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아네트 진실 재평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부터 바렌 도주까지 (Marie Antoinette)


 마리 앙투아네트: 비운의 장미와 혁명의 불꽃


낯선 궁정, 운명의 장난

1. 오스트리아의 막내 공주 (마리아 안토니아, Maria Antonia)

1755년 11월 2일. 

오스트리아 대공국(Archduchy of Austria)의 호프부르크 궁전에서 태어난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하나(Maria Antonia Josepha Johanna)는 합스부르크 가문(Habsburg Monarchy)의 여제(여자 황제)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a,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Franz I)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딸이었다. 

그녀는 14살의 나이에 프랑스의 왕세자 루이 오귀스트(Louis-Auguste, 훗날 루이 16세)와 결혼하여, 프랑스식 발음인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로 불리게 되었다.


이 결혼은 개인적인 인연이나 사랑 때문이 아니었다. 

수백 년간 앙숙 관계였던 오스트리아와 프랑스가 신흥 강국 프로이센(Prussia)을 견제하기 위해 맺은 정략결혼(政略結婚)의 결과였다. 

본래는 그녀의 언니인 마리아 요제파(Maria Josepha)나 마리아 카롤리나(Maria Carolina)가 루이 오귀스트와 맺어질 운명이었으나, 천연두(天然痘)로 인해 요제파가 사망하고, 카롤리나가 다른 결혼을 하면서, 막내 마리 안토니아가 프랑스 왕세자비가 된 것이었다. 

루이 오귀스트 역시 아버지와 형을 병으로 잃고 갑작스럽게 왕세자(Dauphin of France)가 되었으니, 본래 만나지 못했을 인연이 운명의 장난으로 맺어진 셈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 초상

마리 앙투아네트의 성장 배경은 복잡했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식 편애(偏愛)가 심했는데,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랑받지 못하는 쪽에 속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궁정(Austrian court)은 비교적 자유롭고 예술적인 분위기였기에, 그녀는 음악과 미술을 좋아하고 하프 연주에 소질을 보이는 활달하고 사교적인 소녀로 성장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프랑스 혼담이 정해진 후부터는 왕비로서의 교육을 혹독하게 시키기 시작했다.


1770년 5월 16일, 베르사유 궁전(Palace of Versailles) 왕실 예배당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신부의 혼인 서약서 서명에 잉크 얼룩이 커다랗게 번지는 불길한 징조가 있었으며, 이후 파리 방문 시에는 인파가 몰려 대형 압사 사고(壓死事故)가 발생하는 등, 불운은 결혼 초부터 그녀를 따라다녔다.


2. 베르사유의 이방인

15세의 어린 나이에 프랑스 왕실(French Royal Family)에 들어선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베르사유는 감당하기 힘든 낯선 곳이었다. 

자유롭던 오스트리아와 달리, 프랑스 궁정은 하나부터 열까지 엄격한 예법(禮法)을 요구했다. 

특히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어(French language)를 어려워하여 잦은 실수를 했고, 비웃음을 샀다.


그녀를 가장 괴롭힌 것은 프랑스 귀족들(French Nobility)의 냉대였다. 

프랑스 국민들은 수백 년간 적국(敵國)이었던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그녀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궁정 내에서도 그녀를 '오스트리아 계집'(Autrichienne, '암캐'를 뜻하는 'chienne'과 발음이 유사해 악의적으로 불림)이라고 부르며 소외시켰다.


왕실의 엄격한 예법은 그녀에게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왕비가 아침에 일어나 하녀가 잠옷을 벗겨 가면, 귀족 부인이 바로 드레스를 입혀주어야 하지만… 귀족부인이 (여러 절차로 인해) 늦을 경우, 알몸으로 기다려야 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처럼 비인간적인 관습에 지긋지긋함을 느꼈고, 결국 즉위 후 이러한 예법들을 폐지하거나 축소시켰다.


