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漢城, 한양)의 겨울은 유난히 마르는 소리가 컸다.
손암(巽庵) 정약전(丁若銓·Jeong Yak-jeon, 1758–1816, 실학자)은 새 종이를 탁자 위에 펴 놓고 먼지를 털었다.
아명 삼웅(三雄).
어릴 적부터 그는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는 기질’로 기억됐다.
작은 일이라 부르는 것들이 나중에 그의 생애를 만든다는 걸, 그땐 몰랐다.
집안은 남인 명문이었다.
아버지 정재원, 어머니 해남 윤씨.
형제는 넷, 가운데 둘째가 약전, 넷째가 약용(丁若鏞·다산).
호는 손암, 연경재(研經齋).
책을 읽되, 사람 말을 먼저 듣는 버릇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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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산도에 있는 정약전의 사촌서당 나무위키 |
한성에 오른 해, 그는 권철신 문하에 드나들었다.
책상엔 성호 이익의 문집, 주머니엔 장터의 속칭 메모를 했다.
같은 물건이 포구·시장·관청에서 어떻게 달리 불리는지, 어휘의 균열을 수첩에 모았다.
그때부터 이미 그는 학자이자 편집자였다.
‘이름이 틀리면 일이 틀리니, 먼저 바로잡는다’ 그게 그의 평생 신조였다.
1779년 여주 주어사(走魚寺 서학을 연구하고 천주교를 접한곳).
이벽·이승훈과 서학을 토론하던 밤, 약전은 조용히 들었다.
약용은 곧 신앙인이 되었지만, 약전은 “먼저 확인하자”며 판단을 늦췄다(전승).
그는 신앙을 규칙으로 고정하기보다, 배움의 통로로 쓰려 했다.
유예는 그의 방식의 용기였다.
1790년(정조14년) 문과 병과27위로 급제했다.
홍문관(학문 및 언론 기관) 부정자(홍문관에 속한 종9품 관직)·전적(성균관에 속한 정6품 관직), 병조좌랑(오늘날의 국방부의 행정실무).
평판은 “곧고 느긋하다.”
자리보다 사람을 만나는 관청을 좋아했고, 품계가 올라가도 수첩엔 장터의 말이 더 빼곡했다.
한성의 겨울과 봄, 그는 공문 옆 여백에 어망 매듭법을 적어두곤 했다.
혼인은 풍산 김씨.
집안은 단정했지만, 부부의 대화는 현실적이었다.
아이들 교육, 살림의 원칙, 친척들의 소식.
약전은 어디에서나 손을 먼저 씻고 칼날을 가는 사람이었다.
살을 절이고 글을 고치는 태도는 같았다.
살림을 문장으로 삼는 습관은 이때 굳었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대규모 천주교 박해 사건)가 일어났다.
권력 지형이 뒤집히자, 약전은 신지도와 우이도를 거쳐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흑산은 바람만 부는 섬이 아니었다.
표류민, 상인, 군관, 섬사람의 삶이 서로 얽힌 곳이었다.
약전은 유배 첫해 복성재라는 임시 서당을 열고 아이들을 모았다.
낮엔 글, 밤엔 포구.
섬사람 말을 받아 적고, 채비와 조류표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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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산도 연안항 전경” / “Heuksando coastal port view” Wikimedia Commons, “Heuksando Coastal Port 2023-10 Korea.jpg” (CC BY 2.0). 위키미디어 커먼스 |
그는 동업자를 만난다.
창대(張昌大, 섬 토박이·어부).
낱말의 정확함과 물때의 정확함이 같은 무게라는 걸, 두 사람은 곧 알았다.
창대의 실명·신분은 기록마다 다소 엇갈린다(논쟁).
그러나 ‘현장 지식의 공동 생산자’였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흑산의 생활은 거칠고 구체적이었다.
아침 어장 확인, 낮엔 염장과 건조, 저녁엔 기록과 논쟁.
젓갈은 소금 비율을 10:3으로 시작해 계절에 따라 가감했다(섬 실용 기준).
복어는 겨울에 살이 차고, 내장은 반드시 버렸다.
약전은 “독은 모르면 독, 알면 약”이라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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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회화 ‘시인 어부’ / Joseon painting “Poet Fisherman” 클리블랜드 미술관 컬렉션(오픈 액세스 이미지). clevelandart.org |
밤에는 해양 어휘 사전이 펼쳐졌다.
포구 속칭-장터 명칭-문서 한자 이름을 한 줄에 꿰었다.
예: ‘가오리(속칭)–어류상 가오리–鱝(문헌)’.
옆칸엔 포획법, 식용, 약용, 계절.
섬의 말이 사라지면 물고기의 흔적도 사라진다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유배 3년째, 약전은 송정사의(松政私議. 소나무 정책에 관한 개인 의견)를 썼다.
국가의 송금(소나무 벌채 금지) 정책이 민폐를 키우는 구조를 짚고, “심고 쓰는” 방향으로 선회하자 주장했다.
관의 권한 남용을 경계하고, 산림은 보전과 이용이 함께 가야 지속된다고 풀었다.
유배지에서 국가정책을 비판하는 일은 위험했지만, 그는 썼다.
그의 글은 현실로 걸어가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섬엔 표류민이 돌아왔다.
문순득(文淳得, 우이도 홍어 상인).
류큐–여송(필리핀)–마카오–북경을 거쳐 고향으로, 3년 2개월.
