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바티스트 콜베르: 태양왕 재정개혁과 ‘콜베르주의’의 빛과 그림자 (Jean-Baptiste Colbert)


 장바티스트 콜베르: 태양왕의 그림자 재무관


회계사의 눈, 피폐한 왕국을 보다

1. 혼란의 시대와 젊은 야심가

17세기 중반, 프랑스 왕국(프랑스 국왕이 통치하던 절대왕정 국가)은 혼돈의 그림자 아래 놓여 있었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루이 14세(Louis XIV, 태양왕으로 불리는 절대군주)에게 남겨진 것은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부채와 귀족들의 반란인 프롱드의 난(Fronde Rebellion, 1648~1653년 귀족들이 왕권 약화를 틈타 권력 강화를 시도한 사건)으로 피폐해진 왕실 재정이었다. 

민중의 삶은 비참하기 그지없었고, 국왕 루이 14세는 어린 시절부터 권력의 피비린내를 맡으며 피난을 다녀야 하는 처지였다. 

이 시기, 절대왕정은 상공업자들과 손잡고 중상주의(重商主義, 국가의 부를 증진하기 위해 수출을 늘리고 수입을 억제하는 경제 정책)와 보호 무역 정책을 써서 나라의 부를 증가시키려 힘쓰고 있었다.

이러한 격랑 속에서, 장바티스트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 1619~1683년, 루이 14세 시대의 재무총감)는 조용히 자신의 역량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 샹파뉴(Champagne) 주도 랭스(Reims, 콜베르의 출생지)의 부유한 스코틀랜드계 직물업자 아들로 태어났으며, 스스로도 스코틀랜드계 이민자임을 소개하기도 했다. 

콜베르 가문은 무역에 필요한 금전을 제공하는 금융업을 가업으로 삼았고, 그는 10대 중반부터 회계사 교육을 받으며 경제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쌓았다. 

그는 당대 최고의 금융국가인 이탈리아 은행가 집안 마스크라니가의 리옹(Lyon, 프랑스 남동부의 주요 도시) 사무실을 첫 직장으로 삼았고, 중세 상인들의 상업 매뉴얼인 아르스 메르카토리아(Ars Mercatoria)를 완전히 체화한 명실상부한 재무 전문가로 성장했다. 

회계의 중요성이 무시되던 프랑스 사회에서 콜베르는 이례적인 인물이었다.


장바티스트 콜베르 초상 (필리프 드 샹피뉴 작 전통 계열)

2. 마자랭 추기경과의 운명적 만남 

콜베르의 야심은 상인의 영역을 넘어 프랑스의 부국강병(富國強兵)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1639년에 육군성(War Ministry)에 들어가 군대의 병력과 보급품을 완벽하게 정리하며 특출난 회계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 재능을 눈여겨본 이가 있었으니, 바로 당시 프랑스의 수뇌부였던 재상 쥘 마자랭 추기경(Jules Mazarin, 루이 14세 섭정기의 재상)이었다.


쥘 마자랭 추기경 초상

마자랭 추기경은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관리할 능력이 부족했고, 콜베르는 지식은 있었으나 재산이 미미했다. 

이 두 사람은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했다. 

콜베르는 마자랭의 최측근이자 ‘브레인’ 역할을 수행하며, 마자랭의 재산을 3년 만에 800만 리브르(Livre, 중세 프랑스 화폐 단위)에서 3500만 리브르로 불려 놓는 경이로운 실력을 보여주었다. 

이 기간 동안 콜베르는 루이 14세의 국정 운영에도 간접적으로 관여하며 왕실 권력 구조를 학습했다.


3. 왕의 남자: 푸케 숙청과 권력 장악

1661년, 마자랭이 사망하자, 콜베르는 마자랭의 추천에 따라 루이 14세의 곁을 지키게 되었다. 

귀족이 아닌 회계사 출신이 왕의 측근이 된 것은 프랑스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루이 14세 공식 초상 (리가ud, 1701)

콜베르가 재무를 맡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프랑스 재정의 암적인 존재, 즉 '도둑'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가장 큰 도둑은 바로 전임 재무대신 니콜라 푸케(Nicolas Fouquet, 루이 14세의 재무대신이자 콜베르의 정적)였다. 

푸케는 왕실 금고에서 돈을 빼돌려 엄청난 부를 축적했고, 왕실이 프롱드의 난(Fronde Rebellion)으로 휘청거릴 때조차 그의 가문은 부유해져 갔다.


