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의 역사 총정리: 에티오피아부터 한국까지 (The History of Coffee)


춤추는 염소와 신의 눈물

카파의 고원, 춤추는 염소와 목동 (에티오피아, Kaffa)

기원전 6세기경, 혹은 서기 850년경으로 추정되는 아비시니아 제국(Abyssinia, 현재의 에티오피아)의 남서부 카파(Kaffa, 아라비카 커피의 원산지로 유력한 지역) 지방. 

이 험준한 산악지대는 아라비카 커피(Coffea arabica)가 태어난 고향이다. 

역사가 미셀레(J. Michelet)는 일찍이 "커피 그 자체가 혁명이다"라고 정의했지만, 이 혁명의 씨앗은 한 무명의 목동의 눈에서 시작되었다.

어느 날 저녁, 목동 칼디(Kaldi, 커피 발견 전설의 주인공)는 자신이 기르던 염소 떼가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목격했다. 

염소들은 밤새 잠을 자지 않고 흥분하여 춤을 추듯 날뛰었다. 

칼디는 이 기이한 현상의 원인을 쫓았고, 염소들이 숲 속의 작은 나무에 열린 빨간 열매 (커피 체리)를 따 먹은 후 기운에 넘치고 머리가 맑아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한 칼디는 직접 그 열매를 섭취했고, 온몸에 힘이 넘치고 정신이 맑아지는 각성 효과를 경험했다.


칼디의 전설 (춤추는 염소)

이 전설은 커피의 기원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역사적 자가당착을 안고 있다. 

전설은 칼디가 이 열매의 효능을 수도원장에게 알렸고, 수도승들이 기도 중에 잠이 들지 않기 위해 종교적 목적으로 사용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칼디의 전설이 언급되는 시기는 2~3세기 혹은 서기 850년경인데, 이슬람교가 창시된 것은 무함마드(Muhammad, 이슬람교 창시자)에 의해 서기 610년경이므로, 이슬람 수도승이 존재할 수 없는 시기였다는 모순이 발생한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칼디를 예멘의 목동이라고 기록하기도 했으며, 이는 커피를 '자랑스러운 이슬람 문화'로 만들기 위한 논리적 시도로 추정된다.


에티오피아 기원설은 각성 효과보다는 에너지 원천으로서 커피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로 해석된다. 

당시 에티오피아의 갈라족(Galla, 오늘날의 오로모족) 유목민들은 이동이 잦았기 때문에 커피 열매를 그대로 먹거나, 다른 곡물과 함께 갈아 동물성 비계(지방)와 섞어 공 모양으로 빚어 식량이나 전투 식량으로 가지고 다니며 힘과 주의력을 보충하는 초기 형태의 에너지 바로 사용했다. 

그들은 커피를 처음 발견했을 때 아랍어 '카파'에서 유래되었다고 추정되는 '번'(Bun, 콩을 의미) 혹은 '번컴'(Bunchum, 추출액을 의미)이라고 불렀는데, 오늘날에도 에티오피아에서는 커피를 '분나(Bunna)'라고 부른다.


에티오피아 커피 세레모니(현대 사진) – 분나 의식

현재까지도 아라비카 커피의 정확한 기원지에 대해서는 에티오피아 내에서도 논쟁이 치열하다. 

일반적으로 남서부의 숲에서 발견되었다는 데 동의하지만, 특히 카파(Kaffa) 지역과 짐마(Jimma, 때때로 Djimma로 표기) 지역 사이의 갈등이 존재한다. 

짐마 지역 공항에 "커피 아라비카의 고향인 Djimma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리자, 본래 카파 지역으로 표기되었던 문구가 바뀐 것에 수천 명의 농민들이 시위를 벌인 사건이 2018년에 발생하기도 했다. 

이는 커피의 기원 문제가 단순한 역사를 넘어 지역 정체성 및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슬람의 와인, 모카의 탄생 (예멘)

커피가 처음에는 수도승들에게 잠을 쫓고 원기를 주는 성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었다는 공통적인 전설이 있다. 

