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기원: 국가의 탄생과 비극의 시작
끝나지 않는 분쟁의 뿌리를 찾아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단순한 영토 분쟁을 넘어, 두 민족의 역사, 정체성, 그리고 생존이 얽힌 복합적인 비극이다.
이 글은 홀로코스트라는 전대미문의 참사 속에서 시작된 이스라엘 건국 과정과, 그로 인해 발생한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의 기원을 비판적 시각에서 심층적으로 추적하여 오늘날 분쟁의 근본 원인을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본 글은 감정적 서사를 배제하고 사실 관계를 재구성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특히 이스라엘 '신역사학파'의 대표적 학자인 베니 모리스(Benny Morris)의 기념비적 저작인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의 탄생, 재고(The Birth of the Palestinian Refugee Problem Revisited)'를 핵심 자료로 삼아 공개된 기록과 학술 자료에 기반하여 사건의 실체를 파고들 것이다.
이 분석은 다음과 같은 핵심 질문들을 탐구할 것이다.
• 시오니즘은 어떻게 유럽의 반유대주의와 홀로코스트를 동력으로 삼았는가?
• 1948년 전쟁 당시 팔레스타인인들의 대규모 이주는 어떻게 발생했으며, 이는 계획된 추방이었는가, 아니면 전쟁의 불가피한 결과였는가?
• 이스라엘은 왜 난민의 귀환을 막았으며, 이는 분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 국제 사회, 특히 미국의 역할은 분쟁을 해결하는 데 기여했는가, 아니면 악화시켰는가?
제1부: 역사적 배경과 시오니즘의 대두
이스라엘 건국의 이념적 뿌리인 시오니즘(유대인 민족주의 운동)이 유럽의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와 홀로코스트라는 참사 속에서 유대 민족의 생존을 위한 절박한 해결책으로 부상한 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분쟁의 동기를 파악하는 첫걸음이다.
현대 시오니즘의 발흥
현대 시오니즘은 19세기 후반 모세 헤스, 테오도르 헤르츨과 같은 사상가들의 저작과 함께 본격화되었다.
이 운동은 두 가지 강력한 동력에 의해 추진되었다.
하나는 고대 고향인 '이스라엘의 땅'을 재건하려는 긍정적 이상이었고, 다른 하나는 동유럽을 휩쓴 폭력적인 억압이라는 부정적 경험이었다.
특히 1881년 러시아에서 차르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이후 발생한 유대인 대학살, 즉 '포그롬(pogrom)'은 수많은 유대인이 오스만 제국령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의 이중 게임: 벨푸어 선언과 뒤엉킨 운명
시오니즘이 유대인들의 열망이었다면, 그 열망에 '실질적인 토대'를 마련해준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탐욕과 계산이었다.
1. 벨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 약속의 탈을 쓴 계약
1917년, 영국 외무장관 아서 벨푸어(Balfour)는 유대 금융계의 거물 로스차일드에게 공식 서한을 보낸다.
팔레스타인 내에 '유대 민족의 고향'을 건설하는 것을 지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영국은 전쟁 자금이 절실했고, 미국 내 유대인 여론을 움직여 미국의 참전을 독려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 선언은 "이미 살고 있는 비유대 공동체의 권리를 해치지 않아야 한다"는 모호한 단서를 달았다.
땅 주인인 아랍인의 동의 없는 일방적인 '양도 약속'이었다.
2. 아랍의 즉각적인 반발: 배신당한 독립의 꿈
아랍인들은 분노했다.
그들은 이미 영국으로부터 맥마흔 선언(1915년)을 통해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우면 독립 국가를 세워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상태였다.
아랍인들에게 벨푸어 선언은 명백한 배신이었다.
1920년 예루살렘과 1921년 야파에서 유대인 이주에 반대하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
평화로웠던 마을들은 하루아침에 "누구의 땅인가"를 두고 싸우는 전쟁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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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인 이민에 대한 반대에서 비롯된 1936년–1939년 팔레스타인 아랍 봉기 |
3. 영국의 갈지자 행보와 '백서(White Paper)': 모두를 적으로 만들다
유대인 이주자가 급증하고 아랍인의 저항이 거세지자, 당황한 영국은 말을 바꾸기 시작했다.
1939년, 영국은 이른바 백서(White Paper)를 발표한다.
내용: 향후 5년간 유대인 이주를 7만 5천 명으로 제한하고, 이후에는 아랍인의 동의 없이 이주할 수 없다는 파격적인 제한이었다.
사실상 유대 국가 건설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결과: 이번에는 유대인들이 폭발했다.
특히 홀로코스트를 피해 유럽을 탈출하던 유대인들에게 백서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유대인 무장 조직들은 이제 아랍인이 아닌 영국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결국 영국은 이 '이중 약속'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아랍인에게는 독립을, 유대인에게는 국가를 약속했던 영국은 아무런 해결책도 내놓지 못한 채 1947년 팔레스타인 문제를 UN으로 떠넘기고 무책임하게 철수했다.
