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현 대승과 우금치의 비극: 동학농민군 총대장 전봉준, 민주의 씨앗을 뿌리다 (Jeon Bong-jun)


전봉준, 녹두꽃 피다: 망국의 새벽을 여는 혁명가의 일대기


작은 거인의 탄생과 고부의 비극 (The Small Giant)

전봉준(全琫準)은 서기 1854년(철종 5), 전라도 고부군(古阜郡, 지금의 전북 정읍시) 당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몰락한 양반 가문이었으나, 대대로 학문과 서당 훈장(訓長, 스승)의 길을 걸으며 지방 사회에서 존경받는 지식인이었다.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全昌赫) 역시 명망 높은 서당 훈장이자, 지방의 부정한 현실에 맞서 목소리를 내는 인물이었다.


전봉준 생가(정읍 입암면)
·CC BY-SA · Jeon Bong-jun birthplace, Ipam-ri.
위키미디어 공용

[성장 배경과 '녹두'의 유래]

전봉준은 여느 양반의 아들처럼 유교 경전을 익혔으나, 그의 관심은 언제나 '세상의 이치'와 '백성의 고통'에 있었다. 

그는 체구가 매우 작았는데, 키가 150cm가 채 되지 않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의 별명인 '녹두장군(綠豆將軍)'은 단순히 그의 이름인 '봉준'과 소리가 비슷해서 생겼다는 설도 있으나, 작은 키에서 유래했다는 전승이 널리 알려져 있다(전승). 

이 작은 키는 훗날 수많은 사람을 이끄는 그의 거대한 의지와 극적인 대비를 이루며, 혁명가의 드라마를 완성하는 상징이 되었다.


전봉준은 스물여섯 무렵, 시대의 혼란 속에서 새로운 사상인 동학(東學, 최제우가 창시한, 인내천 사상을 바탕으로 한 민족 종교)을 접하고 깊이 빠져들었다.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라는 평등 사상을 주창하며, 신분과 빈부를 가리지 않고 고통받는 민중에게 희망의 불씨를 지폈다. 

그는 고부 지역의 동학 접주(接主, 지방 교구의 책임자)가 되어, 농민들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조용히 세력을 규합해나갔다.


전봉준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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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보(萬石洑)와 아버지의 죽음

전봉준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것은 서기 1892년, 새로운 고부 군수(古阜 郡守, 지방 행정 책임자)로 부임한 조병갑(趙秉甲, 탐관오리의 대명사) 때문이었다. 

조병갑은 부임하자마자 온갖 악행과 가렴주구(苛斂誅求, 가혹한 세금 징수)로 고부 백성을 쥐어짰다.

그중 가장 큰 악행은 만석보(萬石洑, 농업용 저수지) 건설이었다.


조병갑은 이미 있던 저수지를 방치하고 백성들에게 강제로 노동을 시켜 새로운 보를 쌓게 한 뒤, 이 보의 물을 쓰려면 막대한 수세(水稅, 물 사용료)를 내라고 강요했다. 

농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피땀으로 일군 곡식을 수세로 바쳐야 했다.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아들의 동학 세력을 등에 업지 않고, 유생으로서의 명망을 바탕으로 백성들과 함께 조병갑에게 탄원(歎願)을 올리러 갔다.


군수 조병갑은 분노에 가득 차, 서슬 퍼런 눈빛으로 60이 넘은 전창혁을 향해 무자비한 매질을 명령했다. 

군수 앞에서 무릎 꿇고 읍소하던 전창혁은 결국 매를 맞아 쓰러졌고, 그 후유증으로 숨을 거두었다는 전승이 있다(전승).


이 사건은 전봉준에게 단순한 불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개인의 복수이자 혁명의 방아쇠였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탐욕과 부패의 실체를 목도한 전봉준은 더 이상 붓을 들고 경전이나 가르치는 삶을 살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조용히 수염을 다듬고, 창고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녹두색 도포를 꺼내 입었다.


고부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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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 민란과 혁명의 불씨 (The Spark)

사발통문(沙鉢通文)과 고부 관아 습격

전봉준은 행동을 개시했다. 

서기 1893년 겨울, 그는 고부 지역 동학 교도들과 뜻있는 농민 지도자들을 자신의 집에 모았다. 

