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의 사도, 볼테르: 바스티유에서 팡테옹까지의 파란만장한 여정
1. "프랑스는 볼테르의 나라다"
오늘날 프랑스인들은 자신의 조국을 일컬을 때 '프랑스(France)'라는 국호 대신 "볼테르의 나라(le pays de Voltaire)"라고 부르곤 합니다.
한 국가의 정체성을 단 한 명의 인물과 동일시한다는 것, 이것은 그가 남긴 정신적 유산이 일개 문학가의 성취를 넘어 한 민족의 영혼을 형성했음을 의미합니다.
19세기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일찍이 그를 향해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이탈리아에 르네상스가 있다면, 프랑스에는 볼테르가 있다."
볼테르는 단순한 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이자 프랑스 정신의 뿌리인 '똘레랑스(Tolérance, 관용)'를 길어 올린 투사였습니다.
그는 평생을 종교적 광신, 권력의 부당함, 그리고 지독한 편견에 맞서 펜 한 자루로 싸웠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처음부터 이 거창한 이름을 가졌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의 본명은 프랑수아마리 아루에(François-Marie Arouet)였습니다.
중산층 부르주아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아루에'라는 성이 풍기는 평민적 색채를 지우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볼테르'라는 귀족적이고 세련된 필명을 창조해냈는데, 이는 기존의 견고한 계급 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명명하겠다는 발칙한 반골 기질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제 평민의 아들로 태어나 왕실과 교회의 심장을 겨누었던 한 천재 소년의 위대한 여정을 함께 따라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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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테르 |
2. 불온한 천재의 탄생과 첫 번째 시련
볼테르는 1694년 파리의 유력한 공증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경제적으로 매우 넉넉했던 덕분에 그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 코스인 예수회 학교(루이 르 그랑)에서 수학할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고전 문학과 수사학을 섭렵하며 장차 유럽을 뒤흔들 문학적 기초를 다졌습니다.
하지만 학교의 엄격한 가톨릭 교육은 오히려 그에게 종교의 모순을 직시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볼테르 초기 생애 핵심 요약
- 출생: 1694년 11월 21일, 프랑스 파리 (부유한 부르주아 가문)
- 교육: 루이 르 그랑 예수회 학교에서 고전 교육 이수. 12살 때 이미 시를 짓기 시작함.
- 기질: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독설가'이자 사교계의 총아.
- 사교: 대부 샤토뇌프 신부의 소개로 상류층 사유가들의 모임인 '르 탕플' 출입.
그의 천부적인 풍자 본능은 스물두 살 무렵 첫 번째 시련을 불러옵니다.
당시 루이 14세가 서거하고 오를레앙 공이 섭정을 하던 시절, 볼테르는 섭정자의 근친상간과 부패를 풍자하는 시를 썼다는 혐의를 받았습니다.
"나는 이 모든 악행을 보았네. 나는 스무 살이 아니었네."
사실 이 시구 자체는 그리 대단한 독설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권력자들은 이 발칙한 청년의 기를 꺾고 싶어 했습니다.
결국 볼테르는 1717년 바스티유 감옥에 11개월간 투옥됩니다.
하지만 감옥의 차가운 벽도 그의 집필욕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창살 너머로 비치는 달빛을 벗 삼아 비극 《오이디푸스(Œdipe)》의 초고를 완성했습니다.
출옥 후 이 작품이 전례 없는 대성공을 거두며 그는 비로소 '아루에'를 버리고 '볼테르'라는 이름으로 화려하게 비상하게 됩니다.
하지만 감옥에서도 멈추지 않았던 그의 날카로운 펜 끝은, 곧 한 오만한 귀족과의 숙명적인 충돌이라는 인생 최대의 폭풍우를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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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테르 - Œdipe |
3. "내 성(姓)은 나로부터 시작되오": 로앙 드 슈발리에와의 결투
1726년, 30세의 볼테르는 이미 파리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스타 작가였습니다.
하지만 신분제의 벽은 여전히 높았습니다.
어느 날 사교계에서 오만한 귀족 슈발리에 드 로앙(기 오귀스트 드 로앙-샤보)이 볼테르의 출신을 비꼬며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로앙: "당신의 성은 대체 무엇이오? 아루에요, 아니면 볼테르요?"