게다가 남편 루이 오귀스트(당시 16세)는 내성적이고 숫기가 없어 아내에게 무심했다. 

루이는 왕이 될 운명이 아니었으며, 지독한 근시(近視)로 인해 사람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해 대인기피증(對人忌避症)까지 겪는 등, 군주로서의 카리스마나 결단력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둘은 결혼 후 7년 동안 부부 관계를 제대로 갖지 못했다. 

루이 15세(Louis XV, 시할아버지)의 왕비였던 마리 레슈친스카(Marie Leszczyńska)가 사망하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아이를 낳지 못하면서 궁정은 왕실의 후계자(後繼者) 문제로 들끓었다.


루이16세 초상

이러한 상황은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온갖 악성 루머를 낳았다. 

그녀가 '매력이 없어서 왕이 관심을 주지 않는다'거나, 심지어 '오스트리아 여자가 왕의 후계를 끊으려 한다'는 쑥덕거림이 끊이지 않았다. 

왕비의 동서(同壻, 남편의 남동생의 부인)가 아들을 출산하자 그녀의 압박감은 더욱 커졌다.


이 시기,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유일한 위안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고 따뜻하게 대해주는 랑발 공주(Princesse de Lamballe, 왕세자비의 시녀이자 친구)였다. 

하지만 랑발 공주(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와의 관계가 점차 지루해질 무렵,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폴리냑 백작부인(Comtesse de Polignac)이 나타났다.


마리 앙투아네트: "랑발 공주는 따뜻하지만, 파티에서는 너무 조용해. 나는 좀 더... 활달하고 신나는 무언가가 필요해."


폴리냑 백작부인은 간사하면서도 영특하여 어린 왕세자비의 마음을 이용했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조언("사치를 부려 백성들의 마음을 잃지 말거라")을 잊은 채, 유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유흥과 오해, 재정 악화의 희생양

3. 젊은 왕과 왕비, 그리고 국가의 몰락

1774년 5월 10일, 루이 15세(Louis XV)가 천연두로 사망하자, 20세의 루이 오귀스트와 19세의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왕과 왕비(King and Queen of France)가 되었다.

루이 16세(Louis XVI)는 즉위하자마자 최악의 재정 상황이라는 거대한 짐을 떠안게 되었다. 

선선대 왕인 루이 14세(Louis XIV)와 선대 왕 루이 15세의 수많은 전쟁과 사치로 이미 프랑스는 엄청난 빚을 지고 있었다. 

빚을 갚기 위해 또 빚을 내면서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궁정에는 간신(奸臣, 간사한 신하)이 들끓어, 사치와 타락이 만연했다.


특히 루이 15세의 평민 출신 정부(情婦, 첩)였던 퐁파두르 부인(Madame de Pompadour)은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그녀가 관여한 7년 전쟁(Seven Years' War)의 실패로 프랑스는 식민지를 잃고 막대한 빚을 지면서, 왕실 재정은 무너지고 백성들의 삶은 궁핍해졌다. 

루이 16세는 선왕들과 달리 정부를 두지 않았지만, 그 결과 사교계 행사의 주최와 그에 대한 비난이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모두 집중되는 역효과를 낳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비가 된 후 후계자 문제와 엄격한 왕실 예법 때문에 더욱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녀는 이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폴리냑 부인(Comtesse de Polignac)과 함께 유흥과 사치에 빠져들었다. 

밤새 파티를 열거나, 연극을 보고, 심지어 밤에 몰래 궁을 빠져나와 얼굴을 가리고 도박장(賭博場)에 가기도 했다.


폴리냑 공작부인

루이 16세(Louis XVI):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어젯밤은 즐거웠소? 너무 늦게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오." 

마리 앙투아네트: "이곳의 모든 격식은 날 숨 막히게 해요. 잠시라도 나 자신이 되어야 숨을 쉴 수 있어요. 폐하의 사냥 취미처럼요."