이 30여 년간의 기만적인 통치가 오늘날 중동 비극의 설계도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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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6월 18일, 시온주의를 악어로 묘사하며 영국 장교의 보호를 받고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게 "두려워 말라! 내가 평화롭게 너희를 삼키리라..." |
홀로코스트와 유대인 국가의 절박성
시오니즘을 유대 민족의 생존을 위한 필연적 과제로 만든 결정적 사건은 홀로코스트였다.
나치 정권과 그 협력자들은 60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 남성, 여성, 어린이를 체계적으로 학살하며 유럽 대륙에서 수 세기 동안 이어져 온 유대인 공동체의 삶을 파괴했다.
이 끔찍한 집단학살의 여파 속에서 수많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과 다른 유대인들은 독립적인 유대인 국가만이 민족의 안전을 보장할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절박함은 '브리하(Brihah, 탈출)' 조직의 활동으로 이어졌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브리하는 약 10만 명의 유대인을 동유럽에서 연합군 점령 지역과 난민 수용소로 이주시켰고, 이들을 팔레스타인으로 보내기 위한 비밀 네트워크를 조직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Exodus 1947'호 사건은 국제 여론을 움직이는 분수령이 되었다.
4,500명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태운 이 배가 팔레스타인으로 향하자, 당시 위임통치령을 관할하던 영국은 입국을 거부하고 생존자들을 독일의 영국 점령지로 강제 송환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전 세계에 전후 유럽 유대인들의 곤경을 알렸고, 깊은 동정 여론을 형성했다.
결국 이는 1948년 유엔의 유대인 국가 건국 승인을 지지하는 결정적인 국제적 압력으로 작용했다.
이처럼 시오니즘은 단순한 민족주의를 넘어, 홀로코스트 이후 유대인의 생존을 위한 필연적 귀결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절박한 열망은 이미 수십만 명의 아랍인들이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의 현실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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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팔레스타인에 유입되는 유대 난민들. '독일인들이 우리 가정과 집을 파괴했다. 우리의 희망을 파괴하지 말라'라는 문구 |
제2부: 1948년 전쟁 이전의 팔레스타인 - 두 민족의 대립
1948년 전쟁의 비극적 결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쟁 발발 직전 팔레스타인 내부의 인구 구성, 사회 구조, 그리고 양측 지도부의 전략적 역량을 비교 분석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는 힘의 불균형이 어떻게 난민 문제의 본질을 규정했는지 보여주는 핵심 열쇠이다.
인구 구성과 '인구 이전(Transfer)' 구상
시오니즘 이주가 시작될 무렵, 팔레스타인에는 약 45만 명의 아랍인과 2만 명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시오니즘 지도자들은 아랍인이 대다수인 땅에 어떻게 '유대인 국가'를 세울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인구학적 딜레마'에 직면했다.
이 딜레마에 대한 해결책으로 '인구 이전(Transfer)' 아이디어가 시오니즘 지도부 내에서 꾸준히 논의되었다.
이 구상이 본격적인 추진력을 얻게 된 계기는 1937년 영국 필 위원회(Peel Commission)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는 팔레스타인 분할안과 함께 인구 이전을 제안하며, 이 아이디어에 '국제적 도덕성의 날인'을 찍어주었다.
시오니즘 지도자 다비드 벤구리온은 분할안 수용을 지지하며 "정상적인 시기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혁명적인 시기에는 가능하다"고 주장, 인구 이전을 유대 국가 수립의 필수적인 단계로 여겼다.
흥미롭게도, 이 아이디어가 시오니즘 진영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영국 관리들의 기록에 따르면, 이라크의 누리 사이드 총리나 트란스요르단의 압둘라 국왕과 같은 아랍 지도자들조차 분할안이 현실화될 경우, 인구 교환이 불가피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음을 비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이는 분할이라는 급진적 해결책이 인구 문제의 재조정을 필연적으로 동반할 것이라는 인식이 당시 정치 지도자들 사이에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두 사회의 역량 비교 분석
전쟁 직전, 유대 공동체와 팔레스타인 아랍 공동체는 조직력과 군사력 면에서 극명한 차이를 보였다.
• 유대 공동체 (이슈브, Yishuv): 65만 명의 인구에도 불구하고 이슈브는 고도로 조직화되고 이념적으로 단결된 사회였다.
국가의 전신 역할을 한 행정 조직(유대기구, Jewish Agency), 우수한 경제력, 그리고 군사적 경험을 갖춘 준군사조직(하가나, Haganah)을 보유하고 있었다.
교육 수준이 높은 인적 자원과 무엇보다 홀로코스트의 경험은 유대인 국가 수립에 대한 절박하고 강력한 동기를 부여했다.
• 팔레스타인 아랍 공동체: 반면, 당시 팔레스타인 아랍 사회는 본질적으로 소작농 중심의 사회였다.
1936-39년 아랍 대반란이 영국에 의해 진압되면서 정치 지도부는 와해되었고 사실상 무장 해제된 상태였다.
심각한 내부 분열(후세이니 가문 대 반대파), 무기 부족, 조직력 부재, 그리고 각 마을이 개별적으로 행동하며 지역적 방어 협력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마을 중심 사고방식(village mentality)'은 치명적인 군사적 약점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비대칭적 상황은 모든 관찰자들에게 명백했다.
유대인, 영국인, 아랍인 모두 전쟁이 발발할 경우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시오니스트를 이길 수 없다고 평가했다.
