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문왕 대흠무 평전: 해동성국을 설계한 문치 군주 (King Mun of Balhae)


해동성국의 주춧돌을 놓은 군주, 발해 문왕 대흠무 평전


무(武)의 시대를 넘어 문(文)의 시대로

발해의 역사는 아버지 무왕(武王) 대무예가 휘두른 강력한 검 위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당나라와 격전을 치르며 북방의 패자로서 발해의 영토를 넓혔다. 

그러나 737년, 그의 아들 대흠무(大欽茂)가 3대 군주의 자리에 오르면서 발해는 역사의 거대한 전환점을 맞이한다. 

무(武)의 시대가 저물고, 문(文)의 시대가 개막한 것이다.


문왕 대흠무의 57년에 걸친 긴 재위 기간은 발해가 단순한 군사 강국을 넘어, 찬란한 문화와 체계적인 제도를 갖춘 제국으로 발돋움하는 결정적 시기였다. 

후대 역사가들이 발해를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 즉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부를 수 있었던 그 모든 기틀이 바로 그의 손에서 다져졌다고 평가한다. 

이 평전은 한 가지 핵심적인 질문을 던지며 시작하고자 한다. 

"대흠무는 어떻게 전쟁의 시대를 끝내고, 발해를 문명과 제도의 나라로 재탄생시켰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한 국가가 어떻게 군사적 팽창의 시기를 지나 내적 성숙을 이루고 문명국으로 발돋움하는지에 대한 보편적 통찰을 제공한다.


1. 새로운 시대의 개막: 문치(文治)를 선포하다

문왕이 즉위한 737년, 발해는 무왕이 남긴 강력한 군사력과 넓은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 정세를 고려하면, 이는 영광이자 동시에 무거운 과제였다. 

당과의 오랜 대립으로 대외 관계는 긴장 상태에 놓여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급격한 팽창으로 복속된 다수의 이질적인 부족들을 통합해야 하는 문제가 시급했다. 

무력만으로는 이 거대한 다종족 국가를 지속시킬 수 없었다. 

안정적인 중앙집권적 행정 시스템의 도입이 절실했고, 이는 정교한 법과 제도를 갖춘 당나라와 같은 문명국을 지향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문왕이 아버지와는 다른 길, 즉 '문치(文治)'를 선택한 것은 단순한 개인적 성향의 차이가 아니라, 국가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시대적 필연이었다.


1.1. 아버지의 검 대신 책을 들다

무왕이 당나라의 등주를 공격하며 강경 일변도의 정책을 펼쳤다면, 문왕은 즉위하자마자 당과의 우호를 선택하며 관계 개선에 나섰다. 

그 상징적인 사건이 즉위 이듬해인 738년에 일어났다. 

문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당례(唐禮)』,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등 다수의 서적을 요청했다.

특히 주목할 것은 『당례』였다. 

사료를 통해 추론해 보건대, 이는 당시 당 현종 대에 막 완성된 최신 예법서인 『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를 가리키는 것으로, 반포된 지 불과 6년 만에 수입하려 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책의 요청을 넘어선 정치적 선언이었다. 

국가 경영의 패러다임을 '무력'에서 '예법과 제도'로 전환하고, 유교적 도덕규범을 통치의 근간으로 삼겠다는 새로운 비전을 천명한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검 대신, 국가의 미래를 설계할 책을 손에 쥐었다.


1.2. 새로운 비전과 오래된 신하들

문왕의 즉위 초, 조정에는 아버지 무왕을 따라 전쟁터를 누볐던 노장들과 강경파 신하들이 가득했다.

그들 앞에서 문왕은 발해의 새로운 길을 선포해야만 했다. 


한 신하가 우려 섞인 목소리로 아뢰었다. 

"전하, 당과의 화친은 시기상조이옵니다. 저들은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사온데, 어찌 검을 놓고 책을 논할 수 있겠나이까?"

