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토종개의 간단 역사: 진돗개·삽살개·동경이·풍산개·제주개 (Korean native dog breeds)


 달이 서쪽으로 기울던 새벽, 갈대밭 사이로 허연 입김이 떴다.

사냥꾼의 손짓 하나에 개가 멈췄다.

귀가 서고 꼬리가 들렸다.

먼저 바람을 맡는 쪽은 언제나 ‘그들’이었다.


진돗개(진도섬 토종견, Korean Jindo, 천연기념물 제53호).

삽살개(경산 토종견, Sapsaree, 천연기념물 제368호).

동경이(경주 토종견, Donggyeongi, 천연기념물 제540호).

풍산개(함경도 고지대 토종견, Pungsan/Phungsan, 북한 국가지정 기념물·국견).

그리고 제주개(Jeju Dog, 도 단위 보존 품종).

이 다섯 부류가 오늘 우리가 따라갈 발자국이다. 


진돗개는 섬의 바람을 등에 업고 자랐다.

좁은 들과 얕은 구릉, 갈대밭과 염습지가 뒤섞인 환경은 빠르고 조용한 사냥꾼을 길렀다.

1962년, 국가가 이 개를 천연기념물 제53호로 지정하며 혈통 관리가 시작됐다.

국제켄넬연맹(FCI) 표준 번호 334, 분류는 스피츠·프리미티브 그룹.

오늘날에도 ‘섬 출생’이 순혈 인증의 핵심이라는 사실은, 이 품종이 근대의 혼종화 파고를 힘겹게 버텨왔음을 말해준다. 


사람 손에 안긴 하얀 진돗개 강아지 / White Jindo puppy being held
 Wikimedia Commons / CC BY-SA 4.0
위키미디어 커먼스

이 개를 상징하는 이야기는 ‘백구’다.

1993년 대전으로 팔려간 7살 암컷이 일곱 달을 헤매다 300km를 거슬러 주인에게 돌아온 일화.

군더더기 없이 간단한 줄거리인데도 한국인의 가슴을 흔들었다.

군청은 2004년 그 개의 동상을 세웠다.

충성심은 혈통과 개체 성향이 겹쳐 빚는 성질이라 과장되기 쉽지만, 

백구의 귀환은 진돗개의 방향감각·추적성·사회적 유대가 어떤지 단번에 보여준 상징이었다. 


우리문화신문 화보 기사 내 “백구와 박복단 할머니상” 이미지(진도군 의신면 돈지리, 백구마을).
우리문화신문 2015.09.09 기사.
코야문화

삽살개는 다르다.

흔들리는 숫사자 같은 털이 이마를 덮고, 걸음은 느긋하지만 견폭은 단단하다.

집집마다 ‘잡귀를 쫓는다’(전승)는 믿음이 따라 붙었다.

일제 강점기와 전쟁을 거치며 사실상 소멸 직전까지 갔다가, 1980년대 말부터 학술·현장 보존이 시작됐다.

1992년 천연기념물 제368호.

이후 경산의 번식연구소·대학 네트워크가 계통을 정리하고, 2000년대 들어 개체수가 수천 단위로 회복됐다.

우리가 네 발로 걸어온 민속의 기억이 어떻게 과학과 만나 살아나는지, 이 품종의 계보가 증명한다. 


전주 한옥마을 길 위에 앉은 삽살개 / Sapsaree sitting in front of Jeonju Hanok Village
Wikimedia Commons / CC BY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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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이는 꼬리로 말하는 개다.

정확히는 ‘꼬리의 부재’가 말한다.

경주 일대에서 오래 내려온 이 보브테일(bobtail 짧은꼬리)은 꼬리가 짧거나 거의 없다.

2012년 천연기념물 제540호 지정으로 본격 보호가 시작됐다.

유전학은 왜 짧은 꼬리가 생기는지에 답했다.

다수 견종에서 꼬리 단축을 일으키는 T-box(T) 유전자 C189G 변이가 알려져 있고, 동경이에서도 짧은 꼬리의 유전적 원인이 규명되었다는 연구가 보고됐다.

전통·민속의 흔적이 분자 표지와 만나면서, ‘불길해서 꼬리가 없다’는 낡은 편견은 증거 앞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잔디 위에서 노는 동경이 강아지 두 마리 / Two Donggyeongi puppies playing on grass
Korea Heritage Service 이미지 / KOGL 공공누리 제1유형(출처표시)
위키미디어 커먼스

풍산개는 북녘의 설원을 닮았다.

