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로츠비타 - 간데르스하임 서원자의 삶과 〈둘키티우스〉 한 장면 (Hrotsvitha)

 


아침 종이 울리면 간데르스하임 수도원(Gandersheim Abbey, 작센 왕가 보호의 왕립 수도원) 마당에 서리가 남아 있었다.

흐로츠비타(Hrotsvitha, 10세기 작센의 여성 극작가·수도서원 서원자)는 

공동 식탁에서 따뜻한 수프를 마신 뒤, 필사실 열쇠를 받았다.

그녀는 라틴어 사전을 펼쳐 전날 표시한 줄을 다시 읽었다.

오늘은 원고를 쓰기 전에 가족에게 답장을 보내야 했다.

편지는 “집으로 돌아와 혼처를 보라”는 요구로 시작했다(전승).


간데르스하임의 흐로츠비타 동상 / Hrotsvitha memorial statue in Bad Gandersheim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위키미디어

흐로츠비타는 수도녀가 아니라 서원자(canoness, 혼인·재산 선택의 여지가 있는 세속 성직 여성)였다.

필요하면 수도원을 떠나 결혼할 수도 있었다.

가족은 이 선택을 여러 번 권했다는 말이 남아 있다(전승).

그녀는 답장에 짧게 적었다.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수도원은 책과 음악과 행정이 함께 있는 공간이었다.

원장 게르베르가 2세(Gerberga II, 오토 왕가 일원·수도원장)는 교육에 적극적이었다.

흐로츠비타는 라틴 강독 후 어린 서원자들에게 문장을 가르쳤다.

오전마다 서고 정리도 도왔다.

사본의 순서가 흐트러지면 다음 수업이 꼬였기 때문이다.


로츠비타가 오토 1세에게 희곡 원고를 봉정(1501) / Hrotsvitha presenting her comedies to Emperor Otto I (1501 woodcut)
The Met Open Access, Public Domain.
The Metropolitan

점심 뒤 그녀는 개인 시간에 들어갔다.

서원자는 방 한 칸과 약간의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다.

침대 아래 상자에는 가족이 보낸 천과 작은 은상자가 들어 있었다(전승).

그녀는 상자를 열어 천을 접고, 다시 닫았다.

바깥과의 연결은 위안이면서도 흔들림이었다.


그녀에게는 가까운 동료가 있었다.

리카르디스(Ricardis, 라틴문 교육을 맡은 선배 서원자)와의 토론은 길었다(전승).

새 작품의 대사를 어디에 더할지, 어떤 단어를 뺄지 정리했다.

기록은 남지 않았지만, 필사본 여백의 교정 표시가 대화를 증언한다.

작품은 이렇게 두 사람의 손을 거쳐 단단해졌다.


간데르스하임 수도원 교회 외관 Exterior view of Stift Gandersheim church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위키미디어 

수도원은 왕가와 가까웠다.

오토 왕가(Ottonian dynasty, 10세기 독일 지역 왕조)의 특사는 종종 이곳을 지났다.

그럴 때면 식탁은 붐볐고, 대화의 주제는 정치로 흘렀다.

흐로츠비타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메모를 남겼다.

후일 〈오토의 업적(Gesta Ottonis, 오토 1세 관련 연대시)〉의 소재가 된 문장들이었다.


사생활의 문제는 언제나 문턱을 넘나들었다.

친척이 보내온 소식지에는 집안의 상속과 결혼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전승).

어떤 친척은 그녀의 글쓰기를 “가문의 실용과 무관하다”고 낮춰 말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전승).

그녀는 방 문을 닫고 일정표를 다시 세웠다.

기도, 수업, 필사, 원고, 상담, 그리고 밤 기도.


흐로츠비타 봉정 장면(1913 재현) / Roswitha offering poem to Otto I (1913 reproduction)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문제는 글의 내용뿐만 아니라 여성이 글을 쓴다는 사실 자체였다.

외부 성직자 몇은 “연극이 여성에게 과연 합당한가”라고 물었다는 기록이 있다(전승).

그녀는 응답 대신 원고를 고쳤다.

웃음의 표적을 권력의 오판으로 고정하고, 결말을 강요가 아닌 선택으로 마감했다.

원장이 “이 방향이라면 허가할 수 있다”고 적었다.


대표작 〈둘키티우스(Dulcitius)〉의 결정적 장면은 짧고 분명하다.

총독 둘키티우스(Dulcitius, 로마 지방 행정관)가 

어둠 속에서 성녀를 껴안으려다 부엌솥을 끌어안고 검댕투성이가 된다.

관객은 웃고 장면은 즉시 다음으로 넘어간다.

이어지는 대사에서 성녀의 침착한 진술이 권력자의 오판을 드러낸다.

웃음 뒤 판단을 붙이는 이 설계가 흐로츠비타의 방식이었다.


