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캄보디아 현대사 연구서, 재판 기록, 생존자 증언, 학술 논문 등을 참고했으나
독자의 몰입을 위해 문학적 상상과 서사적 각색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대로의 연대기가 아닌, 드라마와 긴장감을 살린 소설체 서술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인물과 사건에는 이해를 돕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한 나라를 통째로 실험실 삼아버린 독재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폴 포트(1925~1998).
그는 캄보디아를 ‘새로운 사회’라 부르며 실은 지옥으로 끌고 간 학살자였다.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를 꼽을 때 그의 이름은 반드시 등장한다.
폴 포트의 본명은 살로트 사르였다.
농촌에서 태어나 불교 사원에서 글을 배웠고, 유학을 통해 프랑스에서 마르크스주의 사상에 깊이 빠졌다.
그는 귀국 후 급진적 사상을 들고 캄보디아 공산주의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의 말은 언제나 “인민”과 “평등”을 이야기했지만, 실상은 인민을 학살하는 칼날이었다.
1975년, 내전 속에서 크메르 루주(극좌 게릴라 조직)가 수도 프놈펜을 점령했다.
그날부터 캄보디아의 시계는 거꾸로 돌아갔다.
폴 포트는 선언했다.
“오늘부터 우리는 제로의 해다.”
모든 역사와 제도, 종교와 문화는 삭제되었고, 사람들은 과거와 단절된 ‘새로운 인간’이 되어야 했다.
프놈펜에 살던 200만 시민은 하루아침에 총부리 앞에서 내쫓겼다.
병원에 누워 있던 환자들, 아이를 안은 산모, 장사하던 상인들까지 모두 강제로 행군에 나섰다.
물도 음식도 없는 길에서 노인과 아이들이 쓰러졌다.
병든 자는 도로 옆에서 버려졌다.
“도시는 타락이다. 농촌만이 순수하다.”
폴 포트는 그렇게 외쳤다.
폴 포트는 프랑스 유학 시절 마르크스주의를 접했다.
그는 자본주의가 도시에서 발생한다고 보았고, 도시를 불평등과 계급 착취의 근원지로 규정했다.
반대로 농민은 “순수한 생산자 계급”으로, 땅을 일구는 손이야말로 혁명의 토대라 생각했다.
이것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산업 노동자)’를
혁명 주체로 본 것과는 다른, 농민 중심 해석이다.
그러나 그의 말은 이념이 아니라 학살의 명령이었다.
킬링필드(Killing Fields, 집단 학살지)는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실제로 캄보디아 전역의 들판과 숲, 늪은 처형장과 집단 매장지로 변했다.
대표적 장소 중 하나인 처엉엑(Choeung Ek) 학살터에서는
지금도 해골과 뼈 조각이 비가 내릴 때마다 땅 위로 솟아난다.
그곳에서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총알은 아깝다며 사용되지 않았다.
대신 곤봉, 도끼, 삽, 심지어 대나무 몽둥이가 사용되었다.
아이들은 나무에 머리를 부딪혀 살해되었고, 어머니들은 그 장면을 본 뒤 처형당했다.
피는 흙으로 스며들었고, 들판은 고요했으나 바람은 울부짖었다.
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캄보디아 전역에 300곳 이상의 킬링필드가 존재한다.
그곳에 묻힌 희생자는 약 200만 명에 달한다.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단 4년 만에 사라진 것이다.
수도 프놈펜의 한 학교 건물은 곧 툴슬렝 감옥(S-21)으로 바뀌었다.
그곳은 ‘고백 공장’이었다.
무고한 사람들이 끌려와 고문을 당했다.
손톱이 뽑히고, 전기가 흐르고, 물에 잠기며, 끝내는 허위 자백을 강요당했다.
“나는 스파이였다, 나는 반역자였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면 곧바로 집단 처형장으로 실려 갔다.
툴슬렝에 수감된 2만여 명 중 살아남은 이는 10명 남짓이었다.
오늘날 그곳은 박물관이 되어, 벽에는 피해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카메라 앞에서 두려움에 질린 얼굴.
그 시선은 지금도 방문객의 심장을 찌른다.
1979년, 베트남이 폴 포트의 만행을 멈추기 위해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폴 포트와 크메르 루주는 정권에서 쫓겨나 밀림으로 숨어들었다.
그때부터 그는 추악한 몰락의 길을 걸었다.
국제사회는 그의 범죄를 고발했고, 생존자들의 증언은 세계를 경악시켰다.
그의 이름은 ‘혁명가’가 아니라 ‘학살자’로 기록되었다.
그는 1997년 크메르 루주 내부의 쿠데타로 체포되어 가택 연금 상태에 놓였다.
전 세계는 그가 국제재판정에 서길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끝내 법정에 서지 못했다.
폴 포트가 법정에 서지 못한 이유는
냉전 속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국제사회가 그를 오랫동안 묵인했고
캄보디아 내부 내전으로 안정된 재판 환경이 없었으며
정치적 타협으로 전범 처벌이 지연되었다.
1998년 4월, 태국 국경 지대 밀림 오두막에서 그는 쓰러졌다.
심장 발작이었다.
옆에는 낡은 모기장과 약간의 약품뿐.
평생 수백만을 굶겨 죽인 자가, 결국 굶주림과 병에 시달리다 허망하게 죽은 것이다.
그의 장례는 초라했다.
타이어를 던져 넣은 임시 화장터에서, 그의 시신은 악취와 함께 사라졌다.
애도도, 추모도 없었다.
그의 무덤은 잡초에 덮였고, 사람들은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너무 쉽게 갔다. 너무 늦게 갔다.”
폴 포트는 끝내 죗값을 치르지 않았다.
죽기 전까지도 그는 “나는 조국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거짓을 반복했다.
그러나 역사는 거짓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가 남긴 것은 오직 폐허, 해골, 그리고 학살자의 이름뿐이다.
오늘날 캄보디아의 들판에는 여전히 흰 해골이 비에 씻겨 나온다.
아이들은 그 옆에서 공을 차며 자란다.
그 뼈들은 묻혀도 묻히지 않는 증거다.
박물관의 유리 케이스 속에 빼곡히 쌓인 해골은 방문객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망각은 또 다른 범죄다.”
폴 포트는 죽었지만 킬링필드는 아직 살아 있다.
그의 범죄는 인간이 어디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상처로 남았다.
그는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중 하나로 기록되었고,
그 최후는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을 만큼 비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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