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려: 부산 복음병원·청십자의료협동조합·간외과 개척기 (Jang Gi-ryeo)

 

한 남자가 밤새 켜진 수술등을 껐다.

창밖에 부산 영도(영도구, 1951년)의 바람이 먼저 식었다.

손등의 피 냄새가 감쪽같이 사라질 때마다, 그는 다시 가난을 떠올렸다.

장기려(張起呂, 1911–1995)는 그 가난을 고치는 법을, 칼로만 배우지 않았다.


“장기려 박사의 1972년 흑백 초상” / “Portrait of Dr. Chang Kee-ryo, 1972”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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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성장기는 북쪽 평안의 냉기와 맞닿아 있었다.

경성의전(경성의학전문학교) 수석 졸업, 평양에서의 외과 수련, 

교수와 병원장을 오가며 쌓은 임상은 전쟁보다 앞섰다.

그러나 실전은 1950년 가을 한 번 더 찾아왔다.

1950년 1·4 후퇴 때 장기려는 둘째 아들만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왔고, 아내와 나머지 자녀들은 북에 남았다. 

피난길에서 가족을 본 듯했지만 멈추지 못했고, 결국 생전에 다시 만나지 못했다.(전승)

그날 이후 ‘돌아가면 만난다’는 약속은 평생의 뒤틀린 문장이 되었다(전승).


“1951년 야전병원에서 진행되는 수술” / “Operation in a field hospital, Korea, 1951”
Wikimedia Commons(미 국립문서보관청), Public Domain(US Ar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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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으로 내려온 그는 미군 천막을 빌렸다.

영도의 교회 마당, 임시 병원, 이름은 '복음병원 (현재의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전기도 물도 불안정했지만, 수술은 시작되었다.

‘가난해서 못 고치는 병’을 고치겠다는 목표는 그날부터 그의 전공이 됐다.


“부산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외관” / “Facade of Kosin University Gospel Hospital, Busan”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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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로서의 업적은 차갑게 정확했다.

간담도(간에서 생성된 담즙을 십이지장까지 운반하는 길) 혈관 해부를 집요하게 연구해, 간암 대량 절제의 길을 열었다.

‘간은 못 건드린다’는 당시의 금기를, 그는 회복 가능한 환자에게서부터 뒤집었다.

수술장은 늘 팽팽했고, 동료들은 ‘한국 간외과의 문턱’이 여기라고 말했다.


“그레이 해부학의 인체 간 삽화” / “Gray’s Anatomy plate of the human liver”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고전 의학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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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를 국민이 기억하는건 다른 장면들이었다.

밤이면 병원 뒷문을 살짝 열어 두고, 돈 없는 환자에게 “며칠 뒤에 다시 오라”고 속삭였다는 이야기(전승).

영양실조 환자의 처방전에 ‘닭 두 마리 값’을 내어 내보냈다는 이야기(전승).

명동 길모퉁이에서 걸인의 손에 월급 수표를 통째로 쥐여 주었다는 이야기(전승).

시장에선 바가지를 쓰고도 값을 더 얹어 주며, “다음엔 겁나서 속이지 못할 것”이라 했다는 이야기(전승).

사실 여부를 떠나, 이런 이야기들이 그의 ‘진료 철학’을 더 정확히 설명한다는 데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도 바깥의 자비가 한계에 닿을 즈음, 그는 제도 안의 해법을 만들었다.

1968년,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의료보험조합).

“건강할 때 조금 내고, 아플 때 서로 돕자”는 구호는 북유럽의 모델을 한국 현실에 맞게 다듬은 문장이었다.

의료가 ‘자선’에만 기대지 않도록,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도달하는 회비와 진료의 루트를 만들었다.

이 조합의 실험과 통계, 실패와 보완은 훗날 전국민의료보험 구상에 살아 있는 참고서가 되었다.


그의 칼은 개인을 살렸고, 그의 조합은 골목을 살렸으며, 그의 습관은 한 도시의 윤리를 바꾸었다.

병원장으로서 그는 늘 적자였고, 의사로서 그는 늘 가난했다.

사택에서 지냈고, 낡은 구두를 신고, 새것을 먼저 환자들에게 보냈다(전승).

이 맥락에서 ‘바보 의사’라는 별명은 조롱이 아니라 호칭이었다.

사람들은 그 바보를 믿었다.


그의 삶은 명확했다.

가난과 질병은 기다려주지 않았고, 간질환 수술은 시간의 게임이었다.

무균·수혈·마취의 조건이 불완전할수록, 선택은 되돌릴 수 없었다.

