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년 파리(Paris),
겨울비가 식은 담쟁이 잎을 두드리던 밤.
한 저택의 서재에서 불빛이 나왔다.
벽난로의 잿빛이 꺼져 가자 남자는 초를 붙잡았다.
피에르 드 쿠베르탱(Pierre de Coubertin).
그는 부드럽게 가죽 제본을 넘겼다.
종이 위에서 먼지가 춤추고, 그 먼지 사이로 무너진 기둥의 그림자가, 헐벗은 경기장의 흙 냄새가, 올림피아(Olympia)라는 지명이 살아났다.
“전쟁이 청년을 먹어치우는 시대라면, 운동장에서만큼은 서로를 적이 아닌 상대라고 부르게 해야 한다.”
그는 혼잣말을 했다.
누구도 듣지 못할 설득을, 누구나 듣게 만들려면, 세계가 모이는 장치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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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에르 드 쿠베르탱 초상 | Pierre de Coubertin portrait" Public Domain(미국 의회도서관/위키미디어 공용) 위키미디어 공용 | 
하지만 현실의 첫 장면은 거칠었다.
파리의 살롱에서는 체육이 ‘고상한 취미’인지 ‘하등한 노동’인지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영국의 클럽은 아마추어리즘의 순도를 저울질했고, 미국의 대학은 스포츠가 교육인지 오락인지 따졌다.
무엇보다 돈이 없었다.
폐허를 부활시키는 작업은 언제나 먼저 누군가의 지갑을 부른다.
그는 런던(London)으로, 보스턴(Boston)으로, 뉴욕(New York)으로 떠났다.
각 나라의 체육협회, 대학, 언론, 기업인.
그가 들고 간 건 계략이 아니라 비전이었다.
“4년에 한 번, 세계의 청년이 한 도시로 모여 뛰고 웃고 손을 맞잡는다면, 전쟁을 늦출 수 있습니다.”
차가운 응접실에서, 따뜻한 손이 간혹 나왔다.
1894년 6월 파리 소르본(Sorbonne). 탁자 위에 손이 올랐다.
그리스의 문인 디미트리오스 비켈라스의 손, 프랑스의 체육가들의 손, 각국 대표들의 손.
종이 한 장이 미끄러졌다.
그 종이는 이름을 갖게 된다.
국제 올림픽 위원회.
그리고 첫 개최지는 아테네(Athens).
누군가가 농담처럼 말한다.
“폐허에서 축제를?”
그 우려에 쿠베르탱은 웃었다.
“우리는 그 ‘폐허’라는 말부터 바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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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4 소르본 올림픽 회의 일정 | 1894 Sorbonne Olympic Congress schedule" Public Domain(IOC Olympic Studies Centre/위키미디어 공용) 위키미디어 공용 | 
1895년, 아테네의 바람은 소금기와 석회가루 냄새를 실어 나르며 오래된 돌을 핥았다.
파나티나이코(Panathenaic Stadium)는 흙먼지 위에 앉아 있었다.
기둥의 흔적은 아름다웠지만, 경기장의 기능은 쉬고 있었다.
왕궁의 회의실에서는 한숨과 계산기가 오갔다.
“돈이, 시간이, 인력이 부족합니다.”
그리스 재정은 취약했고 나라의 자존심은 그 재정보다 민감했다.
‘고대의 영예’라는 단어는 잘 울리지만, 대리석을 절단하는 기계 소리를 가리지는 못한다.
그때 나타난 이름이 있다.
조르지오스 아베로프(Georgios Averoff).
상인으로 세계를 다닌 그가, 수송기보다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대리석을, 사람을, 시간표를 책임지지요.”
그의 기부는 숫자였지만 도시에는 동사(動詞)였다.
멈춘 것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힘.
대리석은 펜텔리콘(Pentelikon) 산지의 흰빛을 띠고 돌아와, 관중석을 하나씩 쌓아 올렸다.
아테네의 골목에서는 품팔이들이 새벽에 일어났고, 목수는 가로등 밑에서 손을 녹였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무대 뒤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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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나티나이코 경기장 공사(1895) | Panathenaic Stadium under construction (1895)" Public Domain(BnF Gallica/위키미디어 공용) 위키미디어 공용 | 
왕세자 콘스탄티노스는 막대한 목록을 껴안고 뛰었다.
입장 행렬의 질서, 종목별 심판의 선발, 규정의 번역, 외국 대표단 숙소, 항만의 통관.
언론은 ‘그리스는 진짜 할 수 있나’라는 제목으로 하루 걸러 한 번씩 시비를 걸었다.
