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바레: 여성 최초 세계 일주를 완수한 남장 식물학자의 비밀과 재조명 (Jeanne Baret)

    

위장된 열망 (Introduction: The Disguised Ambition)

1740년 7월 27일, 프랑스 부르고뉴(Bourgogne, 프랑스 동부지역)의 작은 농촌 마을 

 라코멜(La Comelle)에서 잔 바레(Jeanne Baret, 여성 탐험가이자 식물학자)가 태어났다. 

그녀의 성장 배경은 흙냄새와 풀냄새로 가득했다. 

잔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농민 가정 출신이었지만, 

어머니에게 배운 약초 지식과 타고난 관찰력으로 주변의 식물을 이해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이는 그녀의 평생을 지배할 운명의 밑그림이었다.


1760년대 초, 잔의 삶은 당시 유명한 식물학자 필리베르 코메르송(Philibert Commerson, 루이 15세의 왕실 박물학자)을 만나면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았다. 

코메르송은 그녀의 고향 근처에서 연구 중이었고, 잔은 그의 집 가정부로 들어가게 된다. 

코메르송은 아내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잔은 그의 집안일을 돌보는 동시에 그의 식물 연구를 보조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곧 주종 관계를 넘어 연인 관계로 발전했고, 

1764년에는 두 사람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기에 이른다. 

결혼하지 않은 두 남녀 사이의 출산은 당시의 엄격한 사회 규범 아래에서는 큰 스캔들이었다. 

코메르송은 공식적으로 아이의 아버지를 밝히지 않았고,

 아이는 파리(Paris, 프랑스의 수도)의 고아원에 맡겨진다. 

이후 두 사람은 작은 마을의 시선을 피해 파리로 이사했고, 

잔은 공식적으로는 코메르송의 하인이자 비밀리에 그의 과학적 동반자로 활동을 이어갔다.


"필리베르 코메르숑 | Philibert Commerson, naturalist"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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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5년, 코메르송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프랑스 해군 제독 루이 앙투안 드 부갱빌(Louis Antoine de Bougainville, 프랑스 최초의 세계 일주 항해 대장)이 이끄는 세계 일주 탐험대의 공식 식물학자로 임명된 것이다. 

탐험의 목적은 새로운 영토를 발견하고 프랑스에 이익을 줄 수 있는 

희귀한 식물 표본과 광물들을 수집하는 것이었다. 

코메르송은 몸이 약했고(특히 만성적인 다리 궤양으로 고통받았음), 

방대하고 육체적으로 힘든 식물 채집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신뢰할 수 있는 조수가 절실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단 한 사람, 잔 바레뿐이었다.


문제는 단 하나. 

당시 프랑스 해군법은 여성의 군함 승선을 엄격히 금지했다. 

잔은 여성으로서 탐험대에 합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식에 대한 잔의 강렬한 열망과 코메르송에 대한 헌신(그리고 어쩌면 코메르송의 일방적인 요청)은 

이 금기를 깨는 결정을 낳았다. 

그들은 잔을 남자, 즉 '장 바레(Jean Baret)'로 위장시키기로 했다. 

가슴을 천으로 압박하고 헐렁한 남자 옷을 입는 것, 

머리를 짧게 자르고 목소리를 굵게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잔은 자신이 탐험을 함께 하고 싶은 욕망을 이 위장술 속에 깊숙이 숨겼다. 

이것은 단순한 모험이 아니라, 그녀의 지식과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한 목숨을 건 선택이었다.


"잔 바레, 선원 복장 | Jeanne Baret in sailor’s dress"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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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6년 12월, 잔은 장 바레라는 이름으로 탐험선에 승선했다. 

배는 보급선인 에투알호(Étoile, 프랑스어로 '별'을 의미)였다.

과학 장비가 많다는 이유로 선장 지라도에가 자기 큰 선실을 코메르숑과 조수에게 내줬다. 

선실엔 개별 화장실이 있었다. 

공동 화장실을 피해야 했던 잔에게, 이것만큼 든든한 위장 장치도 없었다. 

