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파르 하우저-두 통의 편지에서 시작된 미스터리 (Kaspar Hauser)

 


1828년 5월 26일 저녁, 뉘른베르크(Nuremberg, 바이에른)의 성문 앞 초소에 소년이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종이 두 장과 닳은 모자가 있었다.

목이 쉰 소년은 같은 문장을 기계처럼 되뇌었다.

“나는 아버지처럼 기병이 되고 싶다.”

그 말은 뜻을 모르는 외운 대사 같았다.

1828년 뉘른베르크에 도착한 하우저, 판화 / ‘Arrival of Kaspar Hauser in Nuremberg’, engraving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첫 번째 편지는 베세니히 대위(von Wessenig, 기병 6연대 4중대장) 앞으로 쓰여 있었다.

머리말에는 “바이에른 변경, 지명 없음, 1828”이 적혔다.

익명의 필자는 “이 아이를 1812년부터 길렀고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내보내지 않았다”고 썼다.

그리고 “아이가 원한다면 데려가 쓰라, 아니면 목을 매도 좋다”는 비상식적 문장을 남겼다.

둘째 편지는 ‘어머니의 글’처럼 꾸며졌지만 두 편지의 필체는 유사하다는 의심이 곧 돌았다(논쟁).


초병은 성문 기록에 시각과 상황을 적고 아이를 데려갔다.

“말, 물, 빵.” 같은 낱말에는 반응했지만 질문이 길어지면 소년은 “몰라요”로 돌아갔다.

그는 베세니히의 집에서 경찰서로, 다시 성안 감시탑으로 옮겨졌다.

루긴스란트 탑(Luginsland Tower, 뉘른베르크 성 내부)에서 그는 두 달을 보냈다.

방문객이 늘었고, 그는 빵과 물만 고집했다(전승).


시장 빈더(Binder, 시 행정 책임자)가 관찰을 남겼다.

소년은 걷고 계단을 오르는 데 큰 문제가 없었지만, 사회적 반응과 어휘는 뒤처져 있었다.

그는 하늘과 새와 불빛을 오래 바라보았다.

밤이 되면 낮보다 더 길게 잠들었다고 적었다.

아침이면 머리카락과 손발톱이 깔끔해진 채 깨어났다는 소년의 진술도 기록됐다(전승).


카스파르 하우저 초상(1830경), 파스텔 / Portrait of Kaspar Hauser (c.1830), pastel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소년의 이름은 카스파르 하우저(Kaspar Hauser, 19세기 독일의 정체불명 소년)로 적혔다.

도시는 그를 공식 보호 대상으로 채택했다.

가정교사 프리드리히 다우머(Friedrich Daumer, 철학·자연과학 교사)의 집으로 이동해 글과 숫자, 예절을 배웠다.

다우머는 자침·자석·호메오파시 같은 당시 유행 실험으로 소년의 반응을 관찰했다.

하우저는 그림을 잘 그렸고, 한글자씩 따라 쓰는 속도가 빨라졌다.


하우저가 머문 집, 뉘른베르크 / House associated with Kaspar Hauser, Nuremberg (LoC)
Library of Congress 경유 이미지,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그러나 첫 금이 갔다.

1829년 10월, 하우저는 다우머의 집 지하에서 이마에 칼자상을 입은 채 발견됐다.

그는 “후드를 쓴 남자가 변소에서 칼을 들이밀고 

‘너는 뉘른베르크를 떠나기 전에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전승).

피가 떨어진 흔적은 복도와 층계를 지나 지하로 이어졌다.

자해 의혹과 동정의 목소리가 동시에 커졌다(논쟁).


거처는 잦아졌다.

시 당국자는 그를 비버바흐(Johann Biberbach, 시 관리)의 집으로 옮겼고, 

곧 남작 투허(Baron von Tucher)의 집으로 재이동시켰다.

일부 보호자는 “허영과 거짓”이라며 불만을 적었다(전승).

1830년 4월에는 방 안에서 권총이 발사되어 머리를 스쳤고, 

그는 “책을 꺼내다 걸려 있던 권총을 잡아당겨 오발됐다”고 진술했다.

사건은 또 한 번 의심과 사고 사이에서 진동했다(논쟁).


그때 영국 귀족 로드 스탠호프(Lord Stanhope, 영국 귀족·여행가)가 등장했다.

그는 “출신을 밝혀 양자로 삼고 영국으로 데려가겠다”고 약속했다(전승).

헝가리로 두 차례 동행해 기억의 실마리를 찾으려 했지만, 하우저는 어떤 장소도 알아보지 못했다.

