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의 삶과 전설 (Niccolò Paganini)



이 글은 『파가니니 전기』, 19세기 유럽 신문 기사, 

음악학자들의 연구 논문 등을 참고했으나,

독자의 몰입을 위해 문학적 상상과 서사적 각색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대로의 연대기가 아닌, 

드라마와 긴장감을 살린 소설체 서술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인물과 사건에는 이해를 돕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1782년 이탈리아 제노바, 좁은 골목길 위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퍼졌다. 

니콜로 파가니니. 

그의 아버지 안토니오 파가니니(항만 노동자 겸 아마추어 만돌린 연주자)는 

아들의 울음을 듣고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아이는 반드시 음악을 해야 한다.” 

당시 제노바는 항구도시답게 다양한 문화가 드나들었지만,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가 예술가가 되는 일은 드물었다.




니콜로의 어머니 테레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데, 

임신 중 꿈을 하나 꾸었다고 훗날 전해진다. 

꿈속에서 천사가 나타나 

“너의 아이는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는 음악을 할 것이다”라 속삭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훗날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뒤집어 “그건 악마였다”고 말했다. 

실제로 파가니니의 별명은 죽을 때까지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였으니 말이다.


네 살이 되자 아버지는 작은 만돌린을 아들에게 쥐여줬다. 

손가락은 뼈대만 앙상한 듯 가늘었지만, 움직임은 유난히 부드럽고 길었다. 

여섯 살에는 바이올린을 배웠다. 

아이가 활을 쥐는 순간, 아버지는 뭔가 특별함을 느꼈다. 

“저건 평범한 손이 아니다.” 

실제로 파가니니의 손가락은 기형적으로 길어,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스트레칭과 포지션 전환이 가능했다. 

후대 학자들은 그가 마르판 증후군 같은 희귀병을 앓았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덕분에 그는 현악기의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그러나 천재는 혹독한 훈련 속에서 다듬어졌다. 

아버지는 무자비했다. 

하루 10시간 이상 연습을 시켰고, 실패하면 밥을 주지 않았다. 

어린 니콜로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바이올린을 놓지 못했다.

 그 혹독한 훈련 덕분에 그는 8세 때 이미 성인 연주자 못지않은 기량을 갖췄다.


열두 살 무렵, 파가니니는 제노바에서 첫 연주회를 열었다. 

관객은 기대 없이 앉아 있었지만, 아이가 무대 위로 나오자마자 분위기는 바뀌었다. 

긴 손가락이 현 위를 날아다니자,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떤 노인은 공연이 끝나고 

“나는 평생 바이올린을 들어왔지만, 저건 인간이 아니다”라고 중얼거렸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하지만 신동의 삶은 화려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가난했고, 몸은 점점 쇠약해졌다. 

긴장성 질환과 폐결핵 증세가 겹쳐 늘 창백했으며, 

가늘고 긴 체형은 사람들에게 괴이하게 보였다. 

어린 나이에 병약한 몸과 기괴한 외모는 ‘악마와의 계약’이라는 괴담을 키우는 데 한몫했다.




청년 파가니니는 제노바를 떠나 이탈리아 전역을 돌았다. 

그는 어느 무대에서 의도적으로 현을 끊고 나머지 세 줄로만 곡을 완주했다. 

청중은 경악했다. 

또 한 번은 세 줄을 끊고, 단 한 줄로 전체 곡을 연주했다. 

기교를 넘어선 광기에 가까운 퍼포먼스였다. 

이런 장면은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었다. 

“저건 악마가 그의 손을 빌려 연주하는 것이다.”


여기서 파가니니는 ‘쇼맨십’의 천재이기도 했다. 

검은 옷을 입고, 창백한 얼굴로, 무대에 서면 그림자마저 불길하게 보였다. 

심지어 공연 도중 갑자기 나타난 그의 그림자가 

뿔 달린 악마처럼 보였다는 목격담도 신문에 실렸다. 

청중 속 여성들이 기절하거나,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는 기사도 남아 있다. 