116명이 넘는 선원과 병사들이 탄 좁고 폐쇄적인 공간, 그 안에 잔은 숨겨진 비밀을 안고 들어섰다. 

탐험대의 총책임자인 부갱빌은 이 사실을 몰랐으며, 오직 코메르송만이 잔의 비밀을 공유한 동조자였다. 

그들의 기나긴 운명적인 항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바다 위의 은밀한 과학 (Development: Secret Science At Sea)

항해가 시작되자 잔의 역할은 단순한 하인이 아니라 

코메르송의 가장 능숙하고 신뢰할 수 있는 과학 조수임이 입증되었다. 

코메르송은 배멀미와 지병으로 고생하는 일이 잦았고, 

육지 탐사 중에도 다리 궤양 때문에 움직이기 힘들 때가 많았다. 

이때 잔은 실질적인 채집과 표본 작업을 도맡았다. 

그녀는 무거운 식물 압축기(Wooden Plant Press)를 짊어지고 

험난한 밀림과 습지를 누비며 수천 점에 이르는 표본을 모았다.


배 위에서 위장을 유지하는 것은 잔에게 지옥과 같은 고통이었다. 

선원들의 가장 큰 의문은 '장'이라는 이 젊은 조수가 왜 그토록 수줍음이 많으며, 

 왜 다른 선원들과 함께 공동 화장실을 사용하거나 옷을 갈아입는 것을 극도로 피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코메르송은 이러한 의문을 잠재우기 위해 잔이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 당시 유럽의 주요 적이자 이슬람 국가)의 포로였을 때 거세(Eunuch)당했다고 설명했다는 전승(Legend)이 있다. 

이 '거세된 조수'라는 설정은 잔의 어색한 행동을 설명해주었고, 

동시에 호기심 많고 거친 선원들의 접근을 막아주는 방패막이 되었다.


1767년, 탐험대는 남대서양을 건너 

남미의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 브라질의 주요 항구도시)에 정박했다. 

이곳에서의 탐사는 잔 바레와 코메르송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를 낳았다. 

바로 덩굴식물인 부겐빌레아(Bougainvillea, 화려한 꽃을 피우는 남미산 덩굴식물)의 발견이다. 

코메르송은 탐험대장의 이름을 따서 이 식물에 이름을 붙였지만, 

실제 야외 채집의 대부분은 잔 바레의 몫이었다. 

코메르송은 훗날 잔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바레티아(Baretia)'라는 속(Genus)을 헌정하려 했지만, 

이는 공식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처럼 잔의 업적은 항상 동반자이자 연인인 코메르송의 이름 뒤에 가려지거나 아예 무시되었다. 

이는 그녀가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당시 사회로부터 받은 가장 큰 과실이자 비판거리이다.


"리우 보타포구 만의 풍경 | Botafogo Bay, Rio de Janeiro (engraving)"
Public Domain (Biblioteca Nacional do Brasil via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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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서 잔의 위장은 점점 취약해졌다. 

선원들 사이에서는 '장'의 진짜 성별에 대한 소문이 점차 커져갔다. 

특히 코메르송과 잔이 선장의 사적 공간에서 함께 숙식하며 은밀한 관계를 이어갔던 것(선원들에게는 단지 '환자를 간호한다'고 설명됨)은 끊임없는 가십의 대상이 되었다. 

잔의 인간관계는 코메르송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으며, 

다른 선원들과는 필요 최소한의 업무적 관계만을 유지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불안정한 시한폭탄이었다.


정체성의 폭발과 좌절 (Turn: The Explosion of Identity and Frustration)

항해는 약 2년 동안 이어졌고, 1768년 4월 탐험대는 남태평양의 타히티(Tahiti, 폴리네시아의 섬)에 상륙했다. 

이곳에서 잔의 오랜 위장술은 결국 종말을 고한다. 

타히티 원주민들(Tahitian Natives)은 유럽인들의 옷차림이나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여성과 남성의 구분에는 매우 명확했다. 

