 코퍼스(KISA의 모기업)의 포이 회장을 비롯해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USAID(미국국제개발처) 등 주요 기관들은 한국의 제철소 건설 타당성을 부인했다.
국제 금융기관들은 한국이 막대한 외채(外債) 부담과 높은 생산비용으로 인해 결국 거대한 부실 기업이 될 것이라 경고했다.
이들은 노동 및 기술집약적인 기계공업 개발을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내에서도 농촌 출신 국회의원들의 80%가 농수산 부문 개발 자금이 종합제철 건설자금으로 전용되는 것에 반대했다.
만약 농업 기반이 흔들리면 자신들의 지지율이 떨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미국 워싱턴 DC (1969년 1월)
박태준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 KISA의 포이 회장을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박태준: (간절한 눈빛으로) "포이 회장님, 한국의 경제 자립을 위해 철강산업은 생명줄과 같습니다. 이 제철소는 단순한 공장이 아니라, 우리 국민의 염원입니다. 한국의 잠재력을 믿어주십시오."
프레드 포이 (Fred Foy, 코퍼스 회장): (단호하게) "박 사장, 사업은 감정이 아닙니다. 분석 결과는 명확합니다. 한국의 종합제철소 건설은 경제성이 의심됩니다. 저는 노동 및 기술집약적 산업 개발을 우선해야 한다는 IBRD의 평가와 맥을 같이합니다. 유감스럽지만, KISA를 통한 자금 조달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박태준은 결국 좌절했다.
자금 조달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제철소 건설은 시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던 그는 귀국길에 잠시 하와이(Hawaii)에 머물며 멍하니 석양을 바라보았다.
4. 배수진의 묘수: 피의 대가 (1969년)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 (1969년 1월 말)
눈앞에는 관광객들과 일본 식당들이 보였다.
당시 하와이는 일본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었다.
그때, 박태준의 머릿속에 불현듯 한 가지 아이디어가 스쳐 지나갔다.
박태준: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듯) "엔화... 돈이 들어올 곳이 있긴 하다. 대일청구권자금 (對日請求權資金, 한일국교정상화 당시 일본이 한국에 제공한 자금)! 아직 남아있는 돈이 있을 것이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협상 당시,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총 3억 달러의 무상 자금을 받기로 합의했었다.
이 돈은 배상금(賠償金)이라는 이름이 아닌 '청구권' 자금이었으며, 일본은 이 돈의 용처(用處)를 농업과 수산 부문에 묶어두었다.
한국이 산업 쪽에 돈을 쓰지 못하게 하여 미래의 경쟁력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박태준은 이 남아있는 약 8천만 달러의 용도를 종합제철 건설 자금으로 전용하는 구상을 떠올린 것이다.
이 돈은 조상들의 피와 땀을 갈아 넣은 목숨값이나 다름없는 보상액이었다.
이것을 국가 경제 기반 사업에 사용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대한 윤리적, 정치적 논란이 뒤따랐다.
일본 도쿄, 외교 교섭 (1969년)
용처(사용 목적)를 돌리기 위해서는 일본 정부의 허락이 필수였다.
박태준은 뛰어난 일본어 실력(일본 유학 경험)과 이미 대한중석 사장 재임 시 구축한 일본 내 네트워크를 총동원하여 끈질긴 설득 작업에 나섰다.
박태준: (이나야마 요시히로(稲山嘉寬), 당시 신일본제철 회장이자 일본 철강 연맹 대표)에게 술을 권하며) "이나야마 회장님. 저희가 제철소를 짓는다고 일본 제철 산업에 위협이 되겠습니까? 지금 한국의 1인당 GDP는 108달러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이걸 해내야 일본에게도 이롭지 않겠습니까?"
이나야마 요시히로: "무슨 말인가, 박 사장?"
박태준: "지금 북한(North Korea)의 1인당 GNP(국민총생산)가 우리보다 높습니다. 한국 경제 발전을 도와 북한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궁극적으로 일본의 안보(安保)에도 좋을 것입니다. 한국의 경제발전은 북한의 도발을 억제할 가장 효과적인 방안입니다."