1661년 8월, 푸케는 자신의 성인 보르비콩트(Vaux-le-Vicomte, 푸케가 지은 호화로운 성)에서 루이 14세에게 화려한 연회를 베풀었다. 


보르비콩트 성(푸케의 저택) 전경

불꽃놀이, 발레 쇼, 진귀한 음식들로 가득 찬, 왕의 궁전보다 더 큰 규모의 사치에 루이 14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자리에서 루이 14세는 콜베르에게 푸케의 뒷조사를 지시했고, 콜베르는 이를 기회로 삼아 회계장부를 무기로 정적을 제거하려 했다. 

연회가 끝난 지 한 달 뒤, 콜베르는 왕의 총사들과 함께 보르비콩트 성에 나타나 푸케의 국고 횡령 기록이 담긴 회계장부를 압수했다. 

(논쟁)이 압수수색을 이끈 총사가 소설 『삼총사』에 나오는 달타냥(d'Artagnan)이었다는 '썰'이 전해진다.

루이 14세는 콜베르를 앞세워 회계적 지식을 이용해 권력의 위협이 되는 정적을 성공적으로 제거한 셈이었다.

이 사건으로 콜베르는 46세의 나이에 재무총감(Finance Minister) 자리에 올랐으며, 재정 외에도 상공업, 농업, 토목, 식민 문제, 해군 업무까지 담당하며 거의 재상과 같은 막대한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논쟁)


니콜라 푸케 초상

콜베르주의의 설계와 태양왕의 스승

1. 재정 개혁과 ‘회계의 왕’

콜베르의 통치는 프랑스 경제 전반에 걸친 대개혁이었다. 

그는 "회계는 국정의 기본이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며 루이 14세에게도 회계의 기본을 교육했다. 

그는 세금을 많이 걷는 것보다 잘 지키고 운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으며, 일주일에 두 번 이상 회계 장부를 보고했다. 

루이 14세는 콜베르가 보고하는 부기(簿記)를 이해하고 좋아했으며, 콜베르는 군주가 '회계의 왕'이 되어야 국부를 쌓을 수 있다고 설파했다.

콜베르의 개혁은 효율적인 세금 제도 마련에 집중되었다. 

그는 관세를 신설하고 토지세를 현실에 맞게 조정했으며, 세금 징수원들에게 정확한 기록을 남기도록 강조하고 허가받지 않은 임의적 면세 혜택을 폐지했다. 

특히, 당시 귀족들에게 면세 혜택이 주어지던 관행을 혁파하고 귀족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려는 조치를 취했으며, 이는 오늘날 현대 국가의 중요한 조세 원칙인 국민 개세주의(모든 국민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원칙)의 시초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개혁 덕분에 프랑스의 재정은 푸케 축출 5년 만에 적자에서 연간 1억 리브르의 흑자로 돌아서는 기적을 이루었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Adam Smith)조차 "콜베르가 국고 세입의 징수와 지출에 질서를 도입했다"고 칭찬했을 정도이다.


2. 중상주의의 꽃: 럭셔리 산업과 콜베르주의

콜베르주의(Colbertism)는 장바티스트 콜베르의 이름을 딴 경제 정책으로, 중상주의의 한 형태였다.

그의 핵심 목표는 프랑스의 경제력을 강화하여 루이 14세의 영광과 프랑스의 권력을 드높이는 것이었다. 

당시 콜베르는 네덜란드(Dutch, 17세기 유럽 상업 헤게모니를 장악한 국가)의 상업적 우위에 맞서 프랑스의 점유율을 높이고자 했다.


그의 정책은 다음과 같은 핵심 사항을 포함했다.

• 무역 흑자 추구: 수출을 수입보다 많게 하여 금과 은을 프랑스 왕국 내에 보존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는 아메리카(Americas)에서 가능한 많은 귀금속을 확보하려는 '은 전쟁(silver war)'을 주도했다.

• 산업 육성과 통제: 정부는 산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통제하는 중앙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직물, 조선, 사치품 같은 산업을 육성했다.

• 왕립 제작소와 품질: 콜베르는 고품질의 제품 생산을 강조하며 왕립 제작소(Royal proto-factories, 예: 고블랭 Gobelins)를 창설했다. 

이는 프랑스 명품 산업의 뿌리가 되었다. 

그는 유럽 각지에서 숙련공을 프랑스로 모아 장인정신이 깃든 명품(럭셔리 상품)을 제작하고 이를 전략 수출 상품으로 장려했다. 

