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DB와
당시 청·일·미 외교문서를 참고했으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소설적 각색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대로의 연대기가 아니라 장면과 대사 중심의 재구성이며,
논쟁이 큰 대목은 (논쟁)으로 표시합니다.
을미사변(1895)은 일본 공사와 낭인들이 주도한 궁중 침입과 살해 사건으로,
그 자체가 범죄임을 먼저 분명히 밝힙니다.
1870년대 후반의 밤, 창덕궁 내전에서 등잔이 길게 흔들렸다.
왕비(명성황후·민씨)가 인명첩을 펼치고 작은 점을 찍었다.
점은 곧 권력이었고, 점은 곧 가족이었다.
궁내부와 내장원(왕실 재정)의 문서가 민씨 일가의 이름으로 굵어졌다.
“속도를 내야 합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했고, 속도는 분명 났다.
하지만 속도는 궁 안에서만 났다.
국가의 등뼈는 점점 더 궁을 바라보며 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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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2년 임오군란—‘일본 공사관 도주’ 우키요에(우타가와 쿠니마쓰) |
임오군란이 왜 터졌는지부터 이야기한다.
구식군(봉급 체불과 곡물 부정으로 불만이 누적된 정예가 아닌 주력)이 수개월 치 급료를 받지 못했다.
겨우 내려온 쌀은 썩거나 모래가 섞였다는 원망이 1882년 여름 내내 병영을 떠돌았다.
한편 새 군대인 별기군(1881 창설, 일본인 교관 훈련)이
최신식 복장과 급료를 받으며 도성 한복판을 행군했다.
낡은 군화는 분노를 밟았고, 새 군화는 그것을 지나쳤다.
폭발의 도화선은 민씨 측근 고위관료의 재정 전횡 의혹과 왜곡된 보급 체계였다(논쟁).
군사와 군중이 섞여 궁문으로 밀려올 때 왕비는 짧게 말한다.
“청군을 부르라.”
청군이 들어와 대원군(흥선대원군)을 납치·연행했고, 조정은 심장을 되찾은 듯 보였다.
하지만 그날부터 조선의 맥박에는 원세개(청국 무관)와 톈진의 리듬이 섞였다.
그녀의 긴급처방은 즉효였지만, 자주권에는 독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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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와의 권력 갈등. 대원군의 공신상 초상화 |
왕비에 대한 평판이 왜 악화됐는지도 숨기지 않는다.
척족 의존 인사와 궁 재정의 불투명 운용이 ‘가문=나라’라는 착시를 키웠다.
궁은 빠르게 움직였고, 내각과 관료제는 배우지 못했다.
정책은 의례와 상징으로 덮였고, 실력은 뒤로 밀렸다.
그녀는 궁을 위해 국가를 담보로 잡았다.
그리고 그 담보는 곧 외세의 담보물로 넘어갔다.
갑신정변이 왜 3일 만에 꺼졌는지도 배경을 덧댄다.
개화파는 상설 내각과 재정 일원화, 문벌 타파, 근대적 군제·사법 분립을 청사진으로 들고 나왔다.
이 청사진은 무모한 총구에 얹혀 있었고, 민중 기반이 빈약했다.
그러나 청사진 자체는 근대 국가의 기본 공정이었다.
왕비는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질서가 먼저다.”
청군이 들어와 연회를 끊었고, 김옥균과 박영효의 이름은 명부에서 지워졌다.
궁은 위기를 넘겼지만, 조선은 개혁의 엔진을 함께 던져 버렸다.
그녀는 반대파를 굴복시키는 기술에 능했다.
하지만 중간지대를 설득해 제도를 착근시키는 기술은 약했다.
그 약함은 곧 국가의 약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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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농민전쟁 지도자 전봉준이 체포되어 압송되는 장면 |
1894년 청일전쟁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동학농민군(1894 농민전쟁)이 탐관오리의 수탈과 외세 배척을 외치며 봉기했다.
조선 조정은 청에 군사 파견을 요청했고,
톈진조약(1885, 청·일의 조선 내 파병 상호 통보 합의) 조항에 따라 일본군도 함께 들어왔다.
일본군은 곧 경복궁을 기습 점령했고, 친일 내각이 출범해
갑오개혁(1894–95, 내무 중심의 근대개혁)을 밀어붙였다.
청은 패했고, 시모노세키 조약(1895)으로 종주권 질서는 사라졌다.
무너진 것은 청의 군대만이 아니었다.
왕비의 ‘친청 견제 전략’이 기둥부터 무너졌다.
그녀는 곧바로 러시아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조선의 왕과 세자는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 그림자에 들어갔다.
비는 피했지만, 비바람보다 더 깊은 그늘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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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벨라 버드가 찍은 1894년 서울 사진 |
여기서 비판의 칼을 더 가한다.
왕비는 외세를 ‘균형추’가 아니라 ‘지렛대’로 썼다.
지렛대는 단숨에 상대를 들어 올리지만,
받침점을 남의 땅에 얹는 순간 힘의 주도권을 잃는다.
그녀의 외교는 균형이 아니라 급전환이었다.
친청에서 친러로의 급회전은 일본의 적개심을 극대화했고,
국내 행정은 한동안 ‘공사관 보호’라는 비현실적 장막 아래 놓였다.