이러한 행각은 궁정 밖으로 새어 나갔고, 왕비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은 더욱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재정 악화의 주범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몰아붙이며 그녀를 경멸적으로 ‘적자부인’(Madame Déficit)이라 불렀다.


사실,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 부부가 사용한 왕실 예산은 프랑스 전체 예산의 약 3% 정도였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역대 왕비들에 비해 특별히 더 사치스럽지 않았으며, 오히려 왕실 예산 중 겨우 1/10 정도만 사용했다는 연구도 있다. 

재정 파탄의 주된 원인은 무리한 대외 전쟁(미국 독립 전쟁 지원 등)과 선왕들의 낭비가 누적된 결과였다. 

그러나 그녀의 과실은 공인(公人)으로서의 책임감 부족과 정치적 무지함이었다. 

그녀는 "왕족의 자리는 권력자가 아닌 나라를 이끌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으며, 자신의 사치 밖에 있는 대다수 국민들의 삶을 몰랐다는 점이 아쉽다는 비판을 받는다.


4. 연인과 친구, 그리고 스캔들

유흥에 빠져 지내던 왕비는 1774년 파리의 오페라 가면무도회(Opéra masked ball)에서 스웨덴 귀족 한스 악셀 폰 페르센(Hans Axel von Fersen)을 만났다. 


한스 악셀 폰 페르센 초상

외국인이라는 동질감에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페르센은 왕실의 연대장(軍事連隊最高指揮官)으로 임명되어 그녀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 되었다. 

2021년 해독된 서신에 따르면,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에게 "나는 당신을 미치도록 사랑해요", "당신 없이는 한순간도 견딜 수 없어요" 등 간절한 사랑의 표현을 남겼다. 

두 사람 사이에 육체적 관계가 있었는지는 모호하지만, 플라토닉한 관계 이상이었음은 확실하다.


한편, 마리 앙투아네트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 큰 오빠 요제프 2세(Joseph II,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조언을 듣고, 마침내 루이 16세와의 첫 잠자리에 성공했다. 

이들은 내외적으로 좋은 부부 관계를 유지했고, 결혼 8년 만인 1778년, 첫 딸 마리 테레즈(Marie-Thérèse, 훗날 앙굴렘 공작부인)를 낳았다.


이후 왕비는 1781년에 모두가 기다리던 아들 루이 조제프(Louis Joseph, 왕세자), 1785년 루이 샤를(Louis-Charles, 훗날 루이 17세), 1786년 막내딸 소피 엘렌 베아트리스(Sophie Hélène Béatrix)를 낳아 네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다. (루이 16세는 아내를 배려하여 장녀 이후로는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출산하도록 했다고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마리 테레즈, 루이 샤를(루이 17세)

아이를 낳고도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소문은 끊이지 않았는데, 심지어 공주와 왕자들이 페르센 백작의 자식이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하지만 루이 16세(Louis XVI)는 이 소문이 돌수록 아이들에게 더욱 신경을 써서 루머가 흐지부지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는 자식들에게 엄격하게 교육하며, 보통 왕족들과는 다른 교육을 시켰다.


마리 앙투아네트: "밖엔 굶고 추위에 떠는 사람이 많이 있어. 선물보다 음식을 먹을 수 있고, 따뜻한 잠자리가 있다는 것에 감사할 줄 알아야지!"

그녀는 고아들을 궁에 데려와 왕자, 공주와 함께 식사를 하게 했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 돈을 쓰기도 했다. 

또한 당시 악마의 열매(惡魔의 熱媒)로 취급받던 감자의 효용에 주목하여 궁정에서 경작했고, 감자꽃을 장식으로 달고 다니며 대중의 인식을 개선하려 노력하는 등 선한 의도를 가진 행동을 하기도 했다.(전승)


루이 16세는 왕비에게 베르사유 궁(Versailles) 외곽의 프티 트리아농(Petit Trianon, 루이 15세의 별장)을 선물했다. 

그녀는 이곳에서 예법과 시선에서 벗어나 작은 농장과 텃밭을 만들어 전원생활을 즐겼다. 