이 정책은 훗날 에르메스(Hermès, 1837년 설립된 고급 마구 및 가죽 제품 업체)와 루이 비통(Louis Vuitton, 여행 가방 업체) 같은 명품 브랜드 탄생에 기여했다.

• 식민지 정책: 콜베르는 프랑스 동인도 회사(Compagnie Française des Indes Orientales, 1664년 콜베르에 의해 재편성된 국영 무역 회사)를 설립하여 아시아와의 해상 무역 독점권을 확보하려 했고, 캐나다(프랑스령 캐나다 식민지)와 서인도 제도(Caribbean Islands, 프랑스 식민지) 확장을 주장했다. 

식민지는 주로 프랑스 경제에 원자재를 제공하고 상품을 판매하는 시장 역할을 하도록 설계되었다.

• 인프라 개선: 도로와 운하 같은 사회 기반 시설에 투자하여 경제 활동을 지원했다. 

해군 장관으로서 툴롱(Toulon, 프랑스 남부 군항) 군항 건설을 명령하고 운하 건설을 담당하게 했다.

• 과학 및 문화 지원: 콜베르는 학문적 탁월함이 프랑스 왕권의 영광에 기여한다고 믿었으며, 테베노 집단(Thevenot circle)의 베이컨적 공리주의를 바탕으로 파리의 왕립과학 아카데미(Académie Royale des Sciences, 프랑스 정부가 조직한 과학 연구 기관)를 설립했다. 

이 아카데미는 봉급 지급, 정부 시설 사용, 정부의 경제적 지원을 받았으며, 과학 분야 출판 검열이나 기술 특허 심사 같은 공공 기능도 수행했다.


그림자의 과실과 비극적 고립

1. 콜베르의 딜레마와 왕과의 불화

콜베르의 가장 큰 갈등은 그가 평생 봉사했던 군주 루이 14세와의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콜베르는 프랑스의 부국을 만들었지만, 루이 14세의 끝없는 야심과 사치를 막을 수 없었다. 

콜베르는 재정이 풍족한 상태에서도 루이 14세의 모든 결정에 회계 장부를 들이밀며 반대했다.


(논란)루이 14세는 호화로운 베르사유 궁전(Château de Versailles, 루이 14세가 왕권의 위신을 과시하고자 지은 궁전)을 짓고, 네덜란드와의 전쟁(Franco-Dutch War, 1672~1678년) 등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을 끊임없이 벌였다. 

콜베르는 베르사유 궁전의 확장에도, 네덜란드와의 전쟁에도 반대했다. 

그는 왕이 자신이 만든 부국 프랑스를 망치지 않도록 경고했다. 

심지어 루이 14세가 궁전 완공을 서두르라고 명령하자, 콜베르는 국민 부담을 이유로 반대하며 궁전 건설비를 빼돌려 배를 만드는 데 전용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루이 14세는 콜베르에게 "나를 슬프게 하지 말라"는 경고성 편지를 보내기도 했으나, 콜베르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콜베르의 재정 흑자 중 70%는 전쟁 비용으로, 6%는 국왕의 사치 비용으로 들어갔고, 경제에 재투자된 재원은 1%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다.


베르사유 궁전 건축·정원

2. 과도한 통제와 ‘거위 깃털’ 논란

콜베르의 경제 정책은 강력한 중앙 통제와 규제를 특징으로 했으며, 여기에 근본적인 과실이 내재되어 있었다.

콜베르주의는 수출을 늘리기 위해 고품질을 보장하려 했지만, 그 방법이 지나쳤다. 

정부가 산업을 규제하고 가격을 통제하며, 나무를 사각형으로 깎는 방법, 옷감의 크기, 심지어 양초의 무게까지 법으로 제정하여 (칙령의 형식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과도한 규제는 기업의 혁신(innovation)과 창의성(creativity)을 방해하고 억압하여, 프랑스가 산업 및 경제 성장에서 선두 경쟁력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콜베르는 프랑스 역사에서 지나친 국가 개입주의(state interventionism)의 구조적 특성을 만든 장본인, 즉 '원죄를 저지른 자'로 비판받기도 했다.


콜베르는 귀족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국민 개세주의를 추진하며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려 노력했지만, 그의 조세 정책에 대한 가장 유명하고도 논란이 많은 발언이 남아 있다. 

그는 "최고의 징세 기술은 거위가 비명을 적게 지르게 하면서 거위 털을 가장 많이 뽑는 것과 같다"는 교훈을 후배들에게 남겼다. 

