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크로니카스 데 인디아스(신대륙 정복 연대기)],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 「잉카의 왕조사」],
[스페인 왕실 문헌(톨레도 칙허, Capitulación de Toledo, 1529)],
[발보아·페드라리아스 다비야 관련 기록], [리마 건설 관련 사료] 등 주요 기록을 참고했으나,
독자의 몰입을 위해 문학적 상상과 서사적 각색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대로의 연대기가 아닌, 드라마와 긴장감을 살린 소설체 서술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인물과 사건에는 이해를 돕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스페인 서부 에스트레마두라의 트루히요.
낡은 성벽과 가난한 마을을 오르내리던 소년은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의 이름은 프란시스코 피사로(1478~1541).
군인이었던 아버지 곤살로 피사로와 평민 어머니 프란시스카 곤살레스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그는 글을 거의 읽지 못했다는 평가를 남겼고(서명 대신 표기를 남긴 기록이 전한다),
세상에서 배운 것이라곤 배고픔을 견디는 법과 칼을 드는 법이 전부였다.
스페인은 레콩키스타(이베리아 반도 재정복)를 막 끝냈고,
칼과 십자가의 기억이 아직 뜨거웠다.
1492년 그라나다가 함락되고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떠나자,
바다는 신과 왕이 나눠준 새로운 전장으로 변했다.
교황의 칙서와 토르데시야스 조약(1494)은 세계를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 선으로 가르며 정복의 명분을 주었다.
새로 얻은 바다 건너의 땅은 왕에게는 금과 세금의 원천, 교회에는 새 신자의 밭, 빈자에게는 사다리였다.
피사로에게도 그 바다는 하나뿐인 사다리였다.
히스파니올라 섬에 도착한 그는 목동, 병사, 소규모 개척민으로 떠돌며 기회를 모았다.
1513년,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가 파나마 지협을 넘어
“남해(태평양)”를 처음 보았을 때 피사로는 그 원정대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몇 해 뒤, 파나마의 총독 페드라리아스 다비야의 명령으로 발보아를 체포해 처형으로 이끌었다.
신대륙의 영광과 잔혹은 늘 맞물려 있었다.
피사로는 파나마에서 자리를 잡아가며 남쪽 어딘가에 황금과 은으로 가득 찬 제국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안데스 너머, 잉카라는 거대한 나라.
그 이름은 바람처럼 떠돌았고, 그는 그것을 실재로 바꾸려 했다.
그의 품에는 세 가지 명분이 들어 있었다.
황금, 복음, 영광.
황금은 제국을 움직이는 피였다.
에스파냐 왕실은 금과 은이 필요했고, 신대륙의 광산과 보물은 제국의 전쟁과 궁정을 지탱했다.
복음은 칼을 씌우는 면죄부였다.
가톨릭 군주는 신대륙의 영혼을 하느님께 바쳐야 했고, 정복자들은 사제와 성서를 동반했다.
영광은 가난한 병사를 귀족으로 만들 유일한 길이었다.
문맹의 사생아에게 성벽을 뛰어넘는 사다리는 정복뿐이었다.
이 세 단어가 피사로의 등에 돛처럼 달라붙었다.
1524년, 피사로는 디에고 데 알마그로, 신부 에르난도 데 루케와 손을 잡고 첫 남쪽 항해를 떠났다.
갑작스런 폭풍과 해안의 기근에 부딪혀 무리한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1526년 다시 나아갔으나, 식량은 떨어지고 병사들은 돌아가자고 아우성쳤다.
해안의 작은 섬, 이슬라 데 가요(가요 섬)에서 피사로는 모래바닥에 칼로 선을 그었다.
“이 선을 넘어 올 사람만이 남쪽으로 간다.”
열세 명만이 그 선을 넘었다.
후대가 “명성의 열세 사람(Los Trece de la Fama)”이라 부른 이들이었다.
그들은 북쪽으로 물러나지 않고 남쪽으로 내려가,
툼베스와 인근 해안에서 조직화된 도시, 창고, 직물, 금속공예와 길들여진 라마와 알파카를 보았다.
소문이 전설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피사로는 이 증거를 들고 스페인으로 향했다.
1529년, 톨레도.
카를로스 5세(스페인 국왕·신성 로마 황제)는 전장과 궁정을 오가며 신대륙의 보고를 받았다.