아랍 연맹 군사위원회의 의장이었던 이라크 장군 이스마일 사프와트조차 "숫자상으로는 아랍인이 우세할지라도, 현재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어떤 방식으로도 시오니스트 군대에 맞설 수 없다"고 보고했다.
이러한 압도적인 힘의 불균형은 1948년 전쟁이 단순한 군사적 충돌을 넘어, 팔레스타인 사회의 구조적 붕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음을 예고했다.
조직화된 일방이 분열된 상대를 마주했을 때, 전쟁의 결과는 영토 점령을 넘어 인구 구성의 근본적인 변화로 귀결될 운명이었다.
폭발하는 화약고: UN 분할안과 영국의 퇴장
영국이 남긴 이중 약속의 독배는 결국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졌다.
1947년, 더 이상 팔레스타인을 감당할 수 없게 된 영국은 문제를 UN에 던져놓고 '손을 씻기로' 결정한다.
1. UN 결의안 181호: 선 긋기의 비극
1947년 11월, UN은 팔레스타인 땅을 유대인 국가(56%)와 아랍인 국가(43%)로 나누는 분할안을 통과시켰다.
모순의 수치: 당시 유대인은 인구의 3분의 1에 불과했고 전체 토지의 6%만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UN은 비옥한 해안지대 대부분을 유대인에게 할당했다.
더 큰 문제는 그 경계선이었다.
수백 개의 아랍 마을이 유대 국가 영토 안에 갇혔고, 아랍인들의 주식인 밀과 보리가 자라는 비옥한 평야 대부분이 유대 측에 배정되었다.
조상 대대로 일궈온 밭이 하루아침에 남의 나라 땅이 된 농민들에게, 이 분할안은 '외교적 타협'이 아닌 '생존권 탈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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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레스타인(1945) 하위 행정구역별 토지 소유권 |
불타는 예루살렘: 성지 예루살렘(Jerusalem)은 어느 쪽도 아닌 국제 관리 지역으로 두기로 했다.
하지만 이는 양측 모두에게 용납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2. 엇갈린 반응: 환호와 선전포고
유대인들은 이 불완전한 안을 국가 건설의 '법적 발판'으로 삼기 위해 즉각 수용했다.
반면, 자신들의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 절반을 내놓아야 했던 아랍인들은 이를 "강도질"이라 규정하며 전면 거부했다.
3. 무책임한 철수: 지옥의 문을 열다
1948년 5월 14일, 영국의 마지막 위임통치 부대가 철수했다.
영국은 질서 있는 정권 이양 대신 '진공 상태'를 남겼다.
영국군이 짐을 싸서 떠나기로 한 날, 시계는 멈추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다.
유대인 지도자 다비드 벤구리온(이스라엘 건국 주역)에게는 단 몇 시간의 여유뿐이었다.
군대가 떠나고 주인이 사라진 이 땅에 '우리가 주인이다'라고 외치지 않으면, 주변 아랍 국가들이 밀고 들어올 명분만 주는 꼴이었다.
오후 4시, 폭격의 위험 때문에 장소는 비밀에 부쳐졌다.
텔아비브 미술관에 모인 지도부 앞에서 벤구리온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스라엘 독립 선언서'를 읽어 내려갔다.
이 종이 한 장은 세 가지 강력한 '근거'를 내세웠다.
역사적 근거: "이 땅은 우리 조상이 살던 고향(에레츠 이스라엘)이다."
국제적 근거: "영국도, UN도 우리 국가 수립을 찬성했다."
도덕적 근거: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을 겪은 우리에게 이제는 안전한 집이 절실하다."
선언서에는 의외의 내용도 담겨 있었다.
"아랍인들도 우리와 평등한 시민권을 갖고 함께 살자", "주변 아랍 나라들과도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호소였다.
누군가에게는 진심 어린 약속이었겠지만, 당장 총칼을 들고 국경에 서 있는 아랍 국가들에게는 공허한 외침에 불과했다.
선언서 마지막에는 "이스라엘의 반석(Rock of Israel)"에 의탁한다는 표현이 들어갔다. (해석: 종교적인 사람들은 이를 '하나님'으로 이해했고, 세속적인 사람들은 '민족의 힘'으로 이해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유대인들을 하나로 묶기 위한 천재적인 단어 선택이었다.
"국호를 이스라엘이라 한다"는 문장이 끝남과 동시에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 환희는 채 몇 시간을 가지 못했다.
선언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인 그날 밤, 이집트와 요르단 등 주변 5개 아랍 국가의 군대가 국경을 넘어 진격해 들어왔다.
국가의 탄생을 알리는 독립 선언문은, 역설적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고향을 잃는 '대재앙(나크바)'의 시작을 알리는 전쟁 선포문이 되어버렸다.
한쪽의 축제가 다른 쪽의 지옥이 되는 순간이었다.
제3부: 1948년 전쟁과 팔레스타인 난민의 탄생 (알-나크바, Al-Nakba)
1948년 전쟁 기간 동안 발생한 팔레스타인인들의 대규모 이주, 즉 '나크바(대재앙)'의 구체적인 전개 과정을 분석하는 것은 분쟁의 가장 큰 비극인 난민 문제의 직접적인 원인을 밝히는 데 결정적이다.