기원 후 11세기경, 커피는 에티오피아에서 홍해를 건너 예멘으로 이식되어 대량 경작이 시도되었다.

커피는 아라비아 세계로 퍼지면서 '아라비아의 와인'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이슬람교가 술(알코올)을 금지했기 때문에 커피가 이를 대체하는 음료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기원 전설의 주인공은 오마르(Omar, 이슬람 수피교 사제)이다. 

1258년경, 정치적 정적(政敵)들의 모함으로 예멘의 모카(Mocha, 예멘의 대표적인 무역항)항 인근 사막으로 추방당한 오마르는 굶주림에 허덕이다가 붉은 열매가 매달린 작은 나무를 발견했다. 

그는 열매를 먹으려 했으나 너무 써서 먹지 못하고, 불에 구웠더니 너무 딱딱해져서 결국 뜨거운 물에 우려내어 마셨다. 

그 결과 피로가 사라지고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고, 오마르는 이를 알라신의 선물이자 축복이라 믿고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사용했다. 

이 소문은 이슬람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그는 '모카의 성인(聖人)'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예멘 모카 항(1690년경 동판화) – 커피 무역의 시발점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커피는 아라비아반도 남단의 예멘 지역에서 대규모 경작이 처음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슬람 사원(수도승)의 독점물이었던 커피는 13세기 말 사라센 제국(Saracen Empire)의 쇠락과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일반인들에게 판매되기 시작하며 홍해를 중심으로 여러 국가에 전파되었다. 

예멘의 모카 항(Mocha, 커피 무역의 시발점이며 명칭의 유래가 된 항구)은 15세기 중엽부터 200년 이상 이슬람 지역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유럽인들에게는 '행복한 아라비아'(Arabia Felix)로 불렸다. 

예멘은 이 커피 재배 기술을 철저히 독점하고자 했으며, 외부인이 농장을 방문하는 것은 금지되었고, 수출되는 생두(Green Bean)는 열을 가해 발아가 되지 않도록 처리한 후 수출했다고 한다.


모카 항을 중심으로 거래되던 예멘산 커피나 에티오피아산 커피는 통틀어 '모카 커피'로 불렸고, 이 맛이 초기 유럽 커피 음용자들에게 커피 맛의 표준이었다. 

모카라는 명칭은 이후 '커피' 그 자체를 의미하는 용어로 확장되었는데, 모카포트(가정용 에스프레소 추출 기구)나 모카빵(커피 성분이 들어간 빵)과 같은 용례가 대표적이다. 

특히, 18세기 네덜란드에 의해 실론과 자바 지역에서 생산된 커피에서 모카 특유의 달콤한 맛이 나지 않자, 설탕이나 초콜릿을 가미하여 비슷한 맛을 내려는 문화가 생겨났고, 이로 인해 초콜릿 향이 나는 커피나 단맛이 가미된 커피를 모카 커피로 부르게 된 역사가 있다.


오스만 커피 문명: 지옥처럼 검고, 사랑처럼 달콤하다

16세기, 사라센 제국이 몰락한 후 오스만 튀르크 제국(Ottoman Empire)이 이 지역을 지배하며 커피 문명이 만개했다. 

오스만 제국은 커피를 신적이고 자극적인 음료로 여겼으며,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현재의 이스탄불)에 커피가 소개된 후 1554년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커피하우스는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공간이 아니었다. 

오스만 제국의 카흐베하네(kahvehane, 지식인과 일반인이 모여 토론하던 커피하우스)는 다양한 인종, 계층, 직업의 사람들이 체스를 두고, 뉴스를 읽고, 사회 문제에 대해 토론하며, 사업 기회를 찾는 문화 공간이자 정치 토론장이었다. 

터키 법에서는 남편을 위해 커피를 끓여주지 않는 부인을 이혼시키는 것이 합법화될 정도로, 커피는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오스만 사회에서 커피는 환대와 우정의 상징이었으며, "한 잔의 커피의 기억은 40년 동안 지속된다"는 유명한 속담도 전해진다.