부갱빌의 공식 일지 기록에 따르면, 원주민들은 즉시 장 바레가 여성임을 알아챘고, 

 흥분한 원주민 무리가 잔을 에워싸고 공격하려 들었다. 

이 극적인 상황은 선원들에 의해 저지되었고, 

이 일은 잔의 정체가 선원들 모두에게 공개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코메르숑의 타히티 스케치 | Commerson’s drawings from Tahiti"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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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발각'의 순간에 대해서는 역사적 기록이 매우 논쟁적이다. 

부갱빌은 타히티 원주민들이 발각했다고 기록했지만, 

탐험대 내부의 다른 인물(특히 잔과 코메르송을 싫어했던 선원 비브(Vivès, 에투알호의 항해사))의 회고록은 더욱 어둡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일부 선원들이 잔의 성별에 대한 확신을 갖고 뉴 아일랜드(New Ireland, 현재 파푸아뉴기니의 섬) 등지에서 그녀를 강제로 검사(강제 추행)했다는 주장, 심지어 잔 바레가 선원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끔찍한 소문과 정황 증거(후에 출산했다는 설)까지 나왔다. 

잔 바레 개인이 겪은 개인적 고난(Trauma)과 스캔들이다. 

이러한 충격적인 사생활의 침해는 여성이 과학을 위해 금기를 깼을 때 지불해야 했던 끔찍한 대가를 드러낸다.


"타히티에 도착한 부갱빌 일행 | Bougainville at Tahiti (engraving)"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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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가 드라난 후 잔은 더 이상 남성복을 입을 필요는 없었지만, 그녀의 삶은 더욱 제한적이고 위험해졌다. 

그녀는 항해 규정을 어긴 '불법 승선자'가 되었고, 

배 안에서의 권위와 안전은 다시 코메르송의 보호에 의존해야 했다. 

코메르송은 분면 그녀의 식물학적 가치를 알았기에 탐험대장이었던 부갱빌에게 잔의 가치를 필사적으로 설명했을 것이다. 

부갱빌 또한 잔의 업적에 깊은 인상을 받아 그녀를 처벌하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선박 내의 규율 유지를 위해 두 사람의 계속된 동행은 불가능했다.


"루이 앙투안 드 부갱빌 | Louis-Antoine de Bougainville"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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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768년 말, 탐험대가 모리셔스(Île de France, 당시 프랑스령 식민지)에 도착했을 때, 잔과 코메르송은 배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잔은 세계 일주라는 역사적인 목표를 눈앞에 두고 하차하는 좌절을 맛보았다. 

이것은 탐험가로서의 가장 큰 실패로 기록될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다리 지병이 더욱 악화되어 도저히 항해를 계속할 수 없었던 연인을 간호하기 위해 함께 남았다. 

잔은 자신의 안위와 개인적인 꿈보다 코메르송에 대한 의리와 책임을 선택한 것이다.


"부갱빌 부되즈·에투알의 세계일주 항로 | Route of Boudeuse & Étoile (1766–69)"
CC BY-SA 3.0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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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귀환과 후대의 평가 (Conclusion: The Solitary Return And The Later Assessment)

모리셔스에서의 삶은 잔에게 또 다른 고난의 시기였다. 

모리셔스 식물원(팜플무스)을 거점으로 마다가스카르·레위니옹까지 종종 원정을 나갔다. 

현지 네트워크는 잔에게 독립적 채집 루트를 열어 줬다.

코메르송은 섬에서 새로운 연구를 계속했지만, 1773년 결국 병세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다. 

잔은 순식간에 타국에서 혼자 남겨진 미망인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코메르송이 프랑스에 남긴 빚과 유산 문제로 인해 그녀의 경제적 상황은 매우 열악해졌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잔은 생계를 위해 술집에서 일하거나 음료를 팔았으며, 심지어 안식일(Sabbath 일요일)에 주류를 판매한 죄로 벌금을 물기도 했다. (50리브르) 

탐험가의 영광과는 거리가 먼 고단한 삶이었다.


그러나 잔 바레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모리셔스에 머무는 동안 그녀는 장 뒤베르나(Jean Dubernat, 프랑스 해군 병사)라는 군인과 만나 결혼했다. 

