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니(鬼)의 탄생
덴쇼(天正) 7년(1579년). 일본 전국시대(戦国時代).
미카와(三河, 도쿠가와 영지)의 겨울 바람은 차가웠다.
주군 마츠다이라 모토야스(松平 元康, 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라는 폭풍우 속에서 간신히 영지를 지키고 있었다.
이 시대의 사무라이에게 충성(忠誠)은 곧 생존이었으며, 배신(背信)은 일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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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나가 초상 |
밤. 도토미국(遠江国) 후타마타성(二俣城).
달빛 아래, 장수(將帥)의 갑옷을 입은 거구의 사무라이가 서 있었다.
그의 이름은 핫토리 마사나리(服部 正成) (2대 핫토리 한조. 도쿠가와 16신장 중 한 명). 통칭 한조(半蔵).
그의 뒤로는 이에야스에게서 지휘를 명받은 이가 동심(伊賀同心, 이가 지역 출신 무사/닌자 집단) 150명의 그림자가 숨 쉬고 있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창술과 전술의 잔혹함 때문에 ‘오니노 한조(鬼の半蔵, 귀신 한조)’라 불렀다.
마사나리는 고뇌에 찬 표정으로, 성벽 안쪽에 있는 방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마츠다이라 노부야스(松平 信康) (이에야스의 장남)가 있었다.
노부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의심을 받아 할복(切腹)을 명받은 상태였다.
마사나리는 카이샤쿠(介錯, 할복하는 자의 목을 베어 고통을 덜어주는 역할)를 명받았다.
닌자 집단을 이끄는 그였지만, 그는 검술과 창술로 무훈을 세운 무장(武将)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했다.
그리고 그는 야스나가(保長, 초대 한조이자 마사나리의 아버지)의 대(代)부터 3대에 걸쳐 마츠다이라 가문(松平家)을 섬겨왔다.
"할 수 없다... 나는 주군의 아들에게 칼날을 향할 수 없다."
마사나리는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며, 검을 땅에 떨구었다.
그의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노부야스를 비참하게 만들어야 했던 이에야스의 고통이 그의 가슴에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이가(伊賀)의 혹독한 훈련도 막지 못했던 인간적인 고뇌였다.
이후 이에야스에게 이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야스는 덤덤하게 말했다.
“오니(鬼)라 불리는 한조(半蔵)도 주군을 손으로 해치우는 일은 할 수 없구나.”.
이 순간, 마사나리는 단순한 장수를 넘어 이에야스에게 절대적인 충성심을 인정받았고, 그가 인간적인 고뇌까지 지닌 충신임을 증명하는 일화로 역사에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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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 목판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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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와 출신의 오니
마사나리는 미카와(三河)에서 태어났지만, 이가(伊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핫토리 야스나가(服部 保長) (초대 한조)는 닌자였으나, 마사나리는 어릴 적부터 승려의 길(大樹寺, 다이주지)을 거부하고, 창(槍)을 휘두르는 무장(武将)이 되고자 했다.
그의 육체는 어린 시절부터 강건했고, 9세에 절에서 도망친 후 16세(1557년)의 어린 나이에 우토성(宇土城) 야습에서 초전(初戦)의 공을 세우며 무사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당시 닌자(忍者) 또는 시노비(忍び)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수리검을 던지는 암살자라기보다는, 정보 전문가에 가까웠다.
특히 마사나리가 지휘하게 된 이가(伊賀)와 코가(甲賀)의 무사들은 정보 수집, 첩보, 지형 파악, 그리고 때로는 야간 전투 수행 능력으로 명성이 높았다.
마사나리는 이들의 지휘관이었을 뿐, 자신은 갑옷을 입고 창을 든 사무라이(무사)였다.
마사나리는 1575년, 같은 무장 가문 출신인 나가사카 노부마사(長坂 信政) 의 딸과 결혼했다.