좁은 방 안, 탁자 위에는 사발(沙鉢, 밥그릇) 하나가 놓였다. 

그들은 사발을 뒤집어 놓고 그 주변을 따라 참가자들의 이름을 원형(圓形)으로 적었다.

이것이 바로 사발통문(沙鉢通文)이었다.


사발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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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발통문: 민중 봉기의 참가자 명단. 주동자를 알 수 없도록 이름을 사발 모양으로 돌려가며 적어 보안을 유지했다.


사발통문의 내용은 '조병갑의 처벌', '부당한 세금 철폐', '만석보 파괴' 등 20여 개 항목의 봉기 결의문이었다. 

주동자는 전봉준이었으나, 명단에는 그의 이름이 가장 먼저 적히지 않았다.


서기 1894년 정월, 드디어 봉기의 불꽃이 튀었다. 

전봉준은 수백 명의 농민을 이끌고 고부 관아(古阜 官衙, 군수의 집무실)를 습격했다.

그들은 무기고를 털고, 징수된 세곡(稅穀,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풀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만석보를 파괴하는 것으로 조병갑의 폭정에 대한 복수를 마무리했다.


만석보(萬石洑)의 남은 흔적
정읍시청

일파만파, 확산되는 농민의 분노

고부 관아 습격은 성공적이었으나, 조병갑은 이미 도망친 뒤였다. 

사건 직후, 조선 조정(朝廷,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 정부)은 사태를 무마하기 위해 새 군수를 파견하고 봉기의 주동자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조정의 조치는 진정한 원인(탐관오리 숙청)을 해결하지 못했다.


전봉준은 고부 민란이 단순히 한 군수의 비리에 대한 복수로 끝나서는 안 됨을 알았다. 

그는 봉기를 이끌었던 무리를 해산하지 않고, 고부 인근의 무장(茂長)과 정읍(井邑) 등지로 이동하며 동학 교도와 농민들을 다시 규합했다.


이때 전봉준은 자신의 개인적 복수를 '동학의 대의(大義)'로 확장했다. 

그의 목표는 더 이상 조병갑 한 명이 아니라, 조선을 병들게 하는 체제 자체의 개혁이었다.


전봉준의 휘하에는 그의 의형제 격인 김개남(金開南)과 영남 지역의 지도자 손화중(孫華仲) 등 다른 동학 지도자들이 합류했다. 

전봉준은 이들과 삼두마차를 이루며 혁명의 규모를 키워나갔다. 

특히 이 시기에 전봉준의 작은 체구와는 달리, 그의 명확한 연설과 카리스마는 농민들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주었다.


백산(白山) 대집회: '불멸의 의기'를 선포하다

고부 관아 습격이 단순한 폭동이 아님을 천하에 알린 사건은 백산(白山, 김제와 부안 경계에 있는 산) 대집회였다. 

서기 1894년 봄, 수만 명의 농민군이 백산에 집결했다. 

농민들은 창, 칼 대신 죽창(竹槍, 대나무를 깎아 만든 창)을 들고 모여들었다.


전봉준은 이곳에서 혁명의 기치인 '창의문(倡義文, 의로운 봉기를 시작하는 글)'을 선포했다. 

핵심 구호는 ‘보국안민(保國安民)·제폭구민(除暴救民)’이었고, 이후 각 고을 집강소에서 ‘폐정개혁안 12조’가 구체화·집행되었다.


창의문의 대의:

백성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바로잡는다.

외세(특히 일본)의 침략을 몰아낸다.

탐관오리를 숙청하고 부당한 세금을 철폐한다.


이 집회를 통해 농민군은 스스로를 '동학농민군(東學農民軍)'이라 칭하며, 대규모 조직(총지휘부)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전봉준은 명실상부한 총대장이 되었다. 

백산은 동학농민군이 '단순한 폭도가 아닌, 조직된 군대이자 대의를 가진 세력'임을 천하에 알린 성지였다.


황토현의 대승과 전주성 점령 (The Victory and the Compromise)

혁명의 승리: 황토현(黃土峴)과 장성(長城) 대첩

조정은 농민군의 봉기를 심각한 반란으로 규정하고, 홍계훈(洪啓薰)이 이끄는 정규군(京軍, 중앙 군대)을 파견했다. 

