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승정원일기》, 《일성록》, 《규장각지》, 《화성성역의궤》, 《무예도보통지》 등
주요 기록을 참고했으나, 독자의 몰입을 위해 문학적 상상과 서사적 각색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대로의 연대기가 아닌, 장면과 대사 중심의 소설체 재구성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인물과 지명·제도에는 이해를 돕는 (간단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 화성 서장대-정조가 군사훈련과 국방개혁을 지휘하던 지휘초소 CC BY-SA 3.0 / “oreum, 2008” |
을묘년 봄밤이었다.
1795년, 수원 화성(정조가 축조한 신도시·성곽) 서장대 앞에 횃불이 빛의 강을 열었다.
정조(조선 22대 임금)는 장용영(왕권 직속 친위군)의 진을 훑고 서 있었다.
“오늘은 활보다 총을 먼저 본다.”
그가 말하자 장용영 대장이 고개를 숙였다.
“전하, 총열은 바람을 탄다 하옵니다.”
정조가 가볍게 웃었다.
“바람은 모든 무기의 두려움이니, 오늘은 바람과 함께 쏴라.”
밤공기는 약간 차고, 북쪽에서 내려온 바람은 횃불을 길게 흔들었다.
수많은 촉불이 물결처럼 움직였고, 서장대 아래로 사열의 구령이 낮고 단단하게 울렸다.
그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현륭원(사도세자 능)에 이르는 길의 첫 고개였다.
정조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 오늘도 아들이 보고드립니다.”
그리고 다시 서장대로 돌아서며 말했다.
“군대는 부모의 이름을 지키는 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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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조선 22대)의 어진-왕실 족보 『선원록』에 전하는 초상 Public Domain (PD-Art) / “Seon-one-rok, Unknown” |
정조라는 이름은 한 사람의 재능을 넘어, 하나의 작전지도에 가깝다.
그 작전도는 네 줄로 요약된다.
학문과 문관을 키워 정책의 머리를 만들고,
친위군을 세워 팔의 힘을 되찾고,
법전을 정리해 뼈대를 곧게 하고,
시장을 풀어 국가의 피를 돌린다.
이를 위해 그는 사람, 글, 군, 돈을 동시에 움직였다.
그는 1752년 한양(조선 수도)의 창덕궁에서 이산(정조의 어린 시절 이름)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사도세자(비극적 죽음을 맞은 왕세자)는 1762년 뒤주 사건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조는 소년의 나이로 그 비극을 견인처럼 끌고 자랐다.
사도세자에게 내린 시호 장헌(사후의 존호)을 바로 세우고,
능을 옮겨 현륭원으로 정비한 일은 한 사람의 효로만 설명할 수 없다.
그건 정치였다.
왕권의 기억을 바로 세우고, 그 기억에 충성을 모으는 작업이었다.
즉위 첫해, 정조는 규장각(왕립 도서관·정책 싱크탱크)을 세웠다.
서고의 이름이자, 젊은 문신을 직접 가르치는 학교였다.
초계문신(젊은 관료 재교육 제도)을 뽑아 글과 사물을 토론하게 하고,
강의가 끝나면 임금이 직접 시험지를 만들었다.
“사람을 바꾸지 않고 나라를 바꿀 수는 없다.”
그의 말은 짧았고, 제도는 촘촘했다.
규장각은 단지 책을 보관하는 곳이 아니었다.
정책을 설계하고, 인재를 시험하고, 다음 세대의 규칙을 비축하는 장치였다.
머리만 있을 수는 없었다.
팔이 필요했다.
그가 선택한 팔은 장용영이었다.
장용영은 금군과 어영청처럼 문벌의 영향력이 스며든 기존 군영과 달리,
임금이 바로 연결되는 친위군이었다.
수도 한양엔 내영, 화성에는 외영을 두어 남북의 균형을 맞췄다.
정조는 밤마다 장용영의 사열을 받았다.
“군대는 늘 임금의 눈앞에 있어야 한다.”