이 발언은 비판자들 사이에서 콜베르가 국민의 고혈을 짜내는 냉정한 징세꾼이라는 비난의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이 발언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콜베르의 무게중심은 '통증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는 쪽에 맞춰져 있었으며, 납세자의 고통을 최소화하며 국부를 증진시키려는 숭고한 뜻이었다고 해석한다. 

콜베르가 죽어서 묻힌 파리 생 퇴스타슈 성당(Saint-Eustache, 파리 시내에 위치한 성당)의 묘비에는 "멋진 세금으로 프랑스를 부유하게 한 영웅, 여기 잠들다"라고 적혀 있어, 이 상반된 평가를 동시에 보여준다.


3. 종교적 과실과 노예법 

콜베르는 경제적 합리주의를 중시하여 생전에는 종교 탄압에 반대 목소리를 냈지만, 그의 정책 중 일부는 후대에 큰 사회적 논란과 악영향을 남겼다.

콜베르는 1685년에 공포된 흑인 노예법(Code Noir, 프랑스 식민지 노예 제도를 규정한 법령)의 제정에도 기여했는데, 이 때문에 오늘날 국민의회 앞에 있는 그의 석상이 논란이 되기도 한다.(논쟁)

식민지 무역을 국가의 중요한 수입원으로 봤던 중상주의자로서, 노예 제도 확립에 기여한 것은 그의 지울 수 없는 역사적 과실로 비판받는다.


콜베르는 낭트 칙령(L’édit de Nantes, 앙리 4세가 개신교도에게 신앙의 자유를 부분적으로 허용한 칙령)의 폐지(1685년 퐁텐블로 칙령) 이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직접적인 책임은 없으나, 그의 경쟁자였던 전쟁장관 루부아(Louvois, 프랑수아 미셸 르 텔리에, 루이 14세의 전쟁 장관)가 신교도 박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콜베르가 사망하자 (1683년 8월), 루이 14세는 콜베르라는 고삐가 사라졌다는 생각에 미소 지었고, 낭트 칙령을 폐지하며 종교 탄압을 공식화했다. 

콜베르는 이 정책에 반대했었지만, 그의 죽음은 탄압을 막을 최후의 방패가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이 결과 활발한 경제 활동의 윤활유였던 90만 명(추측)에 달하는 위그노(Huguenots, 프랑스 개신교도) 고급 기술 인력이 해외(스위스, 영국, 네덜란드, 독일 등)로 대거 이탈하면서, 프랑스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고, 프랑스 절대왕정의 몰락을 가속화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논쟁)


루이 14세 전쟁(대(對)네덜란드 전쟁)

4. 고독한 죽음과 끝없는 야심

1683년 8월, 콜베르는 신장(Kidney)에 커다란 돌이 요관을 막아 64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검소한 생활로 존경받았으나, 일반 민중에게는 세금 징수의 상징으로 여겨져 인기가 매우 없었다. 

그의 죽음은 루이 14세에게는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막을 자가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절대 왕정의 쇠락과 콜베르의 그림자

1. 콜베르 사후의 혼돈

콜베르라는 '위대한 반대자(Le Grand Colbert)'가 사라지자, 루이 14세는 고삐 풀린 말처럼 "유럽의 지배자"가 되고자 하는 야심을 불태웠다. 

그의 방만한 재정 운용과 전쟁, 그리고 치명적인 낭트 칙령 폐지는 콜베르가 쌓아 올린 튼튼한 국가 재정 기반을 무너뜨렸다. 

콜베르의 죽음은 곧 프랑스 재정 시스템의 죽음과 같았다. 

경제보다 정치가 우선시되면서 켜켜이 쌓인 재정적 부담은 결국 프랑스를 파국으로 몰아갔고, 콜베르가 죽은 지 100여 년이 지난 1789년, 프랑스 대혁명(French Revolution)이 터지며 부르봉 왕조(Bourbon Dynasty)는 몰락했다.


2. 후대의 평가와 문화적 영향

오늘날 경제학의 관점에서 콜베르주의는 자국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지나친 국가적 개입과 보호무역주의로 인해 자국 소비자의 이익을 해쳤다는 단점이 지적되며, 조악한 구석이 많다는 비판을 받는다. 

또한, 콜베르가 주장했던 중상주의적 사고방식은 이후 제국주의(Imperialism)와 근린궁핍화 정책(이웃 나라를 희생시켜야 잘산다는 이론)으로 이어지는 한계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콜베르의 정신과 업적은 여전히 프랑스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콜베르는 튼튼한 국가 재정이 부국의 기본임을 입증했으며,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초대 재무부 장관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은 중앙집권적인 재무 시스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콜베르를 열렬히 존경했다.

