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9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VOC는 향신료 무역을 위해 대형 상선 바타비아(Batavia, 무역선·자카르타 옛 지명과 같음(어원))를 보냈다.
배에는 후추와 섬유 같은 화물이 있었고, 현금 상자와 귀중품도 있었다.
선원과 병사, 상인, 그리고 가족 승객이 함께 탔다.
지휘는 프란시스코 펠서르트(François Pelsaert, 원정 책임자)와
아리앤 야콥스(Ariaen Jacobsz, 선장)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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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타비아 복원선, 네덜란드 바타비아베르프(2014) / Batavia replica at Bataviawerf, Lelystad (2014) Wikimedia Commons, CC0 퍼블릭 도메인(저자: Gouwenaar). 위키미디어 |
바다는 멀고 항해는 길었다.
경계가 느슨해진 새벽, 배는 호트만 아브롤호스(Houtman Abrolhos, 서호주 연안 암초 군도·abrolhos=“눈 크게 떠라”(어원))의 암초에 걸렸다.
선체가 흔들리고 물이 스며들었다.
사람들은 가까운 모래섬과 바위섬으로 옮겨 갔다.
섬에는 숲과 강이 없었다.
식수는 가장 큰 문제였다.
소금기 없는 물이 없으면 며칠을 버티기 어렵다.
먹을 것을 나누는 규칙도 필요했다.
펠서르트는 고민 끝에 소수 인원과 긴 보트를 타고 북쪽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바타비아(오늘의 자카르타)였다.
그곳에서 구조선을 데려와야 전체를 살릴 수 있었다.
배와 대부분의 사람들은 섬에 남았다.
| 비컨 섬, 아브롤호스 제도—바타비아 난파와 학살 현장 / Beacon Island (Houtman Abrolhos), site of the Batavia mutiny Wikimedia Commons, CC BY-SA 4.0(저자: Guy de la Bedoyere). 위키미디어 |
남겨진 사람들 사이에 지휘 공백이 생겼다.
이때 약제사 예로니무스 코르넬리스(Jeronimus Cornelisz, 하급 상관·약제사)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무기와 화약, 식량을 자신이 통제하는 창고로 옮기게 했다.
명단을 만들고, 사람들을 조로 나눴다.
코르넬리스는 말을 잘 듣는 사람을 가까이 두었다.
반대하거나 의심되는 사람은 바람과 파도가 센 작은 섬으로 보냈다.
“물과 먹을 것을 찾으러 가라”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잠재적 위협을 떨어뜨리는 조치였다.
그는 점점 강경해졌다.
규칙 위반자, 반대자, 병약자를 정리했다는 기록이 있다(학살 규모와 수치는 자료마다 다름(논쟁)).
섬에는 두려움이 퍼졌다.
사람들은 밤에 혼자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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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타비아 난파 이후의 학살(1647 목판) / ‘Massacre after the shipwreck of the Batavia’ (engraving, c.17th C.)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원판 17세기). 위키미디어 |
한편 병사 위베 헤이스(Wiebbe Hayes, 병사·후일 방어 지휘)는 정찰에 나섰다.
그는 서쪽의 웨스트 왈라비 섬(West Wallabi Island)에서 얕은 민물 웅덩이를 발견했다.
바다새와 바다표범을 잡아 말리면 단백질 보충도 가능했다.
헤이스는 즉시 간단한 규칙을 세웠다.
물은 순번제로 나눴다.
음식도 일정량으로 정해 나눴다.
낮에는 정찰과 채집, 밤에는 교대로 보초를 섰다.
돌과 표류목으로 낮은 방어벽을 쌓았다.
헤이스 쪽에 사람이 조금씩 모였다.
이유는 명확했다.
그쪽에는 물과 최소한의 공정한 배급이 있었다.
사람은 물과 규칙이 있는 곳으로 모인다.
코르넬리스는 이 소식을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무장한 소규모 보트들을 꾸려 공격을 시도했다.
목표는 헤이스를 무너뜨리고 물을 빼앗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섬 전체를 다시 지배할 수 있다고 계산했다.
| 위베 하이스 요새—오스트레일리아 현존 최古 유럽계 구조(1629) / Wiebbe Hayes Stone Fort, oldest surviving European structure in Australia (1629) Wikimedia Commons, CC BY-SA 3.0(저자: Rupert Gerritsen). 위키미디어 |
첫 충돌은 짧았지만 결과가 분명했다.
헤이스 쪽은 바위와 투석, 간단한 창으로 상륙을 막아냈다.
지형은 방어에 유리했다.
얕은 물과 미끄러운 바위가 공격 측의 속도를 늦췄다.
둘째 충돌에서는 밧줄과 갈고리가 동원되었다.
헤이스는 상대 보트의 노를 끊고 방향을 빼앗았다.
공격대는 상륙 지점을 확보하지 못했다.
몇 명이 이탈하거나 항복했다.
셋째 충돌은 길어졌다.
코르넬리스는 큰 섬부터 장악하려고 우회했다.
헤이스는 인원을 둘로 나눠 정면 방어와 측면 기동을 병행했다.
모래지대에서 발이 빠진 공격대는 밀집했고, 방어 측은 그 틈을 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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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베 헤이스 동상, 제럴턴 해변 광장 전경 | Wiebbe Hayes statue at Geraldton foreshore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위키미디어 |
시간은 헤이스에게 유리했다.
물과 음식이 있는 쪽은 체력이 유지된다.
공정한 배급은 불만을 줄인다.
반대로 폭력 통치는 내부 불신을 키운다.
몇 주가 지났다.
해안에는 난파선에서 떠내려온 재료가 더 줄어들었다.
코르넬리스 쪽의 전투력도 떨어졌다.
섬의 주도권은 서서히 헤이스 쪽으로 이동했다.
그 사이 펠서르트는 바타비아에 도착했다.
그는 구조선 사르담(Sardam, 구조 임무 투입)을 받아 다시 남쪽으로 내려왔다.
돛이 섬을 향해 다가오자 양쪽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마지막 국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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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파 후 보트로 섬에 상륙하는 생존자들(1647) / Survivors ferried to nearby islands (1647 plate)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
헤이스는 구조선이 혼동하지 않도록 선명한 신호를 준비했다.
모닥불과 깃발, 뒤집힌 보트로 “충돌 발생, 약제사가 지휘”를 보여 줬다.
구조선이 정박하자 헤이스 측은 코르넬리스를 붙잡아 넘겼다.
현장에서 조사와 심문이 시작되었다.
심문에는 생존자들의 증언과 물증이 사용되었다.
섬의 여러 지점에서 시신과 도구가 확인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학살과 약탈, 구조선 장악 시도 혐의가 핵심이었다.
일부는 현장에서 처형되었다.
코르넬리스의 최종 형벌과 구체적 절차는 자료마다 조금 다르다(논쟁).
손을 자르고 교수형을 집행했다는 전승이 널리 알려져 있다(전승).
동조자 몇은 다른 지역에 유배되었다는 말도 있다(전승).
야콥스 선장은 별도로 심문을 받았다.
야콥스 관련 혐의는 항해 중 불화와 난파 전후의 판단 문제였다.
난파 이전부터 반란 계획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린다(논쟁).
확실한 것은 지휘 공백이 큰 혼란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 틈을 코르넬리스가 이용했고, 헤이스가 막아 냈다.
이 글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기록(VOC), 선장 보고서, 재판 기록]을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적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한 대목은 (전승),
해석이 갈리는 부분은 (논쟁), 어원 설명은 (어원)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표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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