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브리태니커, 이스트먼 코닥 연대기, 라이카 아카이브,
폴라로이드 특허, 코닥·페어차일드 자료와 스티브 새슨 인터뷰 등을 참고했으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소설적 각색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대로의 연대기가 아닌, 장면과 대사 중심의 재구성입니다.
인물·용어는 처음 등장할 때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필름·디지털·스마트폰: 카메라 기술사가 바꾼 우리의 시선
이 글은 카메라의 역사와 사진의 역사, 그리고 스마트폰 카메라 역사를 한눈에 잇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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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메라 옵스큐라 도식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3ACamera_obscura_mirror_and_lens.jpg CC BY-SA |
처음에는 어두운 방 하나가 있었다.
작은 구멍을 통해 들어온 빛이 반대편 벽에 거꾸로 된 풍경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숨을 멈추고 그 그림을 보았다.
이것이 카메라 옵스큐라(암상자)의 시작이었다.
알하젠(광학의 선구자)은 “빛은 곧게 간다”는 사실을 남겼고, 화가들은 이 장치로 원근을 배웠다.
아직 사진은 아니었다.
그림자를 보고 베껴 그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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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진. ‘View from the Window at Le Gras’(1826/27) — Joseph Nicéphore Niépce 출처 |
1820년대 프랑스, 니엡스(조제프 니세포르 니엡스)가 창가에 판을 세웠다.
역청을 바른 금속판이 햇빛을 오래 마셨다.
하루가 넘게 걸린 끝에 지붕과 하늘이 판 위에 남았다.
르 그라 창문 사진이 태어났다.
“카메라 발명은 언제였을까.”
정확히 말하면 발명은 한 번이 아니라 많은 단계의 합이었다.
니엡스가 시작했고, 뒤이어 다게르가 문을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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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출 시간 때문에 길은 비었지만 구두닦이와 손님이 최초로 사진에 등장.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3ABoulevard_du_Temple_by_Daguerre.jpg |
1839년 파리.
다게르(루이 자크 만데 다게르)는 은판 위에서 수은김이 떠오르는 순간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사진관이 생기고, 의자와 머리 받침대가 줄을 섰다.
손님은 숨을 죽였고, 사진사는 맥박으로 시간을 셌다.
“이제 당신의 모습이 금속 위에 남습니다.”
한 아이가 사진관 유리에 눌어붙어 말했다.
“엄마, 그림자가 갇혔어.”
엄마는 미소로 대답했다.
“오늘부터는 우리도 시간을 모을 수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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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콕 수도원 남쪽 갤러리의 창문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진 네거티브로 만들어졌습니다. https://en.m.wikipedia.org/wiki/File%3ALatticed_window_at_lacock_abbey_1835.jpg Latticed Window at Lacock Abbey’(1835) — William Henry Fox Talbot |
영국의 탈보트(윌리엄 헨리 폭스 탈보트)는 다른 길을 택했다.
종이 위에 음화(네거티브)를 만들고, 그 음화에서 같은 사진을 여러 장 뽑아냈다.
칼로타입(종이 네거티브 사진)은 복제를 가능하게 했다.
“다게레오타입과 칼로타입의 차이는 무엇일까.”
둘 다 초기 사진이지만, 전자는 한 장뿐인 은판이고 후자는 음화에서 여러 장을 만들 수 있었다.
사진은 초상에서 소식으로 변했다.
이웃에게, 먼 곳의 친척에게, 같은 장면이 편지처럼 배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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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의 그림자 골짜기" 크림 전쟁 사진. 협곡의 비포장도로에 포탄이 흩어져 있다.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3AValley_of_the_Shadow_of_Death.jpg ‘The Valley of the Shadow of Death’(1855) — Roger Fenton |
1850년대.
아처(프레더릭 스콧 아처)의 습판 콜로디온이 전쟁터까지 사진을 끌고 갔다.
유리판은 젖어 있는 동안에만 쓸 수 있었다.
사진가들은 이동 암실마차를 끌고 들판을 누볐다.
크림전쟁의 천막과 남북전쟁의 진흙길에서 삼각대가 서자
사람들은 처음으로 전쟁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았다.
마을 아이들은 진열된 유리판을 보고 나직이 속삭였다.
“진짜가 들어 있다.”