볼테르: "내 성은 나로부터 시작되지만, 당신의 성은 당신에게서 끝날 것이오."
이 촌철살인의 일침은 로앙의 자존심을 갈기갈기 찢어놓았습니다.
며칠 뒤, 비열한 로앙은 하인들을 시켜 길거리에서 볼테르에게 무차별적인 몽둥이찜질을 가했습니다.
귀족의 횡포에 분노한 볼테르는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했습니다.
그러나 법과 관습은 여전히 '혈통'의 편이었습니다.
일개 평민이 감히 귀족에게 도전했다는 사실에 격노한 권력자들은 볼테르를 다시 바스티유 감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더욱 뼈아픈 것은 평소 그와 친하게 지내며 찬사를 보내던 귀족 '친구'들이 모두 로앙의 편에 서서 볼테르를 비난했다는 사실입니다.
신분 사회의 추악한 민낯을 본 볼테르는 인맥을 동원해 청원한 끝에, '영국 망명'을 조건으로 간신히 풀려나게 됩니다.
분노와 모멸감을 품고 건너간 영국 땅에서, 볼테르는 프랑스 사회를 뿌리째 뒤흔들 거대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4. 영국 유학: 뉴턴의 사과와 자유의 발견
1726년부터 1728년까지의 영국 생활은 볼테르에게 그야말로 '신세계'였습니다.
그는 프랑스와는 너무도 다른 영국의 공기를 마시며 전율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조너선 스위프트, 알렉산더 포프 등 지성인들과 교류하며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프랑스 vs 영국의 사회 분위기 비교 (18세기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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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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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절대왕정/불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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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입헌군주정/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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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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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이 곧 국가다" - 군주 1인 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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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 중심의 법치와 상호 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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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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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외 종교 박해 (불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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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으로 다양한 종교의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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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 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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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 한 번에 투옥 및 추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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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가 왕처럼 대우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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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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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한 검열과 분서(책 태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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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과 토론의 자유가 보장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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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테르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사건은 과학자 아이작 뉴턴의 장례식이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지식인은 권력자의 눈치를 보는 광대에 불과했지만, 영국에서는 일개 교수가 국가장으로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안치되는 것을 본 것이죠.
그는 감탄하며 말했습니다.
"영국에서는 자신의 천직에 뛰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왕처럼 묻힌다!"
우리가 흔히 아는 '뉴턴의 사과' 일화도 실은 볼테르 덕분에 전 세계에 퍼졌습니다.
그는 뉴턴의 조카딸로부터 이 일화를 전해 들었고, 이것이 중력 법칙의 단순하고 명쾌한 진리를 설명하기에 완벽한 소재임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저서에 실었습니다.
영국에서 자유의 씨앗을 품고 돌아온 그는, 곧 일생의 학문적 동반자이자 연인인 에밀리를 만나게 됩니다.
5. 에밀리 뒤 샤틀레: 천재와 천재의 학문적 로맨스
프랑스로 돌아온 볼테르는 영국에서의 경험을 담은 《철학서간》이 금서로 지정되어 태워지는 수난을 겪습니다.
이때 그를 구원한 여인이 바로 당대 최고의 여성 과학자 에밀리 뒤 샤틀레 후작 부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시레이(Cirey) 영지에서 10년 넘게 동거하며 인류 역사상 가장 지적인 로맨스를 펼쳤습니다.
에밀리는 단순히 귀족 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교육열 높은 아버지 덕분에 남자 형제들과 동등한 교육을 받았으며, 어머니의 반대를 뚫고 수학과 물리학에 매진한 천재였습니다.
볼테르는 그녀에게 영어를 가르쳐주었고, 에밀리는 볼테르에게 난해한 뉴턴 역학을 가르쳤습니다.
에밀리 뒤 샤틀레의 위대한 업적
- 뉴턴의 《프린키피아》 번역: 뉴턴의 방대한 저작을 프랑스어로 완벽하게 번역하고 정교한 주석을 달아 유럽 대륙에 뉴턴 역학을 보급했습니다.
- 운동에너지(Leibnizian vis viva) 연구: 물체의 힘이 질량과 속도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증명하며 현대 에너지 개념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 적외선의 선구자: 빛의 색깔에 따라 열의 세기가 다름을 제안하여 훗날 적외선 발견의 이론적 단초를 마련했습니다.