그의 부재 중 섭정 이사벨 데 포르투갈이 피사로와 협상을 이어갔다.
그해 “톨레도 칙허(Capitulación de Toledo)”가 성사되었다.
피사로는 “누에바 카스티야(신(新) 카스티야)”의 총독·대장(아델란타도)으로 임명되었다.
해안선을 기준으로 남쪽으로 200레구아(대략 수백 킬로미터)의 영토에서 정복과 통치의 권한을 부여받았다.
알마그로는 보조적 지위만 인정받았고,
장차 그 남쪽(후일의 누에바 톨레도)에 대한 막연한 기대만이 약속되었다.
왕실은 칙허로 정복을 합법화했다.
명분은 정돈되었다.
칼과 십자가, 금과 관인이 한 장의 종이 위에 모였다.
피사로는 스페인에서 병사와 말, 화승총과 포, 대장장이와 항해사를 모았다.
그는 안데스에 말이 없고, 금속 무기도 없으며, 화약과 대포가 낯설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다.
그의 계산은 기술·전술의 우위를 믿는 계산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우위가 있었다.
유럽에서 건너온 두창이 이미 아메리카 대륙에 퍼지고 있었다.
잉카의 위대한 황제 와이나 카팍과 그의 후계자로 거론되던 니난 쿠요치가 전염병으로 죽자,
제국은 두 아들, 와스카르와 아타우알파의 내전으로 갈라졌다.
내전은 잉카의 조직력과 신격화된 황제 권위를 약화시켰다.
피사로는 그 균열을 보았다.
그는 균열 속으로 들어갈 칼끝을 준비했다.
1531년, 피사로의 제3차 원정이 시작되었다.
잉카의 도로망(카파크 냔)은 돌과 흙으로 깔끔하게 뻗어 있었고, 스페인 기병은 그 길을 달렸다.
잉카의 창고 콜카에는 옥수수와 퀴누아, 건조 고기 차르키가 쌓여 있었고,
스페인 병사들은 그 저장 체계를 접수해서 자신의 보급로로 삼았다.
1532년, 잉카 북부의 카하마르카 지역.
아타우알파는 내전을 승리로 끝내고 의기양양하게 북부에 머물던 때였다.
피사로는 병력 200 내외, 말 약 60필, 소수의 대포와 화승총으로 도시의 광장을 미리 점거하고 매복을 꾸렸다.
스페인 측은 늘 정복의 법적 형식을 갖추려 했다.
“레케리미엔토(Requerimiento)”라 불린 문서는 원주민에게 스페인 왕과 교황의 권위를 받아들이고
개종하라고 스페인어로 통보한 뒤, 거부하면 정복과 노예화가 정당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도미니코회 신부 비센테 데 발베르데가 성서를 들고 나아가 아타우알파에게 복종과 세례를 권유했다.
아타우알파는 책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며 던져버렸다.
그 행위는 스페인인들에게 ‘신성 모독’과 ‘복종 거부’의 증거가 되었다.
피사로는 기다리던 신호를 내렸다.
화승총의 불이 튀고, 대포가 울렸고, 말굽과 철이 광장을 가르며 덮쳤다.
낯선 말과 폭음 앞에서 잉카 군사들과 수행 인원은 패닉에 빠졌다.
시간은 짧았고, 살육은 길게 이어졌다고 연대기는 기록한다.
아타우알파는 붙잡혔다.
황제가 잡히자 제국은 숨을 멈췄다.
포로가 된 아타우알파는 방 하나를 가득 채울 황금을 바치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 높이까지 두 번 채울 은을 약속했다.
사방의 저장고와 사원에서 금과 은이 뜯겨 나와 카하마르카로 실려 왔다.
태양의 신전에 장식이던 금판이 제거되고, 잔치용 잔과 제사용 조형물들이 녹아내렸다.
스페인 병사들은 분배 비율에 따라 황금을 나눠 가졌다.
왕실 몫, 총독 몫, 병사 몫.
연대기는 몫의 액수를 구체적으로 적었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아타우알파는 재판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불에 태워 죽임을 피해 세례를 받아 ‘프란시스코’라는 이름이 씌워졌고,
1533년 7월경 교수형(가로테)으로 생을 마쳤다.
