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문덕과 살수대첩, 고구려를 지켜낸 전설의 장군 (Eulji Mundeok)



 이 글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중국 정사인 『수서(隋書)』, 『자치통감』 등을 참고했으나,

독자의 몰입을 위해 문학적 상상과 서사적 각색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대로의 연대기가 아닌, 드라마와 긴장감을 살린 소설체 서술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인물과 사건에는 이해를 돕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을지문덕(生卒年 미상). 

그의 이름은 고구려와 수나라, 

더 나아가 동아시아 전쟁사의 한복판에서 빛나는 전설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의외로 베일에 싸여 있다. 

출신 배경도 확실히 알려진 바가 없으며, 심지어 장군으로서의 공식 기록조차 단편적이다. 

하지만 그 단편의 기록만으로도, 그는 영원한 명장이 되었다.




그가 태어난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학자들은 대체로 6세기 후반으로 추정한다. 

당시 고구려는 북쪽으로는 돌궐, 남쪽으로는 신라와 백제, 

서쪽으로는 중국 왕조와 끊임없이 맞서야 했다. 

요동(遼東, 현재의 만주 지역)은 늘 외적의 위협에 시달렸고, 

어린 을지는 그 땅에서 자랐다고 전해진다. 

그의 가문은 무관 집안이었다는 설이 있고, 

또 다른 설은 그가 뛰어난 문무겸비의 인물이었다고 전한다. 

이름의 ‘문덕(文德)’조차 문(글)과 덕(덕망)을 함께 가진 자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을지는 전쟁터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마을의 노인들은 광개토대왕의 정복담과 장수왕의 위업을 전해주었고, 

젊은 전사들은 국경 방비를 위해 매일 무기를 닦았다. 

그는 어릴 적부터 활을 잘 쏘았고, 말을 타는 솜씨가 뛰어났다. 

또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글 공부에도 소질이 있어 시문(詩文)을 잘 지었다고 한다. 

후일 수나라 장수에게 보낸 시는 그가 무예뿐 아니라 문학적 감각도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그 무렵 중국 대륙은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었다. 

남북조 시대의 혼란을 끝낸 수나라가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패권을 노리고 있었다. 

수 문제(양견)가 건국하고, 이어 양제가 즉위하자, 제국은 눈부시게 팽창했다. 

대운하를 건설하고, 수십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는 거대한 군사력을 보유한 수나라는 

동쪽의 고구려를 잠재적 위협으로 여겼다.


고구려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미 수세기 동안 중국 왕조와 맞서 싸우며 국경 방어에 능숙했다. 

그러나 수나라는 달랐다. 

그 규모와 자원은 이전 왕조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수 양제는 한반도까지 제국의 권력을 확장하려 했고, 

고구려는 거대한 파도와 같은 침공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했다.


을지문덕은 바로 이 역사적 전환기에 장수로 등장했다. 

요동 방면의 방어를 맡으며 그는 치밀한 전략가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지휘 방식은 단순한 용맹이 아니었다. 

병력의 운용, 적의 심리를 꿰뚫는 지혜, 지형을 이용한 기만전술. 

그는 장수이면서 동시에 학자 같았다.




611년, 수 양제는 드디어 고구려 정벌을 명령했다. 

대규모 군대가 북방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국경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고구려 조정은 술렁였다. 

왕(영양왕)은 대신들과 장수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수나라가 몰려온다. 

그 수는 수십만, 아니 100만에 이를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 자리에서 을지문덕이 나섰다. 

“대군이라 하나, 그들이 모두 싸움꾼은 아닐 것입니다. 

물자와 사기는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요동의 땅과 백성들의 목숨. 

적을 물리치려면 먼저 그들의 허를 찔러야 합니다.” 

그의 말은 차분했지만, 조정의 귀를 사로잡았다.


이리하여, 을지문덕은 곧 다가올 거대한 전쟁의 주역으로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612년, 드디어 수 양제(양광)는 고구려 정벌을 명령했다. 

역사서에 따르면 동원된 병력은 113만, 지원 인력까지 합치면 200만에 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 숫자가 과장되었더라도, 당시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침공이었음은 분명했다. 

대운하를 통해 북방으로 보급이 이어졌고, 수많은 병사들이 기세등등하게 요동을 향해 진군했다.


고구려 국경은 긴장으로 뒤덮였다. 

성마다 봉화가 오르고, 백성들은 산과 계곡으로 피신했다. 