약전은 그의 구술을 받아 「표해시말(漂海始末)」(문순득의 표류경험)로 정리했다.
노정·풍속·어휘 대비표까지 갖춘, 조선 드문 세계 체험 기록이었다.
| 표해시말 원문 이미지(문순득 표류기) / Pyohae Simal original page 국가기록원 발간자료(PDF, 공공자료). 국가기록원 |
가정은 조용히 흔들렸다.
장자 정학초(丁學樵)가 1807년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후사를 잇는 문제를 두고 집안은 의견이 갈렸다.
아내 김씨, 동생 약용, 약전의 입장이 달랐다는 전언이 남아 있다(논쟁).
입후(立後 가문의 대를 잇게하는제도)는 단지 가문의 절차가 아니라, 생애의 방향을 바꾸는 선택이었다.
약전은 결국 가문·학문·섬의 공동체 사이에서 균형을 택했다.
과장도 도피도 없이.
사람들은 그에게서 모순을 보았다.
원칙에선 완고했고, 현장에선 유연했다.
관료제의 허술함을 비판하면서도, 어민의 구술은 공문서처럼 정리했다.
복어 독은 철저히 경계하면서, 미역은 어금니로 질감을 측정했다.
그 모순이 바로 실용의 구조였고, 섬은 그 구조를 매일 시험했다.
1814년 《자산어보(玆山魚譜)》.
인류(鱗類 비늘이있는동물)·무린류(無鱗類)·개류(介類 조개 무리)·잡류.
55류 226종(근연종 포함 범위에 차 있음·논쟁).
명칭·형태·습성·포획·이용을 ‘한 줄’로 묶고, “섬사람이 이르길…” 다음에 자신의 견해를 붙였다.
전승을 남기되, 검증을 포기하지 않는 문장.
| 자산어보 필사본 / Hand-copied cover of Jasan Eobo 국립해양박물관, 공공누리 제2유형. 국립해양박물관 |
그의 취미는 의외로 단순했다.
다시마를 말릴 때, 첫날엔 그늘, 둘째 날엔 해, 셋째 날엔 바람만.
연필 대신 송곳으로 종이 자국을 내어 밤에 덧쓰는 버릇.
갯바위에서 물결 소리를 숫자로 세어 조류를 기억하는 일.
그리고 아이들 손놀림을 관찰해 글씨를 고쳐주는 재미.
인간관계는 넓고 밀도 있었다.
형 약용과의 서간은 짧고 정확했다. “살아 있는 사전이면 충분하다.”
주어사 인연의 벗들과는 서학·정치·산림을 두루 이야기했다.
섬사람들과는 ‘이름을 같이 쓰자’는 약속을 나눴다.
학문을 시장으로 데려오면, 학문은 사람이 된다는 게 그의 태도였다.
그의 논란은 무엇이 있었나.
첫째, 신앙 문제.
약전이 신앙을 끝까지 지켰는지, 유배 이후 거리를 두었는지는 기록이 엇갈린다(논쟁).
천주교 연루로 유배된 건 분명하지만, 그는 신학 논문 대신 생활 백과를 썼다.
누군가는 비겁, 누군가는 실용이라 불렀다.
둘째, 분류의 한계.
《자산어보》 몇 종은 중국 문헌 인용을 섞어 기술했고, 현대 분류학과 불일치가 있다(논쟁).
그러나 체취·식용·어법·계절 기록의 현장성은 지금도 인용된다.
셋째, 산림정책 비판.
유배지에서 관의 권한을 축소하라 주장한 건 용감했지만, 당시 관리들에겐 “제도 모르는 책상론”이라 공격받았다(전승).
흑산의 어느 봄, 약전은 아이들과 갯벌을 걸었다.
한 아이가 물었다.
“선생님, 어째서 이름을 그리 중히 여깁니까.”
약전은 조개껍질에 ‘이름’ 두 글자를 썼다.
“이름이 있어야, 다음 사람이 길을 찾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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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민화 어해도 / Joseon folk painting Eohaedo (fish & crab) 위키미디어 커먼즈, 퍼블릭 도메인 표기. 위키미디어 커먼스 |
그해 초여름, 우이도(牛耳島)로 거처를 옮기는 일이 잦아졌다.
섬사람들은 흑산과 우이도를 함께 ‘흑산’이라 불렀다.
약전은 두 섬 사이를 오가며 책장을 덧메웠다.
젓갈 항아리 옆에서 장부를 고치고, 포구 기둥에 종이를 말려 붙여 잉크를 말렸다.
생활과 문장은 같은 방에 있었다.
1816년, 약전은 우이도에서 눈을 감았다(1817년 설·논쟁).
돌아갈 기회는 오지 않았지만, 지속은 남았다.
《자산어보》의 이름들, 「표해시말」의 노정, 「송정사의」의 논지.
그리고 손의 습관, 손 씻기, 칼 갈기, 글자 고치기.
그 습관이 그의 인생을 설명한다.
정약전의 일대기는 영웅담이 아니라, 편집의 정확성으로 이어 붙인 생활사다.
그는 사물과 사람 사이를 번역했고, 시장과 문서 사이를 연결했다.
그래서 그의 책은 도서관보다 부엌에서, 연구실보다 포구에서 오래 산다.
이름을 바로 부르고, 쓸모를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
그게 그의 업적이고, 동시에 그의 사람됨이다.
이 글은 신뢰 가능한 사료·논문·공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은 (전승), 해석 갈림은 (논쟁), 어원은 (어원)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표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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