튤립 버블 1637—하를럼 컬리지와 ‘바람 장사’ (Tulip Mania)

 

하를럼(Haarlem, 네덜란드 북홀란트주)의 겨울은 길었다.

1636년 말부터 1637년 초까지, 운하는 얼었고 사람들은 저녁이면 선술집에 모였다.

그곳에서는 컬리지(collegie, 사적인 거래 모임)가 열렸다.

사람들은 탁자 위에 촛불과 장부를 올려놓고, 튤립 구근을 직접 보지 않은 채 미래의 인도를 약속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겨울에는 구근을 캐거나 옮길 수 없으니, 종이만 오갔다.

누구에게도 주인공은 없었다.

직조공, 제빵사, 하역꾼, 공증인, 선주, 종업원이 차례로 앉았다가 일어났다.


“17세기 네덜란드 선술집 내부(컬리지 분위기 연출)” / “17th-c. Dutch tavern interior (collegie-like setting)”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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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 방식은 단순했다.

봄에 캐낼 특정 품종의 구근을 정해진 무게나 수량만큼 인도한다는 약속을 사고팔았다.

사람들은 이 거래를 윈트한델(windhandel, ‘바람 장사’·어원)이라고 불렀다.

현물이 오가지 않으니 약속 자체가 상품이 되었고, 약속은 다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매 건마다 와인 머니라는 관행 수수료가 붙었다(보통 거래가의 약 2.5%, 건당 상한 3길더로 회자·전승).

수수료를 내고 장부에 이름을 남기면 거래는 유효해졌다.


“1637 암스테르담 튤립 거래 논평 팸플릿” / “1637 pamphlet on florists’ trade”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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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조공 얀은 낮에는 베틀을 돌리고 밤에는 컬리지에 앉았다.

그가 산 것은 ‘비세로이(de Viceroy)’ 같은 줄무늬 품종의 인도권이었다.

장부에는 수량 대신 무게가 적히는 일이 많았다.

무게가 늘수록 값이 붙었다.

얀은 자신의 월급보다 더 빨리 숫자가 커지는 것을 보며 한동안 잠을 설쳤다.

그러나 종이에 적힌 숫자는 아직 그의 집에 들어온 돈이 아니었다.


제빵사 마르겐은 새벽마다 반죽을 치고, 저녁이면 가격표를 살폈다.

밀가루 값은 조금씩 오르는 중이었지만, 구근 값은 하루에도 몇 번씩 솟구쳤다.

그녀는 “나는 빵을 굽고, 다른 사람들은 약속을 판다”고 말하곤 했지만 결국 소액을 샀다.

손님들이 지불한 현금을 그대로 묶어두는 것보다, 봄에 받을 구근 한 알이 더 나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항구의 하역꾼 코르넬리우스에게 소문은 늦게 도착했다.

“양파처럼 생긴 구근 한 알이 자루 백 개 값이 된다더라.”

과장은 분명했지만, 그가 봄마다 옮기던 곡물 자루의 무게를 생각하면 그리 허황되게만 들리진 않았다.

코르넬리우스는 세 번은 관망하고 네 번째에 서명했다.

그는 하루 종일 짐을 나르고 밤에는 조심스럽게 약속을 사들였다.


공증인 판 데르 비크는 얼굴빛이 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 거래가 도시의 공식 거래소가 아니라 사람 대 사람의 문서 교환이라는 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보증금도 없고, 매일 정산도 없고, 봄이 올 때까지는 실물 확인도 불가하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는 장부에 남는 문장을 꼼꼼히 확인했다.

가격, 수량(또는 무게), 품종명, 인도 시점.

문장이 모호하면 분쟁이 생겼고, 분쟁이 생기면 봄이 되어서도 해결이 늦어졌다.


“바이서로이, 1637년 튤립북 도판” / “The Viceroy, 1637 tulip book plate”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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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술집 종업원 안나는 잔을 닦으며 장부를 훔쳐보았다.

글자를 읽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서로의 이름 대신 품종 이름으로 불렸다.

“아드미랄 판 앤크하위전(Admiral van Enkhuizen) 하나 더 샀다더라.”

“셈페르 아우구스투스(Semper Augustus)가 또 올랐다네(전승·논쟁).”

안나는 한밤중 뒷마당에서 우연히 구근 하나를 주웠다.

양파와 비슷했지만 양파가 아니었다.

그녀는 주머니에 넣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셈페르 아우구스투스, 튤립 수채화” / “Semper Augustus tulip, 17th-c. gouache”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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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내내 거래는 이어졌다.

현물을 본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모두가 꽃의 무늬를 말할 줄 알았다.

누군가는 줄무늬의 각도를, 누군가는 꽃잎의 마감을 설명했다.

대부분은 전해 들은 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무책임했던 것은 아니다.

장부에는 품종 표기와 인도 장소, 증인 이름이 하나하나 적혔다.

다만, 약속이 약속을 부르는 속도가 실물의 속도를 앞질렀다.


