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무르(타메를란, Tamerlane): 앙카라 전투부터 사마르칸드의 푸른 돔까지 (تيمور)



 이 글은 《Zafarnama(야즈디)》, 이븐 할둔의 기록, 

《The Cambridge History of Iran》, Beatrice F. Manz 등 연구를 참고했으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소설적 각색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연대기 그대로가 아닌, 장면과 대사 중심의 재구성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앙카라 전투 후 바예지드 1세 포로
A miniature depicting the capture of Bayezid I after the Battle of Ankara,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바람이 수분을 앗아가던 1402년 여름, 

앙카라(튀르키예) 들판은 흙먼지로 얇은 막을 만들고 있었다.

정찰병(전령)이 말채찍을 쥔 손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스만 본대가 중앙입니다.”

티무르(중앙아시아 정복자)가 지도의 주름을 펴지 않은 채 고개만 들었다.

“아나톨리아 기병은?”

참모가 대답했다.

“우측에 밀집했습니다.”

티무르가 짧게 지시했다.

“우측은 버텨. 좌측은 숨을 모았다가 파고들어. 중앙은 한 박자 늦게 밀어.”

물통을 안고 달려온 병사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물 저장분이 급격히 줄었습니다.”

다른 참모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들도 같다.”

바예지드 1세(오스만 술탄)의 검은 독수리 깃발이 바람을 타고 젖혀졌고, 

창끝들이 일제히 앞을 가리켰다.

오스만 군은 한 번의 돌파로 전장을 가르려 했지만, 

티무르는 의도적으로 공간을 열어 적의 오른쪽을 깊게 유인했다.

그 틈에 좌측 기병이 반원으로 휘돌아 측면을 깨물었고, 

중앙이 늦게 밀착하면서 포위선의 문이 닫혔다.

아나톨리아 베일릭(소영주) 출신 부대 일부는 과거의 앙금 때문에 머뭇거렸고, 

그 짧은 망설임이 전체 균형을 흔들었다.

바예지드는 포로가 되었고, 곧 “새장에 가둬 조롱했다”는 소문이 돌았다(전승, 논쟁).

확실한 사실은 오스만이 한동안 내분에 빠졌고 유럽은 시간을 벌었다는 점이었다.


티무르 초상(1436), 셜라즈 제작본
Portrait of Timur, Zafarnama (1436),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그날의 지휘관은 티무르였다.

그는 1336년 케쉬(오늘의 샤흐리사브즈, 우즈베키스탄) 근처에서 태어났고, 

바를라스(몽골 기원·투르크화 집단) 공동체 속에서 성장했다.

젊을 때 큰 부상으로 다리를 절었다는 말이 전하며, 

사람들은 그를 티무르-이 랑(절름발이 티무르)이라 불렀다(전승).

걸음은 느렸지만 전장의 순서와 타이밍을 조립하는 손은 빨랐다.


사마르칸드 레기스탄: 울루그베그·틸랴코리·셰르도르 마드라사
Photo by RyansWorld, “Registan, Samarkand, Uzbekistan”,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사마르칸드(우즈베키스탄)는 그의 지도에서 가장 굵은 점이었다.

동쪽은 중국, 서쪽은 이란과 지중해, 남쪽은 인도, 

북쪽은 러시아 초원으로 통하는 길이 모이는 교차로였기 때문이다.

그는 네 줄로 생각을 정리했다.

길목을 잡는다.

세금을 모은다.

군대를 먹인다.

수도를 키운다.

이 네 줄이 흔들리지 않는 기준이 되었다.


처음에는 동맹이 필요했다.

아미르 후사인(동맹이자 경쟁자)과 등을 맞대고 도시를 눌렀지만, 

권력은 둘이 나눌 수 없었다.

1370년대 초 그는 후사인을 밀어내고 사마르칸드를 중심으로 실권을 장악했다.

명분은 혼인으로 보강했다.

사라이 멀크 하나움(칭기즈 왕가 공주)과 결혼해 쿠라간(황실 사위) 칭호를 얻었고, 

겉으로는 칸을 세운 채 뒤에서 지휘하는 틀이 완성됐다.