물론 과장이 섞였지만, 그런 괴담은 그의 명성을 더 높였다.


1805년, 파가니니는 북이탈리아에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작은 도시 공연장부터 귀족 살롱까지 그의 바이올린은 사람들을 홀려버렸다. 

그는 의도적으로 연주를 ‘쇼’로 만들었다. 

무대 위에서 일부러 현을 끊어내고, 남은 줄로만 기적 같은 연주를 이어갔다. 

청중은 열광했고, 동시에 공포에 휩싸였다. 

“이건 인간의 손길이 아니다.”




그는 기교적 곡들을 쏟아냈다. 

그중에서도 《24개의 카프리스》는 전설이 되었다. 

각 곡마다 미친 듯한 테크닉이 요구되었고, 24번은 특히 ‘악마의 연습곡’이라 불렸다. 

파가니니는 무대에서 그것을 연주하며 웃었다. 

동시대 다른 연주자들은 악보만 보고도 고개를 저었다. 

“저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파가니니는 그것을 해냈다. 

이후 이 곡은 바이올린 연주자들의 영원한 과제가 되었고, 

지금도 입시나 콩쿠르의 ‘지옥’ 같은 곡으로 악명이 높다.




1813년, 그는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연주회를 열었다. 

극장은 가득 찼고, 청중 중에는 귀족과 작곡가, 언론인들이 섞여 있었다. 

그날 무대에서 파가니니는 폭발적인 기교로 모든 이를 압도했다. 

한 신문은 다음날 이렇게 썼다.

“그의 활은 불길과 같았다. 현은 그의 손아귀에서 울부짖었고, 청중은 황홀경에 빠졌다.”


그의 명성은 곧 이탈리아를 넘어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빈, 파리, 런던. 어느 곳이든 표는 순식간에 매진되었다. 

심지어 암표가 성행했고, 그의 연주회는 귀족들의 사교 행사이자 민중의 축제였다. 

사람들은 그의 연주를 보기 위해 하루 전부터 줄을 섰다.


괴담도 함께 커졌다. 

파가니니가 무대에 오를 때마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자에서 뿔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한 청중은 공연 중 실신했고, 

다른 이는 그의 손이 비정상적으로 늘어나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심지어 “그의 바이올린은 악마의 뼈로 만들어졌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실제로 그는 인간의 척추뼈로 만든 바이올린을 쓴다는 소문에 시달렸다. 

물론 근거 없는 이야기였지만, 파가니니는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괴담은 그의 브랜드였기 때문이다.


사생활은 더욱 화려했다. 

그는 도박에 미쳐 큰돈을 날렸다. 

연주로 번 돈을 카드와 룰렛에서 탕진하곤 했다. 

한 번은 자신의 바이올린마저 도박빚에 담보로 잡혔는데, 

다행히 그곳 주인이 그의 재능을 아껴 바이올린을 돌려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여성 편력도 끊이지 않았다. 

귀족 부인, 무대 뒤 팬, 심지어 제자까지 그의 연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언제나 불안정했고, 파국으로 끝나기 일쑤였다. 

그중 한 연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아킬레는 예외였다. 

파가니니는 아들을 깊이 사랑했고, 평생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아버지로서 성실했다기보다는, 괴짜 예술가의 불안정한 애정에 가까웠다.


건강은 점점 나빠졌다. 

그는 매독에 걸려 고통을 겪었고, 치과 치료를 거부하다 치아가 거의 빠져 나갔다. 

이 때문에 얼굴은 더욱 괴이하게 보였고, 말소리는 흐릿해졌다. 

청중에게 그는 더욱 “인간 아닌 존재”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그의 음악은 멈추지 않았다. 

파리에서는 프란츠 리스트가 그의 연주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나는 피아노에서 파가니니가 한 것을 하고 싶다.” 

이후 리스트는 초절기교 연습곡을 쓰며, 파가니니의 정신을 피아노로 옮겼다. 

브람스, 라흐마니노프 등 후대의 작곡가들도 파가니니의 주제를 변주곡으로 발전시켰다. 