그녀는 훗날 마사나리에게 장남 핫토리 마사나리(服部 正就) (3대 한조)와 차남 핫토리 마사시게(服部 正重) (4대 한조)를 안겨주었다.
마사나리는 전장의 피를 묻힌 손으로 돌아와, 가족의 온기 속에서 잠시나마 무장의 무게를 내려놓았을 것이다.
그의 사생활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그의 자손들이 겪게 되는 혼란을 볼 때, 그의 가족 생활 또한 평탄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1563년 미카와(三河)에서 일어난 잇코잇키(一向一揆) 는 마사나리의 충성심을 시험했다.
그 자신은 일향종 신자였지만, 많은 가신들이 이에야스에게 등을 돌린 상황에서, 마사나리는 이에야스를 향한 충성을 택했다.
이는 핫토리 가문이 대대로 마츠다이라 가문(松平家)에 충성해왔던 역사와, 무장으로서의 정체성이 신앙보다 우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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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니의 창과 주군의 기만
마사나리는 전장에서 용맹했다.
1570년 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戦い), 1572년 미카타가하라 전투(三方ヶ原の戦い)는 그의 전성기였다.
미카타가하라에서 대패한 이에야스를 엄호하며, 창술로 적을 막아냈을 때, 그는 '오니노 한조(鬼の半蔵)' 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는 동료이자 도쿠가와 16신장(徳川十六神将)인 와타나베 모리츠나(渡辺 守綱) (별명 '야리노 한조', 창 한조)와 구별되는 명예로운 칭호였다.
이 두 명의 '한조'는 전장에서 선의의 경쟁을 하며 도쿠가와 가문의 쌍벽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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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타가하라 전투 |
미카타가하라 전투(1572년)는 이에야스에게 유일한 대참패였지만, 마사나리에게는 닌자 부대 지휘관으로서의 입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 전투 이후 이가(伊賀) 무사 150명의 지휘권을 부여받았다.
마사나리는 이들을 이용해 이에야스의 '눈과 귀' 역할을 수행했다.
정보 수집과 은밀한 침투는 이에야스가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동맹 아래서도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마사나리의 경력에는 어둠의 면이 있었다.
1580년, 고텐진성(高天神城) 공략을 준비하던 하마마쓰성(浜松城)에서 오다(織田) 가문의 가신 오가키 씨(大垣氏) 의 가신들과 핫토리 가신들 사이에 유혈 충돌이 벌어졌다.
오다 가문의 심기를 건드릴 것을 우려한 이에야스는 큰 딜레마에 빠졌다.
이에야스는 핫토리 가문을 보호하기 위해 충격적인 술수를 썼다.
그는 마사나리를 체포하는 척한 뒤, 그를 풀어주어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하마마쓰성(浜松城)을 몰래 도망치게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목을 마사나리의 수급(首級)이라 속여 오가키 가문에 보내면서, 마사나리를 세상에서 '지워버렸다'.
이 사건은 마사나리가 단순한 무사가 아니라, 주군을 위해 자신의 존재마저 기꺼이 버릴 수 있는 '그림자' 역할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2년간의 행방불명 기간(1580년~1582년)은 마사나리에게는 혹독한 시련이었으며, 무장으로서의 삶과 그림자로서의 삶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는 경험이었다. (비록 역사적 기록은 그의 행적을 알 수 없다고 하지만, 영화적으로는 이 기간을 고독한 잠행과 첩보 활동의 시간으로 각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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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고에(伊賀越え) - 생환의 드라마
1582년 6월, 마사나리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던 2년 후, 일본 열도는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건)으로 대혼란에 빠졌다.
이에야스(家康)는 소수의 수행원(隨行員, 34명)만을 데리고 사카이(堺, 상업 도시)에 머물던 중이었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병사들과 오치무샤가리(落武者狩り, 패잔병 사냥꾼)의 위협이 사방에 깔린 무법천지였다.