박태준은 단순히 경제 논리가 아닌, 안보와 지정학적 논리 를 동원해 일본의 정책 결정자들을 설득했다.
그의 냉철한 판단력, 부동의 신념, 정의감 등 인품은 일본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나야마 회장은 박태준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며 기술적 지원에 동의했다.
또한, 일본 측은 미국 주도의 KISA가 붕괴한 상황에서 자신들이 주도권을 잡고, 철강공업설비를 판매할 크고 안정적인 중장기 프로젝트가 필요했기에 자금 전용에 동의했다.
결국 1969년 8월, 제3차 한일 강료 회담에서 대일 청구권 자금 6,370만 달러와 일본수출입은행 차관 5,000만 달러를 포함한 총 1억 2,370만 달러를 제철소 건설에 조달하기로 합의했다.
5. 우향우 정신의 발현: 목숨을 건 약속
자금 문제가 해결되자, 1970년 4월 1일 포항종합제철소 착공식이 거행되었다.
건국 이래 최대의 대역사(大役事)였으며, 건설 역정은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기적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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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항종합제철소 착공식 |
포항제철소 건설 현장 사무소 (1970년)
박태준은 직원들을 모아 놓고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박태준: (결연한 눈빛으로) "지금 우리가 짓는 이 제철소는 조상의 피값, 대일청구권자금(對日請求權資金) 으로 짓는 민족 기업이다. 만약 실패한다면 민족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다. 우리는 실패해서는 안 된다. 실패하면 민족에게 속죄해야 한다!"
그는 목숨을 건 의지를 표명했다.
이것이 바로 우향우 정신 이었다.
박태준: "모든 요원들은 지금 내 말을 명심하라. 공사가 실패한다면, 우리는 현장 사무소에서 나가 우향우 (右向右, 오른쪽으로 돌아서)하여 영일만 (迎日灣, 포항의 바다) 바다에 빠져 죽어 속죄해야 할 것이다!"
이 '우향우 정신' 은 이후 포스코 기업정신(기업문화)의 근간이 되었으며, 목숨을 걸고 어떤 일을 해내려는 비장한 각오와 불굴의 정신력을 상징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박태준은 밤낮으로 건설 현장을 시찰하며 직원들은 물론 협력업체 요원들에게 민족의 숙원 사업에 동참하는 긍지와 사명감을 가질 것을 주문했다.
그는 오직 멸사봉공(滅私奉公) 의 희생정신을 발휘하여 국민의 여망에 보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건설 현장의 완벽주의와 충돌 (1970년대 초)
박태준은 혹독한 완벽주의 와 청렴결백 으로 유명했다.
일화 (꽁초 사건): 1970년대 초, 제강공장(製鋼工場)의 철 구조물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솔선수범이 몸에 밴 박태준은 90미터 높이의 지붕으로 올라가 작업을 지켜봤다.
대형 볼트로 육중한 철 구조물을 연결하는 작업에서는 볼트(Bolt)를 확실히 조이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제대로 조여지지 않으면 수백 톤의 장비 운동을 견디지 못하고 구조물이 무너져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박태준은 허술하게 조여진 볼트의 지저분한 머리 부분을 발견했고, 이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박태준: (사무실로 돌아와 간부들을 집합시키며) "지금 즉시 모든 볼트 24만 개를 하나도 남김없이 확인하라! 잘못 조인 볼트는 흰 분필로 표시하고 시공업체 책임자를 당장 현장으로 내려오게 해!"
나중에 부실시공이 발견되었을 때, 박태준은 현장 책임자들의 안전모를 지휘봉으로 내리쳤고, 지휘봉이 두 토막 났다.
박태준: "너는 민족 반역자야! 조상의 혈세로 짓는 공장에서, 야! 저게 파일로 보이나? 저건 담배꽁초야, 담배꽁초! 천장의 전로(轉爐)에서 쇳물이 엎질러지면 밑에서 일하는 동료가 타죽거나 치명적 화상을 입는 거야. 부실공사는 적대행위야!"