동학농민군과 조선 정규군의 첫 대규모 전투는 황토현(黃土峴, 지금의 전북 정읍시)에서 벌어졌다.


농민군은 비록 무기가 빈약했지만, 지형지물에 익숙했고 결사항전의 의지가 충만했다. 

전봉준은 병법(兵法)에 능했으며, 정규군이 가진 화력의 우위를 무력화하는 기습 작전을 펼쳤다. 

특히 험준한 지형을 이용한 농민군의 매복 작전은 정규군에게 치명타를 입혔다.


농민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낫과 죽창, 몽둥이만으로 무장한 농민군이 관군의 최신 화포에 맞섰다. 

황토현의 흙은 피로 붉게 물들었고, 농민군의 함성은 산천을 뒤흔들었다. 

이 황토현 전투와 이어진 장성 황룡촌(黃龍村) 전투의 연이은 대승은 농민군이 '무적의 군대'임을 입증하며 혁명의 절정을 이루었다.


정읍 황토현 전적
정읍시청

전주성(全州城) 점령: 절정의 순간

연이은 승리로 사기가 오른 농민군은 전라도의 심장이자 상징인 전주성(全州城, 전라도 관찰사가 주둔하는 중심 도시)으로 진격했다. 

서기 1894년 음력 4월,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관군을 격파하고 마침내 전주성을 함락시키는 역사적 쾌거를 이루었다.


전주성 점령은 동학농민운동의 정치적, 군사적 절정이었다. 

전라도 전체가 사실상 농민군의 수중에 들어왔고, 조정은 패닉에 빠졌다. 

청(淸)나라와 일본(日本)은 이 사태를 빌미로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준비를 시작했다.


전주 화약(全州和約)이라는 치명적인 실수

전주성 점령 후, 전봉준은 치명적인 결정을 내린다. 

바로 조정 측과의 협상(協商)이었다. 

조선 조정은 청나라 군대까지 끌어들여 사태를 수습하려 했고, 일본군 또한 조선에 상륙하며 한반도의 위기가 고조되었다.


전봉준은 '외세의 개입을 막아야 한다'는 대의와 '내부 개혁을 먼저 이루어야 한다'는 현실론 사이에서 고뇌했다. 

그는 결국 조정과의 협상을 택했다. 

이것이 바로 전주 화약(全州和約, 전주 평화 협정)이었다.


전주 화약의 핵심:

농민군은 해산하고, 조정은 탐관오리를 처벌한다.


농민 자치 기구인 집강소(執綱所, 지방 자치 개혁 기구)를 설치하여 폐정 개혁(弊政改革, 낡고 잘못된 제도 개혁)을 추진한다.


훗날 역사학자들은 전주 화약을 전봉준의 가장 큰 전략적 과실로 꼽는다. 

그는 협상 후 농민군을 해산시켜버렸다. 

다만 각 군현의 집강소 설치로 ‘무장 해산’의 정도와 범위에 대해서는 학계 해석 차가 있다(논쟁). 

농민군의 힘은 오직 무력에 의한 조직력에 있었는데, 이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농민군의 해산은 조정에게 시간을 벌어주고, 이미 들어와 있던 일본군에게 한반도의 주도권을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봉준은 정치적 협상을 통해 개혁을 이루려 했으나, 이는 무력을 잃은 개혁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보여주었다. 

그의 순수한 대의(외세 배격)가 냉혹한 국제 정세와 권력 투쟁 속에서 오히려 독이 된 순간이었다.


1차 봉기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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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치(牛金峙)의 패배와 영원한 유산 (The Legacy)

재봉기(再蜂起)와 우금치 전투의 비극

전주 화약 후, 조정은 약속 이행에 미온적이었고, 7월에는 일본의 개입 아래 ‘갑오개혁’이 강행되며 정국이 급변했다. 

동학 세력은 가을에 재봉기하여 북상했다. 

 일본은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까지 시해하는 등(을미사변, 1895년 10월) 국권을 위협했다.


전봉준은 다시 한번 천하를 바로잡기 위해 재봉기를 결정했다. 