이에야스는 목숨을 걸고 이가국(伊賀国)을 관통하는 최단 경로를 택했다.
이 임무는 마사나리에게 맡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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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치 미쓰히데 초상 |
마사나리에게 이가(伊賀)의 피가 흘렀다는 사실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상인 차야 시로지로 키요노부(茶屋 四郎次郎 清延) (교토의 상인)와 함께 움직였다.
마사나리는 이가(伊賀)의 토호(地侍)와 코가(甲賀)의 무사들(이가/코가 잇키 세력)을 상대로 필사적인 교섭을 벌였다.
이들은 노부나가(信長)에게 적대적이었고, 이에야스를 인질로 잡을 수도 있었다.
마사나리는 그들의 자치권 보장과 대가를 약속하며 경호 협정을 이끌어냈다.
"나는 핫토리, 이가(伊賀)의 피를 물려받은 사무라이다. 우리는 한 때 노부나가(信長)의 폭압에 맞섰던 이가 일족의 후예다. 지금, 천하의 주인이 될 분이 너희의 영토를 지나간다. 이것은 시험이다. 너희가 힘을 보여주고 대가를 받을 기회다."
마사나리는 거친 목소리로 토호들을 설득했고, 수많은 오치무샤가리의 공격을 막아낼 이가 동심 경호대를 조직하는 데 성공했다.
이 여정은 생지옥이었다.
이에야스 일행은 매복과 습격으로 200여 명의 사상자를 냈고, 마사나리 자신도 창에 찔려 중상을 입었으나, 끝내 주군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이가국(伊賀国)을 무사히 통과한 이에야스 일행은 이세국(伊勢国) 시로코하마(白子浜)에서 배를 타고 미카와(三河)의 오카자키성(岡崎城)으로 귀환했다.
이는 이에야스 생애 최대의 위기를 극복한 기적적인 생환극(生還劇) 이었으며, 마사나리의 가장 빛나는 공적이었다.
이 '이가고에'(이가(伊賀) 지역을 가로질러 도망친 사건)의 성공으로 이에야스는 정치적 재기 발판을 마련했고, 훗날 천하인(天下人)이 되는 결정적 계기를 얻었다.
이가고에 후 마사나리는 8,000석의 영지와 함께 이가 동심(伊賀同心 무사조직) 200명을 휘하에 두게 되었다.
명목상 '닌자 부대의 우두머리'였으나, 실상은 이에야스의 직속 하급 사무라이 부대의 지휘관이었다.
마사나리는 무장으로서의 명예를 원했지만, 닌자의 굴레를 벗을 수 없었다.
더욱이 이가 동심들은 마사나리가 이가(伊賀)를 일찍 떠났다는 이유로 그를 멸시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에야스에게 직접 고용된 것이지, 마사나리 가문의 가신이 아님을 강조하며 핫토리 가문에 대한 불만을 키워나갔다.
마사나리는 이러한 내부 갈등을 이에야스의 신뢰와 자신의 카리스마(귀신 한조)로 간신히 통제했지만, 이는 핫토리 가문에게 있어서 내부의 시한폭탄과 같았다.
이가고에 후 마사나리는 텐쇼 임오의 난(天正壬午の乱),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등 이에야스의 주요 전투에 참전하며 계속해서 무공을 세웠다.
특히 그는 전투에서 철포(鐵砲) 부대(네고로슈 포함)를 지휘하는 등 시대의 변화에 발맞춘 지휘관이었다.
오다와라 정벌 이후 그는 8,000석 영지를 최종적으로 확정하고, 에도(江戸)로 옮겨 에도성 경비를 맡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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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자키성(岡崎城) – 이에야스의 본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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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는 지고 전설은 시작되다
핫토리 마사나리(正成)는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江戸幕府)를 세우기 직전인 1597년 1월 2일 (게이초 원년), 병으로 사망했다.
무장으로서 평생을 전장에서 보냈으나, 그의 마지막은 고독한 병마와의 싸움이었다.