사진은 증명서가 되었고, 동시에 경고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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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4 년 에 촬영된 코닥 브라우니 카메라의 스트랩을 잡고 있는 인간 손의 이미지는 워싱턴주 타코마에 있는 게일리 서플라이 컴퍼니/코닥 매장의 광고에 실렸습니다.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3AHand_holding_a_1904_Kodak_Brownie_camera.jpg |
1870년대, 매덕스(리처드 리치 매덕스)가 젤라틴 건판을 제안했다.
급한 현상에서 해방된 사진가는 더 멀리 갈 수 있었다.
이스트먼(조지 이스트먼)은 그 가능성을 작게 말아 손에 쥐게 만들었다.
1888년, “코닥”이라는 이름과 함께 롤필름 카메라가 나왔다.
“You press the button, we do the rest.”
기차역 플랫폼에서 가족이 나란히 섰다.
아버지가 버튼을 눌렀고, 아이는 깡충 뛰었다.
어머니는 말했다.
“돌아오면 봉투를 받으러 가자.”
여행이 끝날 때마다 노란 봉투가 집으로 돌아왔다.
식탁 위에서 모두가 둘러앉아 사진을 넘겨 보았다.
웃음은 사진의 가장 흔한 현상액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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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mm 포맷의 표준화를 이끈 상징 기종. Leica I (Model A, 1925)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3ALeica_I_1925.png |
거리의 속도는 더 빨라졌다.
바르낙(오스카 바르낙)은 35mm 영화필름을 가로로 눕혀 쓰는 작은 상자를 만들었다.
1925년 라이카 I.
사람들은 더 가볍게 걸었고, 더 자연스럽게 눌렀다.
연인의 손이 공원 벤치에서 맞잡히는 순간 셔터가 조용히 닫혔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결정적 순간”을 말했고, 카파는 “더 가까이”를 외쳤다.
사진은 미술이 되었고 뉴스가 되었다.
시장 골목에서 상인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장면이 한 컷으로 남았다.
사진은 “여기 있었다”는 짧은 증언이 되었다.
| 즉석사진의 시초.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3APolaroid_Land_Camera_Model_95_-_MIT_Museum_-_DSC03766.JPG |
식탁 위의 순간도 달라졌다.
랜드(에드윈 랜드)의 폴라로이드(즉석카메라)는 기다림을 몇 분으로 줄였다.
제주 공항 앞에서 신혼부부가 하얀 테두리를 흔들었다.
“이제 됐어.”
광이 마르면 두 사람의 웃음이 더 선명해졌다.
동네 분식집에서 생일을 맞은 아이가 즉석사진을 냉장고에 자석으로 붙였다.
집은 작은 전시실이 되었다.
색은 노래처럼 입었다.
코닥크롬(컬러 리버설 필름)은 파란 하늘을 더 파랗게 했고, 에크타크롬은 피부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롤라이플렉스(2렌즈 리플렉스)는 허리 높이에서 세상을 보게 했다.
니콘 F(35mm SLR 표준)는 기자의 어깨에서 결승선을 잡았다.
야구장에서 아버지는 망원렌즈 대신 두 손을 모아 아이의 달리기를 응원했다.
사진은 기술이었지만, 더 자주 생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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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 너머로 떠오르는 지구. 아폴로 미션의 이미지 메이킹과 “사진이 세계관을 바꾼 순간”을 상징.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3AAS08-14-2383.jpg |
1968년 달 궤도.
“어, 지구가 뜬다.”
아폴로 8호의 조종석에서 외침이 터지고 핫셀블라드(중형 카메라)에
250mm 렌즈를 단 손이 셔터를 눌렀다.
검은 우주에 파란 행성이 떠오른 ‘지구돋이(Earthrise)’가 생겼다.
1969년 달 표면.
우주복 장갑이 검은 상자를 꼭 쥔다.
필름 뒤 유리판에 새긴 십자표(레조 플레이트)가 화면을 고르게 만든다.
레버를 당기고 한 박자 뒤 셔터가 닫힌다.
임무가 끝나자 필름 매거진만 우주선으로 올리고 카메라 본체는 달에 남긴다.
무게 때문이다.
1972년에는 ‘블루 마블’이 우주의 어둠에 둥글게 떠올랐다.
