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영: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발해를 세운 영웅의 실화와 논쟁 (Dae Jo-yeong)

 

깨어진 뿌리 (Introduction: The Shattered Roots)


668년, 고구려 평양성(平壤城, 고구려의 수도).


함락 직전의 성벽은 불길과 비명으로 뒤덮여 있었다. 

700년 역사의 거대한 제국 고구려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순간이었다. 

대조영(大祚榮, 발해의 초대 군주)은 스물여덟 즈음의 젊은 장수로 전해진다.

그의 출신에 대해서는 논쟁이 많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그를 속말말갈(粟末靺鞨,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살던 부족)의 추장이라고 기록했으나, 대다수의 역사 해석은 그가 고구려 귀족이나 지배층 출신이었을 가능성을 높게 본다. 

그의 아버지 대중상(大仲象, 고구려의 장수이자 훗날 진국공) 역시 고구려의 무장이었으리라 추정된다. (고구려인 혹은 고구려에 깊이 동화된 말갈인 혈통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영주 관아에는 무측천 정권이 동방의 유력자에게 작위를 미끼로 회유한다는 풍문이 돌았다. 

대중상에게도 ‘진(震) 공’ 칭호가 오르내렸다는 말이 퍼졌고, 유민들 사이에서는 “받으면 배신, 거절하면 영웅”이라는 양날의 칼로 회자되었다.


고왕 대조영 표준영정

대조영은 성벽 위에서 패배의 잔해를 바라보았다. 

당나라(唐, 중국의 거대 왕조)의 수십만 대군과 신라(新羅, 한반도 남부의 왕국)의 협공으로 고구려는 무너졌다. 

그의 가슴에는 분노와 함께 끓어오르는 무력감이 자리했다. 

그는 살아남아야 했다. 혼자가 아니었다. 수많은 고구려 유민(流民, 나라를 잃고 떠도는 백성)이 그에게 희망을 걸었다.


평양성이 함락된 직후, 대조영과 대중상 일가는 다른 수만 명의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당나라의 포로가 되어 강제로 이주당했다. 

그들이 끌려간 곳은 당나라의 핵심 방어선 중 하나인 영주(營州, 현재 중국 요서 지역, 당나라의 주요 군사 행정 구역)였다. 

이곳에는 이미 멸망한 돌궐(突厥), 거란(契丹), 해(奚) 등 여러 민족의 포로와 유민들이 뒤섞여 있었다. 

영주는 겉으로는 당나라의 행정 구역이었지만, 실상은 동방 민족들의 '감옥이자 화약고'였다.

영주 성문 밖에는 군량과 가축, 모피와 철부치가 뒤섞인 장이 섰다. 

돌궐·거란·고구려·말갈 사람들이 서로의 말 몇 마디와 손짓으로 흥정을 봤다. 

대조영은 이 장터에서 말갈 지도층 소식을 꾸준히 모았고, 그 정보망이 훗날 동맹의 밑천이 되었다.


"당 제국의 판도(7세기) | Territory of the Tang Empire, c. 660 CE"
CC BY-SA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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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영의 청년기는 잃어버린 조국의 그림자와 당나라의 감시 아래에서 흘러갔다. 

그는 노예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으나, 당의 지배·감시 아래에서 조직과 전술을 접했다

그는 낮에는 운반·경비에 묶였지만, 밤에는 당의 점호·호령·군량 배분표를 눈으로 외웠다. 

패자의 무기는 적의 장점 기록이었다. 

이때 익힌 중간보급·정찰-기습-철수의 사이클이 천문령에서 그대로 쓰인다.

고구려의 용맹함은 이미 그의 피 속에 흐르고 있었지만, 적의 강점을 배우는 것은 패자(敗者)가 생존하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대중상은 끊임없이 아들에게 속삭였다. 

"우리의 뿌리는 평양에 있다. 이 고난은 잠시일 뿐, 저들을 섬기는 것은 우리의 복수를 준비하는 과정이다." 

이 시기에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들 사이에서 조용한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그의 뛰어난 체력과 무예뿐만 아니라, 냉철한 판단력과 뛰어난 언변은 지친 유민들에게 희망의 불씨가 되었다.