이것은 루소(Jean-Jacques Rousseau)의 자연주의(自然主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화려하고 긴장된 왕실 생활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프티 트리아농

하지만 왕비가 친밀한 사람들(폴리냑 부인, 페르센 백작 등)만 별장에 부르자, 초대받지 못한 귀족들은 그녀가 편애(偏愛)한다고 비난하며 안 좋은 소문을 퍼트렸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능력 있는 측근(랑발 공주, 메르시 백작 등)들을 멀리하고, 폴리냑 백작 부인에게 엄청난 특혜와 연금을 주었으며, 평민 출신 디자이너 로즈 베르탱(Rose Bertin)을 왕궁에 자유롭게 드나들게 하는 등, 인사 행정에서 치명적인 실책을 저질러 귀족들의 불만을 키웠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패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땅에 끌리던 긴 스커트 길이를 짧게 하고, 거추장스러운 옷을 활동적으로 바꿨다. 

특히 말년에 입은 슈미즈 드레스(Chemise dress)는 엠파이어 드레스(Empire dress)의 시발점이었으며, 유럽 전역의 유행을 선도했다.

하지만 이 소박한 면모차저도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수입 면 모슬린(cotton muslin, 성글게 짠 면직물)으로 만든 슈미즈 드레스는 왕실의 품위를 떨어뜨렸다는 이유로 비난받았고, 심지어 적대국인 영국(England)의 면직물 산업을 도왔다는 정치적 지적까지 받았다.


슈미즈 드레스

5. 재앙의 도화선: 목걸이 사건

1785년, 마리 앙투아네트의 명성에 결정적인 손상을 입힌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 (Affaire du collier de la reine)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후에 독일의 문호 괴테(Goethe)가 "프랑스 혁명의 서곡"이라 부를 만큼, 궁정의 부패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루이 15세가 그의 정부 뒤바리 백작 부인(Madame du Barry)을 위해 파리의 보석상 샤를르 뵈이머(Charles Boehm)에게 주문했던 고가(高價)의 다이아몬드 목걸이였다. 


뒤바리 백작 부인

루이 15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목걸이는 주인을 잃었고, 뵈이머는 이를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팔려 했으나 실패했다. 

왕비는 "우리나라에는 보석보다 군함 한 척이 더 필요합니다"라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왕비에게 중용되어 재상으로 출세하고 싶었던 로앙 추기경(Cardinal de Rohan, 프랑스의 고위 성직자)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미움을 받고 있었는데. 그는 왕비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의 사기꾼 잔 드 라 모트 백작부인(Jeanne de la Motte, 라 모트 백작부인)은 이를 간파하고 로앙 추기경에게 접근했다. 

그녀는 자신이 왕비와 친분이 있다고 속이고, 왕비의 친필 서명까지 위조하여 로앙 추기경을 속여 목걸이를 대리 구매하도록 유도했다.


로앙 추기경은 왕비와 닮은 창녀 니콜 드 올리바(Nicole d’Oliva)를 왕비로 착각하고 베르사유 정원(Gardens of Versailles)에서 만나는 등 철저하게 속았다. 

결국 로앙 추기경은 자신의 신용을 담보로 목걸이를 구입한 뒤, 라 모트 부인에게 넘겨주었다. 

라 모트 부인은 목걸이를 해체하여 국외로 팔아 넘겼다.


라모트 백작부인

대금 지불일이 다가오자 사기극의 전모가 드러났고, 루이 16세는 분노하여 로앙 추기경을 바스티유 감옥(Bastille)에 투옥시켰다. 

재판을 통해 마리 앙투아네트는 목걸이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결백이 밝혀졌지만, 프랑스 시민들은 재판 결과를 믿지 않았다. 

오히려 왕비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에게 누명을 씌웠다고 생각했다.


혁명재판 관계자: "왕비는 목걸이 사건과 무관함이 밝혀졌소." 