에밀리와의 교류는 볼테르를 단순한 문필가에서 과학적 합리주의를 갖춘 철학자로 성장시켰습니다.
그러나 1749년, 에밀리가 출산 직후 사망하면서 볼테르는 깊은 슬픔에 빠집니다.
상심한 그는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대를 수락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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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밀리 뒤 샤틀레 |
6. 부유한 철학자의 영리한 투쟁법
볼테르는 사상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선 무엇보다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현실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유럽 역사상 가장 부유한 평민 중 한 명이었으며, 그 막대한 부는 그의 펜 끝을 지키는 든든한 방패가 되었습니다.
볼테르의 자산 관리 및 도피 전략
수학으로 복권을 해킹하다: 볼테르는 프랑스 정부가 발행한 복권의 당첨 확률 계산 오류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수학자 친구와 함께 복권을 싹쓸이하여 수백만 리브르의 당첨금을 챙겼습니다. (프랑스 최초의 복권 당첨자)
글로 벌어 투자로 불리다: 그는 은행가들과 교류하며 국제적인 투자와 대출 사업에 참여했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왕 밑에서 교정 업무를 해주며 받은 2만 리브르(현재 약 8만 달러)의 연봉조차 그에게는 소소한 용돈 수준이었습니다.
지혜로운 '두더지의 굴' 전략: 그는 프랑스와 스위스 국경 지대인 투르네와 페르네에 영지를 사들였습니다.
"철학자는 뒤쫓아오는 개들을 피하기 위해 땅속에 두세 개의 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는 프랑스 관리가 오면 스위스 집으로, 스위스 관리가 오면 프랑스 집으로 도망치며 수사망을 농락했습니다.
그의 재치와 독설은 부유함 속에서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하루는 한 작가 지망생이 찾아와 자신의 원고를 평가해달라고 하자, 볼테르는 원고 맨 마지막의 'Fin(끝)'을 'Fi(풉/비웃음)'로 고쳐버렸습니다.
또한 자신의 책을 불태우고 있다는 악플러의 편지를 받자, "내 책은 군밤처럼 불에 구워야 제맛인데, 직접 구워주시니 고맙다"는 답장을 보내 상대를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영리한 거장이 처음부터 국경 지대에 은둔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는 '철학자 왕'을 꿈꾸던 강력한 후원자와의 뼈아픈 파국이 선행되었습니다.
에밀리를 잃고 상심에 빠졌던 볼테르는 1750년,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던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2세(프리드리히 대왕)의 초대를 받아 포츠담으로 향했습니다.
왕은 그를 '프랑스의 보물'이라 치켜세웠고, 볼테르는 왕의 시를 교정해주며 화려한 궁정 생활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두 천재의 동거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볼테르는 왕의 측근인 과학원장 모페르튀를 특유의 독설로 조롱하며 왕의 심기를 건드렸고, 결국 1753년 궁정을 탈출하듯 떠나게 됩니다.
분노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국경 도시 프랑크푸르트에서 볼테르를 강제로 억류하고 소지품을 수색하는 수치를 안겼습니다.
왕권의 변덕스러움과 세상의 부조리를 뼈저리게 느낀 그에게, 인류사적 비극이 들이닥칩니다.
바로 1755년 발생한 리스본 대지진이었습니다.
수만 명의 무고한 시민이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다 건물에 깔려 죽어가는 참상을 보며, 볼테르는 "이것이 신이 만든 최선의 세상인가?"라며 통곡했습니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모든 것은 잘 돌아가고 있다"는 낙천주의 철학을 향해 침을 뱉었습니다.
이 분노와 환멸을 담아 1759년 발표한 불후의 명작이 바로 《칸디드(Candide)》입니다.
주인공 칸디드가 온갖 불행을 겪은 뒤 내뱉는 마지막 대사, "우리는 우리의 정원을 가꾸어야 합니다"는 권력의 허망함을 깨닫고 페르네 영지에 정착한 볼테르 자신의 선언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개인적인 고통과 환멸을 통과한 노철학자는 자신의 정원을 넘어, 광신에 희생된 타인의 인권을 위해 싸울 진짜 준비를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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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테르 의 『칸디드』 의 앞표지 그림 |
7. "파렴치를 박살내라!": 칼라스 사건과 관용론
1762년, 68세의 노철학자를 분노로 떨게 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칼라스 사건'입니다.
