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년의 혈투, 왕관은 누구의 것인가: 백년전쟁의 모든 것
[제1부] 엇갈린 혈통: 전쟁의 불씨가 된 왕위 계승권
1장. 사촌이냐 외손자냐: 프랑스 카페 왕조의 단절과 에드워드 3세의 선전포고
1. 황금 왕조의 저주, '철권왕'의 자손들이 사라지다
1328년 초겨울, 파리 인근의 뱅센 성(Château de Vincennes).
차가운 바람이 성벽을 때리던 그날, 프랑스 국왕 샤를 4세(Charles IV)가 후사 없이 숨을 거두었다.
이 죽음은 단순한 군주의 서거가 아니었다.
800여 년간 프랑스를 지배해 온 유구한 카페 왕조(Capétiens: 프랑스 왕조의 근간)의 직계 혈통이 완전히 끊겼음을 의미했다.
불과 14년 전만 해도 이런 비극을 상상한 이는 없었다.
당시 프랑스는 '철권왕'이라 불리던 필리프 4세(Philippe IV)의 통치 아래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였다.
그는 세 명의 건장한 아들과 아름다운 딸 하나를 두었다.
왕조는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저주라도 내린 것일까.
필리프 4세의 세 아들이 왕위를 이어받았으나, 모두가 아들을 남기지 못한 채 차례로 요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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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프 4세 |
이제 프랑스의 왕관은 공중에 떴다.
왕국은 거대한 혼란에 빠졌다.
"누가 이 위대한 땅의 주인이 될 것인가?"
파리의 귀족들은 긴급 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고 이 질문은 훗날 유럽을 불바다로 만들 116년 전쟁의 첫 번째 불씨가 되었다.
2. 바다 건너온 청년 왕의 야심, 에드워드 3세
프랑스 귀족들이 새로운 왕을 논의하고 있을 때, 영국 런던에서는 한 명의 청년이 이 소식을 듣고 눈을 빛냈다.
당시 15세였던 영국 국왕 에드워드 3세(Edward III)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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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워드 3세 |
그의 가계도는 흥미로웠다.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 이사벨라(Isabella: 필리프 4세의 딸)는 바로 죽은 샤를 4세의 누이였다.
즉,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전임 국왕의 '친외손자'였다.
혈통상으로만 따지면 그보다 가까운 계승권자는 없었다.
"프랑스의 왕관은 나의 것이다. 어머니의 피를 이어받은 내가 그 땅의 진정한 주인이다!"
에드워드 3세는 당당히 권리를 주장했다.
그는 사치스럽고 약한 소년 왕이 아니었다.
아버지 에드워드 2세의 비참한 몰락을 지켜보며 권력의 냉혹함을 배운 그는, 잉글랜드라는 섬나라에 만족할 인물이 아니었다.
에드워드 3세가 처음부터 강력한 권력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왕위에 오른 초기, 영국의 실권은 어머니 이사벨라와 그녀의 애인 로저 모티머(영국의 권력을 찬탈하려 했던 귀족)가 쥐고 있었다.
모티머는 어린 왕을 무시하며 국고를 탕진했고,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의 궁전에서조차 감시받는 처지였다.
1330년 어느 깊은 밤, 18세의 에드워드 3세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비밀 통로를 통해 모티머가 머물던 방을 급습했다.
어머니 이사벨라가 "내 아들아, 불쌍한 모티머에게 자비를!"이라며 울부짖었지만, 에드워드는 냉혹했다.
그는 모티머를 반역죄로 즉시 처형했다.
이 '피의 숙청'을 통해 비로소 홀로 선 에드워드 3세는 영국을 완전히 장악했다.
내부의 적을 제거한 그의 시선은 이제 바다 건너 프랑스로 향했다.
어머니의 정부를 처단하고 왕권을 되찾은 그 기세가 바로 백년전쟁이라는 거대한 폭풍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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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워드 3세가 어머니의 애인을 붙잡았다 |
프랑스의 암늑대: 아들의 왕관을 위해 남편을 버린 여인
에드워드 3세의 뒤에는 '프랑스의 암늑대(She-Wolf of France)'라 불린 어머니 이사벨라가 있었다.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딸이었던 그녀는 영국으로 시집갔으나, 무능한 남편 에드워드 2세에게 실망해 직접 반란을 일으켜 남편을 폐위시킨 여걸이었다.
그녀는 어린 아들 에드워드 3세의 귓가에 끊임없이 속삭였다.
"프랑스는 내 아버지의 땅이고, 이제는 네 땅이다."
그녀는 프랑스 왕실의 정통성이 자신을 거쳐 아들에게 이어졌음을 확신했고, 그 야망을 위해 영국 내부의 정적들을 잔혹하게 숙청했다.
에드워드 3세가 보여준 초인적인 집념과 군사적 재능은 바로 이 '암늑대'라 불린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이 전쟁은 어쩌면 고향으로 돌아가 권력을 되찾으려 했던 한 여인의 복수극에서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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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워드 2세의 왕비. 이사벨라 |
3. "여자는 땅을 전할 수 없다" 살리카법의 함정
하지만 프랑스 귀족들은 섬나라의 어린 왕을 주군으로 모실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들에게 영국인은 그저 바다 건너의 '무례한 사촌'일 뿐이었다.
프랑스 귀족들은 먼지 쌓인 고대 법전을 뒤져냈다.
바로 살리카법(Loi Salique: 여계를 통한 왕위 계승을 금지하는 고대 법전)이었다.
"여자는 프랑스의 왕관을 가질 수 없으며, 여자를 거쳐서도 전달될 수 없다!"
이 논리에 따라 이사벨라의 아들인 에드워드 3세는 후보에서 탈락했다.
대신 프랑스 귀족들은 필리프 4세의 조카이자 프랑스 토박이 귀족인 발루아의 필리프(필리프 6세)를 새 국왕으로 선포했다.
발루아 왕조(Maison de Valois)의 시작이었다.
에드워드 3세는 분노했다.
"법을 급조해 내 권리를 훔치다니!"
하지만 당시 영국의 국력은 프랑스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그는 때를 기다리며 일단 발루아의 필리프를 왕으로 인정하는 척했다.
가스코뉴(Gascony: 프랑스 남서부의 영국령 땅) 영지를 지키기 위해 필리프 6세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손은 칼자루를 꽉 쥐고 있었다.
그것은 굴욕의 맹세가 아니라 전쟁을 위한 연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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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 필립 6세에게 경의를 표하다. |
4. 사자의 포효, 선전포고의 편지가 도착하다
1337년, 인내심은 바닥났다.
필리프 6세가 에드워드 3세의 영지인 가스코뉴를 몰수하겠다고 선언하며 선공을 날렸다.
에드워드 3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명분이 생겼다.
에드워드 3세는 파리로 사절을 보냈다.
사절이 들고 간 편지에는 더 이상 필리프를 '왕'이라 부르지 않았다.
대신 '발루아의 필리프'라는 평민에 가까운 호칭을 사용했다.
"나,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진정한 왕 에드워드는, 나의 왕관을 불법으로 찬탈한 발루아의 필리프에게 선전포고를 하노라."
이 편지는 단순한 종이 조각이 아니었다.
기사도의 시대가 저물고,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건 처절한 살육의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유럽 전역의 기사들이 갑옷을 챙기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의 깃발에 프랑스의 상징인 백합 문양(Fleur-de-lis)을 새겨 넣었다.
그것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결코 지워지지 않을 선명한 욕망의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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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와 부르봉 왕가를 상징하는 문양 |
전설적인 116년의 전쟁, 그 거대한 불길이 프랑스 북부의 평원을 향해 타오르기 시작했다.
2장. 양모(Wool)와 땅: 경제적 이권이 걸린 플랑드르와 가스코뉴 영토 분쟁
1. 전쟁의 엔진, ‘금(金)’과 ‘양모(Wool)’
역사는 종종 왕들의 자존심 싸움으로 기록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언제나 차가운 경제 논리가 도사리고 있다.
백년전쟁 역시 마찬가지였다.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며 칼을 뽑은 데에는 잉글랜드의 생명줄이라 할 수 있는 양모(Wool) 무역이 걸려 있었다.