〈둘키티우스〉 목판화, 1501 / Woodcut plate for ‘Dulcitius’, 1501
BSB MDZ 디지털본(Opera Hrosvite, 1501), Public Domain.
digitale-sammlun

소문도 따라왔다.

“테렌티우스를 베꼈다”는 말은 오래된 공격 방식이었다(전승).

흐로츠비타는 공개 반론보다 주석으로 답했다.

형식은 빌리되 목적을 바꿨음을 서문에 명확히 적었다.

비난은 멈추지 않았지만, 서문은 남았다.


한 해에는 병이 돌았다.

수도원 인근 마을에서 환자가 늘었고, 서원자 몇이 간호에 나섰다(전승).

흐로츠비타는 밤에 열이 올라 강독을 거르기도 했다(전승).

휴식 동안 그녀는 원고의 장면 수를 줄이고 배우 겸역표를 새로 만들었다.

아픈 날에도 원고는 앞으로 움직였다.


겨울이 깊을수록 스승과 동료의 부재가 늘었다.

리카르디스의 건강이 악화되자 강독을 그녀가 맡았다(전승).

수업 뒤 비어 있는 필사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여백에 짧게 적었다.

“빈 자리만큼 장면을 단순하게.”


가족의 권유는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어머니가 “집안의 제의(祭儀)에 돌아와 함께하라”고 쓴 편지가 왔다(전승).

그녀는 답장을 미뤘다.

그날 그녀는 수도원 마당에서 어린 서원자들에게 발성 연습을 시켰다.

잔잔한 소리가 겨울 하늘로 올라갔다.


무대 밖 생활은 서원자의 기본 의무로 채워졌다.

문서 기록, 세입 장부 확인, 방문자 응대가 있었다.

서원자는 수도원 재정의 일부를 관리했다.

흐로츠비타는 숫자를 정확히 썼다.

숫자는 작품보다 먼저 점검받았기 때문이다.


간데르스하임 전경(엽서) / Gandersheim village and abbey church (vintage postcard)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어느 날, 외부 검사단이 도착했다.

낭독회 전 사전 검토를 하겠다며 들어왔다(전승).

그들은 장면 일부를 삭제하라고 요구했다.

허가를 받으려면 고쳐야 했다.

그녀는 장면 길이를 반으로 줄이고, 다음 장면에 판단을 붙였다.


이런 압박은 반복되었다.

한 축제에서는 초청 낭독자가 갑자기 불참했다(전승).

그녀는 밤새 배역 겸역표를 새로 짰다.

소품과 동선을 다시 배치하고, 전환을 빠르게 했다.

다음 날 공연은 간신히 올라갔다.


가끔은 사적인 즐거움도 있었다.

서재 한구석에 작은 악기가 있었고, 쉬는 시간에 음계를 눌렀다(전승).

동료 서원자들과 빵을 나눠 먹고, 서고에서 새로 들어온 사본의 앞장만 함께 읽었다.

누군가는 여행객이 남긴 소식을 들려주었다.

그럴 때 그녀는 웃었다.


그러나 가장 큰 굴곡은 사후에 왔다.

그녀의 작품은 한동안 서고에 묻혔다.

사본은 손때와 곰팡이로 흐려졌다.

이름은 명부에서 희미해졌다.

그녀가 세운 설계는 잊힘의 위험 속으로 들어갔다.


콘라드 첼티스 초상 / Portrait of Conrad Celtis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세기가 바뀌고 나서야 길이 다시 열렸다.

콘라트 첼티스(Conrad Celtis, 르네상스 인문주의자)가 사본을 찾고, 

1501년 뉘른베르크에서 인쇄본이 나왔다.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가 삽화에 관여했는지는 학계 의견이 갈린다(논쟁).

중세 여성 라틴 극작가의 대본이 체계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공표되었다.

이름은 다시 교실과 무대로 돌아왔다.


흐로츠비타 초상(전통 도상) / Roswitha (Hrotsvitha) of Gandersheim, traditional portrait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흐로츠비타의 좌표를 정리한다.

출생과 사망은 대략 935년경~1002년경으로 본다(전승).

가문은 작센계 유력 집안으로 추정된다(전승).

혼인은 기록에 없다.

평생을 서원자로 지냈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이 글은 [기본 사료·논문·자료]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적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한 대목은 (전승), 

해석이 갈리는 부분은 (논쟁), 어원 설명은 (어원)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표기했습니다.


Hrotsvitha of Gandersheim, a 10th-century canoness and playwright, balanced private pressure to marry with public duties—teaching, accounts, and writing. 
She set women at the center, mocked official folly, and closed plays with choice, not punishment. 
In Dulcitius, a governor hugs a soot-blackened pot, then a calm testimony restores judgment. 
Her work faced scrutiny, illness, and shortages, later faded, and was rediscovered in 1501 by Conrad Celtis (Dürer’s role debated).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