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비가 그친 뒤, 관청 마당의 진흙이 아직 축축했다.
우왕(고려 국왕·재위 1374–1388)이 앉은 전정 앞, 작은 철통 하나가 낮게 숨을 쉬었다.
최무선(崔茂宣·무관·1325?/1330?–1395·논쟁)은 부싯돌을 쥔 손을 한 번 더 말렸다.
염초(鹽硝·KNO3·어원: 소금 ‘염’+초석 ‘초’)와 유황, 목탄을 섞은 검은 가루가 통 안에 들어 있었다.
그는 “화통(火筒·화약식 발사관)을 씁니다”라고 짧게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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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무선 표준영정 / Standard portrait of Choe Mu-seon” Encyves, CC BY-SA. 디지털 인문학 센터 |
화염과 굉음이 관청 지붕을 놀라게 했다.
깃털을 단 화전(火箭·불붙인 화살)이 날아가 모래더미를 파고들었다.
관원들은 뒤로 물러섰고, 우왕은 자리에서 몸을 기울였다.
“이걸로 바다의 악귀를 쫓아낼 수 있겠는가.”
무선은 대답 대신 허리를 깊이 굽혔다.
그는 이미 몇 해를 이 장면을 위해 보냈다.
무선의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부친 최동순(광흥창사·곡물·군량 관청 관리)에게서 배운 숫자 감각은 군량과 세곡의 흐름을 이해하는 밑천이 됐다.
젊은 시절, 그는 활쏘기보다 기록과 공정을 더 오래 들여다보는 무관이었다.
근무 끝엔 중국어 책을 더듬었고, 원(元) 상인들 말씨를 흉내 냈다.
동료들은 “과거 글공부 대신 이상한 걸 판다”고 농담했지만, 무선은 바닷가 소식을 들을수록 마음이 급해졌다.
왜구(倭寇·Wokou·일본계 해적)의 배가 남해와 서해를 갈랐다.
해안 촌락의 곡식은 불탔고, 사람들은 내륙으로 숨어들었다.
관청의 장부는 비어 갔고, 세곡의 숫자는 매년 줄었다.
무선은 대책을 골랐다.
창고의 창, 방패의 능선, 화살의 곡선이 아니라, 화약이었다.
그건 적의 돛과 갑판, 그리고 기세를 한꺼번에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도구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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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구의 습격 / Wokou attack (14th-century painting)”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문제는 염초였다.
유황과 숯은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화약의 심장, 염초는 기술이었고, 기술은 비밀이었다.
그는 벽란도(예성강 하구·대외무역항)와 개경의 객주를 전전하며 원나라 사람들의 입을 붙잡았다.
“염초는 흙에서 난다.”
“마루 밑의 흙, 재, 오줌을 섞어 비축하라.”(전승)
단편이 모였다.
무선은 부엌의 재, 마당의 흙, 창고의 항아리를 실험대 삼아 끓이고 굳히고 걸렀다.
때로는 냄새가 집안을 채웠고, 밤엔 창호지에 희미한 불빛이 배었다.
결정적 실마리는 사람을 통해 왔다.
원(元) 출신 염초 기술자 이원(李元)이라는 이가 고려 땅에 머문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선은 집을 내주고, 밥과 술을 대접하며 이웃처럼 붙었다.
그는 ‘은근히’ 물었고, 하인 몇을 붙여 공정을 익혔다.
염초가 흙에서 빠져나오고, 결정이 엉기고, 검은 가루가 ‘숨 쉬는’ 순간을 반복했다.
드디어 나라에 올릴 말이 생겼다.
“이제 우리 손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우왕 3년, 1377년 가을.
화통도감(火筒都監·화약·화기 제조 관청)이 설치되었다.
무선은 제조(提調)로 올라 공정을 표준화했고, 화약과 화기의 목록을 만들었다.
대장군포·이장군포·삼장군포 같은 중·경·경량 총통(銃筒·금속 발사관).
석탄자(鐵彈子·쇠탄)와 철령전(鐵翎箭·철깃 화살).
촉천화(觸天火·하늘을 찌른다는 뜻의 폭발물·어원), 유화(流火·흐르는 불), 주화(走火·달리는 불·로켓류).