당시 유럽 최대의 모직물 공업 중심지는 플랑드르(Flandre: 현재의 벨기에 및 네덜란드 남부 지역)였다.
이곳의 베틀은 잉글랜드산 고품질 양모가 없으면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잉글랜드 왕실은 양모 수출세로 나라 살림을 꾸렸다.
즉, 잉글랜드의 양과 플랑드르의 기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경제 공동체였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가 플랑드르 백작에게 압력을 넣어 잉글랜드와의 교역을 방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플랑드르는 법적으로 프랑스 국왕의 봉토였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3세는 즉각 대응했다.
그는 잉글랜드 양모의 플랑드르 수출을 전면 금지했다.
"내 양모를 쓰지 못한다면, 그대들의 배를 채울 빵도 없을 것이다!"
2. 가스코뉴의 포도주와 뒤섞인 피
또 다른 갈등의 뇌관은 프랑스 남서부의 가스코뉴(Gascony: 오늘날의 보르도 지역)였다.
이곳은 잉글랜드 국왕이 프랑스 국왕의 신하 자격으로 소유하고 있던 영지였다.
잉글랜드인들에게 가스코뉴는 단순한 땅 그 이상이었다.
가스코뉴는 유럽 최고의 포도주 산지였다.
잉글랜드 귀족과 상인들은 이곳에서 생산된 와인을 독점적으로 수입하며 막대한 이익을 누렸다.
프랑스 국왕 입장에서는 자신의 앞마당에 섬나라 왕이 버젓이 성을 쌓고 앉아 포도주 장사를 하는 꼴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필리프 6세는 사사건건 가스코뉴의 사법권에 개입하며 에드워드 3세를 압박했다.
"가스코뉴는 프랑스의 땅이니, 그곳의 판결은 나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영토권과 경제권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에드워드에게 가스코뉴를 뺏기는 것은 지갑을 통째로 뺏기는 것과 같았다.
3. 상인들의 속삭임, "전쟁을 사십시오"
에드워드 3세의 뒤에는 잉글랜드의 부유한 양모 상인들과 가스코뉴의 포도주 상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왕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전하, 프랑스 놈들이 우리의 돈줄을 막고 있습니다. 전쟁에 필요한 자금은 우리가 대겠습니다. 부디 우리의 시장을 지켜주소서."
중세 전쟁은 흔히 기사들의 명예를 위한 싸움으로 묘사되지만, 백년전쟁의 서막은 철저히 상업적 이익을 지키기 위한 투자 전쟁이었다.
에드워드 3세는 이탈리아 은행가들과 잉글랜드 상인들에게 막대한 빚을 지면서까지 함대를 꾸리고 병사를 모집했다.
실패하면 파산이었고, 승리하면 유럽 최대의 시장을 손에 넣는 거대한 도박이었다.
4. 굶주린 플랑드르, 프랑스 왕을 거부하다
수출 금지령으로 굶주림에 허덕이던 플랑드르의 도시들(헨트, 브뤼허 등)이 마침내 폭발했다.
그들은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명분이 부족했다.
봉건 질서 하에서 주군을 배반하는 것은 대죄였다.
이때 에드워드 3세가 그들에게 기막힌 출구를 제안했다.
"내가 프랑스의 '진정한 왕'이다. 나를 주군으로 섬긴다면, 그대들은 반란군이 아니라 충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잉글랜드의 양모를 마음껏 공급해주마."
플랑드르인들은 환호했다.
1340년 1월, 헨트의 광장에서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국왕의 문장이 새겨진 깃발을 휘날리며 스스로 프랑스의 왕임을 선포했다.
이제 전쟁은 단순히 영토 분쟁을 넘어, 경제적 생존권을 건 '국가 대 국가'의 총력전으로 진입했다.
명분(왕위)과 실리(양모와 포도주)가 하나로 합쳐진 순간이었다.
3장. 슬로이스 해전: 바다를 먼저 장악한 영국의 기선제압
1. 바다 위의 거대한 성벽, 프랑스의 봉쇄 작전
1340년 6월, 프랑스 북부 슬로이스(Sluys: 현재 네덜란드 질란트 근처) 앞바다.
수평선 위로 거대한 돛의 숲이 나타났다.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가 소집한 거대 함대였다.
프랑스는 제노바 용병들의 갤리선과 거대한 상선들을 개조한 군함 200여 척을 집결시켰다.
그들의 목표는 단순했다.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영국 함대가 대륙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바다 위에서 통째로 수장시키는 것이었다.
프랑스 사령관들은 배들을 쇠사슬로 묶어 서로를 연결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거대한 '움직이는 성벽'을 만든 셈이었다.
그들은 자신만만했다.
배의 숫자도, 병사의 숙련도도 프랑스가 앞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쇠사슬 전술'은 훗날 그들의 퇴로를 막는 거대한 족쇄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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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년전쟁의 일부. 슬로이스 해전 |
2. "사자 대 사자로 붙어보자" 에드워드 3세의 도박
영국 함대 150여 척을 이끌고 나타난 에드워드 3세는 전방의 거대한 성벽을 보고 잠시 멈췄다.
바람의 방향과 조류가 불리했기 때문이다.
측근들은 후퇴를 건의했다.
하지만 에드워드 3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태양의 위치를 계산했다.
"바람이 바뀌기를 기다린다. 해를 등지고 적의 눈을 멀게 할 때, 그때가 우리가 돌진할 시간이다."
오후 3시경, 마침내 바람의 방향이 바뀌자 영국 함대가 돌진을 시작했다.
배 위에는 수천 명의 영국 궁수들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훗날 프랑스 기사들의 악몽이 될 1.8미터 길이의 롱보우(Longbow: 장궁)가 들려 있었다.
3. 화살의 소나기, 바다를 붉게 물들이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하늘이 검게 변했다.
영국 궁수들이 쏘아 올린 화살이 분당 수만 발씩 프랑스 배 위로 쏟아진 것이다.
쇠사슬로 묶여 꼼짝달싹 못 하던 프랑스 수병들은 화살비를 피할 곳이 없었다.
갑판 위는 순식간에 시신으로 뒤덮였고, 바다는 비명으로 가득 찼다.
화살비가 적진을 초토화하자, 영국 병사들이 갈고리를 던져 프랑스 배에 올라탔다.
이제부터는 처절한 육상전이었다.
배 위는 좁은 골목길과 같았다.
영국군은 도끼와 단검을 휘두르며 프랑스 수병들을 몰아붙였다.
쇠사슬로 묶인 프랑스 함대는 한 척이 무너지자 옆 배로 혼란이 순식간에 전염되었다.
퇴로가 막힌 프랑스 군사들은 차가운 바다로 뛰어들었지만, 무거운 갑옷 때문에 그대로 수장되었다.
4. 제해권의 상실, 영국에게 열린 대륙의 문
전투 결과는 처참했다.
프랑스 함대 200여 척 중 190척이 파괴되거나 나포되었고, 2만 명에 가까운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영국 측의 피해는 미미했다.
이 승리로 에드워드 3세는 전쟁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제 영국군은 프랑스의 방해 없이 언제든 원하는 곳으로 대륙에 상륙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패배 소식을 들은 필리프 6세에게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할 때, 궁정 광대만이 나직이 속삭였다는 전승이 내려온다.
"프랑스 놈들이 영국 놈들보다 훨씬 용감합니다. 영국 놈들은 감히 바다로 뛰어들지 못했는데, 우리 프랑스 군사들은 모두 바다로 뛰어들었으니까요."
슬로이스 해전은 영국이 '해상의 지배자'로 거듭나는 첫 번째 신호탄이었다.
이제 에드워드 3세의 시선은 바다를 넘어 프랑스의 깊숙한 심장부, 기름진 평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화려한 갑옷으로 무장한 프랑스 기사단이 복수를 다짐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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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4년 노블 주화. 앞면에는 함선에 앉아 있는 에드워드 국왕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 이 전투를 기념한다. |
[제2부] 기사의 몰락과 롱보우의 공포 (영국의 압승 시기)
4장. 크레시 전투: 프랑스의 화려한 중무장 기사단, 영국의 '롱보우(장궁)' 앞에 무너지다
1. 쫓기는 사자와 굶주린 늑대들
1346년 8월, 프랑스 북부 크레시(Crécy) 평원.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프랑스 본토를 휩쓸며 진격하던 영국군은 압도적인 숫자의 프랑스 대군에 포위될 위기에 놓였다.