이들의 이주는 단일한 원인이 아닌, 전쟁의 단계에 따라 그 성격이 변모하는 복합적인 과정이었다.
한 가지 구분은 난민 문제의 원인을 더 정확하게 보여준다.
1947년 말부터 1948년 5월까지의 폭력은 ‘국가 대 국가 전쟁’이라기보다, 무너지는 위임통치 공간에서 벌어진 내전의 성격이 강했다.
이 시기에는 공포, 보복, 소문, 경제 붕괴, 지도부의 와해가 한꺼번에 작동하며 도시 단위의 탈출을 촉진했다.
반면 1948년 5월 이후 전면전이 시작되면서, 점령과 군사 작전이 인구 이동을 더 직접적으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이 구분을 놓치면, 어떤 이동은 ‘자발적 피난’으로만 환원되고, 어떤 이동은 ‘계획된 추방’으로만 단정되며, 실제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회색지대가 사라진다.
제1파: 도시 엘리트의 탈출 (1947년 12월 – 1948년 3월)
유엔 분할안이 가결된 직후, 팔레스타인 내부에서는 저강도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 유대 측 준군사조직(하가나, 이르군, 레히)의 공격과 폭탄 테러, 혹은 이에 대한 공포로 인해 하이파, 야파, 예루살렘 등 주요 혼합 도시의 중산층 및 상류층 아랍인들이 먼저 피난길에 올랐다.
이들 대부분은 주변 아랍 국가로 잠시 피신했다가 전쟁이 끝나면 돌아올 것으로 예상했다.
이 시기의 탈출은 아직 체계적인 추방 정책의 결과라기보다는, 교전 격화에 따른 자발적 피난의 성격이 강했다.
제2파: 대규모 이주와 'D 계획 (Plan D)' (1948년 4월 – 6월)
1948년 4월, 유대 측 하가나는 'D 계획(Plan D)'을 실행하며 방어에서 공세로 전략을 전환했다.
이는 제2부에서 살펴본 '인구 이전'이라는 이론적 구상이 전쟁이라는 '혁명적 시기' 속에서 군사적 독트린으로 구체화되는 과정이었다.
이 계획은 공식적인 추방 '청사진'은 아니었으나, 하가나 지휘관들에게 "적대적이거나 잠재적 위협이 될 수 있는 마을을 파괴하거나 주민을 추방할 수 있는" 광범위한 재량권을 부여함으로써 대규모 이주를 촉발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 데이르 야신 학살: 4월 9일, 이르군과 레히 소속 대원들이 예루살렘 인근의 데이르 야신 마을을 공격하여 100명 이상의 비무장 주민을 학살했다.
이 사건은 팔레스타인 사회 전체에 엄청난 심리적 충격을 주었고, '데이르 야신'이라는 이름은 유대 측의 공격에 대한 극심한 공포의 상징이 되어 이후의 피난 행렬을 가속화했다.
• 티베리아스와 하이파의 함락: 4월 중순, 하가나는 박격포 공격을 통해 티베리아스와 하이파의 아랍 주민들의 저항 의지를 꺾었다.
특히 하이파에서는 하가나의 3인치 박격포탄이 군중으로 붐비는 시장 광장에 떨어지면서 대규모 공황이 발생했다.
이는 아랍 측의 사기를 꺾고 신속하게 저항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심리전술이었다.
공포에 질린 주민들은 항구로 몰려가 배를 타고 탈출했고, 아랍 지도부는 영국군의 중재 제안을 거부하고 전면 철수를 결정했다.
• 야파와 사페드의 함락: 4월 말, 이르군은 야파를 박격포로 공격했고, 하가나가 도시를 포위하면서 수만 명의 주민이 바다를 통해 피난했다.
5월 초 사페드에서는 인근 아랍 마을들의 함락 소식과 박격포 공격이 연쇄적인 공포를 확산시키며 주민들이 대거 도시를 떠났다.
• 마을 파괴: 미쉬마르 하에멕 전투 이후, 하가나는 주변의 아랍 마을들을 체계적으로 점령하고 파괴했다.
주민들은 쫓겨났고, 그들의 집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도록 불도저로 밀리거나 폭파되었다.
제3파 및 제4파: 전면전과 조직적 추방 (1948년 7월 – 11월)
이스라엘 건국과 아랍 국가들의 침공으로 전면전이 시작된 이후, 팔레스타인인들의 이주는 명백한 '추방'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 다니 작전(Operation Dani)과 리다/람레 추방: 7월, 이스라엘 방위군(IDF)은 '다니 작전'을 통해 리다(Lod)와 람레(Ramle)를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지도부는 약 5만에서 7만 명에 달하는 두 도시의 아랍 주민들을 추방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는 자발적 피난이 아닌 명백한 군사 작전에 의한 추방이었음이 IDF 내부 통신 기록을 통해 증명된다.
작전 사령부는 상부에 보고하기를, "리다의 주민들은 추방되어야 한다"고 했으며, "[우리 군은] 주민 추방 작전에 분주하다 (oskim begeirush hatoshavim)"고 명시했다.
이는 전쟁 중 발생한 가장 규모가 큰 단일 추방 사건이었다.