그는 병기만 찍지 않았다.
전함의 선체를 보강했고, 포좌를 만들었으며, 화통방사군(火筒放射軍·전문화 부대)을 편성해 사격술과 안전 절차를 익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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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자총통 디테일 / ‘Jija chongtong’ (Treasure No. 885)” Wikimedia Commons, CC BY-SA. 위키미디어 공용 |
장이 좋은 날엔 훈련장에서 장난 같은 사고가 났다.
젊은 병사가 장약을 너무 세게 다져 점화가 지연되었고, 모두가 숨을 참던 순간 포구에서 검은 연기가 역류했다.
무선은 즉시 통풍과 장약 규정을 바꾸고, 점화 전 구령을 추가했다.
실패와 수정을 반복하는 동안, 경상과 전라도의 조운선이 비료 같은 흙과 재를 싣고 올라왔다.
도감의 장부엔 ‘흙’도 자원으로 기록되었다.
그해 겨울, 무선은 우왕 앞에서 화통의 위력을 다시 보였다.
“해상에서 쓸 수 있겠는가.”
그는 “배를 새로 만들고, 포좌를 고치면 가능합니다”라고 답했다.
목수와 쇠장이 함께 배에 올랐다.
돛대와 돛가림대, 포좌의 각도가 바뀌고, 배 앞머리의 무게중심이 재배치되었다.
바람과 불, 물과 쇠가 처음으로 한 배에 탔다.
1380년, 진포(전북 군산·금강 하구).
왜구 500여 척이 북상했고, 고려 수군이 기다렸다.
나세(鎭撫·지휘관), 심덕부(지휘부), 정룡·윤송·최칠석 같은 비장들이 자리를 잡았고, 무선도 배 위에서 명령을 살폈다.
선봉 몇 척이 먼저 부딪혔다.
곧 화포의 포문이 열렸다.
불 붙은 화전이 원을 그렸고, 총통의 불꽃이 바람을 탔다.
왜선의 돛이 먼저 불붙고, 이어 갑판과 노가 무너졌다.
바다는 타는 냄새와 젖은 연기로 뒤덮였다.
밤이 될 때까지, 고려 수군은 쫓고 갈랐다.
함대는 17척을 대파했고, 적의 주력은 흩어졌다.
“이만큼 통쾌한 적이 없었다”는 말이 장부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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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구와 명군의 해전 / Naval battle with wokou pirates (Chinese painting)”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그 다음 몇 해, 관음포(경남 남해) 등지에서도 화포는 말을 했다.
새로 조련된 함대는 사거리와 각도를 재며 왜선의 돛과 노를 자르듯 겨냥했다.
해안 주민들은 안도했고, 조운선은 다시 바람을 탔다.
장시(場市)의 쌀값이 안정되고, 조세는 제자리를 찾았다.
바다는 공포의 무대에서 ‘국가의 바다’로 조금씩 돌아왔다.
무선의 일상은 전쟁만으로 채워지지 않았다.
그는 도감에서 돌아오면 아들 최해산(後日·화차·신기전 연구 주역)에게 기록과 도면을 넘겼다.
“숫자를 남겨라. 장약량, 지름, 개화 시간.”
식탁에서는 소금과 숯 냄새가 났고, 붓끝엔 자주 ‘초(硝)’ 자가 붙었다.
술자리에선 가끔 동료가 물었다.
“그 비법을 어찌 얻었나.”
무선은 웃음으로 돌렸다.
정확히 말해 비법은 혼합물이었다.
이웃에서 얻은 말, 실험에서 얻은 실패, 그리고 나라가 쌓은 공적 지식.
누군가는 그걸 ‘뇌물’이라 불렀고(논쟁), 누군가는 ‘간절함의 비용’이라 불렀다.
그는 그 말들의 진자 운동을 조용히 견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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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병서 속 화포·화살 도해 / Hand cannon & fire arrows in a Joseon manual” Wikimedia Commons, CC BY-SA. 위키미디어 공용 |
무선의 공은 곧 비판과 함께 기록되었다.