황제의 죽음은 황제의 신격을 무너뜨렸다.
그 무너짐은 제국의 뼈를 무너뜨렸다.
피사로는 잉카의 수도 쿠스코를 향해 나아갔다.
잉카의 귀족과 장군들 사이에서 이탈이 이어졌고,
스페인 측은 와스카르의 동복 형제 만코 잉카 유판키를 ‘합법적’ 후계자로 내세웠다.
만코 잉카는 잠시 협력했으나, 곧 스페인의 가혹함과 약탈을 견디지 못하고 1536년 쿠스코 포위를 주도했다.
잉카 전사들이 성을 둘러싸고 불을 지폈고, 궁도와 투석기가 하늘을 메웠다.
그러나 화승총과 대포, 기병의 돌격, 보급로 장악은 최후를 막았다.
쿠스코는 버티었고, 잉카의 저항은 빌카반바로 물러나 ‘신(新)잉카’의 도피왕국을 만들었다.
스페인의 도시가 필요했던 피사로는 해안으로 내려와
1535년 1월 18일 리마(“왕들의 도시”, 시우다드 데 로스 레예스)를 세웠다.
사막의 하천 라키야강 어귀에 선 이 도시는 안데스의 은과 곡물이 바다로 빠져나가는 관문이 되었고,
훗날 식민지 행정의 심장부가 되었다.
정복은 도시를 만들었고, 도시는 제국을 유지했다.
피사로는 종종 왕과 신을 입에 올렸지만,
그의 가슴 속에 자리한 가장 뜨거운 불씨는 개인의 결핍과 상승 욕구였다.
사생아, 문맹, 가난.
그 결핍은 그를 야심과 경계심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는 잉카의 재화와 인력을 에스파냐의 제도로 편입시켰다.
엔코미엔다(원주민 분배·노동 부과)와 미타(잉카의 공역 동원제를 식민 체제로 변형한 강제노동)는
생산을 끌어올리기 위한 도구였다.
정당화의 언어는 언제나 종교와 법에서 나왔다.
하지만 현장에서 울린 것은 채찍과 쇠사슬, 질병과 굶주림의 소리였다.
피사로가 개인의 영광을 쌓는 동안, 수많은 이름 없는 이들이 사라졌다.
야망은 외부의 적만이 아니라 내부의 적을 낳았다.
알마그로는 칙허에서 밀려난 굴욕을 지우려 했다.
그는 쿠스코의 지분을 요구했고, 피사로는 물러서지 않았다.
형제들, 에르난도·후안·곤살로 피사로가 각각의 군대를 이끌며 알마그로와 충돌했다.
1538년 라스 살리나스 전투에서 알마그로는 패했다.
그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러나 칼은 칼을 부른다.
알마그로의 아들과 잔당은 복수를 다짐했다.
리마의 골목에 피바람이 서렸다.
1541년 6월 26일, 리마.
피사로는 궁정에서 소수의 동료와 식사 중이었다.
알마그로의 잔당(알마그리스타)이 돌연 들이닥쳤다.
칼날이 번쩍였고, 피사로는 노장의 힘으로 몇 명을 베어냈다.
그러나 수는 훨씬 많았다.
그는 벽을 짚으며 피를 뿜었고, 손끝으로 벽에 십자가의 형상을 그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주여.”
그렇게 정복자는 쓰러졌다.
칼과 십자가와 황금으로 쌓은 제국에서, 그는 칼 앞에 무너졌다.
피사로의 죽음 뒤에도 정복의 체계는 멈추지 않았다.
리마는 곧 식민 통치의 수도로 자리를 굳혔다.
안데스의 은은 포토시에서 거대한 강처럼 쏟아져 나왔다(발견은 피사로 사후 1545년).
왕은 세수를 얻었고, 교회는 교구를 넓혔다.
그러나 잉카의 길 위를 달리던 노새의 발굽 소리와 교회의 종소리 사이에서,
이름 없는 수많은 원주민과 혼혈의 삶이 흘렀다.
그 삶은 피사로라는 이름을 기억과 원망, 공포와 냉소, 생존의 기술로 함께 발음했다.
피사로의 명분은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왕의 칙허와 교황의 축성, 레케리미엔토의 낭독과 세례, 도시의 건설과 법정의 판결.