서기 1894년 가을, 수만~수십만으로 전하는 농민군이 다시 모여 서울 진격을 목표로 했다(전승).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공주 우금치(牛金峙, 공주 외곽의 고개)에서 동학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과 맞닥뜨렸다. 

일본군은 최신식 소총과 화포로 무장하고 있었고, 농민군의 무기인 죽창은 그들의 화력 앞에서 무의미했다. 

 우금치 전투는 1894년 11월 대패로 끝났고, 동학농민군은 급속히 와해되었다.


우금치 전투
위키백과

우금치 고개는 피와 화약 냄새로 뒤덮였다. 

전봉준은 작은 체구로 군사들의 최전선에서 사자처럼 외쳤지만, 일본군의 기관총 소리는 농민들의 함성을 삼켜버렸다. 

농민군은 수만 명이 희생되는 참혹한 패배를 당했고, 동학농민운동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우금치 전적지(공주·2차 봉기 패전지)
공주시 관광/지역 페이지
국가유산포털

체포, 재판, 그리고 최후의 진술

우금치 패배 후, 전봉준은 도피하던 중 부하의 배신으로 체포되었다. 

그는 일본군에게 넘겨져 고문과 함께 재판을 받았다.


재판정에서 전봉준은 초라한 포박(捕縛) 차림이었으나, 그의 눈빛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반역(叛逆)이 아니라 폐정 개혁을 위한 정당한 의거(義擧)였음을 당당하게 주장했다.


"내가 비록 실패하였으나, 내가 일으킨 이 개혁의 대의는 결코 썩지 않을 것이다. 나는 백성을 위하여 일어섰고, 이 땅에 민주(民主, 민중의 주인됨)의 씨앗을 뿌렸다."


서기 1895년 3월 29일, 전봉준은 김개남 등 동학 지도자들과 함께 서울에서 교수형에 처해지며 41년의 짧고도 강렬한 삶을 마감했다.


전봉준과 동학농민운동은 비록 군사적으로는 실패했지만, 한국 역사에 가장 거대한 문화적, 정치적 유산을 남겼다.


민중의 자각: 동학농민운동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민중 스스로가 국정 개혁의 주체임을 선언한 사건이었다. 

이는 이후 의병운동, 독립운동, 그리고 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민중 저항의 원류(源流)가 되었다.


녹두장군가는 전봉준의 별명인 '녹두장군'은 '녹두장군 녹두장군, 어이하여 왔느냐'로 시작하는 민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와 함께 민중의 애환과 저항 정신을 상징하는 노래로 남았다. 

그의 작은 체구는 약자의 강인한 의지를 상징하게 되었다.


전봉준은 근대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에게 자주와 민주(자유와 평등)의 상징으로 추앙받으며, '민족 혁명가'이자 '선구자'로 재평가되었다. 

그의 생애는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 소설의 소재가 되었으며, 그의 비극적 운명은 조선 말기 민중의 고통을 대변하는 아이콘으로 남아 있다.


전봉준은 자신의 비극적인 실패를 통해, 이 땅에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대의와 '민중이 나라의 주인이다'라는 혁명의 불씨를 영원히 남긴, 작은 거인이었다.


본 글은 사료·주류 연구를 기본으로 필요한 범위의 각색을 더한 역사 서사입니다. 

 연도·사건 시퀀스(전주화약–갑오개혁–우금치–을미사변)와 전봉준 사형일(1895.3.29) 등 핵심 사실은 검증된 학계 통설을 따랐으며, 아버지 별세 경위·별명 유래·병력 규모 등은 (전승) 혹은 (논쟁) 표기로 구분했습니다. 

오류 제보·사료 추천 환영합니다.



Jeon Bong-jun, a diminutive scholar from Gobu, became the fiery leader of the 1894 Donghak Peasant Revolution. 
Outrage at magistrate Jo Byeong-gap’s corruption—especially the Mansokbo water tax—sparked the Gobu uprising and the famed “sabal tongmun.” 
Rallying tens of thousands at Baeksan under the banner “Protect the nation, save the people,” his forces won at Hwangtohyeon and seized Jeonju. 
The Jeonju Truce brought brief reforms but dissolved his army; a autumn re-uprising collapsed at Ugeumchi against modern arms. 
Captured and executed in 1895, Jeon left a lasting legacy of popular sovereignty and resist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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