그는 보고 듣고, 군기를 바로잡고, 무예를 표준화했다.
무예도보통지(국가 표준 전투 교범)를 편찬해 창과 검,
장창과 쌍수도의 동작을 도해로 남기게 했다.
서책과 훈련장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게 만드는 일, 그것이 그의 병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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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예도보통지』(1789 간행) 속 봉술—정조의 군제개혁과 무예정비 Public Domain (PD-Art) / “attributed to King Jeongjo project, c.1786” |
국가의 뼈대를 곧게 세우는 작업도 서둘렀다.
대전통편(법전 총정리)을 추진해 각 부처의 법령을 통일하고,
문서의 길이를 줄이는 대신 적용의 정확성을 높였다.
군공이라면 군공답게, 과오라면 과오답게 기록하게 하는 일,
곧 ‘문서의 지도’를 바로 잡는 일이었다.
그는 밤이면 붉은 주필(임금의 수정 표시)로 신하들의 상소에 줄을 그었다.
논리의 빈틈, 자료의 누락, 문장의 모호함을 가차 없이 지적했다.
“네 말은 옳다. 다만 근거가 없다.”
이 문장은 칭찬도 꾸짖음도 아닌, 국가의 규칙이었다.
정조가 강하게 눌렀던 것은 시장의 숨통이었다.
신해통공(1791, 금난전권 폐지)을 통해 시전상인(한양 관허 상인)의 독점권을 걷어내고
난전(허가 없는 상인)의 판매를 상당 부분 허용했다.
사대문 안 상권의 물길이 바뀌자, 물건은 골목을 타고 퍼졌다.
‘풀린 시장’은 세수를 넓히고, ‘풀린 시장’은 서민의 일상에 작은 선택권을 가져왔다.
정조에게 자유화는 거대한 사상이 아니었다.
피를 돌리는 의술에 가까웠다.
대신과 붕당을 다루는 방식도 독특했다.
그는 탕평(붕당 간 인재 등용)이라는 연로한 말을 새롭게 운영했다.
논쟁을 금하지 않았고, 논쟁을 인사에서 무기로 쓰는 것을 금했다.
사람은 자리에서 틀릴 수 있어도, 기록에서 틀리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태도였다.
홍국영(정조 초기의 최측근)은 그 기준을 벗어나면 누구든 밀려난다는 살아 있는 사례가 되었다.
정조에게 ‘내 편’은 정권의 안전핀이 아니라, 기준을 지키는 한기의 수첩이었다.
그러나 정조의 평면은 한 장으로 그릴 수 없었다.
그의 시대는 새로운 사상과 오래된 예법이 충돌하는 경계였다.
서학(천주교 사상)은 학문으로서 조심스럽게 읽히다가, 제사 문제를 통해 종교로서 충돌했다.
진산 사건(1791, 제사 거부로 인한 처벌)은 그 충돌의 첫 폭발이었다.
정조는 전면 박해로 치닫지 않게 속도를 조절했지만,
유교적 예법을 흔드는 사안을 용인하지도 않았다.
국가의 심장은 바꿀 수 없고, 바꿔야 할 것은 호흡이라는 판단이었다.
그의 사후, 신유박해(1801)는 다른 속도로 달려갔다.
정조의 고삐는 그의 생과 함께 풀렸다.
정조가 도시를 만든 방식은 더 분명하다.
수원 화성은 단지 성곽이 아니라, 왕권의 새로운 방향이었다.
성의 곡선과 직선, 수문과 포루, 거대 행궁과 시장의 배치는 모두 제도였다.
정약용(실학자·기술자)은 거중기(도르래 복합 장치)로 돌을 들게 하고,
채제공(정승)은 공사를 전체로 조율했다.
화성성역의궤(공사 기록서)는 인건비와 자재, 공정과 도면을 세밀하게 남겼다.
“성은 아름답고, 계수는 명확해야 한다.”