잔혹한 감시와 노동 속에서도 그는 말갈(靺鞨)족의 여러 부족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익혔다. 

특히 속말말갈의 유력 가문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었는데, 이는 훗날 발해 건국에서 말갈족을 포용하고 통합하는 기반이 되었다. 

고구려의 명맥을 이으려는 대조영의 노력과, 당나라의 핍박에 시달리던 주변 민족들의 분노가 영주라는 좁은 공간에서 용광로처럼 끓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거대한 폭발을 기다리는 전조였다.


거란의 불꽃 (Development: The Flames of Khitan)

7세기 말, 당나라는 무측천(武則天, 당나라의 여황제)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무측천은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주변 민족들을 더욱 가혹하게 통제했고, 영주에 모인 유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696년, 마침내 폭발이 일어났다.

영주 북쪽 초소에서 연기봉 하나가 이틀 내리 올랐다. 

거란이 먼저 움직였다는 침묵의 신호였다. 

대조영은 그 즉시 사람을 흩어 식량과 말을 끌어모았다. 

탈출은 봉기보다 한 박자 빨라야 했다.


영주도독 조문홰(趙文翽, 당나라 영주 지역의 책임자)가 거란족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자, 거란의 추장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반기를 들었다. 

이것이 바로 이진충의 난(李盡忠之亂)이다. 

난이 발생하자 당나라의 통치력이 급속도로 와해되었고, 영주는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대조영에게는 이것이 하늘이 준 기회였다.


대조영과 대중상은 즉시 이진충의 거병에 합류하는 대신, 고구려 유민 집단을 이끌고 독자적인 탈출 계획을 세웠다. 

이진충과 손만영은 당과의 싸움에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이 기회를 틈타 영주를 탈출하여 고구려의 옛 영토로 돌아가는 것이 목표였다. 


"이진충·손만영의 거란 반란 경로 | Map of the Khitan Rebellion"
CC BY-SA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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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상과 대조영이 이끄는 대규모 고구려 유민과 일부 말갈 세력은 북쪽 만주 지역, 즉 고구려의 옛 요충지를 향해 목숨을 건 대장정을 시작했다. 

그들의 뒤에는 당나라의 추격군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고, 앞에는 험준한 산맥과 예측 불가능한 말갈 부족들이 버티고 있었다. 

대조영의 인간 관계가 빛을 발한 것도 이때다. 

그는 고구려 유민들 외에도 영주 주변에 흩어져 있던 걸사비우(乞四比羽, 속말말갈의 유력 지도자)가 이끄는 말갈족 집단과 연합하는 데 성공했다. 

걸사비우는 대조영의 뛰어난 무력과 통솔력에 깊은 신뢰를 보냈고, 두 세력은 피의 맹세를 맺었다.

두 무리는 잔에 소금과 흙을 한 줌씩 떨어뜨려 돌려 마셨다(전승). 

“오늘부터 강의 물길이 합쳐지듯 우리 길도 하나다.” 

동맹은 단순한 서약이 아니라, 추격을 버티는 공동 보급선 약속이었다.


이들의 행렬은 압록강(鴨綠江)과 송화강(松花江) 유역의 험한 산악 지대를 통과하며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당군의 추격을 견뎌야 했다.

강폭이 넓은 구간에서는 밤에 갈대 뗏목을 엮어 이동했고, 물살이 가파른 곳은 기병의 안장을 엮어 부유물을 만들었다. 

소년들은 말고삐를 붙잡고 헤엄쳤고, 노인과 아이는 말갈 전사들의 말에 둘러매 건넜다.

이 과정에서 대중상은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하자 군사적 지휘를 아들 대조영에게 대부분 위임했다. 

병세가 깊어진 밤, 대중상은 장막 밖 소나기 소리를 들으며 말했다. 

“성(城)을 되찾는 것보다 먼저, 사람을 잃지 마라.” 

이 한 줄이 이후 대조영의 포용 인사 원칙으로 남는다.

대조영은 지친 유민들에게 강인한 의지를 불어넣고, 때로는 강경한 카리스마로 질서를 유지했다.


한편, 거란족의 봉기는 당나라를 더욱 혼란에 빠뜨렸다. 