• 히람 작전(Operation Hiram)과 갈릴리 지역: 10월 말, '히람 작전'이 전개된 상부 갈릴리 지역에서는 또 다른 대규모 피난과 추방이 발생했다.
북부 전선 사령관 모셰 카르멜은 "갈릴리 지역의 정화(cleansing) 작전을 계속하라"고 명시적으로 명령했다.
이 과정에서 살리하, 사프사프, 에일라분 등 여러 마을에서 학살이 자행되었고, 이는 주민들의 공포를 극대화하여 레바논으로의 피난을 촉발했다.
카르멜 사령관 자신도 훗날 자신이 목격한 피난민 행렬의 비참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는 한 여인이 오른팔에는 생후 2주 된 아기를, 왼팔에는 두 살배기 아기를 안고 네 살짜리 딸아이가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고 따라오는 것을 보았다."
결론적으로 1948년 전쟁을 거치며 팔레스타인인들의 이주는 초기 국지적 교전에 의한 피난에서, 점차 이스라엘 군의 명시적인 추방 정책과 군사 작전의 결과로 변모해갔다.
이로 인해 약 7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으며, 이들의 존재는 신생 이스라엘 국가의 다음 정책 결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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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한 색으로 표시된 땅은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종료 시점의 이스라엘 국경 내 영토 |
제4부: 귀환의 봉쇄 - 난민 문제의 영구화
전쟁으로 발생한 수십만 명의 난민 문제는 이스라엘 신생 정부의 '귀환 불허' 정책과 이를 뒷받침한 구체적인 조치들을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영구적인 비극으로 고착화되었다.
전쟁이 낳은 상처를 해결할 수 있었던 기회는 이 정책으로 인해 사라졌다.
이스라엘 내각의 결정
1948년 6월 16일, 이스라엘 임시정부 내각은 "전쟁이 계속되는 한 난민의 귀환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의 배경에는 국가 안보와 인구학적 고려라는 두 가지 핵심 논리가 있었다.
다비드 벤구리온 총리와 모셰 셰르토크 외무장관은 귀환한 난민들이 잠재적인 '제5열'이 되어 신생 국가의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수십만 명의 아랍인들이 돌아올 경우, 어렵게 확보한 '유대 국가'로서의 인구학적 특성이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셰르토크는 각료회의에서 체코슬로바키아가 주데텐 지역의 독일인들을 추방한 사례를 언급하며, "세계는 주데텐 독일인들의 뿌리 뽑힘을 이해했고, 이 또한 이해할 것"이라 주장하며 이러한 조치가 신생 국가의 안정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논리를 폈다.
귀환을 막기 위한 구체적 조치들
이스라엘 정부는 단순히 정책적 결정을 내리는 데 그치지 않고, 난민의 귀환을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구체적인 조치들을 체계적으로 실행했다.
• 아랍 마을의 체계적 파괴: 유대민족기금(JNF)의 요세프 바이츠와 같은 인물들은 '소급적 인구 이전(retroactive transfer)'이라는 개념을 주도했다.
이는 이미 발생한 아랍인들의 이주를 영구적인 사실로 만들기 위해, 그들이 떠난 마을을 파괴하는 것을 의미했다.
수백 개의 버려진 아랍 마을들은 이스라엘 방위군(IDF)에 의해 계획적으로 다이너마이트로 폭파되거나, 불도저로 밀리거나, 완전히 평탄화되었다.
이는 난민들의 귀환 의지를 꺾고, 그들이 돌아올 물리적 공간 자체를 없애기 위한 조치였다.
• 버려진 땅과 집에 유대인 정착: 전쟁으로 버려진 아랍인들의 집, 농지, 과수원 등 막대한 자산은 이스라엘 국가에 의해 관리되기 시작했다.
이 '버려진 자산'은 유럽에서 온 홀로코스트 생존자와 중동 각지에서 온 유대인 이민자들을 정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빈집에 새로운 유대인 가족이 들어서고, 버려진 농지는 새로운 키부츠(집단농장)와 모샤브(협동농장)에 할당되었다.
이는 난민들의 귀환을 현실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도 더욱 복잡하고 불가능하게 만든 핵심 요인이었다.
• 국경지대 '정화' 작전 (1948–1950): 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난 후에도 이스라엘 군은 안보상의 이유를 들어 국경 지역에 남아 있던 아랍 마을 주민들을 지속적으로 추방했다.
갈릴리 북부의 이크리트(Iqrit)와 비르암(Bir'am) 마을 주민들은 "2주간의 임시적인 조치"라는 약속 하에 이주되었으나, 결국 귀환이 허용되지 않았고 그들의 마을은 파괴되었다.
이처럼 국경 지대에서 아랍인들을 제거하는 '정화' 작전은 1950년대까지 이어졌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군사적 승리에 이어, 아랍 마을 파괴와 유대인 정착이라는 물리적 조치를 통해 난민의 귀환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이로써 1948년의 '나크바'는 일시적인 전쟁의 비극을 넘어, 해결 불가능에 가까운 영구적인 정치 문제로 고착화되었다.
제5부: 국제 사회의 역할과 오늘날의 분쟁 구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단지 두 민족 간의 문제를 넘어,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특히 미국과의 특수 관계 속에서 현재의 복잡한 구도를 형성하게 되었다.
