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7년 로마 ‘시체 공의회’(Cadaver Synod)의 전말



 이 글은 『브리태니커·가톨릭백과·중세 교회사 연구서』 등 주요 기록을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적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한 대목은 (전승), 

해석이 갈리는 부분은 (논쟁), 어원 설명은 (어원)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설명합니다.


라테란 대성당 내부(재판 장소) (Interior of Archbasilica of St. John Lateran)
Wikimedia Commons, CC BY 2.0/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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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테라노 대성당(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안은 향 냄새로 가득했다.

밤새 세운 촛불이 약하게 흔들렸고, 법석 위의 의자에는 비단을 걸친 시신이 앉아 있었다.

포르모수스(교황, 재위 891–896)의 시신이었다.

시신 앞에는 대리 응답자 역할의 부제가 서 있었다.

재판을 주재한 인물은 스테파누스 6세(교황, 재위 896–897)였다. 


시체 공의회 장면 — 포르모수스 시신과 스테파누스 6세 (Cadaver Synod, Jean-Paul Laurens, 1870)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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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토의 주교였던 그대가 어찌 로마의 좌(좌-교황좌)를 넘보았는가.”

스테파누스가 손짓으로 대리 응답자를 지목했다.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죽은 자에게 묻고, 산 자가 대신 대답하는 기묘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왜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배경은 권력 싸움이었다.

로마는 스폴레토의 람베르트(이탈리아의 공동 황제)와 그의 모친 아젤트루데, 

그리고 알프스를 넘어온 아르눌프(카린티아의 아르눌프·동프랑크 왕) 사이에서 갈라져 있었다.

포르모수스는 한때 람베르트를 인정했다가, 다시 로마에 입성한 아르눌프에게 황관을 씌웠다.

그가 죽자, 남은 것은 문서와 서임, 그리고 원한이었다.

스테파누스 6세는 람베르트 쪽을 편든 인물로 알려져 있다. 


교황 포르모수스 초상 (Pope Formosus, 19th-century engrav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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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장은 조항을 읽었다.

“주교좌 이동 금지 위반(어원: translation, 한 주교좌에서 다른 주교좌로 옮기는 것을 금지), 

위증, 부당 즉위.”

부제가 시신을 대신해 변명했지만, 판정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포르모수스의 행위는 소급 무효가 선언되었고, 축복에 쓰던 오른손의 세 손가락이 잘려 나갔다.

옷이 벗겨졌고, 시신은 결국 묶인 채 티베르 강으로 던져졌다. 


며칠 뒤, 강에서 시신을 건져 올렸다는 이야기가 로마에 돌았다(전승).

수도자들이 밤에 몰래 거두어 등불 아래에 안치했다는 말도 뒤따랐다(전승).

소문은 신성함과 분노를 함께 품었다.


교황 스테파누스 6세 초상 (Pope Stephen VI, engrav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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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바람은 금세 방향을 바꾸었다.

민심은 스테파누스에게 등을 돌렸고, 

그는 체포되어 감옥에서 목이 졸려 죽었다.

뒤이어 즉위한 테오도루스 2세(교황, 897년 12월)는 초단기 재위 동안 이 재판을 무효로 돌렸다.

강에 던져졌던 포르모수스의 시신을 다시 거두어 성 베드로 대성당에 예우해 안치하라고 명했다. 


교황 테오도루스 2세 — 시체 공의회 무효화 (Pope Theodore II, mosaic/portra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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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9세(교황, 재위 898–900)는 로마와 라벤나에서 공의회를 열어 이 결정을 재확인했다.

죽은 자를 다시 재판하지 말 것, 시체 공의회의 의사록을 폐기할 것, 박탈된 성직을 회복할 것.

로마는 “다시는”이라는 말을 공식 문서에 새겼다. 


몇 해 뒤, 세르지우스 3세(교황, 재위 904–911)가 즉위하자 이야기는 다시 흔들렸다.

그는 스테파누스의 판결을 지지하고 포르모수스의 서임을 무효로 돌리는 조치를 취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다만 그 범위와 실제 집행 정도에 대해서는 학계 해석이 엇갈린다(논쟁). 


이제 다시 대성당으로 돌아가 보자.

사람들은 두려움과 호기심 사이에서 떨었고, 어떤 이는 십자가를 그었다.

법과 의례와 정치가 한 자리에 겹쳐 있음을 모두가 알았다.

죽은 자의 몸이 산 자의 정통성을 위해 쓰이는 순간이었다. 


이 사건을 이해하는 열쇠는 단순하다.

첫째, 당시 로마는 황제 대관을 둘러싼 파벌 싸움 속에 있었다.

둘째, 포르모수스의 이동·서임·대관을 소급해 부정하려는 시도가 

‘시체 재판’이라는 극단의 형식으로 나타났다.

셋째, 여론이 뒤집히자 교회는 곧바로 “죽은 자 재판 금지”라는 제도적 안전장치를 세웠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기괴한 소문이 아니라, 제도가 배우는 장면이다.

의례가 정치가 되고, 정치가 다시 법을 바꾼다.

라테라노의 차가운 바닥은 그 과정을 끝까지 지켜봤다.


그리고 끝내 남은 결론은 이것이었다.

권력의 기억을 고치려는 손이, 무덤까지 뒤흔들 수는 있다.

그러나 무덤을 뒤집어 얻은 정통성은 오래 가지 못한다.

로마는 그 값을 이미 한 번 치렀다.


Rome, 897: In the Lateran, Pope Stephen VI staged the “Cadaver Synod,” 

propping the corpse of Pope Formosus on a throne and charging him with perjury and unlawful transfer of sees amid rivalries between the Spoleto faction and Arnulf. 

Verdict: guilty—Formosus’s acts voided, his blessing fingers cut, body cast into the Tiber.

 Backlash was swift: Stephen was deposed and strangled. 

Popes Theodore II and John IX annulled the synod and banned trials of the dead; Sergius III later tried to revive the condem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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