그럴수록 왕은 더 강하게 호소했다.
“우리는 이 일을 통해 우리가 누군지 세계에 보여 줄 것입니다.”
그런 말은 종종 귀에만 머물다 사라지지만, 이상하게도 이때는 발로 번역되었다.
교사들이 자원했고 대학생들이 모였다.
공사장을 지나는 여인들은 점심 보따리를 얹은 채 눈으로 응원했다.
그 무렵, 파리에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미셸 브레알(Michel Bréal).
고대 그리스어를 사랑한 언어학자이자 교육자.
“신화가 규칙이 되는 순간이 올지도 모릅니다.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달렸다는 전승을 경기로 만듭시다.”
조직위원회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천천히 끄덕였다.
거리? 대략 40킬로미터.
출발은 마라톤 평원, 결승은 파나티나이코.
이름은 더 묻지 않았다.
모두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마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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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셸 브레알 | Michel Bréal portrait"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아테네 북동쪽 마루시(Marousi).
스피리돈 루이스(Spyridon Louis)는 아침마다 물통을 지고 언덕을 넘었다.
그는 부자가 아니었고, 이름난 선수도 아니었다.
단지 다리가 강했고 심장이 성실했다.
마을의 노인들은 옛이야기를 했다.
페르시아 전쟁, 필리피데스, 먼지와 피맛, 승전의 소식.
젊은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밤에는 혼자 뛰었다.
별 아래에서, 먼지 위에서, 아무도 모르는 결승선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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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6 마라톤 연습, 바실라코스 | 1896 marathon training, Charilaos Vasilako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그리고 1896년 4월 6일.
대리석 관중석에 사람들이 들어찼다.
옷자락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왕이 서서, 선언했다.
“경기를 엽니다.”
함성은 돌로도 흡수될 수 없을 만큼 진했고, 오래된 도시가 새로 태어난 목소리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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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6 아테네 올림픽 개회식 | Opening ceremony, Athens 1896"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첫 금메달은 제임스 B. 코놀리(James B. Connolly)라는 미국인 청년에게 돌아갔다.
트리플점프. 그는 대학을 잠시 떠나 이곳까지 왔다.
육상의 토마스 버크(Thomas Burke)는 낮게 웅크려 출발했다.
다른 나라 선수들은 그 자세가 우스웠다고 한다.
하지만 총성이 울리자 웃음은 없어졌다.
100미터도, 400미터도 그의 것이었다.
로버트 개릿(Robert Garrett)은 급히 제작한 원반을 들고 멀리 던졌다.
원반은 허공에서 잠깐 머뭇거렸다가, 관성의 법칙을 충실히 따랐다.
테니스 코트에서는 흰 모자가 바람에 흔들렸고, 펜싱장의 예(禮)는 칼끝보다 먼저 빛났다.
수영은 바다의 냄새를, 체조는 인간의 균형을, 사격은 손의 침묵을 보여 주었다.
규정은 아직 서툴렀고 운영은 간혹 어설펐지만, 첫날의 허술함은 ‘최초’라는 이유 하나로 관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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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버크, 100m·400m 우승 | Thomas Burke, 100m & 400m champion"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그리고 모든 장면을 압도한 하루가 왔다.
4월 10일, 마라톤. 출발선에 25명이 섰다.
흙먼지와 햇살과 떨림.
사람들은 거리에 나와 눈으로 물을 건넸다.
외국 선수 몇이 빠르게 앞질러 나갔다.
루이스는 중간을 지켰다.
결승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데, 중간은 손에 잡히는 법이다.
그는 이후에, 그날 마신 물의 맛을 오래 기억하게 된다.
우물가의 시원함, 마을 처마의 그늘, 낯선 이의 손이 건네준 짭짤한 격려.
지쳐서 멈추는 이들이 하나둘 늘었다.
어깨가 떨어지고 발뒤꿈치가 무너졌다.
루이스는 ‘지금’만 보았다.
그 ‘지금’이 겹치고 겹쳐, 어느새 ‘선두’가 되었다.
파나티나이코의 골문에서 경호대가 움직였다.
왕자 니콜라오스와 콘스탄티노스가 계단을 내려왔다.
관중이 일어섰다.
한 남자가 먼지를 머리에 이고 나타났다.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동시에 같은 소리를 냈다.
“루이스!” 누군가 울었고, 누군가 모자를 던졌다.
청년은 두 왕자와 함께 결승선을 걸어 들어왔다.
기록 2시간 58분 50초.