미국의 압도적인 지원은 이스라엘의 안보를 보장했지만, 동시에 분쟁의 근본적인 해결을 가로막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
초기 국제 사회의 개입 실패
전쟁 직후, 국제 사회는 난민 문제 해결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유엔 중재관 폴케 베르나도테는 난민의 무조건적인 귀환을 요구했으나, 이스라엘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1949년 로잔 회담에서 이스라엘은 평화 협정의 대가로 가자 지구를 흡수하고 그곳의 난민을 책임지거나, 약 10만 명의 난민을 받아들이겠다는 제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는 전체 난민 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고, 아랍 측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이 제안들은 실질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고 외교적 실패로 끝났다.
미국-이스라엘 특수 관계와 그 영향
이후 분쟁 구도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변수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특수 관계'였다.
미국이 이스라엘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가 된 배경은 복합적이다.
• 미국 내 유대인 로비의 영향력: AIPAC(미국-이스라엘 공공문제위원회)과 같은 강력한 로비 단체는 미국 의회와 행정부의 대중동 정책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 기독교 복음주의 세력의 지지: 성경의 예언이 현대 이스라엘을 통해 성취된다고 믿는 '세대주의' 신학에 기반한 수천만 명의 미국 복음주의 개신교도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강력하고 일관된 지지 기반을 형성하고 있다.
• 냉전 시대의 전략적 동맹: 냉전 시대에 미국은 친소련 성향의 아랍 국가들을 견제하기 위해, 중동 내에서 가장 확실한 전략적 자산으로 이스라엘을 지원했다.
미국의 지원이 초래한 비판적 결과
미국의 이러한 '맹목적인 지원'은 여러 비판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미국의 지원 아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강경한 정책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는 중동 내 뿌리 깊은 반미 감정을 심화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또한, 지속적인 분쟁은 이스라엘 경제에 막대한 국방비 부담을 안겼다.
1978년 이집트와의 평화협정 이전 이스라엘의 국방비는 GDP 대비 22-25%에 달했으나, 협정 이후 7-9% 수준으로 급감했다.
이는 평화가 가져다준 경제적 이익을 명확히 보여주며, 현재 팔레스타인 및 헤즈볼라와의 지속적인 분쟁이 국가 성장 동력을 어떻게 잠식하는지를 방증한다.
최근에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해관계가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미국이 ISIL 대응 및 이란 핵협상 과정에서 이스라엘을 배제하고 다른 중동 지역 강국들과 협력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양국 관계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는 미국의 국익이 때로는 이스라엘의 입장보다 우선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결론적으로, 미국의 강력한 지원은 이스라엘의 안보를 보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이 국제 사회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롭게 강경 노선을 유지할 수 있게 함으로써 분쟁의 근본적인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중동 전체의 불안정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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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엔 인도주의 업무 조정국에 따른 이스라엘의 점령지 현황, 2011년 12월 기준. |
제6부: 총성이 멈춘 뒤 시작된 '창살 없는 감옥' (1956–1987)
1956년의 수에즈 위기(Suez Crisis)는 1967년의 ‘점령’이 하늘에서 떨어진 번개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예고편이었다.
이스라엘은 전쟁 와중에 시나이(Sinai)와 가자지구(Gaza Strip)를 점령했고,
국제 압력 속에 이듬해 철수했다.
가자 사람들에게 그 짧은 점령의 기억은, 훗날 1967년 이후 이어질 ‘상시화된 통치’가 어떤 얼굴을 가질지 미리 보여준 불길한 체험이었다.
즉 1967년은 시작이라기보다, 이미 한 번 스쳐간 폭풍이 ‘영구적인 기후’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1948년의 전쟁이 국가 간의 거대한 영토 전쟁이었다면, 1967년은 이 비극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뼈와 살'에 새겨진 해였다.
6일 만에 뒤집힌 세상: 6일 전쟁(Six-Day War)
1967년 6월 5일 아침, 이스라엘 공군이 이집트 비행장을 기습하며 전쟁의 포문이 열렸다.
단 6일이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로부터 가자지구와 시나이반도를, 요르단으로부터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을, 시리아로부터 골란고원을 빼앗았다.
지도는 완전히 다시 그려졌다.
이스라엘에게 이 승리는 '기적'이었으나,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제2의 나크바'였다.
어제의 이웃이었던 요르단 군대가 물러간 자리에 이스라엘 군대의 검문소가 들어섰다.
UN 결의 242호: "땅을 줄 테니 평화를 다오"
국제사회는 급히 중재에 나섰다.
UN 안전보장이사회는 결의 242호를 채택하며 '땅과 평화의 교환'이라는 공식을 내놓았다.
이스라엘이 점령지에서 물러나면,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해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문장은 치명적인 함정이었다.
이스라엘은 '어느 정도' 물러나야 하는지 교묘하게 해석을 비틀었고, 아랍 측은 '침략자에게 평화를 구걸하지 않겠다'며 버텼다.
종이 위의 평화가 헛돌 때, 점령지에는 유대인 정착촌(Settlement)이 하나둘 말뚝을 박기 시작했다.