그의 예리한 육감과 비정상의 눈은 터무니없는 부실공사를 막아냈고, 임직원들은 그를 '섬뜩할 만큼 예리한 육감을 지닌 사람'이라 불렀다.
실제로 1977년 3기 발전설비 공사 중 부실이 발견되자, 그는 80% 진행된 구조물을 책임자들이 보는 앞에서 폭파시키기도 했다.
불량 시공은 절대 허용하지 않는 완벽주의였다.
박태준은 최고의 제품이 청결한 환경에서 나온다는 '목욕론(沐浴論)' 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몸을 깨끗하게 유지해야 정리정돈 습성이 생겨 안전의식이 높아지고 제품 관리도 잘한다고 믿었으며, 제철소 건설 초기부터 샤워 시설을 갖추도록 했다.
이 철학은 일본 유학 시절 눈여겨본 일본인들의 청결한 생활 습관에서 비롯되었으며, 질서, 정리정돈, 완벽주의 등의 가치관으로 발전되어 오늘날 포스코가 '세계에서 가장 맑고 푸른 제철소'로 평가받는 밑바탕이 되었다.
6. 가족, 교육보국, 그리고 신화의 완성
박태준은 기업 경영에 평생을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청빈(淸貧)함은 높이 평가받는다.
그는 본인 명의의 집 한 채도 없었고, 포스코 주식도 단 한 주도 보유하지 않았으며, 유족에게 한 푼의 유산도 남기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그의 불굴의 열정과 노력의 목적이 재물에 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박태준의 장남은 삼표(三)레미콘으로 유명한 중견기업 회장의 딸과 결혼했는데, 이는 장남과 정의선 (鄭義宣,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동서(同壻) 관계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그의 딸은 2014년 지방선거와 관련하여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언급되기도 했는데, 이와 관련하여 "못난 아버지를 둔 딸에게 정말 미안하다!" 는 자조적인 평가가 남겨져 있다.
이는 성공적인 기업가이자 정치인으로서의 공적인 업적 뒤에 숨겨진, 자녀의 공적 활동 및 그로 인한 부정적 평가에 대한 인간적인 고뇌와 과실(過失)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박태준은 단순히 철강 생산에만 그치지 않고 인재 양성을 통한 교육보국 을 실천했다.
포스코교육재단(POSCO Educational Foundation)을 설립하여 포항과 광양에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14개 학교를 설립하고 일류 사학으로 키워냈다.
이는 우수 인력 확보와 직원 자녀 교육 문제 해결을 위한 복지 후생 정책의 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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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강을 하는 박태준 회장 |
1985년 광양제철중학교(Gwangyang Jecheol Middle School) 개교 당시, 아파트 단지 조성 공사 지연과 단일 학군 조정으로 인해 입학생이 남학생 1명뿐이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1명의 학생을 위해 9명의 교사가 배치되었다는 점이다.
박태준: (학교 관계자들에게) "학생이 단 한 명이라도 결코 교육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이 한 사람의 교육이 곧 우리의 미래다."
이 학생은 커다란 교실에서 9명의 교사와 1:1 수업을 받았는데, 친구가 없고 개인지도 형태라 몹시 불편해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일화는 박태준의 투철한 교육 철학, 즉 '한 사람의 교육이라도 결코 경시해서는 안 된다' 는 신념을 반영하며, 포스코 교육재단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진기록으로 남았다.
1986년에는 한국 최초의 연구 중심 이공계 대학인 포항공과대학교 (POSTECH)를 설립했다.
그는 국가 경쟁력이 고급 두뇌에 달려 있다고 판단했으며, MIT, 스탠퍼드(Stanford), 칼텍(Caltech) 등 세계적인 명문 공과대학들이 대부분 기업인들이 설립한 사립학교라는 점에 고무되었다.
첫 쇳물이 쏟아지는 날 (1973년 6월 9일)
착공 3년 2개월 만인 1973년 6월 9일, 포항제철 1기 건설의 하이라이트인 국내 최초의 현대식 대형 용광로에서 드디어 첫 쇳물 이 쏟아져 나왔다.
용광로 주변에는 건설에 참여했던 모든 직원들이 모여 있었다.
