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비아 팔미라 여왕: 이집트 원정·임마에·에메사 (Zenobia)


사막의 바람이 기둥 숲을 빠져나갔다.

팔미라(팔미라·타드무르 Tadmor·시리아 사막 오아시스)의 대로(콜로네이드(줄지어선 기둥)) 아래, 낙타 짐이 규칙적으로 흔들렸다.

제노비아(Zenobia·c.240–274?·팔미라 여왕)는 돌바닥의 진동을 귀로 세었다.

진동이 울리는 열주로를 지나는 대상은 곧 관세 수입이었다.

들어온 곡물과 물자는 내일의 군량이 되었다.

출정 날짜는 이 보급 일정에 맞춰 정해졌다.

“팔미라 대주랑로와 원형기둥, 배경의 사막 지형” / “Great Colonnade of Palmyra with columns and desert backdrop”
Wikimedia Commons, CC BY-SA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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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남편 오데나투스(Odaenathus·팔미라 군주)의 승리 행렬을 두 번 보았다.

페르시아의 샤푸르 1세에게서 빼앗은 도시 이름이 종려나무처럼 불렸다.

그러다 267~268년경, 사냥에서 돌아오던 길에 오데나투스와 장자가 암살되었다(논쟁).

범인이 궁내의 친척이었는지, 정적의 사주였는지, 제노비아가 개입했는지는 확증되지 않았다(논쟁).

확실한 건 그녀가 미성년 아들 바발라투스(Vaballathus·아람어 Wahballat)의 섭정으로 즉시 권력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이다.


“팔미라 기념 아치의 정면, 아치 너머로 주랑로가 이어짐” / “Monumental Arch of Palmyra facing the colonnade”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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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비아는 초반에 남편의 노선을 유지했다.

로마의 명목상 충성을 표하고, 국경 방위를 이어가며, 상업로를 열었다.

동시에 팔미라군의 직제와 조달 체계를 정비하고, 현지 귀족과 유목 연맹의 동맹을 재확인했다.

그녀의 탁자는 세 가지 수치로 채워졌다.

세입, 병력, 곡물 재고.


270년, 팔미라는 움직였다.

장군 잡다스(Zabdas·팔미라 장군)와 애굽계 장군 티마게네스(Timagenes)가 이끄는 군이 남하했다.

알렉산드리아(이집트)의 로마 총독 테나기노 프로부스(Tenagino Probus)는 반격했으나, 나일 삼각주의 바빌론 요새에서 포위된 뒤 패배했고 자결했다.

이집트의 곡창과 세금 항구가 팔미라의 장부에 들어왔다.

팔미라는 시리아·팔레스티나·아라비아 페트라에아, 그리고 소아시아 남동부까지 영향권을 넓혔다.


“서기 271년 로마 제국, 갈리아 제국, 팔미라 제국의 영토 구분 지도” / “Map showing Roman, Gallic, and Palmyrene realms in AD 271”
Wikimedia Commons, CC BY-SA 2.5/3.0/GFD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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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비아는 코인을 이해했다.

271–272년의 동방 주조소에서는 아우렐리아누스(Aurelian·로마 황제 270–275)와 바발라투스의 두상이 나란히 새겨진 동전이 나왔다.

표면에는 로마의 정통을 인정하는 황제의 칭호, 뒷면에는 팔미라의 호칭이 병기되었다.

이 동전은 타협의 기술을 증언한다.

“지금은 함께 찍되, 언젠가는 갈라질 수도 있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초상, 바발라투스 병기 문구가 보이는 antoninianus” / “Antoninianus with Emperor Aurelian obverse; Vabalathus referenced”
Wikimedia Commons, CC BY-SA 2.5 (C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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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림은 곧 시작됐다.

팔미라 궁정은 바발라투스의 위상을 높이는 의례를 늘렸고, 

로마제국에 맞서 독립을 선언하며 제노비아 자신에게 아우구스타(Augusta 황후) 칭호를 부여했다(272년 전후·논쟁).

롱기누스(카시우스 롱기누스·수사학자/철학자·제노비아 궁정 참모)가 대외 서신과 칭호 논리를 정리했다(논쟁: 『숭고론』 저자 동일성).