통치와 저항의 일상화
점령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소나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숨통을 조이는 '구조'가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가려면 이스라엘 군인의 검문을 통과해야 했고, 내 땅에서 농사를 지으려 해도 점령군의 허가가 필요했다.
군사적 승리로 땅을 얻은 이스라엘은 뜻밖의 문제에 직면했다.
영토는 넓어졌지만, 그 땅에 사는 수백만 명의 분노한 팔레스타인인들까지 통제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제 전선은 사막이 아니라 좁은 골목길과 시장통으로 옮겨갔다.
제7부: 평화라는 이름의 신기루 (1973–2005)
1973년, 욤키푸르 전쟁(Yom Kippur War 아랍-이스라엘 전쟁)은 ‘이 전쟁은 끝났다’는 착각을 산산이 부쉈다.
이스라엘은 승리의 신화를 다시 확인했지만, 동시에 “군사력만으로는 안전을 영구히 살 수 없다”는 비용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이 현실 정치로 이어진 장면이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Camp David Accords)과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이었다.
하지만 그 평화는 ‘국가 대 국가’의 전선을 잠시 정리했을 뿐, 팔레스타인 문제라는 심장부를 봉합하지 못했다.
전선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점령지의 일상과, 축적되는 분노, 그리고 언젠가 터질 폭발물 같은 시간이었다.
평화의 기회는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악수는 짧았고, 총성은 길었다.
돌을 든 아이들의 절규: 제1차 인티파다(Intifada)
1987년, 가자지구의 한 검문소에서 발생한 교통사고가 도화선이 되었다.
20년 동안 쌓인 점령의 울분이 폭발했다.
탱크 앞에 선 소년들이 돌맹이를 던지는 모습은 전 세계의 안방으로 중계되었다.
이스라엘은 당황했다.
최첨단 무기로도 아이들의 돌팔매질과 집단적인 거부 운동을 멈출 수 없었다.
"군사력만으로는 이 땅을 다스릴 수 없다"는 뼈아픈 교훈이 양측 지도부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냈다.
흔들어 깨우다(Intifada): 이 용어가 가진 진짜 의미는 '털어버리다'에 가깝다.
마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듯, 혹은 잠든 몸을 흔들어 깨우듯, 20년간 이어진 이스라엘의 점령 체제를 온몸으로 거부하며 '털어내겠다'는 강력한 의지였다.
오슬로 합의(Oslo Accords): 엇갈린 악수의 비극
1993년, 백악관 잔디밭에서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과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가 역사적인 악수를 나눴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허용하고,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오슬로는 '완성된 설계도'가 아닌 '임시방편'이었다.
예루살렘의 주인은 누구인지, 1948년에 쫓겨난 난민들은 돌아올 수 있는지 같은 진짜 핵심 질문들은 "나중에 협상하자"며 덮어두었다.
이 미뤄둔 숙제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거대한 시한폭탄이 되어갔다.
가자 철수와 하마스(Hamas)의 그늘
2005년, 이스라엘은 극심한 저항에 시달리던 가자지구에서 정착촌을 철거하고 군대를 뺐다.
평화로 가는 길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듬해 선거에서 무장단체 하마스가 승리하며 상황은 급변했다.
하마스는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고,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거대한 장벽으로 에워싸며 봉쇄했다.
팔레스타인은 서안지구(온건파)와 가자지구(강경파)로 쪼개졌고, 분쟁은 이제 "이스라엘 대 팔레스타인"을 넘어 복잡한 내부 분열과 종교 전쟁의 양상으로 번졌다.
대물림되는 비극, 멈출 수 없는 시계
1948년에 고향 집 대문을 잠그고 도망쳤던 할아버지는 그 열쇠를 아들에게, 또 손자에게 물려준 채 눈을 감는다.
그들에게 그 열쇠는 언젠가 돌아가야 할 '정의'의 상징이지만, 이스라엘에게 그 열쇠는 제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무기'다.
오늘날 UN이 관리하는 팔레스타인 난민은 수백만 명에 달한다.
이들은 단순히 집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다.
'돌아갈 권리가 박탈된 존재'들이다.
이 비극의 역사는 도서관의 책장 속에 갇혀 있지 않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장벽 너머 검문소에서, 그리고 미사일이 오가는 가자의 하늘 아래에서 여전히 쓰여지고 있다.
역사는 묻는다.
과연 이 비극의 순환을 끊을 수 있는 것은 정치인의 서명인가, 아니면 서로의 고통을 직시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눈물인가.
비극의 순환과 남겨진 과제
역사는 때로 지독한 농담을 던진다.
유럽에서 '국가 없는 민족'으로서 대학살을 겪었던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국가를 세우는 과정에서 또 다른 민족을 '고향 없는 난민'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이 분쟁이 가진 가장 뼈아픈 역설이다.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들이 탄 배 '엑소더스호'가 팔레스타인 해안에 닿았을 때,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구원의 배였으나 다른 누군가에게는 재앙의 침입이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뿌리는 두 거대한 역사적 비극의 충돌에 있다.
하나는 유럽의 반유대주의와 홀로코스트가 촉발한 시오니즘의 필연적 귀결, 즉 유대 민족의 생존을 위한 국가 수립의 열망이다.