그는 위험을 환자 편으로 기울게 만들었다.

성공은 환자의 이름으로 기록됐고, 실패는 자신의 가슴으로 들어왔다.


청십자의 진료권과 회비, 계약의 언어, 통계표와 일지, 조합원 교육.

의사의 언어는 법과 회계의 언어로도 이어졌다.

그는 설득했고, 설득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시간을 들였다.

의술은 날이었고, 조합은 손잡이였다.

그 둘이 함께 있어야 칼이 흔들리지 않았다.


무보험자의 줄은 언제나 더 길었고, 적자는 의지보다 빨랐다.

조합의 재정은 몇 차례 고비를 맞았고, 때로는 제도권의 오해와 의심이 그를 막았다.

그때마다 그는 ‘어제 고쳐 낸 환자’를 떠올렸다고 한다(전승).

포기할 구실은 많았지만, 포기할 사람이 없었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느껴지는 밤도 있었다.

북쪽에 남겨 둔 가족을 떠올리는 순간들, 실패한 수술의 침묵, 조합 통장의 바닥.

그는 그때마다 다음 수술을 준비했다.

칼을 준비한다는 건, 환자의 이름으로 다시 일어난다는 뜻이었다.

그는 회복실 문턱에 서서 가족을 대신해 환자의 손을 잡아 주었다(전승).


“강릉 인근 눈길을 남하하는 한국전쟁 피난민들” / “Korean War refugees trekking south near Kangnung, 1951”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US Army)
위키미디어 공용

결단의 문장은 짧았다.

“가난 때문에 죽게 두지 않는다.”

그 문장은 종교였고, 일정이었고, 예산이었다.

언젠가 그는 상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렀다.

그는 대답 대신, 다음 환자 이름을 불렀다.


마지막은 조용했다.

그가 떠난 뒤에도 복음병원엔 불이 들어왔고, 간 연구의 세대론은 이어졌고, 청십자의 기록은 책상 위 지침으로 남았다.

도시에선 여전히 가난이 아프지만, 그 가난은 예전만큼 절망적이지 않았다.

누군가 먼저 길을 냈기 때문이다.

병원 뒷문을 열어 둔다던 그 습관처럼, 제도도 이젠 조금은 먼저 열려 있다(전승).


“장기려기념 더 나눔센터 전경 / Chang Kee-ryo Memorial Hall exterior”
VisitKorea·부산시 스토리 리포트.
한국관광공사

오늘 우리가 장기려를 다시 읽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훌륭한 사람’이기 전에 ‘유능한 공공인물’이었다.

낭만의 어깨에 제도의 허리를 붙였고, 눈물의 자리에서 숫자를 적었다.

미담이 미담으로 끝나지 않게 하는 방법, 그가 이미 보여주었다.

이제 남은 일은, 우리의 병원과 구청과 예산서에서 그 방법을 현재형으로 유지하는 일이다.


그의 일화 가운데 무엇이 정확하고 무엇이 과장인지, 학술적 검증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일제 말기 창씨개명은 의료 현장을 지키려 한 현실적 순응이었다는 증언과 

끝까지 거부했다는 반론이 공존하며, 

1979년 부마항쟁 국면에서도 공개 정치 행보 기록이 적어 ‘비정치적 의료 전념’과 ‘도덕적 개입 부족’ 사이에서 평가가 엇갈린다(논쟁).

한편 널리 퍼진 ‘김일성 맹장수술’은 요청·연결설만 있을 뿐 직접 집도는 아니었다는 해석이 우세해, 과장된 일화로 본다(전승).

그러나 전설은 방향을 가리킨다(전승).

그가 실제로 뒷문을 열었든, 처방전에 닭 두 마리 값을 적었든, 

혹은 누군가가 그의 이름으로 그 장면을 만들었든,

우리는 여전히 그 장면을 필요로 한다.

그 장면이 많아질수록, 이 도시는 덜 아프다.


이 글은 신뢰 가능한 사료·논문·공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은 (전승), 해석 갈림은 (논쟁), 어원은 (어원)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표기했습니다.


Jang Gi-ryeo (1911–1995) was a Korean surgeon who turned wartime exile in Busan into a mission: treat the poor first. 

He helped build Gospel Hospital, pioneered major liver surgery, and created the Blue Cross medical cooperative so care wouldn’t depend on charity alone. 

His life blended exacting skill with stubborn compassion—night clinics, unpaid bills, patients before prestige. 

Legends persist and debates remain, yet his system-level mercy still shapes how Korea imagines humane medic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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