쇳물이 터져 나오는 역사적인 순간, 감격과 환희가 터져 나와야 했지만, 25년 동안 피와 땀을 바친 박태준과 직원들은 멍한 상태였다.
직원 A: (눈물을 글썽이며) "다 됐습니다. 회장님. 드디어..."
박태준: (오랜 침묵 후, 목이 메인 목소리로) "허(虛) 빠진 것 같네... 이것이었구나. 이것 하나밖에 없다."
이날은 한국 철강 신화의 막이 오른 날로, 이후 '철의 날'로 기념되었으며, 이 고로(高爐 원통형 용광로)는 1차 산업 국가였던 한국이 근대적 공업 국가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어 민족 고로 (民族高爐)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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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 4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에게 금탑산업훈장을 수여 |
7. 정치적 외풍과 몰락 (1992년)
포스코는 1992년 광양 4기 설비 준공으로 포항과 광양의 양대 제철소를 합쳐 총 2,080만 톤의 조강 생산 능력을 보유하게 되면서 세계 3위의 대형 철강회사로 부상했다.
박태준은 조강 연산 2,100만 톤 생산 체제 구축을 끝으로 4반세기(25년)에 걸친 대장정(大長征)을 마무리하고, 카네기 (앤드루 카네기, 19세기 철강왕)가 35년에 걸쳐 이룬 1,000만 톤을 훨씬 뛰어넘는 업적을 달성하며 '신화창조자'(Miracle-Maker)로 칭송받았다.
1992년 10월 3일, 그는 박정희 대통령 묘소에 성업보고서(成業報告書)를 올렸다.
박태준: (성업보고서를 낭독하며) "각하! 불초(不肖) 박태준, 각하의 명을 받은 지 25년 만에 포항제철 건설의 대역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삼가 각하의 영전에 보고를 드립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형극과도 같은 길이었습니다. 자본도, 기술도, 경험도 없는 불모지에서 용광로 구경조차 해본 일이 없는 39명의 창업요원을 이끌고 포항의 모래사장을 밟았을 때는 각하가 원망스럽기만 했습니다."
박태준은 포항제철 설립 당시부터 정치적 외풍에서 포스코를 보호하는 '울타리'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는 당시 민주자유당(민자당) 최고위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선 후보였던 김영삼 (金泳三, KY-S)과 불화(不和)를 겪었다.
그는 김영삼 후보의 선거대책위원장직을 거절하고 백의종군(白衣從軍)을 선언했다.
박태준 자택 (1992년)
김영삼 측근: "박 회장님, 지금 대세는 김영삼 후보입니다. 회장님께서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셔야 저희가 힘을 받습니다."
박태준: (단호하게) "나는 포항제철을 지키기 위해 군복을 벗고 철(鐵)에 미쳐 살았다. 정치적 이해관계로 포철을 이용할 수는 없다. 내 소신대로 하겠다."
김영삼이 대통령에 집권한 직후, 박태준은 결국 포항제철 회장직에서 사임했다 (1992년 10월).
곧이어 김영삼 정부는 박태준을 상대로 수사(표적 수사 의혹)를 진행했다.
박태준은 포항제철 협력사들로부터 39억여 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한동안 외국을 떠돌아야 했다.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기업인으로서 협력사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였으나, 당시 정치권에서는 1992년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김영삼 후보의 반대편에 섰던 박태준을 겨냥한 김영삼 정부의 표적 수사 라는 의혹이 지배적이었다.
이는 박태준이 포스코를 정치적 외풍으로부터 지키려 했던 신념에도 불구하고, 결국 한국 정치의 격랑 속에서 희생양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박태준이 평생을 청빈하게 살고, 정치 자금을 내지 않으려 했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권과의 불화로 인해 불명예를 안고 잠시 한국을 떠나야 했다는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8. 재기, 총리직, 그리고 인간적 과실 (1997년 – 2011년)
정치적 재기 (1997년)
박태준은 1997년 자유민주연합 (자민련)에 입당하며 정계에 복귀했다.
그는 김영삼 정부의 경제 실패를 공격했고, 포항시 북구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며 재기에 성공했다.