그 한 장으로 사람들은 처음 “우리가 사는 집”을 진짜로 보았다.
스튜디오에서는 다른 거인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페이즈원(초고해상도 중형 디지털) 백이 한 번에 엄청난 정보를 삼킨다.
색이 두껍고, 모공까지 또렷하다.
미술관 보존실에서도 이 장비를 쓴다.
금박과 균열과 필압을 기록해 내일의 복원에 쓴다.
사진은 상품을 팔고, 동시에 시간을 보존한다.
1975년, 코닥의 젊은 엔지니어 스티브 새슨(세계 최초 디지털 카메라 시제품 개발자)이
낯선 상자를 들고 나왔다.
CCD(전하결합소자) 센서와 카세트테이프 기록 장치.
“찍었습니다.”
모니터에는 점으로 이루어진 흑백 얼굴이 나타났다.
화학이 전자로 바뀌는 문이 열린 순간이었다.
1981년 소니 마비카(전자식 스틸 카메라), 1991년 코닥 DCS,
1999년 니콘 D1, 2003년 캐논 EOS 300D.
현상소는 컴퓨터로 바뀌었고, 기다림은 복사 진행 바(bar)로 바뀌었다.
“CCD와 CMOS는 무엇이 달라졌나.”
CCD는 화질이 정갈하지만 전력과 비용이 크고, CMOS(상보형 반도체)는
효율과 속도와 제조비에서 유리했다.
센서는 더 많은 빛을 모았다.
베이어 패턴(색필터 배열)은 초록 픽셀을 늘려 선명하게 보이게 했다.
BSI(후면조사형) 구조는 배선을 뒤로 보내 약한 빛을 더 잘 받게 했다.
어두운 골목에서 연인의 셀카가 흔들리지 않고 남았다.
지하철 유리창에 비친 두 사람의 얼굴 뒤로 도시의 불빛이 부드럽게 퍼졌다.
그 사진에는 플래시도 삼각대도 없었다.
대신 계산이 있었다.
거울을 덜어낸 미러리스는 조용했다.
전자식 뷰파인더는 찍기 전에 결과에 가까운 화면을 보여 주었다.
아이를 안은 엄마가 한 손으로 셔터를 눌러도 초점은 아이의 눈동자를 따라갔다.
카메라는 전면에서 물러나고 배경으로 스며들었다.
사용자는 장비보다 장면을 오래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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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harp J-SH04(2000) — 초기 카메라폰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3ASharp_J-SH04_CP%2B_2011.jpg CC BY-SA 3.0. |
그리고 모두의 주머니에서 카메라가 빛났다.
스마트폰은 얇은 몸에 작은 렌즈를 넣고 부족한 부분을 계산으로 채웠다.
“HDR+가 왜 선명해 보일까.”
여러 장을 합쳐 밝고 어두운 정보를 동시에 살리기 때문이다.
슈퍼 레졸루션은 미세한 떨림을 모아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나이트 모드는 몇 초 동안 빛을 모아 밤을 밝힌다.
인물 모드는 배경을 부드럽게 날려 사람을 돋보이게 한다.
놀이공원에서 네 식구가 줄을 서 기다리며 셀카를 찍었다.
막내가 말했다.
“또 하나 찍자.”
아빠가 웃었다.
“이건 연습이 없어도 돼.”
사진은 결과물에서 대화가 되었고, 대화에서 일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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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J 데이, 타임스퀘어에서 입맞추는 미 해군 병사와 여성(미 해군 사진·퍼블릭 도메인) |
사람을 바꾼 한 장면들도 있다.
1839년 필라델피아 뒷마당에서 로버트 코니리어스가 삼각대를 세우고 조용히 앉았다.
긴 노출이 끝나자 어두운 은판에 젊은 얼굴이 떠올랐다.
세상이 처음 자기 자신을 제대로 바라본 셀카였다.
1936년 대공황의 천막에서 도로시아 랭지가 셔터를 누르자
‘이주 노동자’의 얼굴이 행정을 움직였다.
1937년 힌덴부르크 비행선의 불꽃 앞에서 샘 시어는 반사신경으로 눌렀다.
1945년 이오지마에서 해병들이 깃발을 세우는 순간
로젠설의 프레임이 전쟁의 상징을 만들었다.
