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과 빵, 그리고 곡식의 역사 (The History of Farming)




 이 글은 [메소포타미아 점토문서(수메르 곡물계량표)], [양쯔강 유역 고고식물학 연구], 

[로마의 안노나(곡물 배급) 관련 문헌], [조선왕조실록·농서(농사직설·산림경제)], 

[인더스·나일 관개 유적 조사보고] 등 주요 기록을 참고했으나,

독자의 몰입을 위해 문학적 상상과 서사적 각색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대로의 연대기가 아닌, 드라마와 긴장감을 살린 소설체 서술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인물과 사건에는 이해를 돕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손바닥에 흘러내린 한 알의 씨앗이 인류를 바꾸었다.

바람에 날리던 풀의 낱알이 불가에 모여 사람들 곁에서 싹을 틔웠을 때, 

인간은 그것을 우연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 우연을 거듭 붙잡아내는 순간, 관찰은 기술이 되었고 기술은 문명이 되었다.

농사가 시작되던 날, 인류는 방랑을 버리고 정착을 택했다.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에는 이미 기원전 3000년 무렵 곡물 계량이 적혀 있었다.

수메르의 서기관들은 갈대펜으로 “밀 30사, 보리 60사”와 같은 문자를 새겼다.

왕조의 창고에는 사람들의 세금이 곡식으로 쌓였다.

곡식은 단순한 알곡이 아니라 왕과 신전의 권력 그 자체였다.

수메르의 땅은 염분에 시달렸고, 밀 대신 보리가 주류가 되었다.

염류화된 토양에 강한 보리는 메소포타미아 남부를 지배한 작물이 되었고,

 이 변화는 농업이 단순한 생태가 아니라 선택의 연속임을 보여준다.


동쪽의 양쯔강 유역에서는 이미 기원전 7000년 무렵부터 벼가 길러졌다.

허난성 쑤이한(수이허)과 저장성 허무두 유적지에서 발견된 볍씨는, 

사람들이 물을 가두어 잡초를 억제하고 벼를 키웠음을 증언한다.

논둑을 세우고 물문을 관리하는 공동체의 협력은 곧 사회적 질서가 되었다.

“누가 언제 물을 대고, 누가 막을 닫을 것인가.”

이 단순한 문제가 합의되지 않으면 마을은 분열했다.

벼는 밥이 되었고, 술이 되었고, 조세가 되었으며, 제사가 되었다.

쌀은 생존을 넘어 정치와 신앙의 중심이었다.


곡식의 힘은 전쟁을 지배했다.

로마 제국의 안노나(곡물 배급 제도)는 대표적이다.

시민들에게 빵을 나누어주는 일은 황제의 권위를 상징했다.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로마 초대 황제)는 곡물 공급을 안정시키기 위해 

곡창지대인 이집트와 시칠리아를 제국의 심장부로 삼았다.

바다를 지배하는 로마의 함대는 곡물 수송선을 보호했으며, 

곡식의 길이 끊기면 곧 민심의 폭동이 일어났다.

“빵과 서커스”라는 말은 비웃음이 아니라, 권력의 비밀을 꿰뚫은 말이었다.



나일 강 유역에서 이집트 파라오는 곡식을 신의 선물로 여겼다.

나일의 범람은 신이 내려주는 달력이었다.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가 곧 파라오의 힘이었고, 

부족한 해에는 곡식을 풀어 백성의 충성을 확보했다.

요셉이 파라오에게 조언하여 7년의 풍년 동안 곡식을 비축하고

 7년 흉년에 풀었다는 성서의 이야기도, 곡식의 힘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다.


동아시아에서는 농업과 제도가 하나로 묶였다.

조선 세종은 정초(정초 농학자)에게 농사직설을 편찬하게 하여 

농민에게 벼, 보리, 조, 콩 재배법을 전수했다.

벽골제(호남 평야의 저수지)는 수리사업의 상징이었다.

수리계라는 공동체가 물을 관리했고, 왕조는 세금을 곡식으로 거두었다.

곡식 단위는 곧 권력 단위였다.

한반도의 결부제, 일본의 코쿠다카(쌀 수확량 기준 영지 평가), 

중국의 오곡 신앙은 모두 쌀과 곡식이 단순한 먹거리를 넘어 국가의 척추였음을 증명한다.




곡식은 문화와 종교로 스며들었다.

중국은 오곡(벼, 기장, 보리, 콩, 조)을 신성시했으며, 

제왕은 오곡을 심는 제사를 올려 하늘과 백성의 중재자임을 드러냈다.

한국은 정월 대보름에 오곡밥을 지어 나누며 공동체의 안녕을 빌었다.

인도의 남부는 벼로 만든 도사와 이들리, 북부는 밀로 만든 차파티가 신전과 가정의 밥상이 되었다.

에티오피아의 테프는 인제라(발효 전병)로 구워져 한 접시의 공동 식탁이 되었다.

곡식은 배를 채우는 알이 아니라 문화의 언어였다.


전쟁은 언제나 곡식을 필요로 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아테네는 흑해 곡창에서 오는 곡물에 의존했다.

곡물 수송이 끊기면 도시도 굶주렸다.

중국 한나라의 평준창은 흉년 때 곡식을 풀어 민란을 막기 위한 장치였다.

조선의 환곡은 기근에 대비한 제도였으나, 관리의 부패로 백성을 괴롭히기도 했다.

곡물의 가격은 곧 정치의 안정성이었고, 군량은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칼날이었다.




저장은 곡식의 생명줄이었다.

수메르의 점토 항아리, 이집트의 곡물 창고, 조선의 뒤주.

곡식을 쌓고 지키는 일은 사람의 생존과 직결되었다.

고양이는 곡식을 지키는 파수꾼으로 인간과 동맹을 맺었다.

곡식이 무사히 겨울을 넘기면 공동체도 살아남았다.


근현대에 이르러 인류는 다시 한 번 농업을 바꾸었다.

20세기 중반의 녹색혁명.

노먼 볼로그(미국 농학자)는 왜성밀 품종을 개발해 인도의 기아를 막았다고 평가받는다.

고수확 품종, 화학비료, 농약, 관개 기술이 합쳐져 생산량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러나 토양의 피로, 수자원의 고갈, 단일 품종의 위험도 함께 다가왔다.

이에 인류는 씨앗은행을 세우고 유전자원을 보존하기 시작했다.

노르웨이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는 혹여 재앙이 닥쳐도 

인류가 다시 씨앗을 뿌릴 수 있게 준비된 곳이다.




곡식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였다.

수메르의 점토판에 새겨진 보리, 나일의 범람을 기다리던 이집트 농민, 

로마의 곡물선단을 지켜보던 원로원 의원, 한반도 논둑에 서서 기우제를 올리던 조선의 백성.

그 모든 순간이 오늘 우리의 밥상으로 이어졌다.


밥그릇을 붙잡은 아이의 손끝에 천 년의 기술이 담겨 있다.

빵을 나누는 공동체의 웃음에 제국의 정치가 녹아 있다.

술잔을 기울이며 부르는 노래에 곡식의 신앙이 배어 있다.


우리는 그렇게 쌀과 밀, 그리고 수많은 곡식을 농사짓는 법을 익혔다.

물과 흙, 불과 미생물, 가축과 도구, 제도와 신앙, 전쟁과 평화가 한 그릇 안에서 뒤섞였다.

그 그릇은 곧 우리의 식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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