콜베르의 럭셔리 산업 육성 정책은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후손들에게 혜택을 주고 있다. 

오늘날 프랑스 명품 기업의 연합 협회인 코미테 콜베르(Comité Colbert, 1954년에 출범한 명품 업체의 이익 단체)는 프랑스의 상공업을 진흥시킨 콜베르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으며, 샤넬(Chanel), 루이비통(Louis Vuitton) 등 프랑스 명품의 자존심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 

코미테 콜베르는 모조품 단속에 관한 법률(Longuet Law) 제정에도 기여하는 등, 프랑스 명품의 우수성을 국제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콜베르가 설립한 왕립 과학 아카데미(Paris Royal Academy of Sciences)는 프랑스 왕권의 영광에 기여하고자 했으며, 과학 활동의 제도화와 지속성에 기여했다.


3. 영웅인가, 냉혈한인가

파리 시내 생 퇴스타슈 성당(Saint-Eustache)의 한 구석. 

햇살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해 묘비에 떨어진다. 

묘비에는 "멋진 세금으로 프랑스를 부유하게 한 영웅, 여기 잠들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는 회계 장부의 숫자들 속에서 루이 14세(Louis XIV)의 절대왕정(Absolutism)을 지탱한 그림자였다. 

그는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프랑스를 유럽 최강국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품었고, 회계라는 무기로 부패한 귀족들(예: 니콜라 푸케)을 숙청했다. 

그는 국민 개세주의(taxation for all)라는 혁신적인 원칙을 도입했고, 프랑스 럭셔리 산업(Luxury Goods Industry)의 씨앗을 뿌렸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과도한 국가 통제와 규제(Over-regulation)로 자유로운 혁신을 질식시켰고, 가난한 민중에게 무거운 세금(Heavy Taxation)을 지워 왕의 전쟁과 사치를 감당하게 했다. 

그는 '거위 깃털 뽑기' 논란에 시달렸으며, 그가 막으려 했던 종교 탄압과 왕의 방탕함은 결국 프랑스를 혁명으로 이끌었다.

콜베르의 유산은 영광인가, 아니면 왕의 그림자에 가려진 비극적인 경직성인가. 

그의 무덤만이 침묵 속에서 3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속된 이 질문에 대한 상반된 후대의 평가를 홀로 간직하고 있다.


본 글은 장바티스트 콜베르(1619–1683)의 생애·정책을 서사적으로 재구성한 2차 해설입니다. 

학술 논문이나 1차 사료의 대체물이 아닙니다.

프랑스 절대왕정·재정사 일반서와 전기류를 종합한 내용으로, 세부 연도·수치·인용은 자료별 편차가 있습니다. 

인용·학술 용도에는 1차 문헌(왕령, 예산 장부, 공문서) 확인이 필요합니다.

논쟁 지점(유의): 니콜라 푸케 체포 장소·경위(보르비콩트 연회 이후 수사, 실제 체포는 낭트에서 d’Artagnan 집행설 등).

재무직 책임 범위(1661년 이후 실권, 재무총감 공식 임명 시점은 1665로 표기됨).

Code Noir(1685)는 콜베르 사후 공포·후속 관료 정비가 포함됨.

위그노 망명 규모, 전쟁·궁정비 지출 비중 등 정량 수치는 연구마다 상이.

이해를 돕기 위한 비유·축약(예: ‘은(銀) 전쟁’)이 포함됩니다. 

사실 판단은 본문 각 문맥에서 해석해 주세요.

Colbertism=중상주의적 국가개입·산업정책, “국민 개세주의”는 귀족·도시 특권층 면세 축소 노력의 현대적 번역어입니다.

노예제·종교박해 관련 서술이 포함됩니다. 

피해 집단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으며, 역사적 맥락 설명을 위한 최소한의 기술입니다.


Jean-Baptiste Colbert, Louis XIV’s finance chief, turned a debt-ridden monarchy into a disciplined fiscal state. 

Rising from merchant roots, he helped fell Fouquet, reorganized taxation and auditing, built royal manufactories, ports and a blue-water navy, and backed academies—foundations of French luxury and science

Yet heavy regulation, protectionism and the crown’s wars blunted gains. 

He opposed excess but could not curb Versailles or persecution after his death; his legacy bridges nation-building and rigid contr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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