사막길의 상인들은 새로운 통행세와 관세 규정을 외웠다.

사람들의 입에서는 ‘팔미렌(팔미라의)’이라는 형용사가 점점 많이 쓰였다.


로마도 조용하지 않았다.

아우렐리아누스는 북방과 내란을 수습하며 동방 원정을 준비했다.

그는 다키아 철수 같은 결정을 단행해 전선을 줄이며 정예를 모았다.

272년, 황제는 보스포루스(흑해 크림반도)를 건너 소아시아를 종횡무진 지나 시리아로 진격했다.

항복을 거부한 도시는 일부 제압했고, 티아나(Tyana 현재의 튀르키예 고대도시)를 살려둔 일화가 각지에 퍼지자 다른 도시들은 주저 없이 문을 열었다(전승).


서기 2세기 말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성전 연단의 유적, 터키 안타키아, 오론테스 강변의 안티오크
 Wikimedia Commons, CC BY-SA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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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는 안티오키아(안티오키아·Antiochia) 근교 임마에(Immae 아미크평야 일대 추정)에서 시작됐다.

팔미라군의 중장기병이 로마의 기병을 몰아붙였으나, 로마군은 더위와 피로를 이용해 역습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제노비아와 잡다스는 안티오키아를 버리고 에메사(Emesa·오늘의 시리아 서부 홈스)로 물러났다.

그곳에서도 전열을 가다듬었지만, 에메사의 전투(272)는 다시 로마의 승리였다.

팔미라군은 무거운 장비와 보급 부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제노비아는 마지막 선택을 준비했다.

팔미라로 돌아와 수비와 외교를 동시에 시도했다.

사산 페르시아와의 연계를 모색했고, 스스로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구원을 청하러 떠났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러나 그 시도는 강가에서 중단되었다.

제노비아는 로마군의 추격대에 붙잡혔다.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앞의 제노비아 여왕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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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미라는 두 번째 선택을 잃었다.

여왕이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이 272년 여름에 퍼지자, 성은 곧 항복했다.

황제는 제노비아와 바발라투스, 궁정의 요인들을 에메사로 이송해 심문했고, 많은 이들을 처형했다.

롱기누스도 그중에 있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자비와 권위’를 교차로 보여주었다.


제노비아의 최후는 확정되지 않았다.

어떤 사료는 로마의 개선식(274)에 사슬에 묶여 등장했다고 쓰고, 어떤 기록은 그 이전에 병사했다거나, 개선 뒤 티부르(Tibur·티볼리) 근처에 별장을 받아 살았다고 적는다(논쟁).

심지어 로마 귀족과 재혼해 평온히 살았다는 이야기까지 있다(전승).

이 상이한 결말은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로마황제들의 전기. 후대 기록·신뢰 낮음) 같은 출전의 한계를 보여준다.

확실한 것은, 273년 팔미라에 재반란이 일어났고 황제가 다시 와서 도시를 가혹하게 응징했다는 사실이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청동 흉상" / “Bronze bust of Emperor Aurelian”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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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응징은 사람들의 삶을 바꿨다.

사람들은 성문에서 이주 명령을 받았고, 일부는 노예로 끌려갔다.

곡물 창고와 배럴은 군량으로 전유되었고, 황제의 병사들은 귀중품을 수색했다.

사원과 콜로네이드의 일부는 불타거나 해체되어 군사적 자재로 전용되었다.

거래로 살아온 도시에서 거래 상대가 사라졌다.


팔미라는 급격히 힘을 잃었다.

사막 길의 관세 수입은 줄었고, 대상단은 다른 경로를 택했다.

오아시스의 물은 여전히 솟았지만, 그 물을 재화로 바꾸는 사람과 문서가 줄었다.

민중은 항구와 창고가 있는 서방 도시로, 또는 유목 친족이 있는 동쪽으로 흩어졌다.

도시는 한동안 로마의 변방 주둔지로 남았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한 인물의 야심만이 없었다.

3세기 위기(로마 내전·북방 침입·경제 불안)의 균열, 사산 왕조의 압력, 사막 교역로의 중개 수익, 지역 엘리트의 자치 욕구가 얽혔다.

제노비아는 그 균열에서 선택을 했다.

