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 르완다 집단학살: 트와·후투·투치, 갈등의 뿌리부터 종결까지 (Rwandan Genocide)


라디오는 새벽 다섯 시에 켜졌다.

오렐리아나(가상·교사)는 볼륨을 바늘만큼 남겨 두고, 칠판 지우개를 손에 쥐었다.

“비행기가 떨어졌습니다.” 같은 문장이 반복되었다(논쟁).

바로 다음엔 지명과 사거리 이름이 흘렀다.

장-바티스트(가상·택시 운전사)는 골목 모퉁이에서 브레이크를 밟았다.

나무 장대 두 개, 콘크리트 블록 하나, 팔에 흰 천을 맨 청년 셋.

첫 검문소가 만들어지는 데 10분이면 충분했다.

“신분증.”

사진, 출생지, 억양.

간단한 것들로 생사를 가르는 선이 그어졌다.

오렐리아나는 출석부에서 두 줄을 찢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 줄에 적힌 주소가 오늘 누군가의 좌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교회와 학교로 움직였고, 오후가 되자 그곳이 표적이 되었다.

그 하루가, 이후 100일의 샘플이었다.


이 일이 갑자기 생긴 건 아니었다.

오래전 르완다의 세 집단은 언어·문화는 비슷했지만, 

벨기에 식민 통치가 신분을 ‘고정’하며 갈등을 키웠다.

트와(인구1%미만)는 주변화, 후투(인구85%)는 농경 다수, 

투치(인구14% 특권부여)는 목축·엘리트로 규정되었다.

카드가 신분이 되었고, 신분이 기회와 의심을 나눴다.

그러나 1962년 르완다가 독립하면서 후투족이 권력을 잡게 되었고,투치족은 차별과 폭력에 직면했다. 

이로 인해 투치족은 주변국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1983년 투치 인구 비율 분포 지도” / “Map: Percentage of Tutsi population by commune, 1983”
Wikimedia Commons, CC BY-SA 3.0/4.0(파일 설명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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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행정 회의는 늘 같은 사람들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끝났다.

내전이 터진 뒤로 라디오와 신문은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말들을 매일같이 뿌렸다.

웃음 섞인 농담, 합창, 친숙한 광고의 뒤에, 폭력을 연습시키는 문장이 숨어 있었다.

무기와 호루라기가 배포되었고, 청년 조직이 훈련을 받았다.

“적이 오면 이렇게 지키라”가 아니라, “적이 누구인지 이렇게 구별하라”가 먼저였다.

그 결과, 명령이 떨어진 날에 모두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1994년 4월 6일 밤, 대통령 전용기가 미사일에 격추되어 추락했다.

누가 쐈는지는 지금도 여러 가설이 남아 있다(논쟁).

그러나 다음 장면은 분명했다.

전화가 돌았고, 트럭이 움직였고, 명단이 상자에서 나왔다.

명단은 ‘오늘 급히 만든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업데이트되던 물건이었다.

군의 일부 지휘자와 극단주의 정치인, 민병대 간부가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검문소는 여기에.”

“여긴 교회가 크니 오후로.”

RTLM 라디오는 좌표와 이름, 이동 방향을 읽어 주었다.

농담을 섞어 긴장을 낮추고, 웃음으로 망설임을 끊었다.

그 순간에, 누가 주도했는지 질문은 현장에서 이미 답이 나 있었다.

지방 행정과 민병대, 군 일부가 같은 지도를 들고 있었다.


“RPF 대원들이 하비아리마나 대통령 전용기 잔해를 조사(1994.5.26)” / “RPF rebels inspect wreckage of President Habyarimana’s plane, May 26, 1994”
TIME 기사 내 사진, 사진 © Corinne Dufka/Reuters (에디토리얼 사용)
TIME

※후투족 강경파의 음모는 투치족과의 평화협상을 추진하던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을 반역자로 간주했다.

또한 대통령 전용기 추락 이후,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투치족이 암살을 저질렀다고 선동했다.


첫 주의 절차는 금방 익숙해졌다.

신분증, 집 수색, 우물·시장·정류장 통제, 그리고 “피난은 교회와 학교로.”

하지만 오후가 되면 공지의 용도가 바뀌었다.

니야마타, 냐루부예, 무람비. (교회와 학교에 투치족이 몸을 숨긴곳)

지도에서 동그라미 친 곳들이 같은 방식으로 무너졌다.


“니아마타 성당 내부의 희생자 유품 / Victims’ clothing inside Nyamata Church Memorial”
Adam Jones(Flickr) 경유, CC BY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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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렐리아나는 교실 지하실에 아이 둘을 숨기고, 성당으로 가려는 이웃에게 물과 분유를 쥐여 주었다.

“지금 가면 위험해요. 어두워질 때 움직이세요.”

그 말이 약속이 되었다.

장-바티스트는 택시 좌석을 접고 담요와 쌀자루를 깔았다.

아이 하나가 그 사이에 들어갔다(전승).

첫 검문소에서는 보닛을 열고 스패너를 흔들었다.

두 번째에서는 장례 행렬 뒤에 붙었다(전승).

관의 천이 길을 열어 주었다.

세 번째 검문소에서 “억양이 다르다”는 말이 나왔다.

그는 엔진을 끄고 창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열을 식혀야 해요.”

시간을 벌었고, 그 사이 아이는 숨을 참았다.

밤이면 라디오는 더 크게 들렸다.

스위치를 끄는 일이, 오렐리아나의 하루 마지막 행동이 되었다.


4월 중순부터 6월까지, 속도는 절정에 닿았다.

키갈리(르완다의수도) 외곽과 동·남부 농촌에서 색출과 집단 살해가 집중되었다.