그러자 젊은 군주, 문왕은 단호하지만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우리가 검으로 얻은 땅은 넓으나,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사상누각에 불과하오. 제도를 정비하고 학문을 일으켜 나라의 근본을 바로 세우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발해를 강대하게 만드는 길이오. 이제부터 발해는 예법과 학문으로 나라의 기둥을 세울 것이오."

이 선언은 발해 내부의 통치 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대개혁의 서막이었다. 

문왕은 단순한 정복 군주가 아닌, 문명 국가의 설계자로서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2. 제국의 기틀을 다지다: 내정 개혁과 체제 정비

문왕의 통치는 발해를 단순히 영토가 넓은 나라에서, 체계적인 중앙집권적 제국으로 변모시키는 과정 그 자체였다. 

그는 당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되, 발해의 실정에 맞게 변용하여 독자적인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의 내정 개혁은 후대 발해가 '해동성국'이라 불리는 번영을 누릴 수 있는 단단한 주춧돌이 되었다.


2.1. 유학의 깃발 아래: 통치 이념의 확립

문왕은 유학을 국가 통치의 핵심 이념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 왕족과 귀족 자제들을 교육하는 국립대학 격인 주자감(冑子監)을 설치하여 유교 경전을 가르치고 인재를 양성했다.

그의 유교적 통치 철학은 중앙 관제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행정을 총괄하는 6부의 명칭을 당나라의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 대신, 유교의 핵심 덕목인 충(忠)·인(仁)·의(義)·지(智)·예(禮)·신(信)으로 명명했다. 

이는 단순한 이름의 변경이 아니었다. 

국가의 모든 행정이 유교적 가치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철학적 선언이자, 발해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당시 발해 지배층의 높은 학문적 소양은 그의 딸들인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묘지명을 통해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묘지문에는 ≪상서(尙書)≫, ≪좌전(左傳)≫, ≪시경(詩經)≫, ≪예기(禮記)≫ 등 수많은 유교 경전이 인용되어 있어, 당시 발해 지식인들이 중국 고전을 두루 섭렵했음을 증명한다.


문왕의 둘째 정혜공주 묘지(복제) 


2.2. 3성 6부와 5경 15부: 중앙과 지방을 아우르는 통치 시스템

문왕 대에 이르러 발해의 중앙 정치 기구인 3성 6부(三省六部)와 지방 통치 제도의 기초가 대부분 확립되었다.

• 중앙 제도 (3성 6부): 당의 제도를 참고했지만, 명칭부터 달랐다. 

3성은 선조성(宣詔省)·정당성(政堂省)·중대성(中臺省)으로 불렸다. 

특히 주목할 점은, 정책 심의 기구보다 행정부인 정당성의 권한이 더 강했다는 것이다. 

정당성의 수장인 대내상(大內相)이 국정을 총괄하는 실질적인 최고 책임자 역할을 했다. 

이는 당의 제도를 맹목적으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효율적인 국정 운영을 추구했던 발해의 실정에 맞게 제도를 변용했음을 보여준다.

• 지방 제도 (5경 제도): 사방 5천 리에 달하는 광활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5개의 전략적 수도(5경)를 중심으로 지방 제도를 정비했다. 

776년경에는 남경 남해부(南京 南海府)의 존재가 사료에서 확인되는 등, 문왕 대에 이미 5경 제도의 골격이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발해의 지방 제도가 최종적으로 5경 15부 62주(五京十五府六十二州)의 형태로 완성된 것은 9세기 초, 후대 선왕(宣王)이 영토를 더욱 확장한 이후의 일이었다. 

문왕은 그 위대한 완성을 위한 결정적인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2.3. 거듭된 천도, 대제국을 향한 역동적 발걸음

문왕은 재위 기간 동안 무려 세 차례나 수도를 옮겼다. 

이는 국가적 혼란이 아니라, 대제국을 향한 그의 역동적인 국가 경영 전략이었다.


1. 중경 현덕부 (中京 顯德府, 742년경): 철, 베, 쌀 등 물산이 풍부한 산업 중심지였다. 

