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름은 로베르토 데 빈센조(아르헨티나 골프선수, 1923–2017).
비야 바예스테르(부에노스아이레스주 교외)의 낮은 지붕과 철도 소음 속에서 자랐다.
연못에서 건져 올린 공을 닦아 팔던 소년이 먼저 돈을 번 뒤 스윙을 흉내 냈다.
그렇게 캐디가 되었고, 라넬라흐 골프클럽(Ranelagh Golf Club, 부에노스아이레스주 베라사테기)의 잔디가 그의 학교가 되었다.
가족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고, 그는 집안의 다섯째로 오래 서 있는 법을 먼저 배웠다.
오래 서 있는 법은 골프에서 리듬으로 바뀌었고, 리듬은 성격으로 굳었다.
서두르지 않는 성격은 장점이자 약점이었고, 그는 그걸 평생 가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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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넬라흐 골프클럽 입구 전경 / Front of Ranelagh Golf Club (Berazategui)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위키미디어 공용 |
프로가 된 뒤에도 그는 늘 돌아갈 곳이 있다고 말했다.
그 돌아갈 곳은 국가나 명예가 아니라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라넬라흐의 회원들, 동일선처럼 길게 늘어선 골프백, 점심시간의 농담, 어깨를 두드리던 손의 온기였다.
그는 클럽 프로다운 친밀한 명성을 얻었고, 멀리 원정을 다녀와도 “돈 로베르토(Don Roberto)”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그는 우승보다 약속을 지키는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약속은 시간의 다른 이름이었고, 그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늘 일찍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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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절의 빈센조, 1952년” / “Young De Vicenzo, 1952.”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그의 우정은 경기장 밖에서 더 빛났다.
아르헨티나 골프의 선후배들이 모이면 그는 가장 늦게 자리를 뜨는 사람이었다.
상대의 어깨를 감싸고 “다음 번엔 네가 이길 거야”라고 말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강한 사람”이기보다 “오래 가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오래 가는 사람은 분노를 끝까지 데려가지 않는 법을 안다.
그래서 그의 악수는 길었고, 악수의 끝에 미안과 감사가 함께 묻어났다.
연애와 결혼에 관한 그의 이야기들은 조용하다.
사람들 앞에서 감정을 과장하는 법이 없었고, 집에서는 일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았다.
멀리 원정을 떠나 있는 동안에도 그는 엽서를 보냈고, 엽서에는 도시 이름과 날씨가 꼭 적혀 있었다.
그의 생일엔 함께 식탁을 차리는 풍습이 있었다는 말이 전한다.
가족의 생일상에는 격식 대신 웃음이 먼저 올라왔고, 그는 케이크를 자르기 전에 식탁에 앉은 사람의 머릿수를 세었다.
사람을 먼저 세는 습관은 그가 스코어를 세는 방식과 닮아 있었다.
숫자보다 먼저 얼굴을 본다.
얼굴을 본 뒤에야 숫자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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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 아르헨티나 아사도 굽는 장면 / Traditional Argentine asado on the grill Wikimedia Commons, CC BY-SA 2.5 위키미디어 공용 |
그의 취미는 남미의 가장 일상적인 것들이었다.
아사도(Asado, 아르헨티나식 숯불구이) 앞에서 손님을 맞는 일.
바비큐 집게 대신 퍼터를 들고도 그는 모두가 익숙한 농담을 던졌다.
“스테이크의 굽기는 퍼팅 라인처럼 마지막에 결정돼.”
마테(Mate, 남미 전통 차)를 돌리며 돌아가며 한 모금씩 마시는 의식도 소중했다.
경기 전날 밤에는 흔히 마테를 멈추고 따뜻한 물만 마셨다는 이야기가 있다(전승).
그에게 마테는 집중을 부르는 절차였고, 집중은 그가 경기에서 들고 들어가는 유일한 사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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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테 호리병과 봄비야 / Mate gourd with bombilla Wikimedia Commons, CC0 1.0(퍼블릭 도메인) 위키미디어 공용 |
그의 젊은 시절을 지켜본 이들은 “로베르토는 코스를 걸으며 세상 이야기보다 동반자의 발걸음 소리를 먼저 듣는 사람”이라고 했다.
동반자의 리듬이 흐트러지면 “잠깐 멈춰서 구름을 보자”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에도 다른 이들이 불평하기 전에 그가 먼저 모자를 벗어 하늘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우린 이걸 기억하게 될 거야.”
그의 낭만은 과장되지 않았고, 정확했다.
과장되지 않은 낭만은 오래간다.
그가 세계의 주목을 받은 건 1967년 디 오픈 챔피언십(The Open Championship, 영국 로열 리버풀) 우승이었다.
그날 데 빈센조는 바람과 싸우지 않고 바람을 이용해 점수를 만들었다.
그날 그는 골프를 ‘완성’하지 않았다.
다만 ‘자기 리듬으로 견디는 법’을 보여 주었다.