스탠호프는 점차 믿음을 거두었고, 1831년 말 하우저의 보호를 안스바흐(Ansbach)의 교사 요한 게오르크 마이어(Johann Georg Meyer)에게 넘겼다.

그의 생활비는 계속 지급했지만 직접 만난 것은 1832년이 마지막이었다.


안스바흐에서 하우저는 법률 사무소의 필사원으로 고용되었다.

그는 스탠호프의 영국행 약속을 기다렸고, 그 기대가 깨질수록 불만도 자랐다.

그를 지켜보던 안젤름 폰 포이어바흐(Anselm von Feuerbach, 바이에른 항고법원장)는 

“사회와 법이 한 인간을 시험하는 사례”로 사건을 기록으로 엮었다.

하지만 만년의 포이어바흐는 하우저를 향한 신뢰를 접었다는 메모를 남겼다는 주장도 이어졌다(논쟁).

도시의 호기심은 피로로, 동정은 계산으로 변해갔다.


1833년 12월, 마이어와 하우저가 크게 다툰 기록이 있다.

며칠 뒤 하우저는 호프가르텐(Hofgarten, 궁정 정원)에서 돌아와 옆구리에 깊은 자상을 안고 쓰러졌다.

그는 “낯선 남자가 작은 가죽 주머니를 건네며 불렀고, 방향을 돌자 칼을 맞았다”고 말했다(전승).

정원을 수색하자 보라색 주머니가 나왔고 그 안엔 거울글씨(Spiegelschrift)로 쓴 쪽지가 있었다.

쪽지는 “그가 내 얼굴과 출신을 말해 줄 것이다… 나는 바이에른 국경의 강… ‘M. L. Ö.’” 같은 단서만 남겼다(전승).


하우저 사건의 거울문자 메모 / Mirror-written note linked to Hauser (1833)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PD-Mark).
위키미디어 공용

의사는 상처의 각도와 깊이를 적었고, 경찰은 옷감의 찢김과 피의 경로를 기록했다.

“외부의 피습”과 “자해 후 날조”라는 해석이 정면으로 충돌했다(논쟁).

사흘 뒤 하우저는 숨을 거두었다.

묘비에는 특정 이름 대신 한 문장이 새겨졌다.

“그 누구인지 알 수 없었던 사람.”


카스파 하우저의 묘, 안스바흐 / Grave of Kaspar Hauser, Ansbach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위키미디어 공용

사건은 죽음 뒤에도 끝나지 않았다.

“그가 바덴 공가(Grand Duchy of Baden)의 실종된 상속자다”라는 설은 오랫동안 반복됐다(전승).

한편에서는 “처음부터 연출된 등장과 자기상처”라는 반론이 맞섰다(논쟁).

유전 표지와 가계 비교는 세기를 건너 이어졌고, 

최근 분석은 “바덴 공가의 모계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논쟁).

그러나 ‘사기’ 단정으로 바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단서도 함께 제시되었다(논쟁).


이야기를 만든 건 단지 비극적 죽음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군과 시를 동시에 호출한 두 통의 편지.

의미를 모른 채 외운 주입된 대사.

거리의 흔적이 희박한 신체 단서와, 격리 아동 회복을 둘러싼 시대의 관심.

법학자·귀족·신문·구경꾼이 얽히며 미스터리는 길게 연소했다.


‘겔라이트브리프’(하우저가 들고 온 종이)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결국 남은 질문은 두 겹이다.

그는 누구였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를 어떻게 대했는가.

보호와 관심은 한 끗 차이였고, 그 경계가 무너지면 서사는 흔들렸다.

정체의 비밀보다 먼저 남은 것은 태도의 기록이었다.


이 글은 [기본 사료/논문/자료]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적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한 대목은 (전승), 

해석이 갈리는 부분은 (논쟁), 어원 설명은 (어원)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표기합니다.



On May 26, 1828, a boy arrived at Nuremberg’s gate with two odd letters—one to a cavalry officer, one styled as a mother—and kept saying, “I want to be a cavalryman like my father.” 
Signs of confinement made him a sensation amid Europe’s “feral child” craze. 
Jurist Anselm von Feuerbach investigated; rumors cast him as a lost Baden heir. 
After a disputed head wound (1829), Lord Stanhope’s brief patronage, and years of doubt, he died from a Hofgarten stabbing (1833) beside a mirror-written note. 
Murder or self-staging remains contested; modern DNA weakens the Baden link.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