오스만 제국의 카흐베하네

그러나 커피가 지나치게 인기를 얻고 사람들을 모으자, 이는 법적으로 금기시되기도 했다. 

커피의 검붉은 색과 각성 효과 때문에 일부 종교 지도자들은 커피를 '악마의 음료'로 규정했다. 

실은 대중들이 커피하우스에 모여 지도자에 대한 반란을 야기하거나, 종교가 아닌 커피가 구심점이 되는 것을 두려워했던 종교적/정치적 지도자들의 변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3년 오스만 커피 문명(터키 커피)은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았다.


이성의 음료와 제국주의의 그림자

교황의 세례와 유럽의 각성

이슬람 세계를 통해 커피를 처음 접한 것은 십자군 원정(12세기) 당시 동방무역으로 발달한 베네치아(Venice, 이탈리아의 자유도시) 상인들에 의한 커피 밀무역이었다. 

17세기 초, 이슬람의 음료였던 커피는 유럽에 전파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악마의 음료'라며 비난받았다.


17세기 초, 교황 클레멘트 8세(Clement VIII, 1535~1605, 카톨릭 교황)는 이교도의 음료로 취급받던 커피를 마셔본 후, "이처럼 훌륭한 음료를 이교도만 마시게 할 수 없다"며 커피에 세례를 내렸다. 

이 사건은 커피가 기독교 세계에서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대중화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본격적인 커피 전파 시기는 17세기 제국주의 시대였다. 

17~18세기 초 계몽주의 시기, 커피는 '이성의 시대'를 상징하는 음료였다. 

당시 유럽인들은 오염되기 쉬운 물 대신 맥주나 와인 같은 알코올 음료를 마셨지만, 커피는 알코올 음료와 달리 지적 활동을 자극하는 각성 효과가 있었다. 

이로 인해 귀족, 성직자, 작가, 과학자 등 '지식인' 계층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유럽의 커피하우스는 평등한 소통, 과학과 상업적 혁신의 발원지 역할을 했다. 

폐쇄적인 귀족 중심의 클럽과는 달리 사회적 신분에 관계없이 출입이 가능했으며, 최신 잡지와 출판물, 고급 정보가 유통되고 다양한 주제 토론과 비즈니스가 이루어지던 장소였다. 

특히 영국에서는 커피 한 잔 가격(페니, Penny)으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뜻에서 '페니 대학'(Penny University)이라고 불렸다. 

기업가, 과학자, 투자자들이 혁신과 도전을 논의하며 산업 혁명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유럽의 유명 커피하우스)

• 카페 플로리안(Café Florian, 1720년 베네치아에 개업): 루소(J. J. Rousseau, 프랑스 철학자), 괴테, 바그너, 카사노바 등 유명 인사가 애용한 곳이다.

• 르 프로코프(Le Procopel, 1686년 파리에 개업): 볼테르(Franois-Marie Arouet, 프랑스 철학자. 하루 50잔 이상 커피 마심),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프랑스 황제. 커피 값이 없으면 군모를 맡기기도 함), 빅토르 위고 등이 찾던 곳이다.

• 푸른 병(Zur Blauen Flaschel, 1685년 비엔나): 비엔나 최초의 커피하우스.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에서 획득한 커피로 문을 열었으며, 게오르그 콜쉬츠키(Georg Kolschitzky)가 초승달 모양의 '케잌'(크루아상 기원설 중 하나)을 만들어 판매했다 (출처 외 정보).

• 로이드(Lloyd's): 1688년 에드워드 로이드(Edward Lloyd)에 의해 런던에서 열린 커피하우스가 오늘날 세계 최대의 재보험사인 로이드 보험회사로 발전했다.


커피하우스 문화가 절정에 달했을 때, 영국 등 유럽의 커피하우스에는 여성이 출입할 수 없었다. 

이에 여성들은 국왕에게 탄원서를 제출했고, 이로 인해 커피하우스 문화가 일시적으로 금기시되면서 자연스레 홍차와 티타임 문화가 여성과 귀족들 사이에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카페 플로리안

커피 벨트의 확장과 식민지의 비극

17세기 이후 유럽 각국이 새로운 항로를 발견하고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커피나무 경작에 적합한 지역을 발견했다. 