그 리듬은 1년 뒤, 오거스타 내셔널(Augusta National Golf Club, 미국 조지아)의 그린에서 시험대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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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7년 로열 리버풀 18번 그린에서 클라렛 저그를 든 빈센조” / “De Vicenzo with the Claret Jug at Royal Liverpool, 1967.” The Open 공식 스토리/프로필, 에디토리얼(권리 보유). The Open |
1968년 마스터스에서 그는 플레이오프에 설 만큼 잘 쳤다.
17번홀에서 실제로는 버디 3타였는데 스코어카드에는 4타로 적혔다.
동반자 토미 에런(미국 골프선수, 1937– )이 표기한 숫자를 그는 재확인하지 못했고,
서명이 끝난 순간 규칙은 사람의 실수를 사람의 몫으로 돌렸다.
카드의 더 높은 숫자가 유효한 규칙.
플레이오프는 사라졌다.
우승은 밥 골비(미국 골프선수, 1929–2021)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세계 앞에서 말했다.
“내가 얼마나 바보인가.”
자책이었지만 변명은 아니었다.
그 말은 실수의 소유권을 선언하는 문장이었고, 그 문장이야말로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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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 테이블에서 스코어카드를 확인하는 비센조(1968)” / “Checking the scorecard at Augusta, 1968.” Bettmann/기사(Links Magazine/Global Golf Post 등 인용) Global Golf Post |
그날 이후 그는 토미 에런을 탓하지 않았다.
규칙의 냉혹함을 욕하지도 않았다.
그는 악수를 청했고, 축하를 전했고, 다음 대회를 준비했다.
패배의 서랍을 스스로 닫는 법을 아는 사람만이 다음 준비를 시작할 수 있다.
그의 악수는 긴 작별이 아니라 짧은 예고였다.
“곧 다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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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미 에런의 포트레이트/플레이 샷” / “Tommy Aaron portrait / action shot.” Global Golf Post 기사 내 사진(출처: Augusta National/ Getty) Global Golf Post |
오거스타의 사건은 그를 깨뜨리기보다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는 다시 각국의 내셔널 오픈을 순례했고, 팀 경기에서 조국을 정상으로 이끌었다.
월드컵 오브 골프(당시 캐나다컵)에서의 활약은 아르헨티나 골프가 ‘세계’라는 단어와 친해지도록 도왔다.
그는 라틴 선수들이 유럽과 미국의 대회에 더 많이 도전해도 된다는 신호를 몸으로 보여 주었다.
결코 떠들썩한 선동이 아니었지만, 귀를 대고 들으면 분명한 진동이 있었다.
“와서 쳐라.”
그의 메시지는 언제나 구체였다.
언어보다 스윙이 먼저였다.
그의 사생활에서 재미있는 장면들은 조용한 결로 이어진다.
먼 도시 원정에서 그는 동료나 통역과 함께 소도시의 작은 식당을 찾아갔고, 그 식당에서 주인과 사진을 찍는 일이 많았다.
메뉴가 간단한 곳일수록 그는 더 오래 앉아 있었다.
가끔은 현지의 어린 캐디에게 장난처럼 동전을 던져 주고, 퍼팅 거리 재는 법을 알려 주었다.
“보폭을 믿어라.”
그 말은 골프에도, 삶에도 통용되는 격언이 되었다.
그의 부드러운 농담에 사람들은 긴장을 풀었다.
그의 농담은 언제나 자신에게 더 엄격했다.
가족과의 주말에는 경기 얘기를 하지 않는 원칙이 있었다고 한다(전승).
승리한 주말에도 그 원칙은 유지됐다.
식탁에는 경기 스코어 대신 그날 장을 본 이야기와 이웃 소식이 올랐다.
그는 자신이 한 말을 다음 주에도 똑같이 되풀이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사람이었다.
그게 그의 도덕률이었다.
꾸며진 말은 다음 주에 똑같이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는 늘 짧고 정확하게 말했다.
| “베라사테기 ‘로베르토 데 빈센조’ 액티비티 센터 전경” / “Centro de Actividades ‘Roberto De Vicenzo’ exterior, Berazategui.”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위키미디어 공용 |
노년의 그는 후배를 위한 시간을 크게 냈다.
주니어 클리닉에서 “짐작으로 때리지 말고, 내기를 하듯 집중하라”고 말하며 손목의 각도를 손으로 잡아 주었다.
자신의 이름을 딴 토너먼트와 기념관이 생겼고, 라넬라흐에는 그가 들어 올렸던 트로피들이 질서정연하게 놓였다.
유리장 속의 트로피보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먼저 들리는 공간이었다.
기념관을 찾은 아이가 “여기서 뭐가 제일 소중해요?”라고 묻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문밖의 잔디.”