올리브 관이 그의 머리 위에 얹혔다.
이웃들은 그에게 포도주를, 누군가는 당나귀를, 누군가는 이발 평생 이용권을 약속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는 웃었다. 사람은 그럴 때 웃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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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피리돈 루이스, 마라톤 우승자 | Spyridon Louis, marathon winner"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폐막이 다가오자, 아테네의 밤은 두 가지 마음을 품었다.
하나는 환희, 다른 하나는 욕심.
“올림픽을 아테네에서 영원히 하자.”
그 제안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했고, 어떤 의미에서는 무모했다.
쿠베르탱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이 축제는 세계가 돌아가며 주인이 되는 실험이어야 합니다.”
흰 대리석도, 오래된 신화도, 그 말을 막지 못했다.
결정은 파리. 다음 대회는 프랑스가 맡을 것이다.
그리스는 상처받지 않았고, 오히려 한 번 더 이 실험을 자기 손으로 해보겠다고 마음먹었다.
훗날 1906년, ‘중간올림픽’이라는 별칭으로 아테네는 다시 하나의 계절을 열었다.
세계는 순회했고, 도시는 차례로 주인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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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르요스 1세 초상 | King George I of Greece portrait"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물론 모든 빛에는 그림자가 따른다.
재정은 팽팽하게 당겨진 실 같았다.
훌륭한 기부가 있었다 해도 공사와 운영, 숙박과 치안, 인쇄와 통역, 음악과 꽃 장식까지 도시는 보이지 않는 비용으로 숨을 골랐다.
어떤 신문은 썼다. “열정은 훌륭하다. 하지만 열정은 영수증을 꺼내지 않는다.”
그 말은 불편하지만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도시가 얻은 것이 없는가?
복원된 경기장, 열흘 동안 이어진 평화의 대사관, 세계라는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
그것들은 대차대조표의 맨 마지막 줄, 숫자 대신 문장이 쓰이는 칸에 들어갔다.
아마추어리즘의 경계도 싸늘했다.
누가 아마추어인가? 돈을 받고 경기하면 프로인가? 돈 대신 학교의 장학금을 받으면? 클럽의 지원은? 국왕의 격려금은? 규정은 아직 명쾌하지 않았고, 각국의 관습은 달랐다.
판정은 의심을 낳았고, 의심은 소문을 낳았다.
하지만 그때의 서툼 덕분에 들어올 수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하루 벌어 하루 훈련하던 청년, 군복을 걸치다 운동복을 꺼낸 이들.
규정의 온도는 때로 문턱을 낮추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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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6 올림픽 공식 프로그램 | 1896 Olympic Games programme (French)"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은 관중석에 머물렀다.
경기장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했다.
고대의 전통을 따른다는 명분이 앞섰다.
하지만 ‘금지’는 늘 가장 빠르게 달리는 이의 발뒤꿈치를 물어뜯는다.
다음 대회, 파리에서 테니스와 골프가 조용히 문을 연다.
그 사이, 이름 없이 기록된 어떤 여인이 마라톤 코스를 홀로 달렸다는 이야기는 전설처럼 돌았다.
우리가 역사를 ‘영화’로 본다면, 그 장면에는 조명이 비친다.
해설은 없다. 숨소리만 남는다.
금지는 그렇게, 허공에 균열을 남긴다.
대회가 끝난 뒤, 루이스는 영웅의 하루를 접고 다시 일상의 수첩으로 돌아갔다.
마을의 길은 도로가 아니라 사람들로 포장돼 있었다.
누구나 그와 악수했고, 누구나 그에게서 ‘할 수 있다’는 문장을 조금씩 떼어 갔다.
왕은 그를 궁정으로 초대했고, 상인들은 기념엽서를 찍었다.
세월이 흘러 전쟁이 두 번 지나간 뒤에도, 아테네의 아이들은 길게 달리면 누군가가 루이스라고 불러 주었다.
이름은 그렇게, 시간의 택배가 된다.
쿠베르탱은 대리석을 떠나 종이로 돌아왔다.
그는 오륜기를 그렸고, 모토를 다듬었다.
“더 높이, 더 빠르게, 더 강하게.”
훗날 여기에 한 단어가 더 붙는다.
“함께.”
그는 이를테면 ‘교육학자’였지만, 사실은 ‘기획자’였다.
전 세계가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상징과 의식을 만들어 낸 기획자.
입장 행렬의 순서, 개폐회식의 음악, 깃발과 성화 모두가 자연스러워졌을 때, 그는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보이지 않는 사람은 종종 가장 큰 일을 해낸 사람이다.