이후 자민련 총재가 되어 김종필(金鍾泌)과 김대중(金大中)의 DJP 연대 를 지원하여 김대중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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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필 김대중 박태준 |
2000년, 김대중 행정부 시절, 박태준은 제32대 국무총리(Prime Minister)로 취임했다.
총리 취임 직후, 박태준은 부동산 명의신탁(不動産 名義信託) 의혹으로 궁지에 몰렸다.
이는 실제 소유자가 타인의 명의로 부동산을 등기하는 행위로, 당시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되었던 불법적인 재산 은닉 의혹이었다.
결국 그는 총리 재임 4개월 만에 불명예 퇴진하게 되었다.
박태준은 평생 청렴결백을 내세웠고, 포스코 주식도 보유하지 않는 등 사심 없는 헌신(私心無私獻身)의 상징이었으나, 만년에 정치적 최고위직에 올랐을 때 이러한 의혹으로 인해 불명예 퇴진하면서, 그의 도덕적 이미지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는 '현장의 선비'라는 찬사와 동시에, 복잡다단한 정치 현실 속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던 인간적인 과실로 남았다.
9. 철강왕의 영원한 불꽃
박태준은 이후 포스코 명예회장(Honorary Chairman)으로서 포스코청암재단(POSCO Cheongam Foundation)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교육 및 기술 지원 활동 에 전념했다.
그의 호인 청암(靑巖) 은 포항공대의 도로명(청암로), 기숙사(청암학사), 도서관(청암학술정보관) 등에 사용되며 그 정신을 기리고 있다.
2011년 9월, 박태준은 포항제철 초기에 영일만 모랫바람 속에서 함께 고생했던 퇴역 현장 직원들을 만나 '보고 싶었소! 뵙고 싶었습니다! 재회' 행사를 가졌다.
재회 행사 (2011년)
노인이 된 400여 명의 동지들 앞에서 박태준은 마지막 당부를 전했다.
박태준: "포스코의 종잣돈이 대일 청구권자금 이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거기서 고도의 윤리성이 나옵니다. 우리는 포스코의 역사 속에, 조국의 근대화 역사 속에 우리의 피와 땀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 는 사실을 우리 인생의 자부심과 긍지로 간직합시다!"
2011년 12월 13일, 박태준은 흉막섬유종(Pleural Fibroma) 수술 후유증으로 인한 급성 폐 손상(Acute Lung Injury)으로 향년 8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포스코가 국가 산업 동력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더 크게 성장해 세계 최강이 되기를 기원한다" 는 것이었다.
그는 국립서울현충원(National Seoul Cemetery) 국가사회유공자묘역에 안장되었다.
10. 후대의 평가와 문화적 영향
업적의 평가: 박태준의 포스코 설립은 한국 경제 성장의 결정적인 밑거름이 되었다. 포스코가 생산한 양질의 철강재(鐵鋼材)는 조선(造船), 자동차, 전자, 건설 등 제조업 전반의 경쟁력 강화와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포스코의 역사는 한국 경제의 성장사와 궤(軌)를 같이 한다고 평가받는다.
• 철강왕 칭호: 그는 '한국 철강산업의 아버지'이자 '20세기의 철강왕'으로 불리며, '신화창조자'(Miracle-Maker)라는 칭송을 받았다.
• 국제적 인정: 생전에 철강업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베세머 금상 (Bessemer Gold Medal, 1987)과 카네기멜런대 명예 공학박사(1988)를 받았으며, 사후에는 '제철보국의 이념으로 일관제철소를 설립해 산업 근대화를 이끈 철강왕'이라는 헌정 근거로 세계 '철강 명예의 전당' 에 올랐다. 또한,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 (Légion d'honneur, 코망되르 등급)을 수훈 받았다.
• 경영철학: 그의 경영철학은 '자원은 유한하지만, 창의는 무한하다' 는 어록으로 요약되며, 이 문구는 현재 포스코 포항제철소 정문에 새겨져 있다.
•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은 생전에 박태준을 "후세 경영자들을 위한 살아있는 교본" 이라고 극찬했다.