같은 해 타임스퀘어의 ‘키스’는 축제의 표정이 되었고 뒤늦게 동의의 논쟁을 낳았다.
1968년 사이공 거리에서 방아쇠와 에디 아담스의 셔터가 겹치자 전쟁에 대한 생각이 흔들렸다.
1972년 닉 우트가 찍은 ‘네이팜 소녀’ 앞에서 세계는 말을 아꼈다.
1984년 스티브 매큐리의 ‘아프간 소녀’가 잡지 표지를 뚫고 나왔다.
1989년 탱크 앞에 선 쇼핑백 든 남자를 호텔 창에서 담은 사진은 용기의 실루엣을 세계에 배달했다.
사진은 마음을 먼저 설득했고, 때로는 오해도 만들었다.
그럼에도 한 장의 힘은 사람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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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nri Cartier-Bresson in Paris (1954), portrait by Kimura Ihei. |
이름도 기억해 둔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은 순간을, 로버트 카파는 근접을,
도로시아 랭지는 불안을, 에디 아담스와 닉 우트는 전쟁의 비명을,
스티브 매큐리는 색과 시선을, 세바스치앙 살가두는 노동의 숨결을,
다이앤 아버스는 낯섦의 친밀을, 앤슬 애덤스는 풍경의 존엄을 남겼다.
사진은 장비의 역사가 아니라 사람의 습관사이기도 하다.
한국의 거리에도 습관이 자리 잡았다.
골목 사진관은 졸업과 결혼을 같은 하늘색 배경 앞에 담았다.
남대문 카메라 상가의 유리 진열장에는 온갖 중고 장비가 층층이 쌓였다.
1988년 경기장에서 오토포커스는 선수보다 먼저 결승선을 보았다.
주말 동호회는 렌즈 목록 대신 촬영 루트를 나눴다.
할머니는 오래된 코닥 봉투를 열어 손자에게 말하고, 손자는 폰 사진 폴더를 열어 할머니에게 답했다.
세대는 다르지만 말투는 같았다.
“여기 있었다.”
오래된 집의 서랍을 연다.
코닥의 노란 봉투, 폴라로이드의 하얀 테두리, 6×6의 반짝이는 젤라틴.
다른 서랍에는 외장하드, SD 카드, 켜지지 않는 오래된 휴대폰.
느린 사진은 손끝에 따뜻함을, 빠른 사진은 마음에 가벼움과 불안을 함께 남긴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두 방식을 섞는다.
여행길에서 필름 한 통으로 가족을 찍고, 그 자리에서는 폰으로 서로를 찍는다.
과거와 현재가 같은 앨범에 눕는다.
카메라가 바꾼 것은 “무엇을 보느냐”보다 “어떻게 보느냐”였다.
다게레오타입은 조용함을 가르쳤고, 라이카는 용기를 가르쳤고,
폴라로이드는 기다림의 기쁨을 가르쳤고, 디지털은 반복 연습을 가능하게 했고,
스마트폰은 나눔을 쉽게 만들었다.
이 작은 습관들이 모여 우리의 시선을 만들었다.
정리하자면, 이 소설 같은 기록은 사진의 역사가 어떻게 스마트폰 카메라까지 이어졌는지 보여 준다.
카메라의 역사는 기술의 목록이 아니라 사람의 버릇에 관한 이야기다.
빛은 여전히 곧게 가지만 우리의 시선은 배우며 꺾인다.
필름에서 디지털로, 디지털에서 스마트폰으로, 우리는 도구만 바꾼 것이 아니다.
우리는 보는 태도도 함께 바꿨다.
그러니 카메라 발명의 역사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오늘의 주머니 속 렌즈가 내일의 박물관 서랍에 눕는 그날까지,
우리는 같은 말을 계속 남길 것이다.
“여기 있었다.”
From the camera obscura to the phone in your pocket,
this story follows photography’s leap from chemistry to computation.
Niépce, Daguerre, and Talbot birth the medium;
Eastman’s roll film and Leica’s 35mm put it on the street;
Polaroid brings instant joy; NASA’s Hasselblad shows Earth from the Moon.
Digital CCD/CMOS, mirrorless bodies,
and computational HDR/night modes turn images from
proof into shared memory—family trips, self-portraits, and daily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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