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MI5 공식 기록과 영국 유산청 자료, 작전 포티튜드 관련 사료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적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한 대목은 (전승), 해석이 갈리는 부분은 (논쟁), 어원 설명은 (어원)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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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안 푸홀 가르시아(가르보) 초상 | Juan Pujol García (Garbo) portrait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새벽 무전기에 “응답바람.”이 찍혔다.
대답이 없었다.
후안 푸홀 가르시아(스페인 출신 이중간첩, 암호명 가르보 Garbo)가 헤드폰을 더 눌렀다.
“약속시간도 못 지키는 자들과는 일할 수 없다.”
그는 불같이 쏘아붙이며 큰소리로 문장을 또박또박 남겼다.
“규율이 없는 곳엔 충성도 없다.”
다음 날, 베를린의 답신엔 달래는 말투가 묻었다.
“어제는 통신 사정이 좋지 못했다.”
“그대의 헌신을 높이 산다.”
독일 정보부 아브베어(Abwehr)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저렇게 화를 내는 걸 보니 진심이로군.’
그 한 번의 분노가 오히려 신뢰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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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헬름 카나리스 — 독일 아브베어 수장 | Wilhelm Canaris, head of Abwehr Bundesarchiv via Wikimedia Commons, CC BY-SA. 위키미디어 공용 |
왜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배경부터 차근히 짚자.
푸홀은 바르셀로나 출신으로 독재와 전쟁을 싫어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영국을 돕겠다.”며 마드리드와
리스본의 영국 공관 문을 여러 차례 두드렸지만 거절당했다.
그래서 방향을 바꿨다.
독일의 군 정보부인 아브베어에 먼저 접근해 “친독 스페인 관료”인 척 스스로를 팔았다.
목표는 분명했다.
영국 본토, 가능하면 런던에 잠입해 정보망을 만들 것.
아브베어는 그에게 비밀 잉크(어원)와 암호표,
여비를 쥐여주며 “영국으로 가라.”고 지시했다.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왜 그는 런던으로 가지 않았을까.
답은 현실이었다.
비자도, 항로도, 영어 자신도 없었다.
정체가 드러나 체포될 위험을 감수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중립국 포르투갈 리스본에 머물며,
마치 런던에 있는 것처럼 보고서를 꾸미는 길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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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스본 알파마 지구 거리, 1946 | Lisbon, Alfama street (ca. 1946) Library of Congress 경유, Wikimedia Commons, 일반적으로 PD. 위키미디어 공용 |
그가 택한 도구는 여행가이드, 철도 시간표, 신문, 잡지였다.
“런던 남동부 군용열차는 오늘 새벽에만 세 번 지나갔다.”
“스완지 항만의 야간 조명이 바뀌었다.”
그는 책상 위의 자료를 섞어 ‘현지에서 직접 본 것 같은’ 문장으로 포장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레퍼런스만으로 만든 가짜 영국’은 놀랍게도 먹혔다.
아브베어는 그의 보고를 실제 첩보로 받아들였고, 돈과 칭찬을 더 얹었다.
영국도 곧 눈치챘다.
독일 측 문서에 사실과 어긋나는 영국 소식이 반복되며 “출처가 있는 것처럼” 굴자,
영국 정보당국은 그 배후를 추적했다.
MI6(영국 해외 정보)는 그를 접촉했고, MI5(영국 방첩)는 스카우트했다.
담당관 토마스 해리스(Tomás Harris)가 배치되었다.
스페인어가 유창한 해리스는 그의 어투를 정리하고 이야기에 결을 더했다.
새 암호명은 가르보.
“세계 최고의 배우에게 주는 이름.”
이제 진짜 연극이 시작됐다.
둘은 ‘없는 사람들’을 만들었다.
글래스고에 사는 베네수엘라 상인.
수다스러운 미군 병장.
웨일스의 민족주의자.
이 가상의 서브 에이전트는 27명까지 늘었다.
각자는 출신, 직업, 습관, 이동 경로, 급여 명세까지 갖췄다.
편지는 비밀 잉크로 쓰여 리스본의 우편함을 경유했다가, 나중에는 무선 교신으로 바뀌었다.
하루에도 수차례, 때론 수십 건의 보고가 흘렀다.
독일은 그의 네트워크가 “영국 전역에 깔려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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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티튜드/퀵실버용 모형 셔먼 탱크 | Inflatable dummy Sherman tank (deception) Wikimedia Commons, PD (U.S. Army). 위키미디어 공용 |
무대는 더 커졌다.
연합군은 디데이(D-Day, 노르망디 상륙 Operation Overlord)를 준비했다.
하지만 상륙 정체를 바로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거대한 기만전이 기획됐다.
작전 포티튜드(Fortitude).
핵심 아이디어는 단순했다.
“본격 상륙은 노르망디가 아니라 파드칼레(Pas-de-Calais)다.”
이를 뒷받침하려면 ‘보이는 증거’가 필요했다.
그래서 유령 군대 FUSAG(제1집단군)가 탄생했다.
서류, 모형 탱크, 가짜 교신, 훈련 소음, 패튼(조지 패튼 George S. Patton) 장군의 이름.