한 사람의 기괴한 바이올리니스트가 유럽 낭만주의 음악 전체를 흔든 셈이다.


1830년대에 접어들며 파가니니의 몸은 점점 망가져 갔다. 

그는 이미 수십 년간 혹사당한 손가락과 신체, 도박과 방탕한 생활, 

그리고 매독으로 인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치아는 거의 빠져버려 제대로 말하기조차 힘들었고,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지만 얼굴은 해골처럼 야위어 있었다. 

무대에 오르면 여전히 기적 같은 연주를 들려줬지만, 

공연 횟수는 줄어들었고, 관객들은 이제 그를 동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한 번은 파리 공연 도중 그는 거의 쓰러질 듯 연주를 마쳤다. 

청중은 폭발적인 박수를 보냈지만, 

무대 뒤 파가니니는 기침을 쏟아내며 “악마도 이제 나를 버린 것 같군”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는 여전히 검은 옷을 고집했고, 무대 위에서 뼈처럼 앙상한 손가락을 휘둘렀다. 

사람들은 더더욱 그를 “악마의 음악가”라 불렀다.


1836년, 그는 파리에서 카지노 사업에 투자했으나 크게 실패했다. 

엄청난 빚더미에 앉자, 그의 재산과 악기까지 위태로워졌다. 

천하의 파가니니도 재정 문제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1837년경, 그의 건강은 심각하게 나빠졌다. 

목소리를 완전히 잃어 더는 말도 하지 못했다. 

친구와 아들에게는 글로만 의사를 전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까지 음악에 대한 집착을 놓지 않았다. 

“내 손가락이 움직이는 한, 나는 연주할 것이다.”


1840년, 프랑스 니스에서 그는 생을 마감했다. 

향년 57세. 

그러나 그의 죽음은 평범하지 않았다. 

가톨릭 교회는 그의 장례를 거부했다. 

이유는 명확했다. 

그는 평생 “악마의 음악가”라는 소문을 달고 살았고, 

방탕한 생활과 신앙 거부의 기록이 있었다. 

사제는 말했다. 

“그는 성스러운 땅에 묻힐 수 없다.”


결국 그의 시신은 수십 년간 매장되지 못한 채 이리저리 떠돌았다. 

여러 지역에서 묻히기를 거부당했고, 

파가니니의 시신은 가문의 손에 의해 옮겨 다니며 안식을 찾지 못했다. 

마치 생전의 전설처럼, 죽은 후에도 그는 방황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파르마에 안치될 수 있었다.



그의 죽음 이후, 파가니니의 이야기는 전설이 되었다. 

“악마와 계약한 바이올리니스트.” 

사람들은 그의 초인적 기교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기에, 신화로 포장했다. 

그리고 그 신화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음악사적 영향은 더욱 확실했다. 

리스트는 그를 흠모하며 피아노에 기교를 이식했다. 

슈만과 브람스는 그의 테마를 변주곡으로 만들었고,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는 지금도 전 세계 무대에서 연주된다. 

바이올린 연주자라면 누구나 《24개의 카프리스》를 시험대 삼아야 했고, 

그 앞에서 무릎 꿇거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파가니니는 단순한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니라, 낭만주의 음악의 상징이자 촉매였다.


대중문화 속 파가니니는 끊임없이 재탄생했다. 

영화에서는 그의 기괴한 외모와 ‘악마의 계약’ 전설이 그려졌고, 

록 뮤지션들은 그를 “최초의 슈퍼스타”라 불렀다. 

지미 헨드릭스, 잉베이 말름스틴 같은 기타리스트들은 파가니니의 기교를 기타로 옮겨와 

새로운 신화를 만들었다. 

그만큼 파가니니는 악기를 넘어선 아이콘이었다.


파가니니의 삶은 아이러니로 가득했다. 

그는 초인적 재능으로 영광을 누렸지만, 동시에 병과 괴담, 고립에 시달렸다. 

그는 세상 누구보다 화려했지만, 말년은 쓸쓸했다. 

그러나 그 모든 모순이 모여 오늘날까지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전설을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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