1637년 2월 초, 하를럼의 어느 아침.

경매인은 기준가를 읽었고, 방 안은 조용했다.

가격을 낮췄다.

여전히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이날의 거래 실패는 곧장 다른 도시의 심리를 식혔다(전승).

“오늘은 관망하자.”

한 문장의 태도가 밤새 여러 도시로 번졌다.


“튤립 버블 풍자화—플로라의 수레” / “Flora’s Wagon of Fools—allegory of tulip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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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은 운하의 얼음을 타고 퍼졌다.

얀은 장부를 덮었다.

마르겐은 계약을 끊었다.

코르넬리우스는 다음 배달을 취소하고, 손에 익은 밧줄을 다시 만지작거렸다.

안나는 주머니 속 구근을 꺼내 보았다가 다시 넣었다.

가격 하락이 시작된 것이다.


곧이어 ‘약정 해지 시 수수료’를 둘러싼 이야기가 나왔다.

겨울 이전의 거래는 지키되, 이후의 거래는 소액의 위약금을 내고 풀어주자는 절충안이었다(도시별로 약 10% 또는 약 3.5% 등으로 회자·논쟁).

어느 도시에서는 공문이 빨리 나왔고, 또 다른 도시에서는 중재가 길어졌다.

공증인은 서랍 속 문서들을 이행, 해지, 분쟁으로 나눠 다시 묶었다.

문서가 많을수록 결론은 느렸다.


그 사이 품종의 이름은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비세로이는 비세로이일 뿐이고, 아드미랄은 아드미랄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이름 대신 실물을 보기 시작했다.

“올해 봄에 실제로 캐낼 수 있는가.”

“인도 장소에 누가 와 있는가.”

현물을 확인하는 습관이 뒤늦게 거래의 첫 질문이 되었다.


“원숭이의 튤립 거래 풍자” / “Monkeys trading tulips—satire on tulip mania”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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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은 크게 무너지지 않았다.

직조공장은 베틀을 돌렸고, 빵집은 새벽에 문을 열었고, 항구에서는 짐이 오르내렸다.

누군가는 잃었고, 누군가는 소액을 벌었지만, 도시 전체가 멈추지는 않았다(현대 연구 다수의 견해).

컬리지는 한동안 조용했고, 거래가 재개되더라도 겨울만큼 과열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약속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약속이 현물 앞에서 어떻게 멈추는지를 배웠다.


그 겨울의 이야기를 사람으로 묶어 보면 이렇다.

얀은 장부 첫 줄에 “현물 확인”이라고 크게 적어 두었다.

마르겐은 가격표 옆에 “빵 한 덩어리의 원가”를 같이 적기 시작했다.

코르넬리우스는 밧줄 끝에 매듭을 두 번 더 묶었다.

안나는 봄이 되자 뒤뜰에 주운 구근을 심었다.

그 꽃이 피었을 때, 그녀는 이름을 묻지 않았다.

그저 물을 주고 빛을 줬다.

줄무늬는 소문처럼 선명하지 않았지만, 그 꽃은 오래 피었다.


“17세기 튤립북 도판—마렐” / “Sheet from a Tulip Book—Jacob Marrel”
Rijksmuseum, Public Domain.
Rijksmuseum.nl

튤립 버블은 종종 “한순간의 광기”로 설명되지만, 이 이야기 속 사람들에게 남은 건 좀 달랐다.

겨울에는 약속의 재빠름이 앞섰고, 봄에는 현물의 속도가 이를 따라잡았다.

그 차이에서 가격이 흔들렸다.

사람들은 다음 겨울을 준비할 때, 장부를 펴기 전에 생활부터 점검했다.

가게 재고, 공장 주문, 항구 일정.

그리고 나서야 컬리지에 앉았다.


여름이 왔다.

운하의 얼음은 풀렸고, 배가 움직였고, 시장은 다시 분주해졌다.

누군가에게 그 겨울은 아픈 기억이었고, 누군가에게는 비싼 수업료였다.

그러나 도시는 계속 살았다.

튤립은 해마다 피었다.

비세로이도, 아드미랄도, 이름 없이 심겨진 꽃도.

사람들은 가끔 그 겨울을 떠올렸고, 장부에 한 줄을 더 적었다.

“먼저 생활. 그다음 약속.”


“1637년 튤립 바람장사 풍자판” / “Anno 1637—De tulpenwindhandel”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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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주인공이 없다.

대신, 여럿의 선택이 있다.

그 선택들이 모여 겨울이 지나고 봄을 맞았다.

그렇게 한 계절의 시장은 끝났고, 다음 계절의 생활이 시작됐다.


——— 막간: 그 겨울을 오늘식으로 듣는다면 ———


하를럼의 오래된 선술집. 낮은 천장에 촛불이 흔들리고, 벽에는 낡은 장부가 못으로 걸려 있다.