1774년, 잔과 뒤베르나는 결혼식을 올렸고, 1775년 마침내 프랑스로 돌아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이로써 잔 바레는 여성 최초로 세계 일주(Circumnavigation)를 완수한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다. 

비록 영광스러운 탐험대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한 남자의 아내로서 조용히 귀환했지만 말이다.


프랑스로 돌아온 후 잔은 코메르송의 유언에 따라 자신에게 남겨진 금액을 받기 위해 정부와 오랜 법정 싸움을 벌였다. 

그녀의 존재와 업적을 알고 있던 부갱빌 제독은 잔의 어려운 상황을 묵과하지 않았다. 

부갱빌은 잔의 '용감하고 헌신적인 봉사(Courageous and Devoted Service)'를 증언하며 루이 16세(Louis XVI, 프랑스의 국왕)에게 탄원했고, 결국 잔은 연금(Pension)을 받게 된다. 

이것이 그녀의 업적에 대한 공식적인 최초의 인정이었다. 

1807년, 잔은 생타울라이(Saint-Aulaye)에서 남편과 함께 조용히 여생을 마쳤다.


잔 바레는 수세기 동안 역사 속에서 잊힌 인물이었다. 

그녀의 수많은 식물 표본들은 모두 코메르송의 이름으로 박물관에 기록되었고, 그녀의 이름은 단지 코메르송의 '하녀' 혹은 '정부'로만 간혹 언급되었다. 

이는 당시 여성의 업적을 기록하지 않거나 남성의 공로로 돌려버리는 사회적 비판적 관습 때문이었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며 상황은 변했다. 

다니엘 클로드(Danielle Clode), 글리니스 리들리(Glynis Ridley) 등 현대 역사가들의 끈질긴 연구를 통해 잔 바레의 숨겨진 업적이 재조명되었다. 

특히 2012년에는 남미에서 발견된 감자과 식물에 공식적으로 솔라눔 바레티아에(Solanum baretiae)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변이 잎’의 형질은 위장과 경계 넘기를 상징한다는 코멘트까지 붙었다.

이로써 300년 가까이 묻혀있던 잔 바레의 업적은 마침내 과학적으로 영구히 기록되었다.


후대의 평가는 잔 바레를 단순히 '남장을 한 여자'가 아니라, 18세기 계급과 성별의 제약을 뛰어넘어 과학적 탐험의 영역에 발을 디딘 용감한 개척자(Pioneer)로 기억한다. 

그녀의 이야기는 단순한 낭만적 모험이 아니라, 여성이자 농민 계급 출신으로서 지식과 열정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한 인간의 숭고한 인간 드라마이며, 오늘날까지 문화적 영감(Cultural Influence)을 제공하는 영화적 서사의 원천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녀의 인생은 성공과 좌절, 업적과 고난이 다 섞인 복잡하지만 빛나는 여정이었다.


이 글은 신뢰할 수 있는 1차·권위 자료(부갱빌 항해기·선상 기록, 코메르숑 표본 자료, 

모리셔스 거주 관련 문서, 프랑스 왕실 연금 기록, 현대 연구서 등)를 대조하여 작성했습니다. 

수치·용어는 최신 연구에 맞춰 정돈했고, 

논쟁이 남은 대목(타히티/뉴아일랜드 정황·폭력성)은 확인 가능한 범위에서만 서술했습니다. 

사실 오류나 더 나은 사료 제보를 환영합니다. 

확인 즉시 반영하겠습니다.



Jeanne Baret (1740–1807), a peasant-born herbalist from Burgundy, became botanist Philibert Commerson’s partner and disguised herself as “Jean” to join Bougainville’s Pacific voyage (1766). 
She collected thousands of specimens—famously bougainvillea—while hiding aboard Étoile. Outed in Tahiti amid threats, she left at Mauritius, nursed Commerson until his death, then married Jean Dubernat and returned to France, completing the first female circumnavigation. 
In 2012, Solanum baretiae honored 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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