병사들은 긴장 속에 무기를 들었지만, 두려움은 감출 수 없었다. 

“저 많은 군사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


이때 을지문덕이 병사들 앞에 섰다.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적이 많다고 두려워하지 마라. 

그들의 군량은 한정돼 있다. 

사기는 길게 가지 못한다. 

우리는 지형을 알고, 우리는 버틸 줄 안다. 

싸움은 숫자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병사들의 눈빛 속에 희미한 용기가 피어올랐다.


수나라 군은 요동성으로 진격했다. 

요동성은 고구려 국경의 요충지. 

이를 함락시키면 곧바로 평양으로 진격할 수 있었다. 

수나라 군은 대군을 동원해 포위를 강화했지만, 고구려군은 끈질기게 버텼다. 

화살과 돌, 끓는 물, 갖가지 방어책이 쏟아졌다. 

성벽 위에서 울려 퍼지는 함성은 대군의 기세를 꺾었다.


을지문덕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정면승부 대신 유인과 기만을 택했다. 

소규모 기습대를 보내 수나라 군의 보급선을 공격하고, 밤마다 매복을 풀어 적의 진을 교란시켰다. 

낮에는 싸우는 듯하다가도, 밤이 되면 홀연히 사라졌다. 

수나라 군은 혼란에 빠졌다. 

“대체 고구려군은 어디에 있는가?”


요동성 공성전은 길어졌고, 수나라의 사기는 점차 떨어졌다. 

병사들은 굶주렸고, 질병이 돌기 시작했다. 

반면 고구려군은 성 안에서 버티며 적을 지치게 했다. 

을지문덕은 일부러 작은 패배를 허용하기도 했다. 

후퇴하는 척, 도망가는 척하며 수나라 군을 점점 깊숙이 고구려 땅으로 끌어들였다.


드디어 수나라 장수 우중문(9군의 병력 수: 30만 5천 명)이 고구려 추격전을 시작했다. 

그는 요동성에서 승리를 거뒀다고 생각했고, 고구려군이 패주한다는 보고를 믿었다. 

수 양제는 조급했다. 

거대한 원정군을 일으켰는데, 성 하나 제대로 못 뚫은 채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래서 더 깊이, 더 무리하게 전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을지문덕은 바로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병사들에게 말했다.

“적을 깊이 끌어들이자. 그들이 돌아갈 수 없는 곳까지. 

그때 우리의 칼은 가장 날카로워질 것이다.”


수나라 군은 고구려군을 추격하며 수십 리를 달렸다. 

그러나 지형은 점점 낯설고 험해졌다. 

보급은 끊기고, 병사들의 발걸음은 무거워졌다. 

결국 그들은 살수(청천강)에 이르렀다. 

장마가 지나간 강은 범람해 있었고, 물살은 거셌다. 

피곤한 수나라 병사들이 강을 건너려 할 때, 강둑에는 이미 고구려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을지문덕은 전군을 정렬시키며 속삭였다.

“이제 때가 왔다.”


612년 여름, 수나라의 대군은 살수(薩水, 오늘날 청천강)에 도착했다. 

병사들은 지칠 대로 지쳤다. 

몇 달간 이어진 행군, 고구려군의 매복과 괴롭힘, 

끊어진 보급로, 그리고 굶주림과 전염병이 그들을 잠식했다. 

기록에 따르면 수나라의 군세는 처음 출발할 때는 30만 명이 넘었지만, 

살수에 도착했을 땐 이미 절반 이상이 전투 불능 상태였다.


강가에 도착했을 때, 수나라 군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 강만 건너면 평양으로 간다. 이제 끝이다.” 

그러나 그 순간, 강 저편에서 깃발이 휘날리고 함성이 울려 퍼졌다. 

고구려군이 이미 강둑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을지문덕은 강 위로 명령을 내렸다. 

“이제 전군, 적을 몰아라!”

수만의 화살이 하늘을 가르며 날아갔다. 

거센 강물과 뒤엉킨 진형 속에서 수나라 군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강을 건너려던 병사들은 물에 빠져 익사했고, 지쳐 있던 말들은 강물에 휩쓸렸다. 

고구려군의 창과 칼이 강변에서 몰려드는 적들을 무자비하게 베어냈다.


수나라 장수 우중문은 패닉에 빠졌다.

 “후퇴하라! 후퇴하라!” 하지만 이미 퇴로는 끊겨 있었다. 