개신교도였던 장 칼라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려던 아들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수레바퀴형(뼈를 부러뜨려 죽이는 형벌)으로 처형된 사건이었습니다.
이는 명백한 종교적 광신이 부른 사법 살인이었습니다.
볼테르는 3년간 끈질기게 재심 여론을 조성했습니다.
그는 왕실 사료 편찬관이라는 직함을 이용해 고등법원 기록을 분석하고 팸플릿을 뿌렸습니다.
마침내 1765년, 칼라스의 무죄와 복권을 이끌어낸 그는 인류의 고전 《관용론》을 발표합니다.
핵심 메시지: "관용은 자연의 제1법칙이며 보편적 원칙이다."
이신론(Deism): 그는 신을 세상을 정교하게 만든 '시계 제작자'에 비유했습니다.
신은 시계를 만든 뒤 스스로 돌아가게 내버려 둘 뿐, 기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의 이름을 팔아 타인을 고문하고 죽이는 행위는 신에 대한 모독이자 야만일 뿐입니다.
숙명의 라이벌: 볼테르의 인생을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사회계약론 저자)입니다.
두 사람은 당대 계몽주의의 두 축이었지만, 물과 기름처럼 결코 섞일 수 없는 앙숙이었습니다.
볼테르는 비관론적 세계관을 가진 파스칼(Blaise Pascal)을 '숭고한 인간 혐오자'라고 비판하며 철저히 인류의 편에 섰던 인물입니다.
그런 그에게 문명의 타락을 꾸짖으며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루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네 발로 기어 다니고 싶군요": 루소가 자신의 저서를 보내오자 볼테르는 특유의 독설로 답장을 보냅니다.
"선생님의 책을 읽고 나니 다시 네 발로 기어 다니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버릇을 버린 지 60년이 넘었군요."
비극의 공유, 해석의 차이: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때도 두 사람은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볼테르가 무고한 희생을 낳은 신의 섭리를 원망할 때, 루소는 "사람들이 자연을 벗어나 도시로 몰려 살았기 때문에 피해가 컸던 것이니 문명을 탓해야 한다"고 맞받아쳤습니다.
볼테르는 이 기괴한 논리에 실소하며 루소를 더욱 몰아세웠습니다.
그의 투쟁 대상은 명확했습니다.
볼테르는 루소와 같은 '낭만적 광신'이나 종교적 불관용을 향해 언제나 이렇게 외쳤습니다.
"파렴치를 박살내라!(Écrasez l'infâme!)"
여기서 파렴치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모든 종류의 독단과 광신을 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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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테르와 루소 |
죽어서도 멈추지 않은 전쟁: 두 사람은 1778년, 약 한 달 간격으로 나란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혁명 정부는 두 사람을 모두 국가적 영웅으로 추대하며 팡테옹(Pantheon)에 안치했습니다.
평생을 으르렁대며 싸웠던 이 숙명의 라이벌들은, 지금도 차가운 지하 묘소에서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영면해 있습니다.
8. 18세기 철학자가 바라본 '고려(Corée)'
놀랍게도 볼테르는 그의 저작에서 극동의 작은 나라 '고려(Corée)'를 여러 번 언급했습니다.
당시 유럽에 한국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특유의 인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해 우리 민족을 묘사했습니다.
희곡 《중국의 고아(L'Orphelin de la Chine)》에서 볼테르는 중국이 칭기즈칸의 몽골군에 점령당하자 중국 황자를 피신시킬 최후의 보루로 고려를 선택합니다.
그는 한국인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한국인은 용맹하고 충성심이 강한 민족이며, 위기에 처한 중국을 구할 구원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는 한국이 중국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라는 점을 알고 있었으며, 아시아의 끝자락에 위치한 신비로운 땅으로 묘사했습니다.
비록 한국인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었으나, 기독교 밖에도 훌륭한 윤리를 가진 사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시누아즈리(중국풍)'와 함께 고려를 언급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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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루아르 모리스의 그림 볼테르의 마지막 파리 여행 |
9. 거장의 귀환과 '바쁜 죽음'
83세의 볼테르가 28년 만에 파리로 복귀했을 때, 도시는 마비되었습니다.