무람비의 체육관은 넓었지만 출구가 적었고, 성당의 문은 두껍지만 오래 버티지 못했다.

어떤 성당은 사람을 숨겼고, 어떤 성당은 협조의 의심을 남겼다.

같은 제도, 다른 선택.

비세세로(서부주 카롱기(Karongi) 구역)에 있는 지역의 산등성에서는 

주민들이 돌을 옮겨 방어선을 만들었다.

낮에는 숨어 있고 밤에는 이동했다.


“키갈리 추모관의 희생자 사진 전시 / Wall of victims’ photos at Kigali Genocide Memorial”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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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6월, 학살이 계속되자 프랑스가 유엔 안보리 결의 929로 승인받아 ‘터키석 작전’을 실시했고, 

6월 23일부터 8월 21일까지 르완다 서남부(시앙구구–키부예–지콩고로)에 민간인 ‘안전지대’를 열었다.

이 구역은 많은 주민에게 식량·의료·대피를 제공해 실제로 목숨을 살렸다.

동시에 가해 세력 일부가 무장 해제 없이 그 안/경유로 자이르로 빠져나가거나 재정비했다는 비판이 커, 평가는 지금도 엇갈린다(논쟁).


“1994년 RPF 진격·프랑스 보호구역 지도 / Map of RPF advance and French Zone Turquoise (1994)”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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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와중에 사람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버텼다.

한 수도자가 지하 저장고로 사람들을 내려보내고, 

밖에서 빈 항아리를 굴려 발자국 소리를 가렸다는 진술이 남았다(전승).

오렐리아나는 학교 서류 철에서 두 가족의 주소 표기를 일부러 틀리게 적었다.

며칠 뒤 그 서류는 분실 처리되었다(전승).

장-바티스트는 비가 올 때만 사람을 실어 날랐다.

빗소리가 주변 소리를 덮어 주었기 때문이다(전승).

하이라이트는 거대한 전황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남은 작은 장면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지도를 바꾼 건 다른 힘이었다.


7월 초, RPF(투치족 중심의 반군 무장단체이자 현재 르완다의 집권 정당)가 키갈리를 장악했다.

중순에는 전국 통제권이 넘어갔다.

검문소가 사라졌고, 도로 표지판이 제 역할을 되찾았다.

사람들은 국경으로 몰렸다.

자이르와 탄자니아 방향 캠프는 구호와 질병, 무장화가 뒤섞인 새로운 위기가 되었다.

법과 절차가 뒤따랐다.

국제형사재판소가 문을 열었고, 

국내 법원과 가차차 재판(지역 공동체 재판. '잔디가 깔린 마당'이라는 의미)이 시작되었다.

큰 사건은 법정으로, 수많은 사건은 마을 광장으로 올라왔다.

증언은 상처와 함께 나왔고, 보호의 한계와 보복의 두려움도 그 옆에 있었다.

국가는 추모관을 세우고 4월 7일을 기념일로 정했으며, 

교과 과정을 손보고 증오 선동을 막는 규정을 강화했다.


“적십자 직원과 가족 / British Red Cross assisting family during genocide”
British Red Cross(Flickr) 경유, CC BY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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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서야 질문을 한 번에 정리할 수 있었다.

왜 일어났는가.

오래 저장된 구분과 반복된 선동, 준비된 명단과 동원된 행정, 라디오의 지시가 한 날에 겹쳤기 때문이다.

누가 주도했는가.

극단주의 정치 지도자와 민병대 간부, 군의 일부가 같은 지도를 들고 현장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끝났는가.

RPF가 무력으로 도시를 바꾸었고, 그다음 법이 사람의 책임을 호출했기 때문이다.


1994년 4월 22일 르완다 내전 지도—파란색=RPF 통제 구역” / “Rwandan Civil War map on 22 Apr 1994 — blue = RPF-controlled areas”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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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렐리아나는 그해 가을, 교실 벽에서 지난달 지리 과제를 떼었다.

아이들에게 가족의 공백을 적게 했다.

말할 수 없는 학생에겐 빈 칸을 허락했다.

“빈 칸도 기록이다.”

장-바티스트는 택시 앞유리에 작은 지도를 붙였다.

한때 검문소였던 곳에 빨간 점을 찍고, 아이들에게 설명했다.

“이 도로는 낮에 검문이 많다. 해가 진 뒤에만 이동하거라.”

마지막 남은 빨간 점은, 몇 달 뒤 검은 잉크로 덮였다.

그 점이 더 이상 검문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람비 추모관 학교 부지 파노라마 / Panorama of Murambi Memorial Centre (former schoolgrounds)”
Adam Jones(Flickr) 경유, CC BY-SA 4.0/CC BY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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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는 음악만 흘려보냈다.

오렐리아나는 창문을 열고 분필을 들었다.

칠판에는 다섯 줄이 적혔다.

신분–권리.

방송–규제.

명단–보호.

증언–증거.

검문–절차.

아이들이 따라 읽었다.

그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생활에 맞는 크기였다.


이 글은 신뢰 가능한 사료·논문·공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은 (전승), 해석 갈림은 (논쟁), 어원은 (어원)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표기했습니다.


After the president’s plane crash in April 1994, extremist Hutu leaders activated pre-made lists, roadblocks, and RTLM radio to target Tutsi and moderate Hutu. 
Churches and schools turned from shelters to kill sites; some communities resisted (e.g., Bisesero). 
France led ‘Zone Turquoise’ to aid civilians, yet critics say it let perpetrators flee. 
The RPF seized Kigali in July, ending the massacres after 100 days.
 Later, ICTR and Gacaca courts pursued accountability and memorials fixed the rec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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