처음엔 로마와 공존하는 길, 이후엔 독자적 정통을 구축하는 길.

그 선택은 군량과 코인, 봉급과 보급로 위에서 시험되었다.


헤르베르트 구스타베 슈말츠의 그림 《팔미라를 내려다 보는 제노비아》 (1888년 제작)
Wikimedia Commons, CC0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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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통치엔 칭찬과 비판이 함께한다.

칭찬받을 점은, 지역 방위를 지속하고, 상업로를 안정화하여 세수를 확보했고, 행정과 외교를 병행해 단기간에 국가 기능을 작동시켰다는 것이다.

또한 여성 통치자의 드문 사례로서 섭정→사실상의 주권자로 올라선 정치 기술을 보여주었다.

비판받을 지점은, 로마와의 대립에서 군사·보급의 한계를 과소평가했고, 확장 초기의 외교적 타협(공동 주화·칭호 병기)에서 급격한 단절로 전환해 정면충돌을 자초했다는 점이다.

또한 반란 진압 이후 팔미라 시민들이 치른 대가를 고려하면, 확장의 속도와 위험 관리가 불균형했다.


문화적 파생도 남았다.

후대의 조각가 해리엇 호스머(Harriet Hosmer)는 〈사슬에 묶인 제노비아〉(1859)로 포로의 여왕을 장엄하게 형상화했다.

오페라 무대에서는 로시니의 〈Aureliano in Palmira〉(1813)가 로마 황제와 팔미라 여왕의 대치를 음악으로 재현했다.

영문학과 아랍 전승에는 ‘알자바(al-Zabbā)’로 불리는 여왕상이 겹겹이 그려졌다(전승).

현대의 대중사에서 제노비아는 “전투하는 여왕”으로 종종 그려지지만, 사료는 그녀를 정치·외교의 설계자로 보는 편이 안전하다(논쟁).


“사슬에 묶인 제노비아 대리석상, 위엄 있는 자세” / “Harriet Hosmer’s ‘Zenobia in Chains’ marble sculpture”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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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관계의 핵심을 요약한다.

270년 팔미라의 이집트 편입.

271–272년 동전 병기와 칭호 상승.

272년 아우렐리아누스의 원정, 임마에와 에메사 전투, 제노비아 포획.

273년 팔미라의 재반란과 가혹한 진압.

이 일련의 사건은 오아시스 도시국가가 제국의 균열에 올라탄 뒤, 제국의 복구력에 의해 되돌려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민중의 관점에서 본 여파도 적는다.

전쟁 중 징발과 관세 인상으로 생활비가 상승했고, 상인을 중심으로 현금흐름이 흔들렸다.

팔미라 함락 이후 재산 몰수·노예화·이주가 이어졌고, 상업 네트워크는 타 도시로 이동했다.

그러나 동시에 로마의 재통합은 동방 무역의 장기적 재안정을 가져왔고, 일부 장인은 로마의 다른 도시로 흡수되어 생업을 이어갔다.

패자의 손실과 제국의 질서 회복이 같은 페이지에 기록되었다.


“파괴 이전의 팔미라 벨 신전 정면과 중정” / “Temple of Bel in Palmyra (before destruction), façade and courtyard”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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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면을 그린다.

팔미라의 열주 사이로 모래가 다시 쌓인다.

상인의 장부엔 빈 칸이 늘었고, 병사의 명부엔 사망 표시가 이어졌다.

그리고 먼 훗날, 여행자는 그 빈 칸 위로 남은 기둥의 그늘을 본다.

제국과 오아시스의 교섭이 한 시대를 닫았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이 글은 신뢰 가능한 사료·논문·공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은 (전승), 해석 갈림은 (논쟁), 어원은 (어원)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표기했습니다.


Zenobia of Palmyra rose as regent for her son Vaballathus after Odaenathus’s disputed murder. 
Balancing nominal loyalty to Rome with bold expansion, she seized Egypt and Syria, issued coins pairing Aurelian with Vaballathus, and claimed the Augusta title. 
In 272 Aurelian advanced: defeats at Immae and Emesa forced retreat; Zenobia was captured while seeking Persian aid. 
Her fate is uncertain; in 273 Palmyra was crushed, trade rerouted, and its people scatte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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