커피는 적도를 중심으로 남위 25도와 북위 25도 사이의 열대·아열대 지역인 커피 벨트(Coffee Belt)에서 주로 생산된다.


예멘이 커피 수출을 독점하고 있을 때, 1616년에 네덜란드는 예멘의 모카 항에서 커피나무 묘목을 훔쳐 암스테르담 식물원에서 재배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1658년 실론(Ceylon, 현재의 스리랑카), 1696년에는 인도네시아의 자바(Java)에 커피를 경작하게 되면서, 네덜란드 식민지는 유럽의 주요 커피 공급처가 되었다.

이 변화의 가장 큰 요인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Dutch East India Company)가 실론과 자바 지역에 커피 재배를 확대한 것이었다. 

독일의 커피 역사학자 야콥의 표현에 따르면, 커피는 경제적 수익만을 목표로 하는 제국주의에 의해 계획적인 착취의 도구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쿼터제(Quota system)를 통해 지역 농장주들에게 일정량의 커피를 일정한 가격에 출하하도록 강제했고, 이 물량을 맞추기 위해 농장주들은 현지 농민들을 소작 노예 형태로 혹독하게 착취하는 일이 일상화되었다. 

첫 희생양은 아프리카가 아닌 아시아 민족이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자바의 화산재 토양과 따뜻한 날씨는 커피 재배에 매우 적합했고, 커피 생산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726년에는 자바로부터 공급되는 커피의 양이 연 400만 파운드에 달해, 생산을 시작한 지 불과 20년 만에 자바 커피는 모카 커피를 추월하여 세계 제1위의 커피가 되었다. 

자바 커피의 가격이 모카 커피의 3분의 1 수준이었기 때문에 수요 증가에 기여했으며, 결국 1731년부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모카로부터의 커피 수입을 중단했다. 

이로 인해 200년 이상 지속된 모카 항의 독점은 급속도로 막을 내렸다.


1714년 네덜란드로부터 루이 14세(Louis XIV, 프랑스 국왕)가 커피나무를 선물받아 파리 식물원에서 재배하게 되었는데, 프랑스 해군 장교인 가브리엘 마티유 드 클리외(Gabriel Mathieu de Clieu)는 1723년 이 묘목 중 일부를 훔쳐 카리브 해의 마르티니크(Martinique) 섬에 처음 심었다. 

이 묘목이 카리브 해와 중남미 지역에 커피가 전파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커피 벨트가 완성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브리엘 드 클리외의 커피 묘목 이식(18세기 삽화) – 카리브·중남미 전파

눈물의 모카와 한국의 '양탕국'

예멘의 비극과 모카 커피의 몰락

커피의 생산과 소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동안, 커피 무역의 시초였던 예멘의 모카 항은 크게 위축되었다. 

18세기 초부터 흑사병(Black Death) 창궐로 도시 인구의 절반 이상이 희생되어 무역항 기능이 마비되었고, 이맘(Imam, 이슬람교 지도자), 오스만 제국, 서유럽 제국주의 세력 간의 잇따른 전쟁으로 지역 안정이 무너졌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자바를 비롯한 신흥 커피 생산 경쟁 지역의 급속한 등장 때문이었다. 

결국 1869년 홍해와 지중해를 잇는 수에즈 운하가 개통될 무렵, 에티오피아 커피가 모카 항을 거치지 않고 유럽으로 직접 전달되면서 모카 항의 역할과 예멘 커피의 가치는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다.


예멘의 역사는 난민의 나라로 변한 눈물의 역사이고, 그 한가운데 커피가 있다. 

예멘이 1980년대 커피 제2의 물결 시대에 부활을 시도했지만, 2015년에 본격화된 내전은 모든 일상과 산업을 무너뜨렸다. 

"커피는 눈물이다"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나라가 예멘이며, 커피 무역의 상징 모카 항의 몰락으로 시작된 예멘의 비극은 여전히 끝나지 않고 있다.