당시 영국군은 약 1만 2천 명, 이에 맞서는 프랑스의 필리프 6세는 그 3~4배에 달하는 3만 명 이상의 대군을 이끌고 있었다.
영국군은 굶주리고 지쳐 있었다.
반면 프랑스군은 승리를 확신했다.
프랑스 진영에는 유럽 전역에서 모여든 화려한 갑옷의 기사들과 이탈리아에서 고용된 정예 제노바 석궁병들이 포진해 있었다.
누가 봐도 프랑스의 압승이 예상되는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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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레시 전투 초기 양군 병력 배치도 |
2. 기사도라는 이름의 오만, 지옥을 부르다
8월 26일 오후,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평원을 적셨다.
프랑스의 선봉에 선 제노바 석궁병들이 공격을 시작하려 했지만, 젖어버린 석궁의 시위는 힘을 쓰지 못했다.
반면, 영국 궁수들은 소나기가 내리는 동안 롱보우의 시위를 풀어 모자 속에 넣어두는 치밀함을 보였다.
프랑스 기사들은 조급해졌다.
"비천한 보병들이 시간을 끄는구나!"
명예에 눈먼 기사들은 전열을 가다듬기도 전에 말을 몰아 전진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길을 비키지 않는 자신들의 아군(석궁병)을 밟고 지나가는 오만함을 보였다.
그때, 에드워드 3세의 명령이 떨어졌다.
"궁수들이여, 시위를 당겨라!"
3. '흰 소나기'의 공포, 장궁(Longbow)의 역습
영국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날리자, 하늘이 하얗게 변했다.
수만 발의 화살이 곡선을 그리며 프랑스 기사단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이것이 바로 백년전쟁의 판도를 바꾼 롱보우(Longbow: 장궁)의 위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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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Longbow |
1.8미터가 넘는 주목(Yew)으로 만든 이 활은 사거리가 석궁보다 길었을 뿐만 아니라, 숙련된 궁수는 분당 10발 이상의 화살을 퍼부을 수 있었다.
화려한 문장을 새긴 프랑스 기사들의 판금 갑옷(Plate Armor)도 근거리에서 쏟아지는 장궁의 화살 앞에서는 종잇장에 불과했다.
말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말에서 떨어진 기사들은 진흙탕 속에서 무거운 갑옷에 짓눌려 허우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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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레시 전투 |
4. 무너진 기사도, 새로운 시대의 서막
프랑스 기사들은 무려 15차례나 돌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결과는 매번 같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아오는 화살 비에 기사들은 접근조차 하지 못한 채 쓰러져갔다.
프랑스 왕 필리프 6세는 말을 잃고 간신히 도망쳐야 했다.
이날 밤, 크레시 평원에는 프랑스 귀족과 기사 1,500여 명의 시신이 뒹굴었다.
반면 영국의 피해는 수백 명에 불과했다.
수백 년간 전장을 지배해 온 '말 탄 귀족(기사)'들이 '땅 위의 평민(궁수)'들에게 처참하게 패배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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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레시 전투에서 전사자 수를 세는 에드워드 3세 |
에드워드 3세는 전장을 둘러보며 나직이 승리를 만끽했다.
이제 유럽의 왕들은 깨달았다.
화려한 예절과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도의 시대가 가고, 철저한 계산과 화력으로 승부하는 냉혹한 '전쟁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말이다.
5. "6명이 죽으면 나머지 시민 모두를 살려주마."
1347년, 크레시 전투에서 승리한 에드워드 3세는 요충지 칼레(Calais)를 점령했습니다.
1년 가까이 끈질기게 저항한 칼레 시민들에게 분노한 그는 잔혹한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도시의 대표 6명이 스스로 목에 밧줄을 걸고 나와 죽음을 맞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침묵이 흐르던 광장, 가장 먼저 손을 든 것은 칼레에서 가장 부유했던 귀족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Eustache de Saint Pierre)였습니다.
"내가 나가겠소."
그의 뒤를 이어 시장, 법률가 등 고위층들이 차례로 일어섰습니다.
기사도란 전장에서의 칼싸움뿐 아니라, 약자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임을 몸소 보여준 것입니다.
다행히 임신 중이던 영국의 왕비 필리파가 "태어날 아이를 위해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간청하여 이들은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 사건은 훗날 로댕의 조각으로 재탄생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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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댕 - 칼레의 시민들 |
5장. 검은 재앙, 흑사병: 전쟁보다 무서운 전염병이 멈춰 세운 시간
1. 전장 위로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
1347년, 크레시 전투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이었습니다.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북부의 전략적 요충지 칼레(Calais)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프랑스 전역이 영국의 발아래 놓이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동방에서 온 상선들을 타고 온 '보이지 않는 사신'이 유럽의 해안가에 발을 내디뎠기 때문입니다.
흑사병(Black Death: 페스트).
몸에 검은 반점이 생기며 고열 속에서 피를 토하다 죽어가는 이 끔찍한 역병은 전쟁의 함성마저 집어삼켰습니다.
칼을 휘두르던 병사도, 성벽을 지키던 파수꾼도 어제까지 함께 웃던 동료의 시신을 치우다 그 옆에 쓰러졌습니다.
신의 징벌이라 믿었던 이 재앙 앞에 국경과 왕관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2. 전쟁이 멈춘 이유, "싸울 인간이 없다"
1348년에 이르자 프랑스와 영국 전역은 거대한 공동묘지로 변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유럽 인구의 3분의 1, 많게는 절반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에드워드 3세와 필리프 6세는 어쩔 수 없이 칼을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명예나 땅을 뺏기 위해서가 아니라, 군대를 유지할 '인간'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군량미를 나를 마부도, 화살을 깎을 장인도, 성벽을 수리할 인부도 모두 죽었습니다.
전장에는 버려진 갑옷과 주인 잃은 말들만이 덩그러니 남았습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공식적인 휴전을 선포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잔혹한 전염병이 가장 잔혹한 전쟁을 잠시 멈춰 세운 것입니다.
3. 죽음이 바꾼 역사의 물줄기
흑사병은 단순히 인구만 줄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중세 유럽을 지탱하던 봉건제(Feudalism: 토지를 매개로 한 주종 관계)의 뿌리를 뒤흔들었습니다.
노동력이 귀해지자 살아남은 농노들의 몸값이 치솟았습니다.
지주들은 농민들을 붙잡기 위해 더 나은 처우를 약속해야 했습니다.
반면, 전쟁터에서 공을 세워야 할 기사들은 성 안에서 역병을 피하다 권위를 잃어갔습니다.
"신은 왜 기사도, 정승도, 거지도 가리지 않고 죽이는가?"
사람들은 교회와 봉건 질서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이 혼란은 훗날 르네상스와 농민 봉기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4. 텅 빈 들판, 다시 타오를 불씨
약 7년간의 대유행이 잦아들 무렵, 유럽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은 슬픔을 뒤로한 채 다시 생존을 고민해야 했습니다.
에드워드 3세 역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인구는 줄었지만, 왕관을 향한 그의 집념은 병균보다 끈질겼습니다.
영국군은 전열을 가다듬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에드워드 3세 본인보다 더 잔혹하고 유능한 지휘관이 전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바로 왕의 장남이자 영국의 전설적인 영웅, '검은 왕자' 에드워드였습니다.
흑사병의 어둠이 걷힌 자리에 다시금 전운의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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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레시의 흑태자. 우드스톡의 에드워드 라고도 불림. |
6장. 검은 왕자 에드워드: 푸아티에 전투의 승리와 프랑스 왕 장 2세의 포로 신세
1. 전장에 나타난 검은 그림자, 에드워드 직계 왕자
흑사병의 공포가 채 가시지 않은 1355년, 프랑스 남부 대륙에 다시 한번 공포의 상징이 나타났습니다.