백색에 가까운 모색이 흔하고, 골격은 진돗개보다 크며 사냥성은 강하다.

개마고원의 지형은 대형 수렵에 적합한 개를 요구했고, 이 품종은 그 요구에 응답했다.

1956년 북한에서 국가지정 기념물로 지정되었고, 2018년 남북 정상외교의 선물로 청와대에 두 마리가 보내지면서 다시 화제를 모았다.

이 개를 둘러싼 민족 상징화는 때로 정치의 언어를 빌리지만, 품종 그 자체의 역사는 보다 장구하고 단단하다. 


성견 풍산개 두 마리(흰색·크림색) / Two adult Pungsan dogs
Wikimedia Commons / CC BY-SA 3.0(겸 GFDL)
위키미디어 커먼스

제주개는 바람의 섬에서 다시 태어났다.

1980년대 중반, 섬에 남은 순계가 손가락으로 꼽힐 만큼 적었다.

1986년부터 보존·번식 사업이 시작되며 개체수가 회복되었고, 현재는 도 단위 관리·분양 프로그램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제주개의 외형은 여우·늑대를 연상시키고, 빗자루처럼 치켜든 꼬리가 특징이다.

천연기념물 국가 지정은 아직 없지만, 지역 차원의 보호와 유전 연구가 축적되며 ‘섬의 토종’ 정체성은 견고해졌다. 


제주개 기사
경향신문

이름만 다를 뿐, 다섯 품종의 뿌리는 공통의 기후와 생활사에 닿아 있다.

대륙과 바다의 길목, 산악과 해안이 촘촘히 교차하는 한반도는 ‘스피츠형’ 개가 살기 좋은 곳이었다.

직선의 등선, 쫑긋 선 귀, 이중모, 차가운 공기에 강한 체성.

사냥과 경계, 가족과의 유대에 최적화된 형질이 세대를 거듭하며 고정됐다.

혼종화의 물결이 거셌던 20세기에도, 이 형질은 지역 공동체의 필요와 애정 속에서 근근이 이어졌다. 

이밖에도 누렁이, 코리안 마스티프(도사견)들의 개량견 혹은 잡종이라고 불리는 견종들도 있다.


한때 이 나라는 개를 빼앗기기도 했다.

강점기의 공출, 전시 불안과 식량난은 토종개를 사라지게 했다(전승).

진돗개가 비교적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일본 학계가 원산·시바 같은 자국 토종과의 유사성을 인지해 연구·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논쟁).

역사는 잔혹하지만, 기록은 때로 구명줄이 된다. 


토종개의 역사는 혈통의 순결 경쟁이 아니다.

섬세한 ‘관리’와 구체적 ‘용도’가 만든 기능의 역사다.

진도는 추적과 귀소 본능, 삽살은 호위와 동거, 동경이는 민속과 유전학의 교차, 풍산은 설원 수렵, 제주는 섬 생태와 공동체.

각 품종이 자신의 자리에서 인간과 맺어온 계약의 총합이 곧 ‘한국 토종개’라는 이름이다.


오늘 우리가 지켜야 할 건 ‘이름’보다 ‘능력’과 ‘이야기’다.

고유의 행동특성, 지역 프로그램과 번식 기록, 표준과 건강 데이터, 유전 표지.

그리고 사람과 나눈 구체적 장면들.

백구가 돌아왔다는 사실처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단번에 이해하는 한 화면.

그 장면이 많아질수록, 토종개의 내일은 더 또렷해진다. 


끝으로 하나만 더.

이야기는 언제나 현재형이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바람을 먼저 맡는 그들 덕분에 우리 집 마당이 고요할 것이다.

그 고요가 이어지는 한, 한국 토종개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글은 신뢰 가능한 사료·논문·공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은 (전승), 해석 갈림은 (논쟁), 어원은 (어원)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표기했습니다.


Korea’s native dogs reflect the peninsula’s landscapes and history. 
Jindo (Nat’l Monument No.53) is famed for loyalty and homing. 
Sapsaree (No.368) rebounded from near extinction. 
Donggyeongi (No.540) is a natural bobtail validated by genetic research. 
Pungsan from the North’s highlands excels at big-game hunting. 
Jeju dogs embody island ecology. 
Beyond names, preserved behavior, records, and community stewardship keep these traditions alive; function and story matter more than pu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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