가르보의 27명은 이 환영에 살을 붙이는 배우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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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전 바디가드 하위 계획 지도 — 포티튜드 노스·사우스 | Map of Operation Bodyguard (Fortitude North/South) Wikimedia Commons(ErrantX), CC BY-SA 3.0. 위키미디어 공용 |
“응답바람.”
다시 침묵.
가르보는 고의로 분노했다.
“약속시간도 못 지키는 자들과는 일할 수 없다!”
베를린은 다음 날 그를 달랬다.
“그대의 충정을 의심하는 이는 없다.”
‘저렇게까지 화를 내다니 진심이군.’
신뢰는 더 높아졌다.
그가 보내는 “조금 늦은 정확한 사실”과 “아주 그럴듯한 거짓”의 조합은,
이렇게 쌓인 신뢰 위에서 빛을 발했다.
1944년 6월 6일 새벽, 노르망디의 해변에서 상륙정이 물을 가르기 시작했다.
가르보는 베를린에 반복 주입했다.
“노르망디는 견제, 본공격은 칼레.”
그가 일부러 보고 타이밍을 늦춘 ‘정확한 사실’은 적이 스스로 합리화할 재료가 됐다.
“봐라, 진짜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는 MI5의 더블 크로스 시스템(Double Cross System) 무대에서 배우이자 각본가였다.
해리스는 조용히 신을 맞바꿨다.
“이제 6월 9일 보고다.”
“근거를 촘촘히.”
그날 보고에는 부대 번호, 탄약 소요, 야전 주방의 배식 시간,
우편 분류표 같은 생활 디테일이 달라붙었다.
독일 최고지휘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도 위 칼레 축선에 빨간 핀이 하나 더 꽂혔다.
노르망디 해변의 교두보가 자라는 동안, 독일 15군의 전차와 보병은 북쪽에 묶였다.
사흘.
닷새.
일주일.
중장비가 더 올라왔고, 항만은 숨을 돌렸다.
총과 칼이 벌어준 시간이 아니었다.
문장과 타이밍이 벌어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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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하 해변 상륙 — 미 해안경비대 LCVP | ‘Into the Jaws of Death’ (D-Day, Omaha) 노르망디 상륙의 실전 장면 Wikimedia Commons, PD (U.S. Coast Guard). 위키미디어 공용 |
그 여름, 베를린에서 무전이 왔다.
“철십자훈장 2급 수훈.”
적국이 보낸 훈장 소식이었다.
겨울에는 런던에서 대영제국훈장(MBE)이 조용히 수여됐다.
같은 해에 서로 적인 두 나라로부터 상을 받은 사람.
그의 연극이 얼마나 치밀했는지 말해주는 대목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무대는 암전했다.
그는 기록 속에서 앙골라에서 말라리아로 죽은 것으로 남았다(전승).
실제로는 베네수엘라로 건너가 서점과 선물가게를 운영하며 살았다.
수십 년이 지나 1984년, 연구자 나이절 웨스트(Nigel West)가 그를 찾아냈다.
버킹엄 궁전에서 악수하던 노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짧게 말했다.
“내가 더 못 했다.”
헨던의 크레스피니 로드(35 Crespigny Road, 런던 북부 안전가옥)에는
훗날 영국 유산청 블루 플라크(Blue Plaque)가 붙었다(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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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르보가 활동한 헨던 안전가옥 블루 플라크 | English Heritage blue plaque at 35 Crespigny Road (Garbo) Wikimedia Commons(사진: Spudgun67), CC BY-SA. 위키미디어 공용 |
이제 결론을 또렷이 적는다.
적이 믿는 세계를 정교하게 설계하면, 그 믿음이 적을 묶는다.
가르보의 정보전과 심리전은 디데이 첫 일주일,
나아가 작전 오버로드(Operation Overlord)의 성패에 필요한 시간을 벌었다.
작전 포티튜드 사우스(Fortitude South), 유령 군대 FUSAG,
조지 패튼의 이름, MI5와 MI6의 조율, 더블 크로스 시스템.
그 모든 장치 위에서 한 사람이 매일 쌓은 디테일이, 수십만의 생존 확률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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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S. 패튼 — FUSAG 명목 지휘 | Gen. George S. Patton portrait Wikimedia Commons, PD (U.S. Army Signal Corps). 위키미디어 공용 |
마지막으로 사람을 본다.
그는 영웅이라기보다 연출가였다.
그의 무기는 비밀 잉크, 무선 교신, 생활 디테일, 그리고 인내였다.
그는 하루하루 문장을 쌓아 적의 확신을 지치게 만들었다.
그 문장이 시간을 만들었다.
그 시간이 사람을 살렸다.
그 시간이 전쟁의 방향을 아주 조금 바꿨다.
Juan Pujol García, a Spanish anti-fascist, fooled the Abwehr from Lisbon with reports built from guides and newspapers, then was recruited by MI5 as “Garbo.”
He invented 27 agents and, through the Double Cross System, drove Operation Fortitude South—messages insisting the real invasion would be Pas-de-Calais, not Normandy.
German units stayed north, buying time for D-Day. He uniquely earned both the Iron Cross and an MBE, later vanished to Venezuela (legend), and was rediscovered in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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