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앙리 마르탱의 프랑스사》, 《미슐레의 프랑스 혁명사》,
《사이어의 제3신분론》, 그리고 바스티유 사건 관련 기록들을 참고했으나,
독자의 몰입을 위해 문학적 상상과 서사적 각색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대로의 연대기가 아닌, 드라마와 긴장감을 살린 소설체 서술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인물과 사건에는 이해를 돕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1789년 여름 파리는 거대한 불만의 화약고였다.
1788년의 흉작과 혹독한 겨울 때문에 밀 수확이 줄었고
빵값은 치솟아 평민들의 삶을 옥죄었다.
빵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하루 생존을 지탱하는 주식이었기에
그 가격 폭등은 곧 굶주림과 절망을 의미했다.
시장마다 줄을 선 군중은 서로의 어깨를 부딪치며 불안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아이들은 굶주림에 울었고 어머니들은 밀가루에 물을 섞어 허기를 달랬다.
길거리에는 “빵을 달라!”는 외침이 메아리쳤다.
사회적 불평등은 이런 고통을 더욱 선명하게 했다.
프랑스 사회는 세 신분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제1신분(성직자 계급)과 제2신분(귀족 계급)은 대부분의 세금에서 면제되었다.
반면 제3신분(농민, 상인, 장인, 지식인 등 평민 계급)은 무거운 세금을 짊어져야 했다.
농민들은 세금을 내고 군역을 지면서도 귀족의 사냥으로 밭을 망치기 일쑤였다.
상인과 장인, 지식인들도 정치적 발언권은 전혀 없었다.
억눌린 불만은 마치 용광로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정치적 긴장은 이 불만 위에 기름을 부었다.
1789년 5월 루이 16세는 국가 재정을 논의하기 위해
삼부회(성직자·귀족·평민 세 신분 대표가 모여 의결하는 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표결 방식은 신분별 1표로 정해져 있었기에
평민은 수적으로 압도적이었음에도 번번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제3신분 대표들은 6월 17일 스스로를
국민의회(프랑스 혁명기의 새로운 의회, 평민 대표들이 주도)라 선언했다.
6월 20일에는 테니스코트의 서약(국민의회가 헌법 제정을 결의하며 실내 테니스 코트에서 맺은 서약)을 통해 헌법 제정까지 다짐했다.
이는 곧 왕권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도전이었다.
루이 16세는 군대를 파리 주변에 배치했고,
시민들은 이제 언제라도 무력 진압이 벌어질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때 자크 네케르(스위스 출신 금융가이자 루이 16세 치하의 재무총감)는
시민들에게 희망 같은 존재였다.
그는 귀족과 성직자에게도 과세를 주장하며 개혁의 목소리를 냈다.
평민 출신에 가까운 배경과 그의 발언은 사람들에게
“고위 권력자 중에서도 우리 편이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그런 네케르가 7월 11일 전격 해임되었다.
이 소식은 곧 파리 시민들에게 “왕이 개혁을 버리고 군사로 억누르려 한다”는 신호로 읽혔다.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바스티유는 바로 그 분노가 향할 상징이었다.
바스티유(원래는 백년전쟁 시기 파리를 방어하기 위해 지어진 요새, 이후 정치범 수용소로 변질)는
왕의 전제와 공포를 상징했다.
lettre de cachet(왕의 인장이 찍힌 봉인 서한, 재판 없이도 누구든 감금할 수 있었음)
하나만으로도 시민은 흔적 없이 그곳에 갇혔다.
계몽주의 철학자이자 작가 볼테르조차 두 차례 바스티유에 수감된 바 있었다.
1789년 여름,
그곳에 남은 죄수는 단지 일곱 명에 불과했지만 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바스티유를 무너뜨려야만 왕권의 억압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느꼈다.
7월 12일, 팔레 루아얄 정원에 모인 군중 앞에서 카미유 데물랭(언론인, 혁명 선동가)이
탁자 위에 올라 권총을 흔들며 외쳤다.
“시민들이여 무장하라! 자유를 지키려면 지금 일어나야 한다!”
군중은 함성과 함께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분노와 불안은 이제 행동을 요구하고 있었다.
7월 13일, 시민들은 앵발리드(파리의 군사 병원 겸 무기고)를 습격해
수천 정의 머스킷을 확보했다.
그러나 총에는 화약이 필요했다.
그리고 모두가 알았다.
화약은 바스티유에 있었다.
1789년 7월 14일 아침 파리는 긴장으로 가득했다.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수천 명의 시민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장정들은 손에 머스킷과 창을 들었고 일부는 낫과 망치를 움켜쥐었다.
여인들은 아이들을 등에 업고 따라나왔고 소년들까지 돌멩이를 주워 들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하나였다.
바스티유.
군중은 점점 불어나 오후 무렵에는 8천 명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화약을 내놔라!”고 외쳤다.
바스티유의 총독은 베르나르 르네 드 로네(바스티유의 마지막 총독)였다.
그는 성 안에 병사 100여 명을 두고 있었는데 대부분은 은퇴 직전의 노년 병사들이었고
스위스 용병 몇 명이 추가로 배치되어 있었다.
성벽 위의 대포는 두려움 그 자체였지만 실제 전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오전 10시 무렵 시민 대표단이 바스티유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교섭을 시도하며 말했다.
“우리는 감옥을 풀어달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화약을 내놓아라. 그것만 가져가면 돌아가겠다.”
드 로네는 잠시 고민하다 성문을 걸어 잠근 채 교섭을 끌었다.