검은 갑옷을 입고 검은 말을 탄 사내, 잉글랜드의 황태자 에드워드(Edward the Black Prince)였습니다.
훗날 역사는 그를 '검은 왕자'라 부르게 됩니다.
그는 아버지 에드워드 3세보다 훨씬 더 잔혹하고 효율적인 전쟁 방식을 택했습니다.
바로 슈보슈(Chevauchée: 기동 약탈전)였습니다.
이는 프랑스의 마을과 농장을 불태워 경제 기반을 파괴하고 민심을 이반시키는 일종의 '초토화 작전'이었습니다.
프랑스의 남부는 검은 왕자가 지나간 자리마다 잿더미로 변했고, 분노한 프랑스의 새 국왕 장 2세(Jean II)는 마침내 대군을 이끌고 그를 막아서기 위해 나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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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50년 목판에 그려진 장 2세의 초상화 |
2. 푸아티에의 덫, "도망칠 곳은 없다"
1356년 9월, 프랑스 중서부 푸아티에(Poitiers).
검은 왕자가 이끄는 영국군은 약탈한 전리품 때문에 행군 속도가 느려졌고, 결국 장 2세가 이끄는 프랑스 대군에 덜미를 잡혔습니다.
프랑스군은 영국군보다 2~3배나 많았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검은 왕자는 휴전을 제안했으나, 승리를 확신한 장 2세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오늘은 프랑스 기사도의 명예를 회복하는 날이다!"
장 2세는 크레시 전투의 패배를 거울삼아 이번에는 기사들에게 말에서 내려 보병으로 싸울 것을 명령했습니다.
장궁의 화살비를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프랑스 기사들의 최대 장점인 기동력을 스스로 포기한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3. 국왕의 생포, 역사상 유례없는 대사건
전투가 시작되자 영국 궁수들의 화살은 여지없이 쏟아졌습니다.
프랑스 보병들은 화살을 뚫고 전진했지만, 지친 상태에서 영국 중갑 보병들과 마주쳐야 했습니다.
혼란의 와중에 검은 왕자는 숨겨두었던 소수의 기병대를 프랑스군의 측면으로 돌격시켰습니다.
순식간에 대열이 붕괴되었습니다.
프랑스 귀족들은 전사하거나 도망쳤으나, 국왕 장 2세는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싸웠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막내아들 필리프와 함께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한 나라의 국왕이 전쟁터에서 적국에게 생포되는, 전 유럽을 경악게 한 대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4. 런던으로 압송된 프랑스의 왕관
검은 왕자는 포로가 된 장 2세에게 정중한 예우를 갖추었습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직접 국왕의 시중을 들며 '기사도의 모범'을 보였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이는 철저히 계산된 승자의 여유였습니다.
장 2세는 런던으로 압송되었고, 영국은 프랑스에 천문학적인 액수의 몸값을 요구했습니다.
왕을 잃은 프랑스는 무정부 상태에 빠졌습니다.
농민들은 굶주림과 세금에 못 이겨 폭동(자크리의 난)을 일으켰고, 프랑스라는 국가는 소멸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반면 영국은 프랑스 영토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받아내는 '브레티니 조약'을 체결하며 전쟁의 정점에 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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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레티니 조약 이후의 프랑스: 녹색은 프랑스 영토, 분홍색은 영국 영토 |
검은 왕자의 검은 갑옷은 프랑스인들에게는 저주받은 악마의 상징이었고, 영국인들에게는 승리를 가져다주는 불멸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제 프랑스에 남은 것은 굴욕과 절망뿐인 듯 보였습니다.
[제3부] 반전의 서막: 벼랑 끝에 선 프랑스
7장. 아쟁쿠르의 비극: 다시 한 번 재현된 영국의 압도적 승리와 헨리 5세의 야망
1. 야심가 헨리 5세,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다
1415년, 영국의 왕위에 오른 헨리 5세(Henry V)는 젊고 야심만만한 군주였습니다.
그는 국내의 정치적 불안을 잠재우고 자신의 정통성을 증명하기 위해 다시 한번 대륙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국왕 샤를 6세의 정신질환과 귀족들 간의 내분(부르고뉴파 vs 아르마냐크파)으로 사분오열된 상태였습니다.
헨리 5세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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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5세 |
그는 약 1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프랑스 노르망디에 상륙했습니다.
하지만 공성전이 길어지면서 영국군은 이질(Dysentery)에 시달렸고, 식량은 바닥났습니다.
헨리 5세는 철수를 결정하고 칼레 항구로 향했지만, 그 길목을 프랑스 대군이 막아섰습니다.
프랑스군은 영국군의 최소 3배가 넘는 대규모 기사단과 보병을 집결시킨 상태였습니다. (논쟁: 실제로는 1.5배~2배 정도였다는 견해도 있음)
"숫자가 적다고 불평하지 마라. 우리가 승리한다면, 나눌 영광이 커질 뿐이다."
1415년 10월 25일 새벽, 아쟁쿠르의 차가운 안개 속에서 영국군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굶주림과 이질에 지친 6천 명의 영국군 앞에 2만 명이 넘는 프랑스 대군이 보였습니다.
병사들 사이에서 절망적인 탄식이 흘러나왔을 때, 헨리 5세가 말에 올랐습니다.
"오늘 여기서 피를 흘리는 자는 나의 형제가 될 것이다(We band of brothers). 오늘 집에서 편히 잠자고 있는 영국인들은 훗날 그대들의 이름을 들으며 자신들이 이곳에 없었음을 부끄러워하게 되리라!"
셰익스피어의 희곡으로도 유명해진 이 연설은 단순히 왕의 허세가 아니었습니다.
헨리 5세는 왕관을 쓴 군주가 아니라, 진흙탕에서 함께 구를 준비가 된 '전우'로서 병사들의 심장에 불을 지폈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6천 명의 눈빛이 변했습니다.
절망은 순식간에 광기 어린 투지로 바뀌었고, 영국의 장궁병들은 비장하게 자신의 위치로 달려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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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 참전한 헨리 5세 |
2. 아쟁쿠르의 진흙탕, 죽음의 덫이 되다
10월 25일, 성 크리스핀의 날(St. Crispin's Day).
프랑스 북부의 아쟁쿠르(Agincourt) 평원에는 새벽부터 가을비가 내렸습니다.
평원은 쟁기질 된 밭이었기에 순식간에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탕으로 변했습니다.
헨리 5세는 좁은 평원 양옆에 숲이 우거진 지형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전방에 날카롭게 깎은 나무 말뚝을 박아 기병의 돌격을 차단했습니다.
반면 프랑스 기사들은 크레시와 푸아티에의 패배를 잊은 듯, 다시 한번 화려한 갑옷을 뽐내며 정면 돌격을 준비했습니다.
"숫자가 저리 적으니, 말로 밟고 지나가기만 해도 끝이다!"
프랑스 귀족들의 오만함은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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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쟁쿠르 전투 지도. 윗쪽이 프랑스군, 아래쪽이 잉글랜드군 진영의 모습 |
3. 장궁의 재림, 진흙 속에서 침몰하는 기사도
전투가 시작되자 영국 궁수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당겼습니다.
롱보우의 화살 비가 다시 한번 프랑스 기사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습니다.
당황한 프랑스 기사들이 돌격했지만, 좁은 지형과 진흙탕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뒤에서 밀려오는 병력과 앞에서 쓰러지는 말들이 뒤엉키며 프랑스군은 자중지란에 빠졌습니다.
무거운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들은 진흙 속에 넘어지면 스스로 일어날 수조차 없었습니다.
영국 궁수들은 활을 내려놓고 단검과 망치를 들고 달려나가 진흙 속에 처박힌 프랑스 귀족들의 갑옷 틈새를 찔렀습니다.
명예로운 결투 따위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일방적인 도살이자 처절한 살육이었습니다.
4. 귀족의 몰락, 프랑스의 심장이 멈추다
이날 전투로 프랑스는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왕실 총사령관을 비롯해 공작 3명, 백작 5명, 그리고 1,500명이 넘는 고위 귀족들이 전사했습니다.