이진충이 사망한 후, 손만영이 전쟁을 이어갔지만 결국 697년 당나라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제 당나라의 시선은 영주에서 탈출한 대조영과 걸사비우 연합군에게로 향했다. 

당나라는 고구려 부흥의 싹을 완전히 잘라내고자 추격군을 조직했다.


대조영은 이를 예상하고 천문령(天門嶺, 거란과 고구려 유민의 활동 경로상 요충지)이라는 전략적 요충지를 선택했다. 

이곳은 험준한 산악 지대로, 소수 병력으로 대규모 적을 막아낼 수 있는 천혜의 방어선이었다. 

대조영은 이곳에서 당나라의 추격군을 격파함으로써, 자신이 더 이상 도망자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여는 지도자임을 증명해야 했다.


천문령의 피 맹세 (Turn: The Blood Vow of Cheonmunryeong)

698년, 대조영과 걸사비우(乞四比羽, 속말말갈의 유력 지도자)가 이끄는 연합군은 당나라의 추격을 따돌리고 고구려 옛 영토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당나라는 거란의 난(李盡忠之亂)을 진압한 후, 고구려와 말갈의 연합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맹렬하게 추격했다. 

당나라의 추격군 사령관은 이해고(李楷固, 거란계로 무주/당 휘하 장수)였다. 

그는 같은 동방 민족 출신이었기에 대조영의 전술과 이동 경로를 잘 알고 있었으며, 잔혹하고 유능한 지휘관이었다. 

대조영의 입장에서 이해고는 가장 위협적인 적이자, 당나라에 투항한 동족의 배신자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이해고는 가벼운 기병으로 먼지구름만 일으키며 뒤쫓았다. 

정면 충돌 대신, 후방 보급대를 끊어 굶기는 방식이었다. 

대조영은 기만 흔적(불 꺼진 화톳재, 일부러 남긴 말발굽 자국)으로 그 눈을 속였다.


대조영은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대중상과 상의 끝에 천문령(天門嶺, 만주 지역의 험준한 산악 요충지)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이곳은 좁은 골짜기와 험한 지형 덕분에 소수 병력으로도 대규모 당군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는 천혜의 방어선이었다. 

대조영은 고구려의 전통적인 산성 방어술과 기마 전술을 결합할 계획을 세웠다.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 대조영은 연합군의 사기를 북돋았다. 

그의 연설은 유민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우리가 쫓겨온 지 수십 년! 우리의 피가 저들의 노예가 되는 것을 보았다! 오늘 이곳 천문령에서 싸우는 것은 단순히 생존을 위함이 아니다! 고구려의 태양을 다시 띄우기 위함이다!"


그러나 비극이 먼저 찾아왔다. 

대중상이 오랜 피난 생활과 병세 악화로 천문령 전투 직전 숨을 거둔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대조영에게 엄청난 충격이자 동시에 마지막 결의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 기록에는 대중상의 사망 시기가 명확하지 않으나, 천문령 전투를 전후해 사망하고 그가 이끌던 세력이 대조영에게 통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아버지가 무너진 제국을 상징하고 아들이 새 제국을 여는 영화적 서사에 필수적인 희생이다.)


아버지의 유지를 받든 대조영은 곧바로 전열을 정비했다. 

전투는 치열했다. 

당나라의 이해고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맹렬히 공격해왔지만, 대조영은 지형을 이용한 게릴라 전술과 고구려 기병의 돌파력을 혼합하여 당군을 깊은 골짜기로 유인했다. 

특히 걸사비우가 이끄는 말갈 기병들은 산악 지형에서 짐승처럼 날뛰며 당군을 교란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전황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기도 했다. 

격전 중에 걸사비우가 이해고의 군대에 의해 전사(戰死)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대조영의 가장 굳건한 동맹이자 형제나 다름없던 걸사비우의 죽음은 연합군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장막 안에는 추장 깃발만 조용히 세워 두었다. 

대조영은 밤새 그의 부족어로 추도문을 외웠다. 

다음 날, 그는 걸사비우의 기병 깃발을 맨 앞에 세웠다. 

연합군은 눈물을 삼키고 속도를 올렸다.


