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이어(李漁·Lǐ Yú, 1611–1680, 호 笠翁·Lìwēng)를 17세기식 ‘크리에이터’로 그려볼까한다.
무대와 인쇄소, 사랑과 장난, 취미와 장사 사이를 왕복했던 남자.
그의 하루를 따라가면 명·청 교체기의 먼지 냄새가 먼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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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 초상(에도 후기 목판화)” / “Portrait of Li Yu, Edo-period woodblock (cropped)”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밤은 남경(南京) 진링의 골목을 반으로 접어 놓고 있었다.
등잔불 아래 판목이 눕고, 잉크가 종이 위에 번진다.
이어는 활자 대신 나무결을 만진다.
오늘 찍어낼 건 삶의 사용설명서, 《한정우기(閑情偶寄) 한가로운 정서와 우연히 떠오른 생각을 기록한다》의 또 한 장.
어떻게 먹고, 어떻게 입고, 어디에 눕고, 정원을 어떻게 ‘오락’으로 만들 것인가.
그의 문장은 관료의 보고서가 아니라 생활의 시나리오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사는 법”을 팔았다.
그리고 그걸로 내일의 무대비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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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閒情偶寄(한정우기)》 고판본 스캔(권1 표지)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PDM). commons.wikimedia.org |
그는 곧장 연습장으로 발길을 돌린다.
무대 위엔 줄을 당기면 나비처럼 흔들리는 막이 있고, 좌우에는 대사보다 먼저 움직이는 눈동자가 있다.
이어는 극작가였고, 동시에 연출·프로듀서·배우·매니저였다.
그에게 극장은 거대한 실험실이었다.
오늘 밤 실험은 새로운 장면 전환.
배우 둘이 무대 뒤에서 옷소매만 바꾸고 다시 걸어 나오면 관객의 시선은 속아 넘어간다.
속임수는 죄가 아니라 기술이었다.
“관객이 안 다치면, 속일수록 좋다.”
그의 미학은 솔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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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경 자기탑 원경(1668)” / “Tour de Porcelaine of Nanking, 1668”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
그의 필명은 笠翁(입옹, Lìwēng).
삿갓을 쓴 늙은이.
하지만 실은 젊은 장사꾼의 머리를 가렸다.
그는 극본을 묶어 팔았고, 서문을 스스로 썼다.
인쇄·유통·공연·홍보를 한 사람의 손에 모았다.
오늘 말로 하면 ‘원소스 멀티유즈’, 그 자신이 브랜드였다.
《笠翁十種曲(입옹 십종곡)》이라는 간판은 한때 지방 장터의 아이들까지 외웠다.
책만 팔지 않았다.
삶의 리듬을 팔았다.
| “청대/근세 중국 목판 인쇄용 목판” / “Chinese woodblock for printing (Yangzhou Museum)” Wikimedia Commons, CC BY-SA(파일 페이지 참조). commons.wikimedia.org |
사랑은 그의 무대에서 늘 ‘대표 장르’였다.
그 사랑은 때로 여자와 여자의 연애였다.
《연향반(憐香伴, The Fragrant Companion) 향기로운 동반자를 사랑하고 아낀다》에서 두 여인은 서로의 향기와 시를 사랑하고, 결국 한 남편의 두 아내가 되어 함께 산다.
그는 제도에 정면으로 들이받기보다, 틈을 찾아 우회로로 걸었다.
사람들은 “규칙을 어기지 않고 규칙을 넘어선다”는 그의 재주에 박수를 쳤다.
그 박수는 종종 불편함과 함께 왔다.
그러나 그는 불편을 불로 지르지 않고, 농담으로 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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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대 미인도 앨범-두 여성” / “Two Ladies (Qing dynasty, album leaf)” The Met Open Access, Public Domain.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
농담은 그에게 무기였다.
《육포단(肉蒲團, The Carnal Prayer Mat)》은 그의 이름이 따르는 에로틱 풍자 소설(논쟁)이다.