전장에서 이기면 그는 늘 사람부터 챙겼다.

도공, 석공, 금속공, 직조공이 전리품 목록보다 먼저 불려 나왔고, 

장인들은 사마르칸드로 옮겨졌다.

“왜 우리입니까.”

한 장인이 묻자, 티무르는 짧게 답했다.

“도시는 군대의 마지막 병참이니까.”

그 뒤로 비비하눔 모스크(거대 사원)의 푸른 돔이 올라갔고, 

레기스탄(사마르칸드 도심 광장)의 타일 문양이 빽빽해졌다.

구르이아미르(사마르칸드 영묘)의 흑옥 비석은 도시의 밤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북쪽에서는 토크타미쉬(황금 오르다 칸, 러시아 초원)가 칼을 세웠다.

그는 한때 티무르의 지원을 받았으나 곧 맞은편에 섰다.

콘두르차 강(러시아 사마라 인근, 1391)에서 적은 좌우 포위로 끌어당겼고, 

티무르는 우측을 방패로 고정하고 좌측의 활각을 낮춘 채 간격을 관리했다.

결정적 순간에 중앙이 전열을 맞춰 전진하며 포위의 고리를 스스로 꼬이게 만들자 

적의 대열은 뒤로 무너졌다.

테레크 강(러시아·조지아 접경, 1395)에서는 

오른쪽을 일부러 방어로 묶고 왼쪽에 시간을 모아 일거에 찌르는 전법이 통했고, 

토크타미쉬 측 내부의 이탈과 동요 기록이 겹치면서 균열은 더 빨리 번졌다(논쟁).

사라이(볼가강 하류의 황금 오르다 수도)와 아스트라한(볼가 하구 도시)의 불길은 

북방 교역망을 흔들었고, 남쪽과 서쪽으로 갈 여유가 그만큼 넓어졌다.


남쪽으로는 델리(인도)가 있었다.

1398년 인더스 강(인도·파키스탄 일대)을 건너자, 

델리 군은 코끼리 전력을 전면에 세웠다.

상아에는 칼날이 묶였고, 이마에는 철갑이 씌워졌다.

이때 “불을 붙인 낙타를 코끼리 대열로 몰아 혼란을 일으켰다”는 이야기가 전한다(전승).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전열은 무너졌고, 델리는 함락됐다.

금과 직물, 경전과 장인이 사마르칸드로 올라가자 수도의 창과 망치는 동시에 더 무거워졌다.


서쪽으로는 알레포(시리아)와 다마스쿠스(시리아)가 길목을 막고 있었다.

다마스쿠스에서는 불길이 번졌고, 

화염이 가라앉을 무렵 이븐 할둔(역사가)이 그의 천막을 찾았다.

“도시는 왜 흥하고 왜 쇠합니까.”

이븐 할둔의 물음에 티무르는 “길과 세금, 그리고 사람”이라고 답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대화가 끝나자 그는 늘 하던 대로 장인을 데려갔고, 

사마르칸드의 직조와 금속 공예는 더 정교해졌다.


바다의 문턱도 시험했다.

스미르나(오늘의 이즈미르, 튀르키예)에서는 

성 요한 기사단(군사 수도회)의 요새가 버텼다.

공성 장비가 흙 경사로를 올라가자 성벽의 키가 낮아졌고, 

균열은 마지막에 작은 소리를 내며 퍼졌다.

도시는 무너졌고, 그는 짠 냄새를 확인하듯 항구를 훑어본 뒤 곧 내륙으로 등을 돌렸다.

그의 무게중심이 끝까지 길과 도시, 세금과 병참 위에 있었다는 사실이 또렷해지는 장면이었다.


울루그 베그 천문대의 거대 육분의(15세기)
Photo by Alaexis, “Ulugh Beg observatory”, CC BY-SA 2.5, via Wikimedia Commons.


그의 집안 기록도 전장과 맞물렸다.