그러나 그의 행동은 장면으로 남았다.
가난한 사생아가 왕 앞에서 무릎 꿇고 칙허 문서에 입맞춘 장면.
가요 섬의 모래바닥에 선을 긋고 열세 명만을 앞에 세운 장면.
카하마르카의 광장에서 대포와 말굽이 황제의 가마를 짓밟던 장면.
리마의 식탁에서 칼이 번쩍이던 장면.
그 장면들은 종이 위의 명분과 현장의 살육 사이에 놓인 골짜기를 냉혹하게 보여준다.
그럼에도 역사란 늘 양면을 지닌다.
피사로가 잉카를 무너뜨리지 않았다면, 스페인과 잉카가 다른 방식의 충돌을 선택했을지 아무도 모른다.
유럽의 질병은 누가 오든 먼저 도착했을 것이다.
화약과 철과 말은 언젠가 안데스의 고원을 밟았을 것이다.
피사로는 그 순간의 얼굴일 뿐, 더 큰 파도의 일부였다.
하지만 그가 파도의 선두에서 휘두른 칼은 분명했다.
그 칼은 황금과 복음과 영광을 새겼고, 동시에 굶주림과 강제노동과 상실을 새겼다.
리마의 하늘 아래, 사막의 바람은 오늘도 건조하다.
식민지의 수도로 태어난 도시는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광장에는 자유의 동상이 서 있고,
좁은 골목에는 정복자의 이름을 딴 거리와 그 이름을 지우려는 표지판이 공존한다.
학교의 교과서는 피사로와 아타우알파를 함께 가르치고,
박물관의 유리케이스 속 금은 다시 엄숙한 빛으로 돌아왔다.
역사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 대신 재해석되고, 재판되고, 재기억된다.
피사로의 생애 역시 그 과정 속에 있다.
우리는 그의 길에서 몇 가지를 배운다.
명분은 언제나 존재한다.
왕과 교회, 법과 계약, 문장과 인장이 명분을 만든다.
하지만 명분을 증명하는 것은 언제나 장면, 행동, 결과다.
한 방의 황금이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리지 못했다는 사실.
한 도시의 기둥이 수많은 사람의 어깨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
정복자의 칼은 제국을 만들었지만, 동시에 제국을 무너뜨리는 씨앗도 심었다는 사실.
알마그로와 피사로가 서로를 쓰러뜨렸듯이, 폭력은 늘 되돌아온다.
가난한 소년은 바다를 건넜고, 왕은 칙허를 내렸고, 신부는 성서를 들었다.
황제는 광장에서 붙잡혔고, 금은 녹아 강처럼 흘렀다.
도시는 세워졌고, 법은 쓰였다.
그리고 어느 여름날, 정복자는 십자가를 그리며 쓰러졌다.
그가 남긴 세계는 오늘 우리의 세계 속에서도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광장에 새겨진 이름, 지하에 묻힌 광맥, 길 위에 남은 돌, 말과 총과 대포가 남긴 시간의 흉터.
그 모든 것 위에, 우리는 질문을 다시 얹는다.
명분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소모되는가.
정복은 누구의 삶을 끌어올리고, 누구의 삶을 무너뜨리는가.
피사로의 생애는 그 질문에 쉽지 않은 답을 남겼다.
그리고 기록은 말한다.
그는 사생아였고, 문맹에 가까웠고, 왕의 칙허를 얻었고, 황제를 붙잡았고, 도시를 세웠고, 칼에 죽었다.
그 사이사이에 들어찬 것은 황금과 복음과 영광, 그리고 그 반대편의 침묵이었다.
우리는 그 침묵의 이름을 잊지 않으려 한다.
그 침묵 속에 수백만의 삶이 있었다.
역사는 그 침묵을 듣는 기술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끝났지만, 심문은 끝나지 않는다.
광장의 바람은 묻는다.
“누가 선을 그었는가.”
“누가 그 선을 넘었는가.”
그리고 “그 선은 누구의 목을 갈랐는가.”
피사로의 모래바닥 위 선은 바다를 건너 지금도 이어져 있다.
그 선 위를 걷는 모든 이에게, 역사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한다.
명분은 종이에 쓰이지만, 진실은 사람의 몸에 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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