정조가 택한 도시정치는 미학과 회계가 한 묶음인 정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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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95년 2월, 정조의 화성 원행—왕릉 참배 어가행렬 장면 Public Domain (PD-Art) / “Unknown, 1795” |
1795년, 원행(왕의 능행차)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정조의 생모) 회갑을 겸해 현륭원으로 향했다.
말과 가마, 군악과 화포가 한 줄로 이어졌다.
사대문을 나와 한강을 건너, 수원 들판으로 내려가니 백성들이 흙먼지 속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정조는 말을 멈추어 어머니의 가마 앞으로 내렸다.
“어머님께서 가시는 길은 백성들이 여는 길입니다.”
그는 다시 군사들에게 눈짓했다.
“장용영은 길 양쪽으로 백 보씩 뒤로 물러, 사람들의 행렬이 먼저 지나가게 하라.”
왕의 행차가 사람들의 행차를 위해 옆으로 비킬 때, 도시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모두가 알았다.
정조의 밤은 글로 이어졌다.
홍재전서(정조의 문집)가 그 기록이다.
정조는 문장으로 신하를 부르고, 주필로 시비를 가르고, 서찰로 사람을 위로했다.
병든 장인의 사정을 알고 상을 내리면서도,
서슬퍼런 지시를 함께 내려 공정의 날짜를 바꾸지 않았다.
“국가의 일정은 병사가 아닌 병자까지 함께 지켜야 할 시간이다.”
그에게 말은 위로였고, 규칙은 약속이었다.
그의 개인사는 정치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일은 왕의 사사로움으로 비칠 수 있었다.
정조는 제도와 기록으로 답했다.
시호를 바로 세우고 능을 이전하며, 능행차를 국가적 행사로 정착시켰다.
사적인 효를 공적 의례로 승화시키는 순간, 왕의 감정은 국가의 대본이 되었다.
사적인 눈물이 공적 문장이 되는 데 필요한 것은 절제였다.
그 절제가 정조를 정조로 만들었다.
그의 마지막 여름은 갑자기 찾아왔다.
1800년, 더위가 한양의 지붕을 누르던 어느 날, 정조는 병상에 눕는다.
그의 숨은 가늘어졌고, 신하들은 처방과 기도를 번갈았다.
“규장각을 잊지 마라.”
“화성을 잊지 마라.”
그의 짧은 유언은 사람과 도시, 제도의 두 방향을 다시 한번 가리켰다.
그가 눈을 감자, 왕권을 붙잡던 손은 풀렸고, 장용영은 다음 시대의 논쟁거리가 되었다.
그가 만든 문장과 제도는 남았지만, 그 문장을 읽는 태도는 달라졌다.
정조를 영웅으로 부를 수 있을까.
정조를 완벽한 개혁가로 부를 수 있을까.
둘 다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의 개혁은 승리와 타협이 섞여 있었고, 장용영의 칼끝은 때로 왕의 불안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의 시대가 남긴 도면은 선명하다.
사람을 키우고, 군을 새로 세우며, 법을 정리하고, 시장을 움직이는 일.
그 네 방향을 동시에 굴리는 작전은 간단하지 않다.
정조는 그 무거운 핸들을 밤마다 스스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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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도, 『규장각도』—정조가 창덕궁 후원에 세운 학술·정책 싱크탱크의 풍경 공공누리 제1유형(KOGL Type I) & PD-Art /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1776) |
어느 초겨울, 규장각의 등잔불 아래서 정조는 젊은 초계문신에게 물었다.
“너는 나라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느냐.”
문신이 망설였다.
“지도 위에 있나이다.”
정조가 웃었다.
“나라의 반은 지도에 있고, 반은 글에 있다.”
“지도는 길을 말하고, 글은 길의 뜻을 말한다.”
그 말은 이후 오랫동안 그의 정책을 해석하는 열쇠가 되었다.
화성의 새벽 공기는 차갑고 맑았다.
서장대에서 내려다보면 곡선의 성벽이 구릉을 타고 흐르고,
포루가 구간마다 노려보며, 수문 아래로 물이 조용히 닫힌다.