학자와 관습을 비틀고, 쾌락으로 성리학의 갑옷을 톡톡 건드린다.
그가 쓴 게 맞느냐 아니냐는 말이 지금도 남지만(논쟁), 정작 중요한 건 그의 문장이 언제나 ‘몸’과 ‘생활’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정신을 위해 몸을 금식시키지 않았다.
몸을 이해해서 정신을 더 재밌게 만들었다.
그게 그의 생활철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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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포단》 목판 삽화 / “Rouputuan woodcut (mobile mirror)” Vietnamese Wikipedia(Commons 미러), Public Domain. 위키백과 |
《육포단(肉蒲團)》(논쟁: 저자 이어)은 후대 대중문화에서 〈옥보단(玉蒲團)〉 시리즈의 원안으로 재활용됐다.
1991년작 〈Sex and Zen〉과 2011년 〈3D 옥보단〉은 원작의 풍자·도덕 알레고리보다 성애 코미디에 방점을 찍은 느슨한 각색이다.
참고로 제목이 肉(살)→玉(옥)으로 달라진 건 검열·브랜딩·어감을 의식한 상업적 네이밍으로 보는 해석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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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스트림무비 |
그는 한때 《개자원화보(芥子園畫譜) 명화복제집이자 회화 학습서》의 출판에 손을 보탠다.
화가를 위한 매뉴얼, 곧 ‘노하우의 책’이다.
이어가 사랑한 건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쓰임새 있는 지식이었다.
붓끝의 획도, 무대의 숨도, 부엌 칼의 각도도 모두 익혀 쓰라고 적어 둔다.
그의 글은 유려했지만 귀착지는 늘 실용이었다.
‘오늘 밤 무엇을 하고, 내일 아침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로 끝나는 문장들.
문장은 도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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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자원화전』 페이지-회화 교본” / “Page from the Mustard Seed Garden Manual of Painting” The Met Open Access, Public Domain.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
그의 삶을 국가로 요약하면 너무 서운하다.
그는 과거를 통과하지 못했다.
그리고 눈앞의 제국이 바뀌었다.
명나라의 꿈이 접히고 청나라의 깃발이 펄럭이는 동안, 이어는 시장의 꿈을 폈다.
권력이 아닌 관객을 선택했다.
그 선택은 누군가에겐 기회주의로 보였고, 누군가에겐 생존이었다.
그는 대답 대신 판매부수로 말한다.
그의 작품이 움직이면, 배우가 먹고, 인쇄공이 일하고, 서점 주인이 웃었다.
그게 그의 정치학이었다.
그의 글은 가끔 장난처럼 보인다.
‘어떻게 하면 부자로도, 가난뱅이로도 행복할 수 있는가’ 같은 제목들.
그러나 장난은 정확한 관찰 위에 있다.
그는 잠자는 법·걷는 법·앉는 법까지 글로 썼다.
사소해 보이지만, 인간의 하루는 사소의 합이다.
그는 거기서 준법과 위반, 금욕과 쾌락의 미세한 조절장치를 찾았다.
그리고 그 조절장치의 이름을 ‘취미’라고 불렀다.
취미는 그의 종교였다.
그는 집을 어떻게 지어야 비 오는 날 소리가 가장 살맛나는지 적었다.
정원의 돌을 어디에 놓아야 달빛이 가장 오래 머무는지 적었다.
부엌의 찻물 온도를 한 번만 올릴지, 두 번 나눌지까지 적었다.
그는 당대의 라이프스타일 매거진을 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한정우기》는 그래서 지금 읽어도 유튜브의 타임라인처럼 빨리 넘어간다.
한 꼭지가 끝나면 손이 저절로 다음 꼭지로 미끄러진다.
그의 시대엔 스크롤이 없었지만, 그의 문장에는 이미 스크롤의 리듬이 있었다.
무대 밖, 그의 사랑 이야기는 조용하다.