오늘날 커피는 석유 다음으로 물동량이 많을 정도로 거대한 산업이지만, 개발도상국의 생산자들은 여전히 착취당하고 있다. 

한 TV 시사 프로그램에서 밝혀진 충격적인 사실은, 유명 커피 전문점에서 판매하는 커피를 만들기 위해 이용되는 원두를 재배한 아프리카 농가에게 돌아가는 이익은 전체 커피 값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제 기구 OXFAM의 보고서에 따르면, 2001~2002년 영국의 최종 소비자가 우간다산 커피에 지불한 돈 가운데 우간다 농민의 몫은 0.5%에 불과했다. 

나머지 대부분은 다국적기업인 가공·판매업자와 코요테(Coyote, 중간 상인)들이 차지했다. 

이디오피아 커피 경작 농민의 1년 수입은 60달러에 불과했으며, 이는 터무니없이 적은 노동의 대가였다. 

이러한 불공정한 거래 제도를 극복할 대안으로 공정 무역(Fair Trade)이 떠올랐으나, 그 실효성에 대한 의문과 함께 자본주의 경제 흐름을 거스르는 운동이라는 비판 또한 존재한다.


조선, 커피를 만나다 (한국 커피의 시작)

커피가 조선에 들어온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존재한다. 

구전이나 불명확한 기록을 제외하고, '커피'가 적힌 우리 땅의 최초 기록은 철종 재위 시기(1849~1864)에 나왔다.

조선 천주교회 4대 교구장이던 베르뇌(Berneux, 천주교 선교사) 신부가 1860년 홍콩에 보낸 편지에 "커피 20kg(생두로 추정)을 보내 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는 고종이 커피를 마신 것으로 알려진 1896년보다 36년이나 앞선 기록이다. 

또한, 베르뇌 신부의 스승이었던 리브와(Libois) 신부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 유학생이던 김대건 (한국 최초의 가톨릭 신부) 신부와 최양업, 최방제 형제들이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마카오 신학교에서 커피와 와인을 제공받았고 잘 적응했다는 내용이 발견된다. 

따라서 커피를 접한 최초의 한국인은 이들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한국 커피의 시작은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 시기이다. 

고종(조선 제26대 왕, 대한제국 황제)은 러시아 공관에 머무는 동안 주한 러시아 공사였던 웨베르(Karl Waeber)를 통해 우리나라 최초로 커피를 마셨다고 전해진다.

고종은 이후에도 커피를 즐겼으며, 경복궁 후원의 서양식 건물인 정관헌(靜觀軒, '조용히 궁궐을 내려다보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커피(가배, 珈琲, 또는 양탕, 洋湯)를 마시며 외교사절들과 연회를 즐겼다.

당시 커피는 서양에서 들어온 국물이라는 뜻으로 '양탕국'이라고 불렸다.


이 시기 커피는 왕족, 귀족, 지식인들 사이에서 먼저 문화가 형성되었다. 

1884년 최초의 의료선교사 호러스 알렌(Horace Allen)은 궁중에서 대기하는 동안 커피 대접을 받았다고 기록했으며, 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도 1884년경 조선에서 유행하던 커피를 고위 관리의 별장에서 마셨다고 증언했다.

커피의 대중화 조짐은 독립신문을 통해 엿볼 수 있다. 

1897년 독일 상인 골스찰키(Gorschalki)가 정동에서 자바 커피(Java Coffee)를 판매한다는 광고가 게재되었고, 1899년에는 윤용주(한국인 주인 최초의 대중 커피 판매점 주인)가 홍릉 전차정거장 앞에서 다과점을 개업하고 커피를 판매한다는 기록도 있다.


고종의 총애를 받던 독일 여인 손탁(Antoinette Sontag, 웨베르 공사의 처남의 처형)은 1902년 고종의 지원을 받아 손탁 호텔(Sontag Hotel,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 커피숍으로 알려짐)을 건립하여 사실상 영빈관으로 활용했다. 