대조영은 개인적인 슬픔과 분노를 억누르고, 걸사비우의 남은 부족들을 통합하여 직접 지휘했다. 

고구려인과 말갈인의 피가 천문령 계곡을 붉게 물들였다. 

최후의 순간, 대조영은 직접 정예 기병을 이끌고 이해고의 본진을 기습 공격하는 도박을 감행했다. 

대조영의 용맹함과 압도적인 통솔력에 무너진 당군은 완전히 와해되었고, 이해고는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도주했다.


천문령 대첩(天門嶺大捷)이었다. 

이 승리는 단순한 전투 승리가 아니라, 멸망한 고구려의 유민들이 당나라에 대한 복수와 독립을 선언한 역사적 선포나 다름없었다.


동방 제국, 진국(震國)과 발해(渤海)의 새벽 (Climax & Resolution: The Dawn of Jin and Balhae)

천문령에서의 승리 후, 대조영은 살아남은 유민과 말갈 부족들을 이끌고 동모산(東牟山, 현재 중국 길림성 돈화시 부근으로 추정되는 발해 초기 수도) 기슭에 정착했다. 

그는 아버지 대중상의 뒤를 이어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고, 698년에 새로운 국가 진국(震國)을 건국했다. (훗날 713년 당나라가 정식으로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하면서 국호를 발해(渤海)로 바꾸게 된다.)

‘진(震)’은 안쪽 결속을 다지는 북소리였고, ‘발해(渤海)’는 바다를 통해 밖으로 말을 거는 이름이었다. 

대조영은 해상 교역의 문을 염두에 두고 국호를 외향적으로 다듬었다는 해석이 뒤따른다(학계 해석 존재).


"발해 목판 | Wood slips of Balhae"
CC0 Public Domain(Author: Gary Todd, via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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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영은 건국 초기부터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려 노력했다. 

그의 통치 방식은 고구려의 전통을 기반으로 하되, 말갈족을 포함한 다양한 민족을 포용하는 다민족 융합의 성격을 띠었다. 

그는 고구려 유민(지배층)과 말갈족(피지배층 및 군사력)을 이원적으로 운영하는 독특한 통치 시스템을 구축했는데, 이는 발해가 200년 넘게 동방의 강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대조영의 사생활에 대한 기록은 매우 희박하여 대부분 추론에 의존한다. 

다만, 그의 혼인 관계는 정치적 필요에 의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말갈 부족과의 연합을 공고히 하기 위해 걸사비우나 다른 말갈 유력 가문의 여인과 혼인했을 것이라는 전승이 존재한다.


그의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는 아버지 대중상과 동맹 걸사비우였고, 이후에는 두 아들로 이어졌다.


대무예(大武藝, 훗날 발해 2대 황제 무왕)가 대조영의 뒤를 이어 발해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는 대조영의 강인한 리더십과 군사적 재능을 물려받아 대당(對唐) 강경책을 펼쳤다.


대문예(大門藝, 대무예의 동생)는 무왕의 치세 때 당나라로 망명하여 형과 대립했던 인물이다. (형제 간의 갈등은 대조영 사후 발해 정치의 불안정 요소를 보여주는 극적인 스캔들이자 역사적 사실이다.)


대조영은 재위 기간 동안(698/699–719) 이들 아들에게 고구려의 멸망을 되풀이하지 말 것을 끊임없이 가르쳤으며, 외교와 군사를 분리하는 이중적 교육을 시켰으리라 짐작된다.


"8세기 통일신라와 발해 | Unified Silla and Balhae (8th c.)"
CC BY 2.0 (Flickr→Wikimedia Commons, National Museum pan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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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영은 위대한 영웅이었지만, 그의 통치에도 역사적 비판이 따른다.

대조영은 고구려의 완전한 영토를 회복하지 못했다. 

이는 그의 과실이라기보다는 당나라, 신라, 돌궐 등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힌 당시의 지정학적 한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의 유산을 완전히 계승하지 못한 것은 유민들 사이에서 아쉬움으로 남았을 수 있다.


말갈족을 대거 포용하고 고구려인과 섞어 통치한 것은 발해의 생존을 위한 필수 전략이었지만, 건국 직후에는 내부 민족 간의 갈등과 불만이 끊이지 않는 정치적 과제였다. 