수천 명의 시민이 "칼라스의 구원자!"를 외치며 그를 에워쌌습니다.
하지만 1778년 5월 30일, 노 철학자는 영광의 정점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육체는 죽어서도 쉴 수 없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이 악마를 우리 묘지에 묻을 수 없다"며 매장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볼테르 유해의 '바쁜 죽음'
- 뇌와 심장 적출: 사후 방부 처리를 위해 의사가 뇌를 추출했고, 심장은 알코올에 소독되어 별도로 보관되었습니다.
- 시신의 위장 여행: 조카 미노 신부가 교회 몰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시신에 가발을 씌우고 옷을 입혀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마차에 앉혀 파리를 탈출했습니다.
- 셀리에르 수도원 안치: 폭풍우가 치던 밤, 시신이 바닥에 굴러떨어지는 소동 끝에 비밀리에 장례를 치렀습니다.
- 팡테옹 이장: 1791년 프랑스 혁명 정부는 그를 국가적 영웅으로 기리며 팡테옹에 안치했습니다.
- 유해의 수난: 이장 과정에서 일부 광신도가 그의 발가락과 치아를 훔쳐가는 기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 현재 보존 현황: 심장은 프랑스 국립도서관 석고상 안에, 뇌는 의사 가문에서 보관하다 경매에 부쳐졌으며, 몸은 팡테옹에 영면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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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테르의 유골이 팡테옹에 도착하다 |
10. 볼테르가 우리에게 남긴 질문
볼테르의 묘비에는 아루아의 'A'와 볼테르의 'V'가 서로 얽혀 있습니다.
이는 평민으로 태어나 스스로 거인이 된 한 남자의 인생을 상징합니다.
혐오와 불관용이 다시 고개를 드는 오늘날, "나와 다른 생각을 할 자유"를 위해 싸웠던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볼테르의 명언 Best 5'
- "관용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모두 약점과 실수로 만들어졌으니 서로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자연의 첫 번째 법칙이다."
- "무고한 자를 비난하느니 죄지은 자를 용서하는 게 낫다."
-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인간 사회의 도덕적 필요성을 강조하며)
- "일은 우리에게서 세 가지 커다란 악, 즉 권태, 부도덕, 궁핍을 막아준다."
- "삶은 난파선이지만 우리는 구명보트에서 노래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 말을 할 자유를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는 말은 작가 에블린 홀이 볼테르의 정신을 요약한 문장입니다.
볼테르가 직접 쓰지는 않았지만, 그의 삶 전체가 이 한 문장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볼테르가 잠든 팡테옹의 묘비 앞에서 우리는 묻게 됩니다.
우리는 과연 타인의 다름을 얼마나 견디고 있는가?
거장이 남긴 유머와 관용의 빛은, 여전히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등불로 남아 있습니다.
본 글은 볼테르의 생애와 사상을 중심으로, 역사적 기록과 일화, 후대 해석을 종합하여 서사적으로 재구성한 콘텐츠입니다.
볼테르와 관련된 일부 대화, 일화, 인물 관계, 평가 등은 당대 기록과 후대 전승, 해석을 바탕으로 정리된 것으로, 표현 과정에서 이해를 돕기 위한 서술 방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 특정 사건의 세부 내용, 인물 간 대화, 평가 표현 등은 다양한 사료와 해석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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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taire, born François-Marie Arouet, was a central figure of the Enlightenment who challenged authority, religious intolerance, and injustice through his writings.
After early imprisonment in the Bastille for his satirical works, he gained fame as a playwright and thinker.
His conflict with a nobleman led to exile in England, where he encountered political freedom, scientific thought, and religious tolerance that deeply influenced his philosophy.
Returning to France, he collaborated with Émilie du Châtelet, expanding his intellectual scope into science and rationalism.
Throughout his life, he used his wealth and influence to defend victims of injustice, most notably in the Calas affair, promoting tolerance and legal reform.
Despite conflicts with powerful figures, including Frederick the Great, Voltaire remained a sharp critic of authority.
After his death, he was honored as a national intellectual symbol, leaving a lasting legacy on modern thought, freedom of expression, and human ri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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