이에야스는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그의 공로를 영원히 기억하고자 했다.
마사나리는 도쿠가와 가문에게 "오니노 한조"라 불린 무장이자, 이에야스의 생명을 구한 최고의 충신으로 기록되었다.
이에야스는 그의 저택이 있던 에도성(江戸城)의 서쪽 문을 한조몬(半蔵門)이라 이름 붙여 그의 공적을 기렸다.
그의 유해는 사이넨지(西念寺)에 잠들어 있으며, 그가 이에야스에게 하사받은 거대한 창(槍)은 그의 무용을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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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넨지(西念寺) "한조 2세" 마사나리의 무덤. |
마사나리가 남긴 유산은 영광뿐만이 아니었다.
장남 핫토리 마사나리(服部 正就) (3대 한조)는 아버지의 이름과 이가 동심(伊賀同心)의 지휘권을 물려받았지만, 내부 갈등을 수습하지 못했다.
3대 한조(正就)는 통솔력 부족과 인간적인 과실로 가문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특히 그는 사적인 일로 이가 동심을 동원하거나, 그들의 지휘관 두 명을 유폐시키고, 급기야 부하의 아내를 강간하고 자결하게 만든 도덕적 스캔들을 일으켰다.
이가 동심들은 이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일으켰고, 결국 마사나리(正就)는 해임되어 가문은 몰락의 위기를 겪었다.
마사나리(正成)의 명성은 아들의 부도덕한 행위와 실책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빛을 바랬다.
결국 차남 마사시게(正重) (4대 한조)가 이름을 계승하고 가문을 재건해야 했다.
이처럼 마사나리 가문의 역사는 주군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 아래 번성했으나, 봉건 사회의 하급 무사 집단을 통솔하는 어려움과 후계자의 도덕적 해이로 인해 굴곡을 겪었다.
마사나리(正成)는 사후 300년이 흐른 뒤, 닌자(忍者)의 대명사로 부활했다.
1950년대 이후 소설과 영화 등에서 그를 주인공으로 삼기 시작했으며, ‘닌자 마스터 한조(Ninja Master Hanzo)’라는 이미지로 각색되어 수많은 작품에 등장한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킬 빌 (Kill Bill)에서, 그는 일본도를 만드는 전설적인 검객이자, 닌자의 삶을 버리고 은둔한 인물로 등장하며, 전 세계 팬들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의 전설은 현대에도 이어져, 아이치현(愛知県)에서는 핫토리 한조 닌자부대가 활동하며 관광 및 문화 홍보에 활용되고 있다.
이처럼 핫토리 한조(마사나리)는 역사 속의 복잡한 무장(武将)이었으나, 후대의 상상력과 대중문화 속에서 불멸의 그림자 영웅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글은 사료(『徳川実紀』, 『三河物語』 등)에 근거한 사실과, 전승·후대 각색(‘오니노 한조’, 닌자상), 서사적 재구성(대사·심리)을 함께 다룹니다.
연대·지명·인물관계는 가능한 범위에서 검증했으나, 일부 일화(카이샤쿠 거부, ‘사가진’ 위장, 이가고에 세부 경로 등)는 기록 간 차이가 있습니다.
본문은 역사 이해를 돕기 위한 서사적 장치가 포함되어 있으니, 신화적 요소와 사실을 구분해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Hattori Masanari, known as “Hanzo the Demon,” serves Tokugawa Ieyasu through Japan’s turbulent Sengoku era.
A spear-wielding commander over Iga/Koga operatives, he refuses to act as kaishaku for Ieyasu’s condemned son, revealing loyal humanity.
After Nobunaga’s death, Hanzo negotiates the perilous “Iga Crossing,” escorting Ieyasu home and securing his rise.
Rewarded with land and command, Hanzo later dies in 1597; his heirs falter, yet legend transforms him into the archetypal ninja of popular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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