파리 시민: "무관하다고? 그 오스트리아 여자가 얼마나 사치스러운지 우리가 다 아는데! 왕실의 돈을 탕진하고 이제 와서 거짓말을 하는군! 라 모트 부인은 그저 이용당했을 뿐이야!"


라 모트 부인이 영국으로 도망가, 자신이 목걸이를 왕비에게 전달했으며 왕비가 자신에게 누명을 씌웠다고 주장하는 거짓말을 퍼트리자, 대중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목걸이 사건은 왕실, 특히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증오의 도화선이 되었다.


복원된 목걸이 모형

혁명의 광풍과 비극적인 몰락

6. 흉년과 분노: 혁명의 시작

프랑스 혁명(French Revolution)이 발생한 결정적인 배경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개인의 문제보다는, 선대부터 누적된 재정 파탄과 더불어 극심한 흉년 (기후 관계) 때문이었다. 

1788년에서 1789년에 걸쳐 가뭄과 폭풍우로 밀값이 천정부지로 상승했고, 빵을 구하지 못하는 평민들이 기아(饑餓)로 숨지는 상황이 속출했다.


프랑스 왕들은 대대로 파리 시(Paris)에 빵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빵집 주인’의 역할을 할 의무가 있었으나, 루이 16세는 이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 

1789년 5월, 루이 16세(Louis XVI)는 재정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175년 만에 삼부회(États généraux, 신분별 의회)를 소집했으나, 이는 오히려 구제도(앙시앵 레짐, Ancien Régime)의 모순을 지적하는 제3신분 대의원들을 결집시키는 결과만 낳았다.


1789년 7월 14일, 성난 민중들이 바스티유 감옥(Bastille)을 습격하며 프랑스 혁명은 시작되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1789년 7월 14일)

혁명의 혼란 속에서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에 대한 증오를 증폭시킨 것은 바로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요!" (Qu’ils mangent de la brioche! / 그들에게 브리오슈를 먹게 하라!)라는 망언(妄言)이었다.


이 말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한 적이 없으며, 혁명 세력이 왕실의 부패와 왕비의 무지를 과장하여 혁명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조작한 근거 없는 낭설이었다. 

이와 비슷한 표현은 루소(Jean-Jacques Rousseau, 계몽사상가)의 회고록 《고백록》(Les Confessions, 1766년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공주"(great princess)의 발언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루이 14세의 왕비 마리 테레즈(Marie Thérèse)의 측은지심을 나타낸 말(‘파이 껍질이라도 주라’)이 와전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한편, 혁명 이전에 프랑스 왕실의 재정난과 관련된 현대 용어의 기원이 있다. 

루이 15세 때 재무대신으로 임명된 경제학자 에티엔 드 실루엣(Étienne de Silhouette)은 긴축 정책을 폈는데, 귀족들은 그를 조롱하며 얼굴의 외곽선만 남기고 안을 까맣게 칠한 그림을 만들어 ‘실루엣’(Silhouette)이라 비아냥댔다. 

이 사건에서 오늘날 복식 용어로 사용되는 ‘실루엣’이라는 단어가 유래했다.


7. 파리 행진과 도주 실패 (바렌 사건)

1789년 10월, 빵값 폭등에 분노한 7천여 명의 여성들이 파리 시청(Paris City Hall)에서 베르사유 궁전(Versailles)까지 행진하며, "빵을 달라"고 외치고, 국왕 일가에게 파리 귀환을 요구했다. 


베르사유 여성 행진 (1789년 10월 5일)

이들은 왕실 가족들을 파리로 호송하며 “빵집 주인과 빵집 마누라, 빵집 아이를 데려간다”고 조롱했다.


국왕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파리 시민들의 감시 하에 튈르리 궁전(Tuileries Palace)에 거주하게 되었다.

국왕과 가족들을 향한 위협이 커지자, 마리 앙투아네트는 모국 오스트리아(Austria)로 망명할 계획을 주도했다.