이는 훗날 대문예의 망명 등 내부 분열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대조영이 고구려 멸망이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비극 중 하나에서 절망하지 않고, 흩어진 민족들을 규합하여 새로운 제국을 세운 창조적 업적은 시대를 초월하는 위대함으로 평가된다.


대조영은 유연하고 실리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당나라에 대해서는 군사적 충돌을 피하고 조공 무역을 통해 실리를 취하는 화친 정책을 썼다. 

705년 당나라가 사신을 보내 화해를 시도하자, 대조영은 고구려 부흥의 의지를 꺾지 않으면서도 당과의 관계를 개선했다.


또한, 돌궐(突厥, 몽골 고원 일대의 강대한 유목 민족)과의 긴밀한 연대를 통해 당나라를 견제했다. 

이러한 실리 외교 덕분에 발해는 건국 초기 안정적으로 기반을 다질 수 있었으며, 대조영은 719년 사망할 때까지 21년간 안정적으로 국가를 통치했다.


대조영이 세운 발해는 고구려의 강성함을 계승하여 해동성국(海東盛國, 바다 동쪽의 번성한 나라)이라 불리며 200년 넘게 지속되었다. 

그는 한민족의 역사에서 고구려의 정신과 영토를 지킨 구원자이자 중흥조로 기억된다.


남쪽의 신라(新羅)는 발해를 북방의 '말갈' 세력으로 폄하했으나, 발해는 스스로를 고구려의 계승자라 칭하며 '남북국 시대(南北國時代)'를 열었다.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발해의 정체성을 두고 '고구려 계승국(한국사)'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말갈족의 국가(중국사)'로 볼 것인가에 대한 첨예한 논쟁이 있다. 

대조영의 출신 성분 논란이 이 논쟁의 핵심이다. 

그러나 발해의 지배층이 고구려 유민이었고 통치 체제와 문화(온돌, 성곽 건축 양식 등)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점에서, 대조영은 고구려의 정통성을 이은 영웅으로 평가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대에 이르러 대조영의 삶은 패배를 딛고 일어선 부활의 서사로 각광받았다.

2000년대 후반에 제작된 KBS 드라마 '대조영'은 그의 일대기를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시킨 사례다. 

이 드라마는 멸망의 비극 속에서 고구려인의 불굴의 정신을 재조명하며 시청자들에게 큰 감동과 민족적 자긍심을 선사했다.

대조영은 좌절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복잡한 민족적 배경을 통합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현대인들에게 위기 극복과 창업 정신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2006년작 드라마 대조영
KBS

대조영의 삶은 잃어버린 조국의 그림자 속에서 시작되었으나, 그가 선택한 길은 동방에 새로운 새벽을 여는 찬란한 빛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아직도 우리에게 진정한 리더십과 민족 통합의 의미를 되묻고 있다.


이 글은 『신당서(新唐書)』·『구당서(舊唐書)』·『삼국사기(三國史記)』·『요사(遼史)』 등 기본 사료와, 천문령 전투·영주 이탈·동모산 비정·국호 전환(진→발해) 관련 국내외 연구를 대조해 서사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 

대조영의 출생연도·영주 탈출 인원·대중상 작위 표기(‘진공’)·걸사비우 전사 시점·천문령의 정확한 위치 등은 사료 해석이 갈리는 대목이므로, 본문에서는 확정적 단정 대신 통설과 유력설을 우선했습니다. 

사실 오류나 더 나은 사료 제보는 언제든 환영합니다. 

확인 즉시 반영하겠습니다.


After Goguryeo’s fall (668), Dae Jo-yeong—likely of Goguryeo elite, allied with Mohe—was moved to Tang’s Yingzhou, where he learned enemy systems under watch. 
When the Khitan rose (696), he led Goguryeo refugees and Mohe under Gulsabiwu in a breakout north. 
Pursued by Tang’s Khitan-born general Li Kaigu, he chose Tianmenling’s defiles and won a decisive victory (698). He then founded Jin (Zhen) near Dongmusan, later recognized by Tang as Balhae (713). 
Blending Goguryeo tradition with Mohe strength, he secured a durable 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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