무함마드 술탄(총애한 손자)의 요절은 

사마르칸드의 밤을 잠시 멈추게 했으나 행군은 곧 재개됐다.

샤루흐(아들)가 틀을 잡았고, 울루그 베그(손자·천문학자)가 자랐다.

울루그 베그는 이후 사마르칸드 천문대(학문 중심)를 세워 별의 좌표를 정리했고, 

전쟁이 모아온 장인과 학자의 손끝은 이번에는 타일이 아니라 천문표와 수학으로 빛났다.


무서운 이야기와 흥미로운 이야기는 늘 한 묶음으로 남는다.

이스파한(이란)과 바그다드(이라크) 등지에서 대규모 학살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해골탑”은 여러 사료에서 반복되지만 숫자와 규모는 엇갈린다(전승, 규모 상이).

바예지드 1세를 새장에 가두고 조롱했다는 엽기적 소문은 퍼졌으나 

확증은 어려워 논쟁이 이어지고(전승, 논쟁), 

구르이아미르의 “무덤 저주” 역시 20세기 소련의 발굴 시점과 

전쟁 개시를 억지로 연결한 이야기다(전승, 인과 불명).

전설은 이야기의 색을 더하지만, 그의 실제 유산은 더 단단했다.

길을 열고 세금을 안정시키며, 이긴 뒤에는 장인과 책을 수도에 쌓아올리는 체계, 

그리고 그 체계를 받치는 도로·시장의 일상이었다.


다시 앙카라로 되돌아가 보자.

그날 티무르는 우측을 굳게 잡아 오스만의 돌파를 지연시키고, 

좌측에 시간을 모아 측면을 물어뜯게 했으며, 

중앙은 한 박자 늦게 밀어 포위의 문을 닫았다.

말은 모래를 걷어찼고, 깃발은 바람에 젖었으며, 짧은 망설임은 긴 패배로 이어졌다.

그는 근육의 힘으로만 싸우지 않았고, 

호흡의 길이를 바꾸어 적의 심장을 흐트러뜨리는 방식으로 싸웠다.

그리고 승리 뒤에는 변함없이 지도를 접었다.

도시의 공방과 시장, 서원의 불빛이 있는 사마르칸드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원정의 화살표는 동쪽으로 꺾였다.

명나라(중국)와의 갈등을 매듭짓고 동쪽 문을 다시 열겠다는 의도였다.

겨울 행군이 필요했지만 그는 겨울을 택했고, 

1404년 오트라르(카자흐스탄) 근처까지 나아가던 중 열병에 쓰러졌다.

1405년 길 위에서 눈을 감자, 그의 시신은 구르이아미르에 안치되었고, 

흑옥 비석과 파란 돔이 그의 이름을 덮었다.


구르-에 아미르, 티무르 왕가의 영묘(사마르칸드)
Photo by Shuhrataxmedov, “Guri Amir (Samarkand)”,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그가 떠난 뒤에도 사마르칸드는 남았다.

레기스탄의 타일이 햇빛을 잡았고, 비비하눔 모스크의 돔이 하늘을 떠받쳤으며, 

천문대의 숫자들이 밤을 정리했다.

길은 여전히 사람과 물건, 기술과 책을 실어 날랐고, 

상흔을 가진 도시들 역시 서서히 생활을 되찾았다.

이 두 장면이 함께 그의 이름을 만든다.

정복의 속도와 도시의 시간, 칼의 명령과 장인의 망치, 전장과 시장.

그는 문을 부수었고, 그 문 안을 채웠다.

그래서 어떤 이는 그를 영웅이라 부르고, 어떤 이는 침략자라 부른다.

두 말 모두 그의 기록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누군가 묻는다.

“그는 왜 이렇게까지 했나.”

대답은 길지 않다.

길목을 잡고 세금을 모아 군대를 먹이며, 수도를 키워 이름을 남기려 한 것이다.

앙카라의 먼지와 사마르칸드의 타일, 이 두 색이 만나면 그의 초상이 나타난다.

그 이름은 티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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