1791년 6월 20일, 국왕 일가는 페르센 백작(Count Fersen)의 도움을 받아 튈르리 궁을 탈출했다. 

하지만 국경 직전 바렌(Varennes)에서 발각되어 파리로 강제 송환되었다.


프랑스 루이 16세 의 바렌으로의 도피 

탈출 실패의 치명적인 이유 중 하나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현실 감각 부족과 오판이었다. 

왕실은 신분에 걸맞게 도망쳐야 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루이 18세(Louis XVIII, 루이 16세의 동생으로 도주에 성공함)처럼 작고 눈에 띄지 않는 마차가 아닌, 화장 도구, 식기류, 술, 심지어 호화로운 변소(화장실)까지 갖춘 12마리 말이 끄는 거대한 베를린형 대형 사륜마차를 고집했다. (논쟁)

마차의 인테리어를 화려하게 맞추고 복장을 준비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여 탈출이 1개월 이상 지연되기도 했다.


루이 16세: "이 마차는 너무 눈에 띄지 않겠소? 동생 루이(루이 18세)는 작고 빠른 마차를 탔는데." 

마리 앙투아네트: "프랑스의 왕은 길가에서 용변을 볼 수 없어요. 그리고 왕실은 그에 걸맞은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이렇게 좁고 초라한 곳에 갇혀 있을 수는 없어요!"


이 탈출 미수 사건(바렌 사건)은 왕정에 대한 국민들의 환상과 신뢰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루이 16세는 파리 탈출 경위를 설명하는 "파리 도주 국왕 선언문"에서 국회의 헌법 위반을 비난하는 내용까지 작성했었는데, 이는 혁명 정부가 루이 16세를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혁명을 진압하려 한 적대자'로 판단하게 만들었다. 

이 사건이 없었다면 프랑스 혁명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며, 루이 16세 부부의 비참한 최후가 이때 결정되었다고 평가된다.


루이 16세와 그의 가족의 체포, 바렌, 1791년

8. 재판과 최악의 누명

바렌 사건(Varennes incident) 이후, 1792년 오스트리아(Austria)와의 전쟁이 발발하자,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는 친정 오스트리아에 정보를 넘기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프랑스를 적국에 팔아넘긴 반역자'로 낙인찍혔다.

1792년 9월 21일, 왕정(王政)이 폐지되고, 국왕 일가는 탕플 탑(Temple Tower)에 갇혔다. 

루이 16세(Louis XVI)는 1793년 1월 21일 단두대(Guillotine)에서 처형당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재판은 1793년 10월 14일 혁명 재판소(Revolutionary Tribunal)에서 열렸다. 

재판은 공정한 절차라기보다는 정치적 희생양을 만들기 위한 대중의 구경거리였다.


그녀에게 씌워진 혐의는 재정 낭비, 부패, 오스트리아와의 결탁, 루이 16세 타락, 전쟁 유발 등의 정치적 범죄와 온갖 성적 모욕 (동성애, 불륜, 근친상간 등)이었다.

특히 혁명 세력은 그녀의 단죄를 정당화하기 위해,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 즉 여덟 살 아들 루이 17세(Louis XVII)와의 근친상간(近親相姦) 혐의를 제기했다. 

루이 17세는 학대를 당하고 심신 미약 상태에서 어머니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증언하도록 강요받았다.


재판 내내 침묵을 지키며 품위를 유지하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근친상간 혐의에 대해서만큼은 유일하게 입을 열어 강하게 분개했다.


검사 에베르(Hébert, 근친상간 혐의의 고발자): "피고인, 아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것이 사실인가?" 

마리 앙투아네트: "내가 대답하지 않은 것은 어머니에 대한 그런 비난에 대답하는 것을 자연이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모든 어머니들에게 묻고자 합니다!"