프랑스 지배 계급의 씨가 말랐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헨리 5세는 승리 직후 포로로 잡힌 프랑스 기사들을 몰살하라는 냉혹한 명령을 내렸는데, 이는 기사도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비정한 선언과도 같았습니다.
아쟁쿠르의 승리로 헨리 5세는 '잉글랜드와 프랑스 공동의 왕'이 될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이제 프랑스인들에게 남은 것은 멸망의 공포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는 가장 어두운 순간에 예상치 못한 반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숨통이 끊어지기 직전, 저 멀리 동쪽 마을 시농에서 한 소녀가 "신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8장. 트루아 조약: 프랑스의 아들이 아닌 영국의 왕이 프랑스를 다스리게 된 굴욕
1. 분열된 프랑스, 스스로 심장에 칼을 꽂다
아쟁쿠르 전투 이후 프랑스는 시체만 남은 거인과 같았습니다.
지도층은 전멸했고, 남은 이들은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눴습니다.
국왕 샤를 6세는 정신질환으로 제정신이 아니었고, 왕실의 주도권을 놓고 아르마냐크파(Armagnacs: 태자 측)와 부르고뉴파(Burgundians: 영국 결탁 측)가 내전을 벌였습니다.
특히 프랑스의 유력한 제후였던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이 태자 샤를의 면전에서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분노한 부르고뉴파는 영국의 헨리 5세와 손을 잡았습니다.
프랑스의 절반이 적국 영국의 편에 선 것입니다.
이제 헨리 5세에게 파리의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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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고뉴 암살사건 |
2. "태자는 왕의 아들이 아니다" 비정한 어머니의 배신
1420년 5월, 프랑스 트루아(Troyes)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기괴한 조약이 체결됩니다.
바로 트루아 조약(Treaty of Troyes)입니다.
이 조약의 핵심은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현직 태자인 샤를(훗날 샤를 7세)에게서 박탈하고, 영국의 헨리 5세에게 넘기는 것이었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샤를 6세의 왕비 이자보(Isabeau of Bavaria)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친아들인 태자 샤를을 향해 "그는 왕의 친자식이 아닌 사생아다"라고 주장하며 아들의 정통성을 부정했습니다.
대신 자신의 딸 카트린을 헨리 5세와 결혼시켰습니다.
프랑스 국왕의 사후에 영국 국왕이 프랑스의 왕위를 이어받기로 약속된 것입니다.
이제 프랑스의 운명은 종이 한 장에 의해 영국으로 양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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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트린 드 프랑스 왕녀 (발루아의 캐서린) |
3. 두 나라의 왕, 그러나 신의 장난
헨리 5세는 승리자로서 파리에 입성했습니다.
그는 영국과 프랑스라는 거대한 두 제국을 통치할 진정한 '유럽의 황제'가 되기 직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인간의 계산대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1422년, 왕위에 오를 날만 기다리던 헨리 5세가 갑작스러운 병(이질)으로 급사했습니다.
그리고 불과 두 달 뒤, 정신질환을 앓던 프랑스의 샤를 6세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약에 따라 영국의 갓난아기 왕 헨리 6세가 '영국과 프랑스 공동의 왕'으로 선포되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민중들은 요람 속의 외국인 아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남부로 쫓겨난 태자 샤를은 비록 사생아라는 오명과 가난 속에 살고 있었지만, 프랑스인들에게 그는 마지막 남은 '프랑스의 자존심'이었습니다.
4. 시들어가는 백합, 꺼져가는 프랑스의 등불
프랑스는 두 토막이 났습니다.
북부는 영국과 부르고뉴가 지배했고, 남부 시농 성에는 '시농의 왕'이라 조롱받는 태자 샤를이 은둔해 있었습니다.
돈도, 군대도, 의지도 없었던 태자 샤를은 매일 밤 기도를 올리며 절망했습니다.
"과연 신은 프랑스를 버리셨는가?"
영국군은 태자 샤를의 마지막 보루인 오를레앙(Orléans)을 포위하기 위해 남하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를레앙이 무너지면 프랑스라는 이름은 지도에서 영원히 지워질 처지였습니다.
프랑스의 등불이 가물거리던 바로 그 순간, 저 멀리 시골 마을 동레미에서 한 소녀가 말에 올라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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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를 7세 |
9장. 오를레앙의 고립: 멸망 직전의 프랑스, 마지막 보루가 흔들리다
1. 프랑스의 심장, 오를레앙으로 향하는 칼날
1428년 가을, 영국군의 시선은 단 한 곳, 오를레앙(Orléans)으로 향했습니다.
이곳은 루아르 강(Loire River)을 가로지르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남부로 쫓겨난 태자 샤를의 거점인 시농(Chinon)으로 가는 최후의 관문이었습니다.
영국군 사령관 솔즈베리 백작은 자신만만했습니다.
"오를레앙만 함락시키면 프랑스라는 이름의 괴물은 마침내 숨을 거둘 것이다."
영국군은 오를레앙 주위에 거대한 포위망과 요새(Bastides)를 건설하며 도시의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습니다.
보급로가 끊긴 오를레앙 내부에서는 굶주림과 절망이 역병처럼 번져나갔습니다.
2. '시농의 왕'이라 조롱받는 태자의 눈물
남쪽 시농 성에 은둔하던 태자 샤를 7세는 무기력했습니다.
어머니에게는 사생아라 부정당하고, 신하들에게는 신뢰를 잃은 그는 매일 밤 성당 바닥에 엎드려 울며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오를레앙을 구할 군대도, 그 군대에게 줄 급료도 없었습니다.
"짐은 진정 왕의 아들이 맞는가? 신은 어찌하여 프랑스를 이토록 무참히 버리시는가?"
샤를은 스코틀랜드 용병들을 고용해 오를레앙을 구하려 했지만, 이마저도 '청어 전투(Battle of the Herrings: 보급 수레를 지키다 패배한 전투)'에서 대패하며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이제 프랑스의 운명은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았습니다.
귀족들은 이미 영국에 투항할 준비를 마쳤고, 백성들은 각자도생의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3. "그녀가 오고 있다" 기이한 소문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기묘한 소문 하나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동쪽 국경 지대인 동레미(Domrémy)의 한 시골 소녀가 "프랑스를 구하라"는 천사의 목소리를 듣고 왕을 만나러 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비웃음이 먼저 터져 나왔습니다.
"훈련받은 기사 수만 명도 못한 일을, 글자도 모르는 양치기 소녀가 하겠다고?"
하지만 절망에 빠진 민중들에게 그 허황한 소문은 유일한 희망의 밧줄이었습니다.
소문은 바람을 타고 오를레앙 성벽 안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로렌 지방의 처녀가 나타나 오를레앙을 구원하고 왕을 대관식장으로 인도할 것이다."라는 고대의 예언과 맞물려, 소녀의 존재는 거대한 신화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4. 침묵 속의 폭풍전야
1429년 2월, 마침내 한 소녀가 남장을 한 채 수백 킬로미터의 적지를 뚫고 시농 성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잔 다르크(Jeanne d'Arc).
그녀의 눈에는 광기가 아닌, 기사들조차 압도하는 강렬한 확신이 서려 있었습니다.
영국군은 여전히 오를레앙 성벽 밖에서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고 있었고, 프랑스의 기사들은 패배주의에 젖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보잘것없는 소녀의 등장은 116년 전쟁의 물줄기를 완전히 뒤바꿀 '신의 한 수'가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반전이 시작되려는 찰나였습니다.
[제4부] 성녀의 등장과 불타는 복수 (프랑스의 반격)
10장. 신의 목소리를 들은 소녀: 시골 소녀 잔 다르크(Jeanne d'Arc), 샤를 7세를 찾아가다
1. 동레미의 불꽃, 양치기 소녀의 기묘한 고백
1412년, 프랑스 동부의 작은 마을 동레미(Domrémy).
전쟁의 불길이 온 나라를 훑고 지나갈 때도 이곳은 비교적 평온했습니다.
하지만 열세 살 되던 해, 평범한 양치기 소녀 잔 다르크(Jeanne d'Arc)는 인생을 뒤바꿀 경험을 합니다.