국가가 궁을 보호해야 하는데, 궁이 외국 공관에 국가를 맡겼다.
그 장면 하나로도 평가는 냉혹해져야 한다.
내장원은 빠르게 살이 쪘다.
왕실 재정의 강화는 긴급 집행에 유리했다.
군복, 의장, 의례, 외교경비가 신속히 지출됐다.
그러나 국고의 근대적 회계·감사가 자리를 잡기도 전에,
왕실 금고가 ‘정책의 최종 결재’로 기능했다.
관청은 숫자를 쓰지 않고 눈치를 읽었다.
이것은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다.
국가 운영 능력을 키울 기회를, 궁의 속도가 빼앗고 있었다.
그녀의 말 한마디가 절차를 대체했고, 절차가 비어 있는 사이 외세가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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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5년 프랑스 『르 주르날 일뤼스트레』의 ‘명성황후 시해’ 삽화 |
정보전에서도 뒤졌다.
일본은 ‘왕비=방해자’ 프레임을 조기에 깔고,
신문·외교전보·조선 내 협력세력을 총동원했다.
궁정은 느렸다.
비밀외교와 밀실자금은 은폐가 필요했을지 몰라도, 은폐는 의혹을 낳고 의혹은 명분이 되었다.
을미사변 직전의 서울은 사실보다 더 강력한 ‘이미지’가 돌아다녔다.
왕비는 상징을 키웠다.
하지만 상징이 클수록 표적도 커졌다.
그녀는 스스로 거대한 표적이 되었고, 국가는 그 표적을 지킬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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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가 피습된 장소로 알려진 건청궁 옥호루의 초기 사진 |
1895년 10월의 아침, 담장 너머로 칼 그림자가 길어졌다.
낭인과 일본 군인이 궁을 넘어섰고, 내전의 비명은 짧았다.
을미사변은 일본의 범죄다.
그 점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범죄가 있었다 해서, 그 이전의 잘못된 선택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척족 인사, 외세 의존, 개혁 좌초, 정보전의 실패가 성벽을 낮추고 마당을 어둡게 만들었다.
그녀의 정치가 성벽을 낮춘 만큼, 칼은 더 쉽게 들어왔다.
이제 인물의 내면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간다.
그녀는 효율을 사랑했고, 위기를 두려워했다.
효율은 근대적 제도가 아니라 ‘신속한 사인’에서 나왔다.
두려움은 자주적 방어가 아니라 ‘더 큰 그늘’로 도망치는 선택으로 표출됐다.
그녀의 신속과 두려움은 언제나 궁 안에서 완결됐다.
국가라는 거대한 몸은 그 신속을 배우지 못했고, 그 두려움에 공감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의 승리는 늘 궁의 승리였고, 패배는 언제나 국가의 패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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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 1907년 사진 |
반론도 알고 있다.
“그 시대의 벽이 너무 높았다.”
그 말은 맞다.
그러나 정치가는 벽을 핑계로 삼을 수 없다.
벽이 높을수록 선택은 더 정교해야 한다.
개혁파를 완전히 쫓아내지 않고, 내각의 손을 묶지 않고,
회계를 국고로 되돌려 관료를 훈련시키고,
외세를 지렛대가 아니라 거래상대로 만들었더라면.
궁은 작아지고 국가는 커졌을 것이다.
그 최소한의 분수조차 지키지 못한 것이, 바로 그녀의 정치다.
마지막 장면을 다시 세운다.
청의 군복이 처음 도성 문으로 들어오던 날의 바람.
우정국 연회장의 촛불이 꺼지던 밤의 한숨.
경복궁 새벽의 군화 발소리.
러시아 공사관 정원의 어둠.
이 모든 장면의 중앙에 왕비가 서 있다.
그녀는 피해자였다.
동시에 책임 있는 실패자였다.
그녀가 세운 상징은 화려했고, 그 상징을 지킬 실력은 없었다.
그녀가 고른 지렛대는 강력했고, 그 받침점은 남의 땅이었다.
그녀가 찍은 점은 정확했고, 그 점이 모인 지도는 나라를 외벽 끝으로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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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로 ‘전해지는’ 이미지 |
역사는 욕설이 아니라 문장으로 남겨야 한다.
그래서 이렇게 적는다.
그녀는 궁을 지키기 위해 국가를 약속 없이 소모했다.
그녀는 외세의 그늘로 뛰어들어 자주를 긴급 피난으로 바꾸었다.
그녀는 상징을 키우며 제도를 지연시켰고, 그 지연의 틈 사이로 칼이 걸어 들어왔다.
이 문장이 가혹해 보인다면, 가혹함의 대가를 이미 치른 것은 국가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된다.
그리고 다시 한 줄, 처음의 전제를 반복한다.
을미사변은 범죄이고, 그 책임은 일본에 있다.
그러나 그 범죄를 가능하게 만든 내부의 잘못된 선택을 기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음 비극을 막을 지혜를 얻지 못한다.
명성황후의 이름은 그래서 교훈이다.
상징보다 제도.
생존보다 작동.
의존보다 자주.
그 세 단어가 내일의 점으로 찍힐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시절의 밤을 통과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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