이 비통한 호소에 재판장에 모인 여성 방청객들(마리 앙투아네트를 증오하던 시장의 아낙네들까지 포함)조차 태도가 돌변하여, 근거 없는 죄목을 들이대는 혁명 정부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심지어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 자코뱅파 수장)조차 "에베르 그 자식이 그녀에게 또 한 번 승리를 안겨주고 말았다"며 분통을 터뜨릴 정도였다.


하지만 이미 판결은 정해져 있었고,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에게는 국고 낭비, 반역죄, 국가 안보에 대한 음모죄가 유죄로 선고되었다. 

그녀는 프랑스 헌정 역사상 최악의 사법 살인(Judicial murder)의 희생자였다.


9. 단두대의 비극적인 최후

1793년 10월 16일,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는 38세의 나이로 단두대(Guillotine)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녀는 처형 직전, 시누이 엘리자베스(Élisabeth de France, 루이 16세의 여동생, 훗날 처형당함)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앙투아네트

마리 앙투아네트: "사랑하는 아가씨, 이것이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입니다. 나는 지금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범죄자들에게 가하는 치욕적인 죽음의 선고가 아니라 당신의 오빠를 다시 만나볼 수 있는 선고입니다...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는 사람은 모두 그렇겠지만, 나는 극히 평온합니다."


그녀는 감옥(콩시에르주리, Conciergerie)에서 나와, 남편 루이 16세(Louis XVI)와 달리 허름한 흰 옷차림에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사형수 호송용 짐수레(거름통을 실은 마차)에 실려 혁명 광장(Place de la Révolution, 현재의 콩코드 광장, Place de la Concorde)으로 향했다.


단두대에 오르기 전날 밤, 그녀의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는 설이 전해지며,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모발 색소가 급속히 사라지는 현상을 '마리 앙투아네트 증후군'이라 부른다.(전승)


그녀는 형장(刑場)의 이슬로 사라지는 순간까지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았다. 단두대(Guillotine) 계단을 오르던 중, 그녀는 사형 집행인 샤를 앙리 상송(Charles-Henri Sanson)의 발을 실수로 밟았다.


마리 앙투아네트: "미안해요, 무슈.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어요."


이 마지막 말은 그녀의 인간성과 왕비로서의 에티켓 준수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기록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

재평가와 인문학적 성찰

10. 후대의 평가와 문화적 유산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는 프랑스 혁명(French Revolution) 당시에는 사치와 향락의 주범이자 희대의 악녀로 극도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후대의 연구와 역사적 사료의 재조명으로 그녀에 대한 오해와 진실이 밝혀지고 있다.

현대 역사가들은 그녀가 정치적으로 희생되었으며, 당대 프랑스 사회에 만연했던 여성 혐오(女嫌, misogynie)의 희생양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녀는 정치적 영역에서 여혐의 희생자가 된 사상 최초의 공적 여성이었다. 

혁명 세력이 그녀를 향해 쏟아낸 포르노그라피적 비방 팜플렛의 본질은 왕실, 즉 절대 군주제(Absolute Monarchy)에 대한 공격이었으며, 왕권의 신성함에 흠집을 내어 민중을 격상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다.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는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해 가장 균형 잡힌 평가를 내렸다.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권주의의 위대한 성녀도 아니었고, 혁명의 '매춘부'도 아니었으며, 중간적인 성격에 유난히 영리하지도 유난히 어리석지도 않으며, 불도 얼음도 아니고, 특별히 선을 베풀 힘도 없을 뿐더러 악을 행할 의사 또한 없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여인일 뿐이었다."


그녀는 평범한 인물이었으나,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격동의 시대와 군주의 자리에 내던져졌으며, 왕비로서 시대적 요구에 맞게 성숙하지 못한 과실이 있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극적인 삶은 수많은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일본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The Rose of Versailles)는 그녀를 순수하고 매력적인 여성으로 묘사했으며, 소피아 코폴라(Sofia Coppola) 감독의 2006년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는 그녀를 역사적 강박에서 벗어난 십대 소녀로 재해석하며, 현실도피적 행각을 현대의 파티 피플에 빗대기도 했다.