그의 대답은 언제나 현장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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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 골프 클리닉 장면 / Kids’ golf clinic scene Wikimedia Commons(Flickr), CC BY 2.0 위키미디어 공용 |
스코어카드 사건은 골프 규칙의 교육 현장에서 ‘첫 페이지’의 사례가 되었다.
선수와 마커, 위원회의 확인 절차가 왜 그렇게 엄격한지를 설명할 때 그의 이름이 호출된다.
나중에 규칙이 일부 개정되며 서명 관련 절차가 현실에 맞게 다듬어졌다는 점을 떠올리면, 그의 실수는 제도를 성찰하게 만든 고전적 계기였다.
그리고 더 중요한 변화가 있었으니, 상업 스포츠 시대가 커질수록 ‘품격’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논할 때 그가 공동 기준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말과 표정과 악수는 선수 교육의 암묵 교본이 됐다.
초록 재킷의 소유 여부보다 더 오래가는 교본.
그의 실패가 전설이 된 이유는 사실 단순하다.
실패를 대하는 방식이 승리의 방식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침착.
감사.
그리고 다음 준비.
그는 스스로를 벌하지 않았고, 남을 벌하지도 않았다.
벌을 주는 건 규칙의 일이고, 사람의 일은 감당하는 것이다.
그는 그 감당을 보여 주었다.
사적인 유머 하나를 덧붙인다.
그가 친구들과 카드게임을 즐겼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는데(전승), 그는 카드에서 져도 늘 먼저 손을 내밀었다고 한다.
“오늘은 네가 더 잘 섞었네.”
패배를 상대의 실력으로 돌리는 농담은 그를 편안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편안함이야말로 그가 지켜낸 최고급의 예의였다.
세상은 그를 한 장면으로 기억한다.
스코어러 테이블, 잘못 적힌 숫자, 한숨, 그리고 “내가 얼마나 바보인가.”
하지만 그 장면이 전부가 아니다.
그 장면은 그의 인생이 어떤 재료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보여 주는 창문일 뿐이다.
창문을 닫고 돌아보면 남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다.
가족, 동료, 팬, 어린 캐디, 식당 주인, 그리고 골프장 잔디.
그가 떠난 뒤에도 잔디는 자라났고, 아이들은 퍼터를 들고 몸을 숙였다.
“보폭을 믿어라.”
그의 목소리가, 아직 그린 위에 남아 있다.
그의 태도를 가장 간단히 보여 주는 이야기를 마지막에 한 편만 붙인다(전승).
정확한 대회와 연도는 불분명하지만, 사람들 사이에 오래 떠도는 이야기다.
경기가 끝난 저녁, 로베르토 데 비센소(아르헨티나 골프선수, 1923–2017)는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노을이 차체에 길게 눕던 시간이었다.
한 여성이 다가와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가 아프다고 말했다.
병원비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말이 이어졌다.
비센소는 잠시 여인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그날 받은 상금 수표를 조용히 건넸다.
영웅담처럼 떠벌리지 않았고, 주변에 알리지도 않았다.
그는 그냥 차문을 닫고 떠났다.
며칠 뒤, 지인이 슬며시 사실을 전했다.
“그 여성, 사기였대요.”
비센소는 어깨를 한번 올렸다 내렸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럼 아픈 아기는 없는 거네요.
오늘 들은 소식 중에 그게 제일 좋네요.”
이 이야기가 기록으로 완벽히 증명되진 않는다.
그래서 (전승)으로 남겨 두는 편이 정직하다.
다만 이 썰이 오래 살아남은 이유는 분명하다.
그의 품격을 설명하는 데, 길게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주차장, 노을, 한 장의 수표, 그리고 짧은 대답.
비센소의 얼굴을 보여 주기에 그 정도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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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세를 맞은 비센조가 테아트로 콜론에서 오찬을 갖는 모습(2013)” / “De Vicenzo at a 90th-birthday lunch at Teatro Colón (2013).” Wikimedia Commons(부에노스아이레스 시정부 플리커), CC BY 2.0. 위키미디어 공용 |
그의 연대기만 적으면 이렇게 된다.
1923년 4월 14일 비야 바예스테르 출생.
라넬라흐 골프클럽에서 성장.
디 오픈 챔피언십 우승.
마스터스 스코어카드 실수.
월드컵 정상과 각국 내셔널 오픈 다수 제패.
U.S. 시니어 오픈 초대 챔피언.
2017년 6월 1일 별세.
그러나 연대기는 이야기의 맨살일 뿐이고, 그의 이야기는 옷처럼 입혀져야 한다.
그 옷은 비싼 비단이 아니라 닳아도 편안한 면셔츠에 가깝다.
땀과 바람과 악수의 체온이 배어 있는 옷.
그 옷의 주름을 펴보면, 한 인간이 실수와 품격을 같은 문장 안에 넣어 살아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그 문장은 지금도 충분히 아름답다.
이 글은 신뢰 가능한 사료·논문·공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은 (전승), 해석 갈림은 (논쟁), 어원은 (어원)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표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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