뒤는 굶주림, 앞은 강물과 고구려군. 

수만의 병사가 강가에서 쓰러졌다. 

고구려군은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수나라의 30만 대군 중 살아 돌아간 자는 2,700명에 불과했다고 『수서』는 기록한다. 

설령 수치가 과장되었다 하더라도, 이것은 명백한 대참사였다.


이때 전해 내려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을지문덕은 퇴각하는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시 한 수를 지어 보냈다고 한다.


神策究天文 (신책구천문)

妙算窮地理 (묘산궁지리)

戰勝功旣高 (전승공기고)

知足願云止 (지족원운지)


뜻은 이렇다.

“신묘한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 

뛰어난 계산은 땅의 이치를 다했다. 

전쟁에서 이겨 공이 이미 높으니, 

이제 만족하고 멈추기를 바라노라.”


이 시는 단순한 문학적 과시가 아니라, 적장에게 보낸 심리전이었다. 

“우린 이미 이겼으니 더는 무리하지 말라.”

 을지문덕의 문무겸비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살수대첩의 승리는 고구려의 기적이었다. 

수나라의 대군을 단 몇 만의 병력으로 궤멸시킨 사건은 동아시아 전체를 뒤흔들었다. 

수 양제는 충격에 빠졌다. 

그는 3차례 더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결국 거대한 제국 수나라는 내분과 반란으로 붕괴했다. 

을지문덕의 승리는 단순한 전투가 아니라, 한 제국의 운명을 뒤바꾼 사건이었다.


살수대첩이 끝난 뒤, 고구려에는 축제가 벌어졌다. 

백성들은 서로 손을 맞잡고 눈물을 흘렸다.

 “우리가 살았다! 고구려가 살았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그날의 승리로 나라 전체가 새로운 기운을 얻었다.




반면 수나라 조정은 혼란에 빠졌다. 

수 양제는 대군이 궤멸했다는 소식을 듣고 노발대발했지만, 현실은 바꿀 수 없었다. 

그는 체면을 지키기 위해 다시금 고구려를 정벌하려 했다. 

그러나 3차례의 추가 원정도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수나라는 내정이 흔들리고, 대규모 반란이 잇따르며 불과 10여 년 만에 멸망하고 만다. 

을지문덕이 거둔 승리는 단순히 전투 하나의 승리가 아니라, 

한 제국의 몰락을 불러온 역사적 사건이었다.


을지문덕의 전후 행적은 신비에 싸여 있다.

 『삼국사기』에도 그의 이름은 살수대첩 이후 자취를 감춘다. 

일부 학자는 그가 왕의 총애를 지나치게 받아 다른 귀족들의 견제를 받았을 것이라 말한다. 

또 다른 설은 전쟁 후 스스로 조용히 물러났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그의 이름은 이미 신화가 되어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도 을지문덕은 충신이자 명장의 상징으로 추앙받았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조선 장수들은 을지문덕을 본받아 외세에 맞서 싸운다고 다짐했다. 

한양의 사대문 안에는 그의 충절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고, 

『삼국유사』에는 그의 지략을 찬양하는 기록이 남았다.


현대에 와서도 그는 민족 영웅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전쟁 때도, 군인들은 “을지문덕을 본받자”라는 구호를 외쳤다. 

지금도 대한민국의 군사훈련 중 하나인 ‘을지훈련’이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을 만큼, 

그는 전쟁과 방위의 상징으로 살아 있다.


Col. Edwin A. Doss' Eulji Medal with Silver Star (은성 을지무공혼장), 1952–63 design


무엇보다 을지문덕의 이름을 빛나게 한 것은 단순한 무용담이 아니다. 

그는 압도적인 수적 열세 속에서도 지략과 인내로 대군을 격파했다.

 이는 단순히 “강한 자가 이긴다”는 법칙이 아닌, “지혜로운 자가 이긴다”는 교훈을 후대에 남겼다.


그의 시 한 수는 여전히 남아 있다.

“전승공기고, 지족원운지.”

이 말은 오늘날에도 울림을 준다. 

승리했을 때 멈출 줄 아는 지혜, 교만하지 않는 자세. 

이것이 바로 을지문덕이 남긴 마지막 가르침일 것이다.


그의 최후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역사의 기록은 이미 충분히 말해준다. 

을지문덕은 전설로 남았고, 그의 이름은 지금도 한국인의 가슴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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