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탕수수와 독립금: 하와이 한인의 하루, 김구의 편지, 인하대의 탄생 (Korean Immigration to Hawaii)



이 글은 사료와 연구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과 대사, 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적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한 대목은 (전승), 

해석이 갈리는 부분은 (논쟁), 어원 설명은 (어원)으로 표기합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설명합니다.

제물포(인천) 항 1904, 출항지 풍경 / Chemulpo (Incheon) Harbor, 1904, point of departure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커먼스

겨울바람이 제물포(인천의 옛 항구) 부두를 스쳤다.

아이를 안은 여인이 포대를 고쳐 잡았다.

남자는 여권을 접어 품에 넣었다.

통역이 이름을 부르고 손짓했다.

“나가사키에서 갈아탑니다.”

배는 어둠 속으로 미끄러졌다.


RMS Gaelic, 1903년 첫 한국 이민선(SS Gaelic) 외관 / RMS Gaelic, the ship that brought the first Korean immigrants in 1903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커먼스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 부두에 흰 배가 정박했다.

RMS 게일릭(RMS Gaelic).

사람들은 갑판 난간에 매달려 바람을 맞았다.

입국대는 분주했다.

“남자 56, 여자 21, 아이 25.”

도합 102명이 첫발을 내디뎠다.


호놀룰루 항만 전경, 1900 무렵 / Honolulu Harbor around 1900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커먼

그 무렵 설탕은 금이었다.

사탕수수 플랜테이션(Plantation, (어원) 대규모 단작 농장)은 만성 인력난이었다.

미국 공사 호러스 앨런(의사 출신 외교관)과 사업가 데이비드 데슬러가 모집을 주도했다.

신문은 “낙원”과 “황금의 땅”을 섞어 광고했다.

사람들은 흉년과 부채, 징병을 피해 바다를 건넜다.


1903-01-13 하와이안 스타 1면—‘코리안 이민자 도착’ 보도 / Hawaiian Star front page reporting Korean immigrants’ arrival
Library of Congress Chronicling America, Public Domain.
The Library of Con

두 해 남짓한 사이 7,000명이 넘는 조선인이 60여 회 항해로 하와이에 들어왔다.

배 이름은 아메리카 마루, 차이나, 코픽, 도릭, 게일릭, 홍콩 마루가 장부에 남았다.

남자 6천여, 여자 6백여, 아이 5백여.

숫자는 곧 마을이 되었다.


새벽 4시 기상.

6시까지 밭에 서야 했다.

사탕수수 잎은 칼처럼 날카로웠고 장갑은 금방 닳았다.

세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줄기를 베고 묶었다.

낮에는 열 시간, 주말엔 반나절.

월급은 성인 남자 16달러, 이듬해 18달러로 올랐다(논쟁).

막사·의무치료가 제공되었지만 하루는 길고, 계약은 느리게 끝났다.


올라아(Ōla‘a) 제당회사, 1902 / The Ōla‘a Sugar Company, 1902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커먼스

점심시간 그늘은 귀했다.

여인은 주머니에서 마른 김치를 꺼냈다.

옆자리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도 경상도요.”

말이 통하자 손놀림이 빨라졌다.

해 질 녘이면 교회로 모였다.

목사는 칠판에 영어 단어를 적고, 앉은 자리마다 ‘하와이 이름’을 새로 정했다.


밤에는 편지를 썼다.

“우린 잘 있습니다.”

거짓이 섞였다.

옆줄에는 진짜 사정을 적었다.

“아이 발목이 부었습니다.”

“다음 달 송금이 늦어질 듯합니다.”

봉투에 우표를 붙이고 장부에 기록했다.


하와이 초기 한국 이민자 가족 / Early Korean immigrant family in Hawaii
hawaiihistory.org via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커먼스

사진 신부의 얼굴이 작은 인화지에 담겨 왔다.

누군가는 사진으로 혼인을 올렸고, 누군가는 답장을 보냈다.

“사탕수수 밭 옆 마을로 오시오.”

가족은 사진에서 현실이 되었다.

밥상에 웃음이 늘었고, 때로는 눈물도 늘었다.


본국의 소식은 갈수록 무거워졌다.

을사늑약과 병탄의 소식이 태평양을 건넜다.

회관 무대 아래 작은 서랍이 있었다.

서랍 앞에는 ‘독립금’이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사람들은 일당에서 몇 센트를 떼어 넣었다.

주일마다 봉투가 쌓였다.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지부가 모금 보고를 적었다.

이름과 액수가 줄을 이뤘다.

모금은 임시정부로 송금되었다.

상하이에서 감사 전보가 도착했다(전승).

‘애국공채’ 모집도 돌았다.

사탕수수 밭의 손바닥이, 낯선 도시의 임대료와 활자비를 버텼다.

사람들은 돈을 보낼 때마다 서로의 등을 가볍게 쳤다.

“조금씩, 그러나 계속.”


1915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대회(이승만·안창호 식별) / 1915 Korean National Association convention in Honolulu (Rhee & Ahn identifiable)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대한민국/미국).
위키미디어 커먼스

그 무렵 임시정부 지도자 김구는 하와이 동포들의 도움에 여러 차례 편지로 고마움을 전했다(전승).