이 호텔 레스토랑에는 친미·반일 성향의 외교관들과 국내 지식인들이 모여 커피를 마시며 일본에 저항하는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본군과 순사 간부들의 소굴로 바뀌었고, 조선 침탈의 거점으로 악용되었다는 슬픈 역사가 있다.


손탁호텔(1900s 엽서/사진) – 대한제국 초기 커피의 거점

커피 공화국의 그림자와 빛

근대화의 굴곡과 다방 문화

일제강점기, 3.1 운동 후 일본이 문화 통치로 전략을 바꾸자 유학파 '모던 보이'들을 중심으로 커피하우스가 다시 등장했다.

영화감독 이경손(한국인 최초 다방 '카카듀'를 연 인물)이 1927년 안국동 네거리에 '카카듀'(Café Cacadew)라는 다방을 열었는데, 이것이 조선인이 문을 연 최초의 다방이었다. 

카카듀는 남녀가 밀착해 술을 마시는 일본식 카페와는 달리 품격이 달랐으며, 조선 지식인들이 톨스토이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 등을 열며 계몽 활동을 벌이던 장소였다. 

이경손은 1931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김구의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도 했다.

천재 시인 이상(본명 김해경, 모더니즘 문화를 이끈 작가) 역시 1930년대 '제비', '카페 쓰루(鶴)', '무기' 등 다방을 직접 운영했는데, 이는 생계 목적보다는 다방을 문인들의 모임 장소이자 창작과 계몽의 혼을 불사르던 아지트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주인공 구보씨가 제비다방, 엔젤다방 등을 돌며 하루를 보내는 모습은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무기력한 일상을 그려낸다.


1945년 해방 후, 그리고 6.25 전쟁(1950년 발발) 중 미군 부대를 통해 인스턴트 커피가 국내에 처음으로 등장하고 일반에 퍼지게 되었다. 

당시 커피는 '설탕을 탄 서양탕국'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값이 싸고 회충 퇴치에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는 지금도 인스턴트 커피의 소비가 높은 나라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 후, 1960년대에 들어서 다방(지식인의 사랑방에서 젊은이들의 낭만 공간으로)이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고, 팝송이 퍼지면서 DJ 박스를 설치한 음악다방이 명동 등에 등장하기도 했다.

대중화에 도사린 부작용도 있었다. 

다방 간의 치열한 경쟁은 '얼굴마담'과 '레지'라는 직업군을 만들어냈으며, 1970년대에는 갈 곳 없는 사람들이 50원짜리 커피 한 잔 값으로 종일 다방에서 시간을 때우기도 했다. 

특히 1970년,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분신한 청년 전태일은 하루 14시간 일하고 받는 일당이 겨우 커피 한 잔 값이라고 절규하며, 커피 가격 뒤에 숨겨진 당시 노동 현실의 비극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1968년 5월 국내 최초 커피회사인 동서 커피가 설립되었고, 1976년 세계 최초로 간편하게 물에 타 마시는 '커피믹스'가 한국에서 개발되었다. 

1978년에는 커피 자판기 1,100대가 주요 공공장소에 설치되면서, '빨리빨리'를 외치는 한국의 경제 발전 전략과 맞물려 커피는 대중화 물결을 탔다.


커피 공화국과 스페셜티 커피 시대

1999년 스타벅스(Starbucks)가 이화여자대학교 앞에 첫 1호점을 열면서, 한국에는 원두커피의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2000년대는 '커피 전문점의 춘추전국시대'로 기록되며, 원두커피가 음용자를 대변하는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스타벅스가 한국에 상륙한 지 26년이 지난 2025년 7월 현재, 전국적으로 2,009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2024년 기준 연간 매출은 3조 1,001억 원으로 국내 커피 프랜차이즈 중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한다. 

스타벅스의 등장 이후 대한민국은 '커피 공화국'이 되었으며, 세계에서 커피 소비량이 세 번째로 많은 나라가 되었고, 국민 1인당 연간 커피 소비량(405잔)은 세계 평균(152잔)보다 두 배 이상 높다.