관광객처럼 보이는 청년이 문을 열자, 바에 앉은 노인이 손짓했다.


“핵심만 말해주지.” 노인이 장부 표지를 탁 치며 말했다.

“우린 겨울엔 구근을 만질 수 없었어. 그래서 ‘봄에 건네줄게’라는 약속만 사고팔았지. 

약속이 약속을 부풀렸고, 봄이 오자 현실이 한꺼번에 쏟아졌어. 그게 튤립 버블이야.”


청년이 휴대폰 화면을 들어 보였다. 초록과 빨강이 깜박이는 차트.

“그럼, 지금으로 치면 코인이랑 비슷한 거예요?”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무엇을 샀나부터 다르다네. 

우린 구근 그 자체가 아니라, 봄에 받을 ‘인도권’을 산 거야. 

종이에 적힌 약속. 자네는 토큰을 즉시 사서 지갑에 넣지. 그 차이가 첫 단추지.”


“담보는요? 강제청산 같은 건?”

노인이 장부를 펼쳤다. 빈칸이 많았다.

“그게 결제·담보 구조의 차이야. 우린 마진도, 중간정산도, 강제청산도 없었어. 

겨울 내내 약속만 돌렸고, 봄에 한 번 계산했지. 

자네는 거래소가 증거금을 잡고, 선을 넘으면 청산을 때리잖아. 

우린 그 울타리가 없었어.”


청년이 선술집 안을 둘러보았다. 

탁자마다 사람들 몇이 모여 호가를 속삭인다.

노인이 웃었다.

“가격·인프라도 달라. 우린 이런 컬리지, 그러니까 선술집 모임마다 호가가 제각각이었어. 

도시가 바뀌면 시세도 달라졌지. 

자네는 오더북이니 AMM이니 하며 전 세계 가격이 실시간으로 수렴되잖아.”


“그래도 팔고 싶을 땐 팔 수 있지 않나요?”

노인이 촛불 심지를 잘랐다.

“유동성이 문제였어. 군중의 마음이 식는 순간, 호가 자체가 사라졌지. 

아무도 손을 안 드는 경매장… 그 침묵을 아나? 

자네 시장은 보통 즉시 체결이 가능하지. 물론 슬리피지나 중단 같은 위험은 있어도.”


청년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노인의 장부를 넘겼다. 

이름과 숫자, 품종명이 촘촘했다.

“분쟁 나면 어떻게 했죠?”

노인은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였다.

“규칙·분쟁은 도시마다 달랐어. 어떤 곳은 위약금 3.5%, 또 다른 곳은 10%라는 소문이 돌았지. 

통일된 청산소 같은 건 없었어. 

자네는 거래소나 프로토콜이 규칙을 일원화하지? 우린 그게 없었다.”


문이 열리고 바람이 들어왔다. 계산을 마친 손님이 문턱에서 돌아보며 외쳤다.

“오늘은 ‘비세로이’가 올랐대!”

노인이 빙긋 웃었다.

“자, 마지막으로 서사 얘기. 우린 희귀 무늬와 품종 이름이 상상력을 키웠어. 

‘셈페르 아우구스투스’ 같은 이름 하나가 방 안 공기를 달궜지. 

요즘은 밈코인이거나 NFT가 그 역할을 하지. 이야기와 커뮤니티가 가격을 끌어올리는 힘. 

다만 이야기만 있고 현금화의 출구가 없으면, 사라지는 속도도 빠르단 걸 잊지 말라구.”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겨울엔 약속이 빨랐고, 봄엔 실물이 느리게 따라왔고, 

그 속도 차가 시장을 흔들었다… 그 말이죠?”

“정확해.” 

노인은 잔을 들어 올렸다.

“투자라는 건 결국 이 질문으로 돌아온다네. 

무엇을, 언제, 어떻게 받는가. 담보는 뭔가, 규칙은 누가 정하나, 

유동성은 어디서 오나. 그리고 무엇이 남는가.”


촛불이 잠시 흔들렸다가 다시 곧게 섰다.

청년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노인은 장부를 덮었다.

문밖 운하는 아직 얼어 있었지만, 봄은 멀지 않았다.

“기억해.” 노인이 말했다.

“먼저 생활, 그다음 약속. 그 순서를 뒤집지 않는 한, 꽃은 해마다 핀다.”


이 글은 신뢰 가능한 사료·논문·공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은 (전승), 해석 갈림은 (논쟁), 어원은 (어원)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표기했습니다.


Mid-winter Haarlem: in tavern “collegies,” townspeople trade paper promises to receive tulip bulbs in spring—no bulbs change hands. 
The windhandel swells as names like Viceroy and Semper Augustus fire gossip. 
With no margins or daily settlement, small “wine-money” fees grease deals and town rules differ.
 In early Feb 1637 a Haarlem auction gets no bids; prices stall across cities. 
Jan the weaver, Margen the baker, Cornelius the porter, and others unwind. 
Lesson: promises outrun goods; spring restores lim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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