정원의 나무 사이에서 찬란한 빛과 함께 목소리가 들려온 것입니다.
"잔, 너는 신의 선택을 받았다. 프랑스를 구하고, 태자를 대관식장으로 인도하라."
대천사 미카엘과 성녀들의 목소리였다고 훗날 그녀는 회상합니다.
일자무식의 시골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거창한 명령이었습니다.
하지만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4년 뒤, 프랑스의 심장 오를레앙이 함락 직전에 놓이자 잔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남자의 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수백 킬로미터의 적지를 뚫고 태자가 있는 시농 성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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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치기 시절 잔 다르크 |
2. 시농 성의 시험, 가짜 왕과 진짜 소녀
1429년 2월, 시농(Chinon) 성의 접견실.
태자 샤를 7세는 잔 다르크를 시험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화려한 왕의 복장을 벗고 신하들 틈에 숨었습니다.
대신 보잘것없는 신하 한 명을 왕좌에 앉혔습니다.
수많은 기사와 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일곱 살의 소녀 잔이 당당히 걸어 들어왔습니다.
잔은 왕좌에 앉은 가짜 왕을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군중 속을 헤치고 들어가 구석에 숨어 있던 샤를 7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신께서 보내신 진정한 국왕 폐하, 저는 프랑스를 구하러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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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 다르크의 샤를 알현을 그린 그림 |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샤를은 당황하며 부인했지만, 잔은 오직 그만이 알고 있던 비밀스런 기도의 내용을 귓속말로 속삭였습니다.
그 순간, 태자의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그것은 신이 보낸 구원자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3. "나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 이기러 왔다"
귀족들과 신학자들은 여전히 의심했습니다.
"여자가 어떻게 군대를 이끄는가?", "마귀의 목소리가 아닌가?"
잔은 며칠간 혹독한 심문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명쾌하고 거침없었습니다.
"신학은 나보다 신부님들이 더 잘 아시겠지만, 전쟁터에서 프랑스를 구하는 법은 내가 더 잘 압니다. 내게 군대를 주십시오. 오를레앙에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잔은 신의 이름으로 승리를 약속했습니다.
그녀는 전설적인 칼 '생 카트린의 검'을 찾아냈고, 자신의 상징인 백합 문양이 새겨진 하얀 깃발을 만들었습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양치기 소녀가 아니었습니다.
절망에 빠진 프랑스군에게 그녀는 '하느님이 보내신 성녀' 그 자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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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3년 판화 잔다르크 |
4. 하얀 갑옷의 상징, 오를레앙으로 진격하라
샤를 7세는 마지막 도박을 걸었습니다.
잔 다르크에게 하얀 갑옷을 입히고 소규모 병력과 보급 물자를 맡겨 오를레앙으로 보냈습니다.
기사들은 처음엔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잔이 말에 올라타 깃발을 휘두르자, 패배주의에 젖어 있던 병사들의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성녀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프랑스를 위해 진격하라!"
1429년 4월, 하얀 갑옷을 입은 소녀를 선두로 한 프랑스군이 오를레앙의 포위망을 향해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116년 전쟁 역사상 가장 기적 같은 반격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영국군은 아직 몰랐습니다.
그들이 마주하게 될 존재가 단순한 소녀가 아니라, 무너져가던 한 민족의 혼을 깨우는 불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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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 다르크의 오를레앙 포위전 |
11장. 오를레앙의 기적: 전세를 뒤집은 잔 다르크의 진격과 파트 전투의 승리
1. 전장의 공기를 바꾼 깃발
1429년 4월 29일, 7개월간 이어진 영국군의 포위로 아사 직전에 놓였던 오를레앙(Orléans) 성문이 열렸습니다.
하얀 갑옷을 입고 백합 문양의 깃발을 든 잔 다르크가 입성하자, 시민들은 울음을 터뜨리며 환호했습니다.
전통적인 지휘관들은 여전히 회의적이었습니다.
"이 아이가 전략을 알 리 없다."
하지만 잔 다르크의 전술은 복잡한 계산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공포를 압도하는 신념'이었습니다.
그녀는 패배주의에 젖어 방어만 고집하던 기사들을 거칠게 몰아붙였습니다.
"신께서 승리를 약속하셨는데 어찌 주저하는가? 지금 당장 공격하라!"
2. "나를 따르라!" 성녀의 피가 땅을 적시다
5월 7일, 영국군의 핵심 요새인 '레 투렐(Les Tourelles)' 공방전에서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잔 다르크는 직접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오르다 영국군의 화살에 어깨를 깊숙이 찔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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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깨에 화살을 맞은 성녀 |
프랑스 병사들이 절망하며 물러나려 할 때, 잔은 스스로 화살을 뽑아내고 상처에 기름을 바른 뒤 다시 전장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보라! 나는 살아있다! 신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피 묻은 하얀 갑옷을 입고 다시 나타난 그녀를 본 영국군들은 공포에 질렸습니다.
그들에게 잔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지옥에서 온 마녀 혹은 하늘이 보낸 사자로 보였습니다.
기적처럼 요새는 함락되었고, 다음 날 영국군은 오를레앙의 포위를 풀고 퇴각했습니다.
수십 년간 이어온 영국의 불패 신화가 열일곱 소녀 앞에서 무너진 순간이었습니다.
3. 파트 전투: 롱보우의 저주를 풀다
오를레앙의 승리는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잔 다르크는 기세를 몰아 루아르 강 유역을 탈환하며 북상했습니다.
1429년 6월 18일, 파트(Patay)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마침내 영국의 '롱보우'에 대한 해법을 찾아냈습니다.
프랑스 기병대는 영국 궁수들이 말뚝을 박고 진지를 구축하기 전에 번개처럼 돌격했습니다.
크레시와 아쟁쿠르에서 프랑스 기사들을 도륙했던 영국 장궁병들은 근접전에서 추풍낙엽처럼 쓰러졌습니다.
수치스러운 패배만 반복하던 프랑스군이 거둔 완벽한 야전 승리였습니다.
이 전투로 영국은 숙련된 궁수 수천 명을 잃었고,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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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 다르크가 이끈 프랑스군의 진격로 |
4. 랭스(Reims)로의 행진, 왕관을 완성하다
잔 다르크의 최종 목표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태자 샤를을 프랑스 국왕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전통적인 장소, 랭스 성당으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랭스는 영국군이 장악한 지역 깊숙이 있었지만, 잔의 기세에 눌린 도시들은 싸우지도 않고 성문을 열었습니다.
1429년 7월 17일, 랭스 성당의 화려한 조명 아래서 태자 샤를은 마침내 국왕 샤를 7세로 등극했습니다.
잔 다르크는 자신의 깃발을 들고 국왕의 곁을 지켰습니다.
"사생아"라 불리며 조롱받던 도망자 신세에서 프랑스의 진정한 주인이 탄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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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를 7세의 국왕 즉위 장면을 그린 그림인 랭스의 잔 |
그녀의 목소리가 성당에 울려 퍼졌습니다.
"전하, 이제 신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프랑스인들의 가슴 속에 '우리도 이길 수 있다'는 민족의식이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영광의 정점에서, 잔의 앞날에는 질투와 배신이라는 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12장. 화형대 위의 성녀: 잔 다르크의 죽음이 오히려 프랑스인의 민족주의를 깨우다
1. 토사구팽, 영웅을 질투한 권력의 민낯
샤를 7세의 대관식 이후, 잔 다르크의 위상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백성들은 그녀를 살아있는 성녀로 추앙했으나, 왕의 곁을 지키던 귀족들은 불안해졌습니다.
"글도 모르는 계집애가 나라를 좌지우지하다니."
정통성을 회복한 샤를 7세 역시 이제는 잔의 존재가 정치적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적극적인 공세 대신 영국과의 협상을 원했습니다.
1430년 5월, 잔은 왕의 미온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콩피에뉴(Compiègne) 전투에 나섰다가 부르고뉴군(영국 측 프랑스 제후군)에게 생포되고 맙니다.