최근 한국 커피 시장은 약 6조 원(2020년 기준) 규모이며, 관세청 자료에 따르면 2023년에는 15조 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현대 한국 커피 시장은 스타벅스와 메가커피(Mega Coffee, 영업이익 기준 국내 2위) 같은 상반된 전략을 가진 브랜드들이 경쟁한다.

• 스타벅스(Starbucks): '프리미엄 경험'을 판매하는 전략을 취한다. 

고급 인테리어, 노트북을 열고 오래 있어도 괜찮은 분위기, 직원이 이름을 불러주는 감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스타벅스는 품질과 브랜드 관리를 위해 대부분 직영점으로 운영하며, 이는 높은 고정비와 낮은 영업이익률에도 불구하고 프리미엄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선택이다. 

높은 커피 가격에도 소비자를 '팬'으로 만드는 브랜딩에 성공했다.


• 메가커피(Mega Coffee): '실용'에 철저히 맞춰진 전략을 구사한다. 

대용량, 저가, 빠른 속도를 강조하며, "아메리카노 한 잔 1,500원"이라는 가성비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커피 소비 성향이 세분화되면서 스페셜티 커피 (Specialty Coffee, 특별한 지리적·기후적 조건에서 자란 독특한 향미를 지닌 최상급 커피) 시장도 확대되었다. 

스페셜티 커피는 생산 이력이 명확하고, 높은 고도에서 재배되며, 전문가의 로스팅을 통해 고유의 향미가 최대한 발현된 커피를 의미한다. 

국내 스페셜티 커피 시장 규모는 2020년 기준 1조 원 수준으로, 전체 시장의 약 15%를 차지하며 대폭 성장했다.

스타벅스의 한국 상륙 26년의 역사에는 '빛'과 '그림자'가 공존한다. 

일자리를 창출하고 선진화된 외식 문화를 선도했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대기업 자본에 의해 도입된 외국 브랜드에 의해 상대적으로 토종 브랜드들의 설 자리가 좁아지고, 국부(國富)가 유출되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스타벅스는 환경 문제와 관련하여 그린워싱 (Greenwashing, 기업이 친환경 이미지를 홍보하지만 실제로는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거나 부정적인 경우)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리유저블컵'이나 '종이 빨대' 사용 등 친환경 정책을 시행했으나, 그 진정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커피는 오랜 기간 한국 경제 성장에 영향을 주었지만, 국민 건강을 염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카페인 섭취는 체내 칼슘 흡수를 방해하여 골다공증 위험을 키울 수 있으며, 임산부가 하루에 커피 2잔 이상을 마시면 저체중 아이가 태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또한 한국 성인의 커피 섭취량이 가장 많고, 특히 젊은 성인들의 가당 커피(설탕이 첨가된 커피) 소비 습관에 대한 건강 우려도 존재한다. 

따라서 커피 문화가 발전함에 따라 건강을 생각하는 현명한 소비가 필요하다는 후대의 평가가 주를 이룬다.


본문은 전설(칼디·오마르), 지역 논쟁(카파·짐마), 연대·기원에 대한 상이한 설을 함께 다룹니다. 

1차 사료가 희박한 구간은 대표 설과 반론을 병기했으며, 일부 수치·통계는 발표 시점과 집계 방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식민지·노동·공정무역 등 민감한 이슈는 다각적 시각을 반영하려고 했습니다.

건강 관련 내용은 일반 정보입니다. 개인 상황은 전문의와 상담하세요.


From Ethiopia’s dancing-goat legend and Yemen’s Mokha to Ottoman coffeehouses, coffee spread into Europe—blessed by Pope Clement VIII—fueling Enlightenment “penny universities.” 

Colonial plantations in Java and the Caribbean eclipsed Mokha and entrenched exploitation, later challenged by fair-trade debates. 

In Korea, coffee moved from 19th-century court and cafés to postwar instant culture, the 1999 Starbucks boom, and today’s specialty scene. 

Creativity in the cup coexists with labor, environmental, and health concer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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