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서울’인가 - 이름의 기원부터 강남·한강·교통까지, 수도의 변천사 한 편 (The history of Seoul)



 이 글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울역사편찬원, 서울특별시 공식 자료, 

국가기록원 등 주요 기록을 참고했으나, 

독자의 몰입을 위해 문학적 상상과 서사적 각색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대로의 연대기가 아닌, 드라마와 긴장감을 살린 소설체 서술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인물과 사건에는 이해를 돕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서울의 이름은 왜 ‘서울’일까.

한글 두 글자, 너무 익숙해서 뜻을 묻지 않고 지나치지만 

이 말은 원래부터 ‘도읍(수도)’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학계 다수 견해는 신라의 서라벌·사로 같은 ‘수도’를 가리키는 옛말이 

세월을 건너 오늘의 ‘서울’로 자리 잡았다고 본다.

그러니까 ‘서울’은 특정 도시 고유명이면서도 동시에 

‘수도’

라는 보통명사의 그림자를 품은 말이다. 


몽촌토성(백제 한성기 토성, 올림픽공원 일대)

서울이라는 도시가 처음부터 한강 북쪽 이 자리에 영원히 앉아 있었던 건 아니다.

삼국시대 백제의 첫 도읍지 위례성(한성백제의 도성으로 비정되는 풍납토성·몽촌토성 일대)이 

잠깐 불꽃을 피웠다가 자리를 옮겼고, 

고려는 이곳을 ‘남경(수도 개경을 보완하는 별도의 도읍)’이라 불러 삼경 체제로 편입했다.

남경 설치는 문종 21년(1067) 처음 이루어졌고, 

숙종 대에는 별도 관청까지 두며 천도를 꿈꾸었다.

한강 물길과 사방으로 통하는 길, 

그리고 풍수의 언어가 이 땅을 오래 ‘다음 수도’의 후보로 지목해 두었던 셈이다. 


결정적 장면은 1394년 가을에 온다.

새 왕조 조선을 연 태조 이성계가 한양(당시 지명)을 도읍으로 정하고, 

임시로 관청 건물을 궁으로 삼아 머물며 종묘와 궁궐 공역을 서둘렀다.

이듬해 1395년, 경복궁(조선의 법궁)이 완공되면서 ‘한성부’라는 새 수도의 틀이 굳었다.

도성 성곽과 궁문 이름이 정해지고, 한양은 조선의 머리가 됐다. 


경복궁 근정전(조선 법전, 국왕 즉위·조회 공간)
Geunjeongjeon, Gyeongbokgung - longzhengyu - CC BY 2.0

이후 수백 년 동안 ‘한성부(조선 수도의 공식 행정명)’라는 한자 이름이 행정의 표기였고, 

백성들 입에서는 ‘서울’이 더 자주 불렸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성부(1910년 병합 뒤 수도의 행정명)’로 바뀌었지만, 

사람들의 입은 완강했다.

신문과 잡지, 사람들 대화 속 ‘서울’은 사라지지 않았다.

해방 뒤 행정명은 ‘서울’로 돌아오고, 

1946년엔 경기도에서 분리되어 특별시 체제가 자리 잡는다.

‘경성’이라는 표기는 역사 속으로 물러났고,

 ‘서울’은 도시의 이름이자 나라의 수도를 뜻하는 보통명사의 숨을 함께 쉬게 됐다. 


한양도성 낙산 구간(서울 성곽 보행로)
Hanyangdoseong Naksan section - Kai Hendry - CC BY 3.0

면적의 윤곽은 어떻게 넓어졌을까.

오늘 서울의 행정구역은 25개 자치구로 나뉘고, 

시 전체 면적은 약 605㎢ 안팎으로 안내된다.

이 수치는 연도별 통계 공표마다 소수점 자리에서 약간의 차이가 나지만, 

도시 통계와 행정자료에서 ‘600㎢대 중반’으로 일관되게 제시되어 왔다.

행정구역 확대의 결정적 변곡점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에 걸친 남쪽 강변, 

곧 ‘강남’ 개발이다.

서울시 도시기본계획과 ‘영동지구(영등포 동쪽이라는 뜻) 신시가지’ 계획이 나오고, 

1970년 11월 ‘남서울 개발계획’이 발표되며 강남의 격자형 간선도로, 

대규모 주거지 조성이 속도를 받는다.

이때부터 서울의 생활 무게중심은 점차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강남은 어떻게 ‘강남’이 되었나.

도시계획의 선은 넓고 곧게 그어졌고, 

경부고속도로의 직선 에너지가 남쪽 들판을 깨웠다.

국영기업·학교·주택을 끌어들이며 인구를 실어 나른 정책은 

‘강북-강남’의 일상 지도를 갈아엎었다.

강북의 명문고와 대학 일부가 남쪽으로 옮겨 붙으면서 교육 수요가 연쇄 이동했고,

 ‘8학군(강남·서초 일대 고교 배정 학군을 가리키는 통칭)’이라는 상징이 태어났다.

학군과 집값, 사교육이라는 한국적 삼각형이 

강남이라는 지명 위에 선명하게 그려진 것도 이즈음이다. 


구(舊) 서울역 1925년 건물(현 문화역서울284)
Old Seoul Station (front) - Raul0928 - CC BY 4.0

서울의 교통은 어떻게 바뀌었나.

1974년 8월 15일,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면서 도시의 시간은 철로 위에서 재편되기 시작했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교량이 늘고, 2·3·4호선이 잇따라 뚫리면서 

도심-부도심의 연결선은 더 촘촘해졌다.