프랑스의 구원자가 적의 손에 넘어갔으나, 그녀가 왕관을 씌워준 샤를 7세는 단 한 푼의 몸값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왕은 그녀를 철저히 외면했고, 잔은 결국 돈에 팔려 영국군에게 넘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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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로로 잡힌 잔 다르크 |
2. 루앙의 재판: 마녀의 굴레를 쓴 성녀
영국군에게 잔 다르크는 단순한 포로가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연전연패를 정당화하려면 그녀를 '악마의 사주를 받은 마녀'로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1431년, 영국 점령지인 루앙(Rouen)에서 잔혹한 종교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녀의 정신을 흔들기 위해 수치스러운 시험을 준비했습니다.
바로 왕실 고위 부인들을 동원한 '처녀성 검사'였습니다.
당시 중세의 믿음에 따르면, 마녀는 악마와 육체적 관계를 맺어야만 그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잔 다르크가 순결한 처녀라면, 그녀를 마녀로 규정할 논리적 근거가 뿌리째 흔들리는 셈이었습니다.
검사 결과는 영국의 예상과 달랐습니다.
그녀는 완벽하게 순결했습니다.
당황한 영국군은 이제 그녀가 '남자의 옷을 입었다'는 사소한 규율 위반을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증거가 있는가?", "왜 남자의 옷을 입어 신성함을 모독하는가?"
수십 명의 노련한 신학자들이 열아홉 소녀를 몰아붙였습니다.
하지만 잔의 답변은 당당했습니다.
"남자의 옷을 입은 것은 전장에서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이며, 내 목소리는 오직 신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조작된 증언과 고문 위협 속에서도 그녀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영국은 그녀에게 '이단'과 '마술'의 죄명을 씌워 화형을 선고했습니다.
3. 1431년 5월 30일, 재가 되어 날아간 불꽃
루앙의 광장에 거대한 장작더미가 쌓였습니다.
하얀 옷을 입은 잔은 화형대에 묶인 채 마지막으로 십자가를 청했습니다.
한 영국 병사가 나무 막대기로 급히 만든 십자가를 건네자, 그녀는 그것을 품에 안고 기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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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 다르크의 화형 장면 |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고통 속에서도 그녀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짖었습니다.
열아홉 살, 프랑스를 구한 성녀의 생애는 그렇게 한 줌의 재가 되어 센 강에 뿌려졌습니다.
그녀의 처형을 지켜보던 영국 관리 중 한 명은 공포에 질려 중얼거렸습니다.
"우리는 망했다. 우리가 성녀를 죽이고 말았다."
4. 죽음이 일깨운 민족의 혼(Soul)
영국의 계산은 틀렸습니다.
잔 다르크를 죽이면 프랑스의 기세가 꺾일 줄 알았으나, 결과는 반대였습니다.
그녀의 순교는 프랑스인들의 가슴 속에 억눌려 있던 '민족주의'라는 거대한 괴물을 깨웠습니다.
"우리의 성녀를 죽인 영국 놈들을 몰아내자!"
귀족들은 부끄러움을 느꼈고, 백성들은 무기를 들었습니다.
분열되었던 프랑스는 '잔 다르크'라는 하나의 상징 아래 단결하기 시작했습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샤를 7세 또한 그녀의 명예 회복 재판을 준비하며 본격적인 수복 전쟁에 나섰습니다.
잔 다르크는 죽었으나, 그녀가 남긴 불꽃은 프랑스 전역으로 번져나갔습니다.
이제 전쟁은 단순히 왕실 간의 싸움이 아니라, 내 땅에서 침략자를 몰아내려는 민족의 성전(聖戰)으로 변모했습니다.
영국군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습니다.
[제5부] 전쟁의 끝, 그리고 새로운 시대
13장. 대포의 등장: 기사도의 종말과 화약 무기가 바꾼 전쟁의 패러다임
1. 전장의 불청객, '검은 가루'의 역습
전쟁 후반기, 프랑스의 샤를 7세는 잔 다르크의 죽음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나약한 도망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프랑스군을 근대적인 상비군 체제로 개편했고, 무엇보다 영국의 '롱보우'를 압도할 수 있는 새로운 무기에 주목했습니다.
바로 동방에서 건너온 화약과 대포(Cannon)였습니다.
당시 대포는 다루기 위험하고 정확도도 낮았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뛰어난 기술자였던 장 뷔로(Jean Bureau) 형제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대포를 규격화하고, 이동이 편리하도록 바퀴가 달린 포차에 올렸습니다.
이제 프랑스군은 성벽 뒤에 숨어 있는 영국군을 향해 수십 킬로그램의 돌덩이와 쇠구슬을 쏟아부을 준비를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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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시대의 대포부대 |
2. 무너지는 성벽, 무너지는 기사도
백년전쟁 초기, 난공불락의 요새들은 영국군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습니다.
하지만 대포의 등장은 성벽의 의미를 지워버렸습니다.
육중한 대포알이 성벽에 부딪힐 때마다, 수백 년간 이어져 온 봉건적 방어 체계가 가루가 되어 흩날렸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무기의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평생을 수련한 기사가 전장에서 보잘것없는 보병이 쏜 포탄 한 발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광경은 중세 기사도의 자존심을 완전히 짓밟았습니다.
"용맹과 예절이 무슨 소용인가? 저 검은 구멍에서 뿜어 나오는 불길 앞에서는 국왕도 기사도 평등하게 죽을 뿐이다."
전장은 명예의 장소에서 철저한 '살육의 전시장'으로 변모하고 있었습니다.
3. 노르망디 수복: 영국의 눈물을 닦다
1449년, 프랑스군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습니다.
프랑스의 전략은 명확했습니다.
영국군이 점령한 도시들을 하나하나 대포로 두들겨 부수는 것이었습니다.
장 뷔로가 이끄는 프랑스 포병대는 노르망디 지역의 영국군 요새들을 단 1년 만에 60여 개나 함락시켰습니다.
과거라면 몇 년은 걸렸을 공성전이 대포 앞에서는 단 몇 주, 길어야 몇 달이면 충분했습니다.
헨리 5세가 피로 일궈낸 노르망디의 영토들이 프랑스의 대포 소리와 함께 모래성처럼 허물어졌습니다.
영국군은 당황했습니다.
그들의 자랑이었던 롱보우는 사거리와 파괴력 면에서 대포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4. 화약 연기 너머로 보이는 새로운 시대
이제 전쟁의 주도권은 완전히 프랑스로 넘어왔습니다.
샤를 7세는 대포를 통해 단순히 영토를 되찾는 것을 넘어, 강력한 중앙집권적 왕권을 확립해 나갔습니다.
대포를 소유하고 유지할 수 있는 막대한 자금력은 오직 국왕만이 가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벽 안에서 버티던 영주들의 시대가 가고, 강력한 화력을 보유한 국가의 시대가 오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사자 문장은 프랑스의 대포 연기 속에서 점차 흐릿해졌습니다.
이제 116년 전쟁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을 단 한 번의 격돌, 카스티용 전투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14장. 카스티용 전투: 116년 전쟁의 종지부, 영국군이 대륙에서 쫓겨나다
1. 마지막 사자, 존 탤벗의 등장
1453년 7월, 프랑스 남서부의 카스티용(Castillon).
영국은 위기에 몰려 있었습니다.
대륙의 거의 모든 영토를 잃고 마지막 남은 보루인 가스코뉴(Gascony)마저 위태로웠습니다.
영국은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명장이라 칭송받던 '잉글랜드의 사냥개', 존 탤벗(John Talbot) 백작이었습니다.
여든 살에 가까운 고령이었지만, 탤벗의 위엄은 여전했습니다.
그는 가스코뉴 주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프랑스군을 몰아내기 위해 진격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카스티용 근처에 견고한 참호를 파고, 장 뷔로가 배치한 300문의 대포를 성벽처럼 둘러친 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 오판이 부른 비극, 안개 속의 돌격
7월 17일 아침, 한 정찰병이 탤벗에게 급보를 전했습니다.
"프랑스군이 후퇴하고 있습니다! 진지에서 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후퇴가 아니라 병력을 재배치하며 생긴 먼지였습니다.