영화 평론가: "영화는 역사적 배경을 털어버리고, 사치와 허영을 부리는 그녀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전유하고 있다."

(실제로 코폴라 감독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소녀적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18세기 의상 속에 컨버스 운동화(Converse shoes)를 등장시키는 파격적인 연출을 시도했다. 또한 영화에 삽입된 1980~90년대 팝 음악은 당시 그녀의 내면이 아직 순진한 십대 소녀였음을 보여주려 했다.)


11. 비극에서 배우는 지혜

마리 앙투아네트의 비극은 한 개인의 삶이 거대한 시대의 흐름과 정치적 이해관계, 그리고 대중의 선동에 의해 어떻게 파괴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베르사유 궁전(Versailles Palace)의 화려함 속에서 살았지만, 혁명으로 인해 콩시에르주리 감옥(Conciergerie Prison)의 삭막한 고독 속에 내던져졌다. 

그녀의 삶은 극단적인 권력과 혐오 사이를 오갔다.


콩시에르주리 감옥

역사 속의 모든 인간은 각자의 결함(缺點)을 가지고 태어나, 원치 않은 시대의 사건을 겪는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비극은 그녀가 가진 사소한 인간적 결함(유흥, 무지함, 편애)이, 절대 군주정(絶對君主政)의 위기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만나 치명적인 정치적 과실로 부풀려져 공격받았기 때문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녀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 왕비의 역을 맡는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진정한 모습을 보였다"고 말했다. 

권력의 껍데기가 벗겨지고, 오직 인간 대 인간으로 남겨졌을 때, 그녀는 비로소 내면의 강인함과 성숙함을 보였다.


마리 앙투아네트: (자신에게 씌워진 억울한 누명과 고통 속에서) "불행 속에서야 겨우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비운의 역사로부터 깨달음의 시차(時差)에 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녀는 "필요한 때에 적합하게 깨닫고 성숙하는 삶의 중요성"을 놓쳤다. 

개인이 처한 상황과 시대적 요구를 파악한 후 각성(覺醒)하고 그에 맞게 성숙하지 못하는 것은, 공인(公人)뿐만 아니라 평범한 개인에게도 비극을 초래할 수 있다. 

그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권력의 정점에서든, 평범한 일상에서든, 자신의 위치에 대한 엄중한 인식과 책임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준다.

또한 그녀에게 가해진 무차별적인 혐오와 조작된 루머는, 오늘날에도 특정 집단에 대한 마녀사냥이나 악의적 비방 캠페인의 형태로 재현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갈등의 표면 아래 숨겨진 구조적 모순과 계급적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역사의 비극은 이미 지나간 사건이지만, 그 후과는 길고도 길기에, 과거를 통해 현재를 성찰하는 것이야말로 인류애(人類愛)를 향한 첫걸음일 것이다.


이 글은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하되, 이해를 돕기 위한 서술·대화체·장면 전환이 포함된 역사교양/서사형 원고입니다.

핵심 사실은 최신 통설에 맞추되, 일부 수치·일화(감자꽃, ‘증후군’ 등)는 전승·일화로 소개됩니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 문구는 앙투아네트 발언이 아닌 유래 불명 문장으로, 대중 오해를 바로잡습니다.

인명·지명은 통용 표기(프·영 혼용)를 사용했으며, 오류 발견 시 정정 가능합니다.


Born Archduchess Maria Antonia in 1755, Marie Antoinette wed Louis XVI in 1770 and entered a hostile Versailles. 

Branded “Madame Déficit,” she became a lightning rod for France’s debts and the Diamond Necklace scandal. 

Famine and unrest fueled Revolution; the royal family’s failed flight to Varennes sealed their fate. 

Tried amid salacious slanders, she met the guillotine in 1793 with poise. 

Later reassessment sees her less a monster than a scapegoat of misogyny, myth, and a collapsing reg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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