2004년의 버스 개편은 중앙버스전용차로(도로 한복판에 버스만 달리는 차로)와 

환승할인·거리비례 통합요금을 도입해 ‘버스-지하철-버스’로 연동되는 일상 이동을 만들었다.

인천국제공항과 도심을 잇는 공항철도는 2010년 서울역까지 전 구간이 열리며 

도심공항터미널(도심에서 미리 체크인·수하물 위탁 가능한 시설) 운영을 시작했고, 

서울의 ‘세계 공항 접근성’은 한 단계 올라섰다. 


한강은 도시를 어떻게 바꿨나.

올림픽을 앞둔 1980년대, ‘한강종합개발’이라는 이름의 큰 공사가 

36km 구간에서 진행되며 제방, 고수부지, 올림픽대로, 하수처리장이 한꺼번에 들어섰다.

수해의 기억을 줄이고 시민공원을 넓힌 반면, 

자연하천의 모습을 잃었다는 비판도 함께 남았다.

그럼에도 서울의 시민적 풍경, 강변 산책로, 야외 공연, 다리 아래의 저녁 바람은 

이 개발 이후 본격적으로 일상이 되었다. 


청계천 1904년, 개천의 옛 모습
Cheonggyecheon, 1904 - Public domain

‘도심’을 다루는 방식도 바뀌었다.

2005년 청계천(도심 복개도로를 걷어내고 되살린 하천) 복원은 

자동차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의 상징적 회전을 알렸고, 

2017년 서울로 7017(옛 서울역 고가 보행길) 개장은 보행 동맥을 새로 그었다.

2023년에는 광화문 월대(궁전 앞 너른 섬돌과 마당)를 복원해 

궁궐 앞 풍경의 역사성을 되찾는 작업도 공개되었다.

도시는 늘 새로운 ‘첫인상’을 실험하고, 시민은 그 위를 걸으며 변화를 체험한다. 


지명과 행정명은 시대마다 달랐다.

고려의 남경, 조선의 한성부, 일제의 경성부, 해방 뒤의 서울.

하지만 ‘서울’이라는 두 글자는 놀랍게도, 

이런 변천의 전 과정에서 사람들 입속에 살아 있었다.

서울은 ‘수도’라는 뜻과 ‘이 도시’라는 고유함을 함께 품고, 

언어와 행정의 불협화음을 넘어 오늘까지 이어진 이름이 됐다. 


서울의 트렌드는 늘 시간의 줄기를 탄다.

1960-70년대의 키워드가 ‘산업화·강남’이었다면, 

1980년대는 ‘올림픽·한강’이었다.

1990-2000년대는 ‘디지털·인터넷·도시재생’으로 접속했고, 

2010년대는 ‘보행·디자인(DDP, 설명: 동대문디자인플라자)·초고층(롯데월드타워 555m)’ 같은 

수직과 수평의 실험이 두드러졌다.

오늘의 서울은 K-컬처와 관광, 스타트업, ESG 도시정책, 

그리고 도시유산의 ‘정교한 복원’을 동시에 굴리는 복합기다.

서울타워(남산의 전망타워), DDP, 롯데월드타워 같은 시그니처는 도시의 ‘사진’을 만든다.

하지만 서울의 풍경을 완성하는 것은 결국 골목이다.

새 아파트 단지와 오래된 시장, 한강 공원과 동네 도서관, 

재개발 펜스 너머의 빈터와 그 사이를 잇는 버스 노선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 

그것이 서울이다. 


광화문과 대로(1890년대 추정) – ‘서울의 대로와 궁문’
광화문 전경, 1890s (퍼블릭 도메인)

학군과 교육의 지형을 빼놓고 서울을 말하긴 어렵다.

‘8학군’은 행정용어라기보다 사회적 기호에 가깝다.

1970년대 강남 개발과 함께 고교 이전·신설이 이어지며 배정 학군이 재편되었고, 

강남·서초 일대 고교 집적은 ‘학군=부동산=사교육’의 연쇄 이미지를 낳았다.

이 상징은 지금도 교육 정책과 시장, 

부모 세대의 선택을 밀어 올리거나 당기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한다.

당대의 ‘성공’과 도시의 ‘균형’ 사이에서 서울이 고민을 거듭해 온 흔적이기도 하다. 


한편 공항 접근성과 도시 관문도 달라졌다.

공항철도 직결로 서울역-인천공항 이동이 상시 40분대가 되었고, 

도심에서 바로 출국수속을 밟을 수 있는 도심공항터미널은 ‘여행의 시작’을 도심 한복판으로 끌고 왔다.

국제도시 서울의 얼굴은 이제 비행기 트랩이 아니라, 지하철 승강장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름의 어원에서 행정의 변천, 강남의 탄생과 한강의 재구성, 교통·학군·랜드마크의 진화까지.

서울은 늘 ‘다음 판’을 준비하는 도시다.

어제의 계획이 오늘의 풍경이 되고, 오늘의 공사가 내일의 일상이 된다.

그리고 그 변화의 속도 속에서도, 한강 바람은 매일 저녁 같은 시간에 분다.

서울은 그런 도시다.


서울 명칭·어원과 변천은 서울역사편찬원 자료를, 

한양 천도와 경복궁 창건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사료 해설을, 

강남 개발과 8학군의 형성은 서울시·국가기록원 자료를, 

교통정책과 인프라 변화는 서울교통공사·서울시 공식자료와 공항철도 문서를 바탕으로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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