“그가 발명가인가, 기술 조달자인가.”
이미 고려엔 1350년대 총통과 화전 시험 기록이 있고, 중국·원에서 화약은 오래전부터 쓰였다.
무선의 진짜 공은 국내 조달 체계와 군수·훈련·함대 개조를 통합해 ‘쓸 수 있는 전력’으로 만든 데 있었다.
그리고 그 전력은 실제 바다에서 검증되었다.
반대로, 도감의 과감한 동원은 지방의 흙과 재, 땔감을 끌어올렸고, 소규모 농가에는 보이지 않는 부담이 되기도 했다.
진포의 승전 뒤, 잡은 포로의 처우와 전리품 분배를 둘러싼 불만도 보고되었다.
눈부신 기술 뒤에는 늘, 사람의 숨과 땀이 있었다.
조정의 정치 바람은 또 달랐다.
1388년 이후, 고려 왕조는 크게 흔들렸고, 도감은 군기시로 흡수되거나 폐지되었다.
무선은 벼슬길에서 한걸음 물러났다.
새 왕조 조선이 서고, 그는 더 이상 최전선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장부와 도면, 실험은 자식 세대로 넘어갔다.
조선 초, 주화의 계통은 신기전(神機箭·다중 발사 화살 로켓)으로 다듬어졌고, 화차(火車·다연장 발사대)가 전장에 나갔다.
바람을 타는 불의 기술은 세대를 건너며 체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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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기전기 화차 / Shinkigeon-style hwacha launcher” Wikimedia Commons, CC BY 3.0. 위키미디어 공용 |
마지막 장면은 조용하다.
1395년, 그가 눈을 감을 때, 장인들과 병사들은 여전히 장약과 포좌를 만지고 있었다.
우왕과 공민왕, 창왕과 공양왕의 이름이 지나갔고, 태조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의 이름 옆에는 뒤늦은 작호가 붙었다.
사람들은 그를 ‘화약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군수 체계의 설계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무선이 남긴 건 불꽃 그 자체보다, 불꽃을 국가의 언어로 만드는 체계였으니, 두 이름은 함께 맞다.
그의 삶을 인간사로 정리해두자.
그는 자리를 탐하기보다 공정을 탐했다.
친구는 목수와 쇠장, 역관과 상인에게 많았다.
술은 절제했고, 기록은 집착했다.
사적인 연애담이나 풍류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가족 식탁에선 흙과 재의 냄새를 아들은 지겹도록 기억했다고 한다(전승).
그 아들은 훗날 국가의 표준 무기에서 아버지의 손놀림을 발견했다.
이야기의 여파는 넓다.
진포와 관음포의 승전은 해안 공동체에 안정을 줬고, 내륙 장시의 호가를 정상화했다.
기술 체계는 조선 초의 군기·공방·창고 운영으로 이어져 ‘국가 표준’을 만들었다.
무기와 군함의 개조 경험은 임진왜란 때의 함포·화기 운용에 간접적인 유산이 되었다(논쟁).
한편, 화약 생산은 늘 숲과 나무, 흙과 인력의 소모를 전제했다.
국가가 강해지는 만큼, 그 힘을 유지하는 비용도 커졌다.
무선의 이름 옆에는 그래서 영광과 질문이 함께 남는다.
“무엇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바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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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성 전시 총통 세트 / Early Joseon chongtong cannons on display (Jinjuseong)” Wikimedia Commons, CC BY-SA. 위키미디어 공용 |
그리고, 돌아가 보자.
우왕 앞의 화염은 잠깐이었으나, 그 불꽃은 체계가 되었다.
연기와 폭음을 따라 나온 건, 기예와 장부, 훈련과 개량이었다.
최무선의 이야기는 결국 이렇게 닫힌다.
한 번의 굉음, 그리고 수천 번의 계산.
한 사람의 결단이, 한 세대의 기술과 행정을 바꾸었다.
그 변화가 바다를 건너, 마침내 사람들의 일상으로 스며들었다.
이 글은 신뢰 가능한 사료·논문·공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은 (전승), 해석 갈림은 (논쟁), 어원은 (어원)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표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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