장용영의 군사들은 창끝을 닦고, 공방의 장인은 타일 무늬를 맞춘다.
시장은 일찍 문을 열고, 마부는 말을 끌고, 은장색은 빛을 닦는다.
도시가 움직이는 소리는 군가처럼 일정하다.
정조가 설계한 리듬이었다.
그가 떠난 뒤, 규장각은 여전히 책을 지켰지만, 왕이 직접 시험지를 쓰던 밤은 사라졌다.
장용영은 논쟁 속에 흩어졌고, 탕평의 칼날은 무뎌졌다.
그럼에도 화성의 성돌과 의궤의 숫자는 남았다.
인재를 모으고, 규칙을 분명히 하고, 시장을 움직이고,
도시를 새기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실물 교과서가 남았다.
그 책은 아직도 사람들에게 읽힌다.
정조를 지금 여기에 불러낸다면, 그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허락되지 않은 감정으로 정치를 하지 말라.”
“그러나 허락된 감정을 끝까지 쓰라.”
그의 허락된 감정은 효였다.
그 효가 군을 만들고, 도성을 벗어나 화성을 만들고, 책을 쌓아 규장각을 만들었다.
감정이 제도가 되고, 제도가 도시가 되며, 도시는 다시 사람을 길러 국가를 만든다.
그 순환을 설계한 왕, 그것이 정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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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성성역의궤』- 화성 축성의 전 과정을 기록한 조선의 '프로젝트 보고서' 공공누리 제1유형(KOGL Type I) /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
정조의 밤은 길었다.
그 밤을 밝힌 것은 횃불과 등잔, 그리고 문장 속 한 줄 붉은 선이었다.
붉은 선은 문장의 잘못을 지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 문장을 더 분명히 하기 위해 그어졌다.
그는 지우는 왕이 아니라, 덧붙이는 왕이었다.
사람을 덧붙이고, 제도를 덧붙이며, 도시의 돌을 덧붙였다.
덧셈의 정치는 느리지만 오래 간다.
화성의 성돌은 아직도 제자리에 있다.
그 돌 위로 바람이 지난다.
바람은 화약의 냄새를 잊었지만, 성의 곡선은 바람에게 길을 가르친다.
그 길을 만든 자의 이름은 정조다.
그를 기억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한밤의 서장대를 떠올리는 것이다.
빛의 강 위로 솟은 지휘자의 그림자, 총열이 바람을 물어보는 순간,
군가와 북소리 사이로 들리는 짧은 명령.
“오늘은 활보다 총을 먼저 본다.”
“군대는 부모의 이름을 지키는 칼이다.”
“학문은 나라의 지도다.”
짧은 말과 긴 도시, 단단한 제도와 조심스러운 자유, 효와 탕평, 규장각과 장용영, 화성과 현륭원.
여러 개의 이름이 하나의 왕을 만든다.
정조, 조선 후기의 시간과 호흡을 설계한 사람.
그가 떠난 지 오래지만, 기록은 음성처럼 남아 우리 귀를 때린다.
붉은 주필로 밑줄이 그어진 상소의 여백, 화성성역의궤의 수량표,
무예도보통지의 도해, 일성록의 짧고 단단한 일기.
우리는 그 여백을 읽고, 도면을 읽고, 동작을 읽고, 하루를 읽는다.
그리고 알게 된다.
정조의 정치는 감정의 고백이 아니라, 감정의 기획이었다는 것을.
그 기획의 결과가 지금도 성곽 위에서 바람을 만난다는 것을.
오늘 밤 바람이 분다.
화성이 아니어도 좋다.
한양의 성곽길이든, 도심의 짧은 돌계단이든, 어디서든 한 번 멈춰 서면 된다.
그리고 질문 하나를 꺼내면 된다.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지도 절반과 글 절반, 그 사이에 사람이라는 답이 돌아오면,
당신은 이미 정조의 교실에 들어온 셈이다.
그 교실은 오래전부터 밤마다 열렸다.
그리고 지금도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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