젊은 나이에 가난했고, 무대는 번번이 이동했다.
그는 북과 남 사이를 떠돌았고, 극단을 꾸려 먹고 사는 일을 최우선에 두었다.
길 위에서 그는 늘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사장이었다.
배우의 기침, 인쇄공의 손톱 밑 먹, 서점 아이의 깡마른 팔까지 챙기는 사람이었다.
그가 사랑한 건 특정한 한 사람의 얼굴만이 아니라, 자기가 만든 세계였다.
그 세계가 멈추지 않도록, 그는 글을 썼다.
그는 늘 관객의 시간을 계산했다.
한 장면이 길면 지루하고, 짧으면 허전하다.
그래서 그는 타이밍을 발명했다.
연애 장면은 기대→지연→폭발, 풍자는 준비→뒤틀림→낙차, 생활문은 문제→해법→작은 농담으로 끝내는 식.
그의 글이 쉬운 이유는, 그가 연출가의 가위로 글을 다듬었기 때문이다.
독자는 늘 관객이었고, 관객은 손님이었다.
손님을 박대하지 않는 것, 그게 그의 문학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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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징대 곤극 무대, 2006” / “Peking University Kunqu performance, 2006” Wikimedia Commons, CC BY-SA 2.0. commons.wikimedia.org |
그의 비판자들도 있었다.
“저속하다.”
“너무 장사꾼이다.”
그는 웃고 넘겼다.
저속과 장사는 때로 시민의 언어다.
아침에 일어나서 먹고, 웃고, 조금 사랑하고, 밤에 눕는 일.
그는 위로부터의 대문호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작가였다.
그 아래에서, 사람들은 사소한 행복을 배웠다.
생애의 후반, 그는 더 노련한 편집자가 된다.
자기 작품을 다시 묶고, 《笠翁一家言(입옹 일가의 말)개인적인 저술들을 모은 전집》로 발언권을 확장한다.
자기 목소리를 브랜드 카테고리로 만든 셈.
‘극장·에세이·생활·농담’이 그의 카테고리였다.
그는 죽은 뒤에도 카테고리를 팔았다.
이름이 남는 이유는 업적 때문만이 아니다.
사용된 문장이 오래 산다.
그의 문장은 오래 사용되었다.
이어의 죽음은 조용했다.
그러나 그의 문장은 조용히 끝나지 않았다.
극장은 돌고, 인쇄는 또 찍혔다.
《연향반》은 20세기 북경에서 다시 오르고, 21세기에도 ‘여성과 여성의 사랑’을 말하는 고전으로 호출되었다.
《육포단》은 금서와 고전 사이에서 서가를 오르내렸고(논쟁), 《한정우기》는 ‘집 짓고 놀기의 기술’을 찾는 이들에게 여전히 실전 지침서였다.
그의 이름 ‘笠翁’은 초등 독본 《笠翁對韻》에서도 살아남아 아이들의 혀끝에서 운율처럼 굴렀다.
한때 시장의 기호를 따랐던 문장이 세대를 건너 생활의 규칙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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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곤극 공연 장면(항저우)” / “Modern Kunqu performance, Hangzhou”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commons.wikimedia.org |
지금, 우리의 스크린에서 그를 다시 부르면 할 말은 단순하다.
사는 일은 공연이고, 공연은 사는 일이다.
그 둘의 접점을 찾는 것이 기술이고, 그 기술의 다른 이름이 문학이다.
이어는 그 기술을 먼저 익혔다.
무대에 오르고, 책을 찍고, 삶을 편집하고, 사랑을 우회하고, 제도를 농담으로 이기고, 다정함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건 지금도 유효한 사용설명서다.
삶을 재밌게 만드는 방법.
그가 남긴 가장 큰 발명품이다.
이 글은 신뢰 가능한 사료·논문·공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은 (전승), 해석 갈림은 (논쟁), 어원은 (어원)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표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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