다른 하나는 그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민족이 겪어야 했던 '나크바(대재앙)', 즉 고향 상실의 비극이다.
특히 1948년에 발생한 약 70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는 단순한 전쟁의 부산물이 아니었다.
이는 이스라엘의 명시적인 '귀환 불허' 정책과 아랍 마을의 체계적 파괴, 유대인 정착촌 건설이라는 물리적 조치를 통해 영구화되었다.
이 문제는 오늘날까지 분쟁의 해결을 가로막는 가장 근원적인 상처로 남아있다.
이 비극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두 민족의 생존 서사가 한 땅에서 충돌했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유대인에게 국가 수립은 홀로코스트 이후의 ‘탈출구’였고, 팔레스타인인에게 그 과정은 고향 상실이라는 ‘낙인’이 되었다.
그리고 1948년의 난민 문제는 단순한 전쟁의 부산물이 아니라, 전후의 선택들로 ‘영구화’되었다.
귀환을 막는 정책, 마을의 파괴, 버려진 자산의 재배치가 겹치면서, 일시적 이동은 되돌릴 수 없는 구조로 굳어졌다.
이 상처가 지금도 분쟁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다만 책임을 한쪽에만 봉인해버리면, 역사 이해는 감정의 승패로 전락한다.
시오니즘 지도부의 ‘인구 재편’ 구상과 전쟁 속 강경한 실행, 팔레스타인 지도부의 분열과 대응 실패, 아랍 국가들의 이해관계, 그리고 강대국의 지정학적 계산은 서로 맞물려 비극을 증폭시켰다.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악한가’를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선택들이 어떤 결과를 고정시켰는지 끝까지 추적하는 일이다.
과거에 대한 정직한 이해 없이는 미래의 해결책도 설계할 수 없다.
1948년은 박물관 속 연도가 아니라, 오늘도 검문소와 장벽, 봉쇄와 공습의 언어로 되돌아오는 현재진행형의 시간이다.
이 순환을 끊는 첫 단추는, 서로의 고통을 ‘상대의 선전’이 아니라 ‘인간의 현실’로 인정하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
이 글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위임통치기 말기부터 1948년 전쟁과 난민 문제의 형성, 그리고 그 유산이 1967년 이후 점령과 협상 실패로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한 흐름으로 재구성한 분석 글입니다.
특정 진영의 선전이나 정당화를 목표로 하지 않고, 공개 기록과 학술 연구에서 확인되는 사건의 ‘연쇄’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다만 이 주제는 같은 사건을 두고도 용어 선택부터 책임 귀속까지 해석이 크게 갈립니다.
예컨대 ‘나크바(대재앙, al-Nakba)’, ‘추방’, ‘자발적 피난’, ‘전쟁 중 공황’ 같은 표현은 연구자마다 강조점이 다르고, 사료의 성격(군 문서, 회고, 외교전문, 현장 증언)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 논쟁 지형을 보여주되, 단정이 어려운 대목은 가능한 한 “그렇게 읽히는 근거”를 함께 제시하는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또한 수치(난민 규모, 작전별 이주 규모, 토지 소유 비율 등)는 출처와 집계 기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제시된 숫자는 ‘가장 널리 인용되는 범위’를 따르되, 정확한 비교를 위해서는 동일 기준(기간·지역·정의)을 맞춘 추가 확인이 필요합니다.
독자분이 학습·인용 목적이라면 유엔 문서, 당시 영국 위임통치 자료, 그리고 주요 연구서(예: 베니 모리스 등 신역사학파의 논의 포함)를 함께 대조해 읽는 것을 권합니다.
이 글은 역사적 폭력을 미화하거나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를 유도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유대인·팔레스타인인(및 아랍 각국 시민)의 고통은 ‘경쟁하는 피해’가 아니라, 같은 시대가 만들어낸 서로 다른 상처로 다뤄야 한다는 전제를 갖고 서술했습니다.
오늘날의 민간인 피해와 증오 선동 역시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편의 글에 긴 세기의 사건을 담다 보니 일부 맥락은 압축되어 있습니다.
이 글은 결론을 대신해 “무엇이 언제 어떻게 쌓여 현재의 구조가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지도에 가깝습니다.
읽는 과정에서 불편함이 생긴다면, 그 불편함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용어, 시점, 책임의 프레이밍)를 표시해 두고 서로 다른 사료·서술과 비교해보는 것이 이 주제에 접근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This essay traces the conflict from Zionism to the Holocaust, which intensified the push for a Jewish state.
Under Britain’s mandate, overlapping promises and immigration fueled revolt and violence.
In 1947 the UN partition plan split the land; Jews accepted it as a legal step, Arabs rejected it as dispossession.
On May 14, 1948, David Ben-Gurion declared Israel’s independence; war followed and, through fear, flight, and expulsions, about 700,000 Palestinians became refugees (al-Nakba).
Israel then blocked large-scale return. The 1967 war brought occupation and settlements, shifting conflict into daily rule and resistance.
The First Intifada (1987) opened talks, but Oslo deferred core issues and trust collapsed. After Israel’s 2005 Gaza withdrawal, Hamas’s rise and blockade deepened division.
The essay argues that 1948’s refugee and sovereignty questions still drive the pres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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