시간을 벌면 왕의 군대가 도착할 것이라 믿은 것이다.
그러나 군중은 기다릴 수 없었다.
태양이 머리 위에 이글거릴수록 사람들의 인내심은 무너졌다.
성문 앞에서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고 긴장된 웅성거림이 폭발 직전의 소음으로 바뀌었다.
군중은 목재 다리와 밧줄을 들고 성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문을 열어라! 화약을 내놔라!”
정오 무렵 갑자기 총성이 울렸다.
누가 먼저 쏘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피가 흐르자 군중의 분노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돌격했고 성문은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머스킷 사격과 돌팔매가 이어졌고 연기가 자욱하게 성문 앞을 덮었다.
드 로네는 성벽 위의 대포를 군중에게 겨누려 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두려움에 동요했다.
그들 중 많은 이가 파리 시민 출신이었고, 군중 속에는 그들의 가족과 친구가 있었다.
몇몇은 총구를 내리고 몰래 성문을 열어주려 했다.
오후 3시, 성문이 열리자 군중은 물밀 듯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피비린내가 퍼지는 격전 끝에 드 로네와 그의 병사들은 항복했다.
드 로네는 시민들에게 끌려나왔고 군중은 그를 분노의 손아귀에서 죽였다.
그의 머리는 잘려 창끝에 꽂혀 파리 시내를 돌았다.
바스티유의 깃발은 찢겨 나부꼈고, 성벽 위에는 시민들이 환호하며 올라섰다.
사람들은 쇠창살을 부수고 감옥을 열었다.
그 안에서 나온 죄수는 단지 일곱 명뿐이었다.
그러나 군중은 그 숫자에 실망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상징의 파괴였다.
바스티유의 문이 무너지는 순간, 왕권의 공포가 산산이 깨져나간 듯했다.
한 시민은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감옥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다. 공포를 무너뜨렸다!”
바스티유가 무너졌다는 소식은 저녁 무렵 베르사유 궁정에 도착했다.
루이 16세는 사냥에서 돌아온 뒤 보고를 받았다.
그는 평소처럼 담담하게 물었다.
“반란인가?”
곁에 있던 라 로슈푸코(혁명 동조 귀족)는 차분히 대답했다.
“폐하, 반란이 아니라 혁명입니다.”
그 한마디는 곧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왕은 처음으로 자신의 권력이 도전받고 있음을 실감했다.
루이 16세는 군대를 동원할 수도 있었지만 이미 병사들 사이에서도 동요가 심했다.
많은 병사들이 시민들의 편에 서기를 원했고 일부는 실제로 무장한 민중에 합류했다.
7월 15일 라파예트(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했던 귀족 장군, 이후 국민위병 사령관)가
국민위병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자유의 상징으로 삼색기를 내세웠는데,
이 깃발은 이후 프랑스 국기의 기원이 되었다.
국민위병은 시민들의 무장 자치군이었고, 왕의 권위는 크게 약화되었다.
바스티유의 돌은 시민들에 의해 하나하나 해체되었다.
어떤 이는 돌을 기념품으로 집에 가져갔고 어떤 이는 파리 시내의 기념비에 사용했다.
한때 공포의 상징이었던 요새는 시민들의 손으로 산산조각 나 자유의 기념물로 바뀌었다.
바스티유 습격은 프랑스 전역에 전율을 일으켰다.
농촌에서는 봉건 영주에 대한 봉기가 일어났고, 기록 보관소가 불태워졌다.
농민들은 자신들을 억압해 온 계약과 채무 문서를 없애며 자유를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대공포(1789년 여름 프랑스 전역에 확산된 농민 봉기와 불안)’라 불린 현상이었다.
파리에서는 시민들이 혁명의 주체로서 자신감을 얻었다.
“우리가 왕보다 강하다.”
이 의식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루이 16세는 결국 국민의회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곧 입헌 군주제로 향하는 첫걸음이 되었다.
후대에 바스티유는 단순한 감옥이 아니라 자유의 상징으로 기억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매년 7월 14일을 국경일로 기념하며 이를 ‘바스티유 데이’라 부른다.
그날 파리 하늘을 가득 채우는 불꽃놀이는 단지 축제가 아니라 혁명 정신의 계승을 뜻한다.
세계사적으로도 바스티유 습격은 거대한 파급력을 가졌다.
유럽 각국의 민중은 프랑스 시민들이 왕의 절대권력에 맞서 승리했다는 사실에 열광했다.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의 지식인들은 파리의 소식을 신문으로 읽으며 자유를 꿈꾸었다.
라틴아메리카의 독립 운동가들 역시 프랑스 혁명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다.
혁명의 불길은 대서양을 건너 세계 곳곳으로 번져나갔다.
‘바스티유’라는 단어 자체도 의미가 확장되었다.
원래 어원은 프랑스어 bastide(요새, 성채를 뜻하는 단어)에서 왔는데,
혁명 이후에는 억압적 권력과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라는 은유로 쓰였다.
누군가의 글 속에서 “그의 집무실은 작은 바스티유였다”라는 표현이 나올 만큼
이 단어는 상징성을 얻었다.
바스티유의 함락은 단순한 감옥 습격이 아니었다.
굶주림, 불평등, 정치적 갈등, 상징적 분노, 촉발 요인들이 뒤섞여 폭발한 필연이었다.
그날 시민들은 화약을 얻었지만 동시에 자유의 불꽃을 피워 올렸다.
그리고 그 불꽃은 왕정의 어둠을 서서히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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