• 소설가 조정래 (趙廷來, 『태백산맥』 작가)는 박태준을 "대한민국의 간디" 라 칭하며, '성스러운'이라는 뜻의 '마하트마(Mahatma) 박' 으로 부르고 싶다고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조정래는 "인도인들이 간디의 길을 걷지 않듯이, 대한민국인도 마하트마 박이 걸어온 길을 따라가려 하지 않을 듯하므로, 박태준은 우리의 영원한 사표(師表)이자 보물이다"라고 덧붙이며 그의 업적이 너무나도 숭고하고 어려워 후대에 이어지기 힘들 것임을 시사했다.
• 덩샤오핑 (鄧小平, 중국 최고 실력자)이 1978년 일본 제철소를 방문하여 "중국에도 이런 제철소를 지어줄 수 있느냐"고 묻자, 이나야마 요시히로 회장은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으냐" 고 반문했다는 일화는 그의 탁월한 추진력과 신뢰를 국제 사회가 인정한 상징적인 사건이다.
포스코교육재단이 포항과 광양이라는 지방 도시에 유치원, 초, 중, 고교를 세계적 수준으로 설립하여 성공적인 교육 지방화 모델(地方逆流모델)을 제시했다.
이는 수도권 집중화가 심각한 상황에서 다른 지방자치단체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포스코 교육 재단 산하 학교들 (포항제철고, 광양제철고 등)은 전국적인 명문 학교로 자리매김했으며, 재단의 건학 이념인 '교육보국'은 '자주와 창의'를 바탕으로 인성 교육, 창의 교육 등 한국 교육계에 선진 교육 제도를 도입하는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1. 역사적 교훈
박태준의 일생과 포스코 신화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집념과 희생의 역사' 그 자체이다.
우리가 그의 삶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다음과 같다.
박태준은 제철소 건설을 조상의 피값으로 짓는 민족의 사명 으로 인식했고, 실패하면 영일만에 빠져 죽겠다는 '우향우 정신' 으로 임했다.
오늘날 우리가 도전하는 모든 과업에서도,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목표를 향해 목숨을 걸 만큼의 절박함과 사명감을 갖는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이룰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박태준은 권력을 배경으로 기업을 운영했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청렴결백(淸廉潔白)을 유지하며 사적 이익을 취하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도덕성은 박정희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뢰를 얻는 정치적 기반이 되었고, 임직원들에게는 무한한 신뢰를 주어 헌신적인 노력을 이끌어내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신뢰(信賴)를 얻으면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다 는 그의 어록처럼, 리더의 도덕적 결단과 청렴함이야말로 조직의 지속 가능한 성공을 위한 핵심 요소이다.
박태준은 단순히 철을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원은 유한하지만, 창의는 무한하다' 는 비전 아래 연구 중심의 대학(POSTECH)을 설립하여 미래 국가 경쟁력을 위한 고급 두뇌 양성에 힘썼다.
단기적인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인재와 기초 과학에 투자하는 것이 국가와 기업의 100년 미래를 좌우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박태준은 포스코를 정치적 외풍에서 지켜냈지만, 스스로 정치의 길에 뛰어들었을 때는 결국 권력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명의신탁 의혹이라는 도덕적 과실을 남겼다.
그의 말처럼, 공인 (公人, 국민에게 봉사해야 하는 사람)이 되는 순간부터는 개인적인 희생에 바탕을 둔 헌신적인 노력이 요구되며, 공직자의 윤리적 잣대는 기업가보다 훨씬 엄격해야 한다는 경계(警戒)를 후대에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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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article explores the life and legacy of Park Tae-jun, the founder of POSCO and the "Iron King" of South Korea's steel industry.
Born in a small coastal village, Park rose from humble beginnings to become a key figure in the country's economic recovery after the Korean War.
The article covers his military service, his pivotal role in establishing POSCO, and his leadership in the creation of Korea’s first steel mill.
Park’s dedication to his country, his strict moral code, and his vision for the future of South Korea’s economy are highlighted.
The article also examines his political struggles, his impact on education, and his enduring influence in shaping Korea’s industrial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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