승리에 굶주려 있던 탤벗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전 군에 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탤벗은 기사로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갑옷도 입지 않고, 하얀 말을 탄 채 맨 앞에 섰습니다.
영국군과 가스코뉴 의용군들이 함성을 지르며 프랑스의 진지로 돌격했습니다.
그들이 프랑스 진지 앞의 깊은 참호에 도달했을 때, 탤벗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프랑스군은 후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대포의 심지에 불을 붙인 채 죽음의 환영 인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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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년전쟁의 종지부 1453년 7월 17일 카스티용 전투 |
3. 대포의 포효, 롱보우의 시대가 저물다
"발사!" 장 뷔로의 명령과 함께 300문의 대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습니다.
참호 앞에 밀집해 있던 영국군 위로 쇠구슬과 돌덩이가 소나기처럼 쏟아졌습니다.
아쟁쿠르에서 프랑스 기사들이 화살비에 쓰러졌듯, 이번에는 영국 병사들이 화약 냄새 진동하는 포탄 앞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습니다.
전투는 처절한 학살극으로 변했습니다.
탤벗의 말은 포탄에 맞아 쓰러졌고, 말 아래 깔린 노장은 프랑스 보병의 도끼에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영국의 전설적인 명장의 죽음과 함께, 100년 넘게 유럽 전장을 지배했던 영국의 자존심도 진흙탕 속에 처박혔습니다.
대포라는 신무기 앞에서 개인의 용맹과 기사도는 더 이상 승리의 열쇠가 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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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탤벗의 죽음 |
4. 116년의 전쟁, 막을 내리다
카스티용 전투의 승리로 프랑스는 가스코뉴의 수도 보르도를 탈환했습니다.
이제 영국 국왕이 프랑스 땅에 소유한 영지는 북부의 작은 항구 도시 '칼레(Calais)'를 제외하고는 단 한 뼘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공식적인 종전 선언문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1453년의 이 전투를 끝으로 양국은 더 이상 대규모 군사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영국은 내분(장미 전쟁)에 휩싸여 대륙으로 눈을 돌릴 여력이 없었고, 프랑스는 마침내 진정한 '프랑스인들의 나라'를 재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1337년에 시작된 사촌들 간의 땅싸움은, 1453년 수십만 명의 희생자와 함께 '국가 대 국가'의 거대한 전쟁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의 끝에서 유럽은 중세라는 긴 터널을 지나 근대라는 새로운 빛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15장. 역사의 유산: 섬나라 영국과 대륙 국가 프랑스, 민족 국가로의 탄생
1. "우리는 누구인가?" 민족 정체성의 발견
전쟁이 시작되던 1337년, 영국 왕은 프랑스어를 썼고 프랑스 귀족들은 영국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국적'은 희미한 개념이었습니다.
하지만 116년의 세월은 이들을 갈라놓았습니다.
프랑스인들은 잔 다르크의 순교를 지켜보며 "우리는 프랑스인이다"라는 강력한 연대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영국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대륙의 영토를 잃고 섬으로 밀려난 영국인들은 프랑스어 대신 영어(English)를 국어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다 건너 저들은 적이며, 우리는 이 섬의 주인이다."
사촌들 간의 집안싸움이 두 개의 서로 다른 민족 국가(Nation-State)를 탄생시킨 것입니다.
2. 왕권의 강화와 봉건제의 종말
백년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영주와 기사들이었습니다.
전쟁 초기 전장을 지배했던 기사 계급은 장궁과 대포 앞에 무력해졌고, 경제적으로도 몰락했습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국왕이 직접 다스리는 상비군(Standing Army)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샤를 7세는 전쟁 중 확립한 징세권을 바탕으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영국 또한 전쟁 후 이어진 내전(장미 전쟁)을 거치며 강력한 튜더 왕조를 열게 됩니다.
성벽 뒤에 숨어 왕의 명령을 거부하던 지방 영주들의 시대는 가고, 이제 국왕이 국가의 모든 권력을 손에 쥐는 절대왕정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3. 고립된 섬나라가 일궈낸 해상 제국
대륙의 영토를 모두 잃은 영국의 처지는 당시로선 '패배'였습니다.
하지만 이 패배는 역설적으로 영국의 축복이 되었습니다.
대륙에 대한 미련을 버린 영국은 시선을 바다 너머로 돌렸습니다.
"대륙에 땅이 없다면, 전 세계의 바다를 우리의 영토로 만들자."
훗날 영국이 대영제국(British Empire)으로 성장하며 전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백년전쟁에서의 패배로 인해 얻게 된 '섬나라로서의 정체성'과 해상 장악력 덕분이었습니다.
4. 116년 전쟁이 남긴 마지막 교훈
역사학자들은 백년전쟁을 '중세의 마지막 전쟁이자 근대의 첫 번째 전쟁'이라 부릅니다.
기사도와 봉건제라는 중세의 옷을 입고 시작된 전쟁은, 민족주의와 화약 무기라는 근대의 옷을 입고 끝났습니다.
수많은 이들의 피로 쓴 이 거대한 서사는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권력의 야망은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비극의 잿더미 위에서 새로운 시대의 싹이 튼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는 이후에도 수백 년간 앙숙으로 지내며 경쟁했지만, 그 경쟁은 서로를 자극해 유럽 문명을 전 세계의 중심으로 밀어 올리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116년의 혈투는 끝났지만, 그들이 남긴 국가 시스템과 민족의식은 지금 이 순간에도 현대 사회의 근간으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이 글은 백년전쟁(1337–1453)의 큰 흐름과 주요 사건(왕위 계승 분쟁, 경제·영토 이해관계, 해전·육전의 전환, 흑사병, 잔 다르크, 화약·대포의 부상, 종전과 유산)을 역사 기록과 연구에서 널리 합의되는 뼈대에 맞춰 재구성한 서사입니다.
다만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 전환, 대사, 심리 묘사, 현장 분위기(“바람이 바뀌었다”, “진흙이 발목을 잡았다” 같은 체감 표현)는 소설적으로 각색되었습니다.
또한 중세 전쟁사는 자료의 성격상 숫자와 세부 묘사가 문헌마다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병력 규모, 전사자 수, 포로·몸값·배상금의 구체 액수, 특정 연설의 문구(특히 후대 문학 작품을 통해 유명해진 표현), 전술의 세부(말뚝 배치·전열 구성·장궁 사거리의 체감 등)는 학계 견해가 갈리거나 기록이 불완전한 부분이 있어, 본문에서도 일부는 일반 독자용으로 단순화해 서술했습니다.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한국어 표기를 우선하고 원어(영어·프랑스어 등)를 병기해 독자가 추가 탐색을 할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다만 번역 관례가 여러 갈래인 고유명(예: 필리프/필립, 장/존 등)은 통일성을 위해 한 가지 표기를 선택했으며, 독자께서 다른 표기를 접하더라도 같은 인물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에는 전투·학살·전염병·화형 같은 폭력적 장면이 포함됩니다.
역사적 사실을 흐리지 않는 선에서 서술 강도를 조절했지만, 읽는 분에 따라 불편할 수 있습니다.
사실 확인이 필요한 독자께서는 영국·프랑스의 국가 기록·박물관·대학 출판물·연구서(전쟁사, 중세 프랑스 정치사, 잔 다르크 재판 기록 등)로 교차 확인을 권합니다.
The Hundred Years’ War began with France’s succession crisis (1328).
England’s Edward III, Philip IV’s grandson through Isabella, claimed the crown; French nobles chose Philip VI of Valois and denied inheritance through the female line (“Salic law”).
The dispute also protected trade and territory—wool for Flemish looms and Gascony’s wine ports.
Early English victories and the longbow eroded French knightly warfare.
Plague slowed campaigns, but England later captured King John II and imposed harsh terms.
In the 15th century Henry V renewed the war, won Agincourt, and backed the Treaty of Troyes to disinherit the Dauphin.
France revived when Joan of Arc lifted Orléans and led Charles VII to coronation at Reims; her execution forged a unifying martyr.
Charles VII rebuilt a standing army and artillery, and French cannon drove England out after Castillon (1453).
The conflict weakened feudal lords and chivalry, strengthened taxation and monarchy, and shaped English and French ident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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