1896년 아테네의 열흘은 기록으로 보면 작은 물방울이다.
그러나 물방울은 파문을 만든다.
열광은 국가의 감정에 자칫 과열을 부른다.
깃발의 색이 선수를 압도하고, 노래가 경기를 덮는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올림픽은 그 두 얼굴을 다 갖는다.
전쟁 앞에서 취소를 겪고, 정치의 장단에 춤추고, 보이콧과 언론전의 장이 된다.
상업주의의 폭우가 쏟아지고, 도핑의 그림자가 어깨에 올라탄다.
그런데도 왜 이 축제는 계속되는가?
아마도 대회가 도시를 바꾸고, 학교의 운동장을 바꾸고, 가정의 텔레비전을 바꾸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는 그때 처음 자기 몸이 만든 문장을 읽는다.
‘내가 여기까지 왔다’는 문장.
그 문장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파나티나이코의 대리석은 낮에는 햇빛을 반사하고, 밤에는 이야기의 체온을 반사했다.
그 관중석에 앉았던 어떤 소년은 훗날 체조의 코치가 되었고, 어떤 소녀는 라디오 앵커가 되어 선수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하는 연습을 했다.
상인들은 표와 포스터를 팔았고, 목수는 경기장의 벤치를 만들며 아들의 학비를 계산했다.
하나의 축제가 도시의 직업을 재배치하는 모습을, 우리는 숫자보다 인간의 표정에서 먼저 본다.
그리고 다시 파리. 1892년의 서재로 카메라가 되감기면, 한 남자의 분신이 남아 있다.
무너진 기둥의 꿈을 꿨던 사람, 먼지에서 규칙을 뽑아냈던 사람, 공포 대신 경쟁을 택하게 만들고, 경쟁을 통해 존중을 배우게 만들고, 존중으로 평화를 조금씩 지연시키려 했던 사람.
그 꿈이 과장인지, 순진인지 묻는다면, 아마 둘 다일 것이다.
꿈은 언제나 과장과 순진 사이에서만 자란다.
아테네의 마지막 밤, 파나티나이코 위로 바람이 지나갔다.
관중이 떠난 자리에는 종이조각과 발자국이 남았다.
청년들이 쓰레기를 줍고, 관리인이 대리석을 닦았다.
야간 경비는 하품을 참았다.
멀리서 발자국 소리가 났다.
누가 다시 트랙을 한 바퀴 돌았다.
누구였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안다. 그런 밤에는 늘 누군가가 뛴다.
좋은 일은 늘 그렇게 반복의 훈련에서 나온다.
그해 봄, 세계는 아주 작은 합의 하나를 얻었다.
말로 싸우는 대신 손으로 악수하고, 눈으로 응원하고, 발로 거리를 재보자는 합의.
그 합의는 해가 여러 번 바뀌어도 무너지지 않았다.
도시의 이름은 달라졌고, 깃발의 수는 늘어났고, 종목은 복잡해졌다.
어떤 날은 그 복잡함이 축제를 위협했다.
어떤 날은 그 복잡함 덕분에 더 많은 사람이 초대되었다.
올림픽의 본모습은 어쩌면 ‘완벽’이 아니라 ‘개선’일지도 모른다.
처음의 허술함에서, 다음의 숙련으로. 다음의 숙련에서, 또 다른 질문으로.
그 질문은 오늘도 유효하다.
우리에게 스포츠는 무엇인가? 국가를 자랑하는 현수막인가, 개인이 자기 몸과 화해하는 과정인가, 도시가 스스로를 재건하는 공사현장인가.
1896년 아테네에서 한 청년이 트랙에 남긴 발자국은, 여전히 화면을 넘어 우리 발 아래까지 번져 온다.
결승선은 늘 멀리 있다.
하지만 ‘지금’은 손에 잡힌다.
루이스가 보여 주었듯이.
오늘 밤, 당신의 도시에는 어떤 폐허가 있는가.
그리고 내일 아침, 그 폐허 위에 무엇을 다시 세울 것인가?
이 글은 1892–1896년 파리·아테네의 주요 사료와 권위 자료(IOC 아카이브, 예술·언론·회고 기록, 파나티나이코 복원 관련 자료, 미셸 브레알 제안 및 동시대 보도, 루이스 우승 관련 현지 기록 등)를 대조해 서사형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초기 올림픽의 규정·운영·참가 현황에는 공백과 해석 차가 남아 있음을 밝힙니다.
사실 오류나 더 나은 사료 제보를 환영하며, 확인 즉시 반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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