그는 후원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적어두었고, 

하와이에서 온 성금이 큰 숨통이 되었다고 썼다(논쟁).

회관 사람들은 그 편지를 돌려 읽었다.

“멀리서도 함께 싸우고 있구나.”


아이들은 빨리 컸다.

학교에서 미국식 동요를 배우고, 집에서는 된장 냄비를 저었다.

주일이면 한복 자락이 예배당 의자 사이를 스쳤다.

세상은 둘이었고, 둘은 한 집에 살았다.


현장은 늘 평온하지 않았다.

임금·주거·차별 문제로 파업이 일었고, 플랜테이션 간 이동이 잦았다.

어떤 파업에는 민족 간 불신이 스며들었고(논쟁), 어떤 자리에서는 서로의 도시락을 나눴다.

노동조합과 교회, ‘청년회’와 야학이 겨울밤을 채웠다.


라디오 수리를 배운 소년은 자동차 정비사가 되었다.

상점 주인이 나온 집에서는 장부에 영어와 한글이 함께 적혔다.

한식과 로코모코가 같은 테이블에 올랐다.

결혼식에서는 하와이안 레이와 비단 저고리가 함께 흔들렸다.


Korean Christian Institute 교정의 헨리 청, Honolulu, 1910s–20s 추정
Calisphere(USC EAL)
 Calisphere

한편 하와이 누우아누 언덕 옆에 작은 학교가 섰다.

코리안 크리스천 인스티튜트(Korean Christian Institute, 기숙형 학교)였다.

이민 1세대의 아이들이 거기서 책을 폈다.

“미래는 공부로 만든다.”

교장으로 이름을 올린 이는 훗날 한국의 대통령이 되는 이승만이었다(논쟁).

학교는 단지 배움터가 아니라 공동체의 약속서였다.


전쟁이 끝나고 한국은 폐허에서 다시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 물었다.

“고향을 도울 길은 무엇입니까.”

답은 뜻밖에 가까운 데서 나왔다.

하와이 동포사회가 세운 학교와 재산을 정리해 종잣돈을 만들자는 제안이었다.

1954년 인천의 인하공과대학(현 인하대학교)이 문을 열었다.

이름의 ‘인(仁)’은 인천, ‘하(荷)’는 하와이.

하와이 한인사회의 기부와 학교 매각 대금, 현지 모금이 초기 재원에 보탬이 되었다.

하와이 교민들에게 ‘인하’라는 두 글자는 모금 영수증과 같은 의미였다.

배에서 내린 첫 세대가 만든 이름을 후손들이 학교 깃발에 달았다.


인하공업전문학교(인하학원 계열) 1958년 학교 전경
인하공업전문대학 공식 연혁 페이지.
인하공업전문대학

그사이 일부는 본토로 건너갔다.

로스앤젤레스·샌프란시스코의 봉제·세탁·식당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어떤 이는 군복을 입고, 어떤 이는 대학 강의실에 앉았다.

이동의 궤적은 달랐지만 부두의 첫발은 같았다.


세월이 흘렀다.

하와이의 옛 플랜테이션 마을에는 아직도 회관이 남아 있다.

벽에는 1903년 입국기록과 배 이름이 적힌 표가 걸려 있다.

게일릭, 코픽, 도릭.

종이는 바래도 글자는 남아 있다.

한 노인은 손자에게 밭을 가리켰다.

“여기서 시작했다.”

노인은 손바닥의 굳은살을 쓰다듬었다.

손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 이제 제 일이에요.”

세대는 바뀌었고, 서사는 이어졌다.


이민 초창기의 기록에는 과장이 섞인다(전승).

모집 과정의 동기, 급여·근로 조건, 지도자들의 역할과 공적 배분에는 견해차가 남아 있다(논쟁).

그러나 몇 가지 줄기는 분명하다.

1903년 1월 13일 게일릭의 102명.

1903–1905년 7천여 명의 도착.

사탕수수 밭의 일당에서 떼어 보낸 독립자금과, 그 고마움을 전한 지도자의 편지.

하와이의 학교와 인천의 공대가 ‘인하’라는 이름으로 이어진 사실.


이야기의 끝에서 우리는 다시 부두로 돌아간다.

긴 항해를 마치고 배가 정박한다.

갓 구운 빵 냄새가 바람을 타고 온다.

아이의 손이 아버지의 셔츠깃을 잡아당긴다.

“우리 집은 어디예요.”

아버지가 가볍게 웃는다.

“여기서부터 만들자.”

그 말은 사실 선언이었고, 다음 세대를 향한 약속이었다. 


From 1903–1905, over 7,000 Koreans reached Hawai‘i to cut sugarcane for $16–18 a month. 

Days began before dawn; nights were for letters, church, and saving. 

In drawers tagged “Independence Fund,” cents became remittances to the Provisional Government; Kim Gu sent thanks. 

The Korean Christian Institute later helped seed Inha College (“In”cheon + “Ha”waii).

 Children bridged kimchi and loco moco, strikes and school—first footsteps growing into a lasting diaspora.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