경제적 기반을 다지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2. 상경 용천부 (上京 龍泉府, 756년경):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방어에 유리하고, 북방 말갈족에 대한 통제를 강화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특히 이 시기는 당에서 '안사의 난'이 발발한 때로, 동아시아 정세의 불안에 대비하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3. 동경 용원부 (東京 龍原府, 785년경): 일본과의 교역로인 '일본도(日本道)'를 확보하기 위한 해상 교통의 중심지였다. 

무역을 통한 국부 증진을 꾀한 것이다.


발해 수도의 이동


이처럼 거듭된 천도는 발해의 넓은 영역을 균형 있게 발전시키고, 각 지역의 전략적·경제적 이점을 극대화하려는 문왕의 적극적인 통치 행위였다. 

잘 정비된 내정은 문왕에게 강력한 자신감을 부여했고, 이는 대외 관계에서 발해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굳건한 기반이 되었다.


3. 천손(天孫)의 외교: 국제 질서를 재편하다

문왕 시대의 외교는 단순한 사신 교환을 넘어, 발해를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끌어올린 고도의 전략 활동이었다. 

그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던 무왕 시대의 외교를 넘어, 문명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주변국과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했다.


3.1. 당(唐)과의 관계: 대립에서 공존으로

문왕 외교의 백미는 755년 발발한 '안사의 난'이라는 국제적 격변 속에서 빛을 발했다. 

당나라가 내란으로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발해에 4만 기병의 파병을 요청해왔다.(추정)

이는 발해의 군사력을 인정하면서도, 당의 위기를 함께 해결하자는 압박이었다.


문왕은 신하들을 불러 모아 논의했다.

"당의 내란은 그들의 문제요. 우리의 칼은 발해를 지키기 위해 써야 하오. 당의 요청은 정중히 거절의 뜻을 전하시오. 다만, 저들의 정세를 면밀히 살피는 것은 게을리하지 말라."


그는 이 절호의 기회에 당을 공격하지도, 섣불리 개입하여 국력을 소모하지도 않았다. 

냉철한 판단으로 자주적인 외교 노선을 견지한 것이다. 

이러한 발해의 국력과 문왕의 외교력을 인정한 당나라는 마침내 762년, 발해를 '발해군(郡)'이 아닌 '발해국(國)'으로, 문왕을 '군왕(郡王)'이 아닌 '국왕(國王)'으로 격상시켜 책봉했다. 

이는 발해의 독립적인 국가 지위를 당나라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외교적 승리였다.


3.2. 일본을 향한 자신감: "나는 고려 국왕이며 천손이다"

문왕의 자신감은 일본과의 외교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를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의미의 '고려국왕(高麗國王)'이라 칭했다.

더 나아가 자신을 '천손(天孫)', 즉 하늘의 자손이라 칭하고 양국 관계를 장인과 사위의 관계인 '구생(舅甥)'으로 표현했다. 

이는 발해가 일본보다 우위에 있다는 강력한 자신감의 표출이자, 고구려의 천하관을 계승했음을 만방에 알린 선언이었다.


국서를 받아 든 일본의 고닌 천황은 격노했다.

"고구려 때에는 우리와 형제를 칭하며 동등한 예를 갖추었는데, 어찌 감히 장인과 사위(舅甥)를 운운하며 우리를 낮추는가! 이는 예를 잃은 망령된 행위다!"

일본 조정이 발해 사신의 예우를 철회하려 하자, 사신 만복(萬福)이 나서 외교적으로 무마하며 상황을 수습했다.

이 일화는 당시 발해가 일본을 압도할 만큼 강성했으며, 문왕이 이를 외교적으로 과감하게 활용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3.3. 남쪽의 이웃, 신라와의 화해

문왕은 남쪽의 신라와도 실리적인 외교를 펼쳤다. 

무왕 시대의 군사적 긴장 관계를 해소하고, 양국 간 상설 교통로인 '신라도(新羅道)'를 개설했다. 

이 길을 통해 사신과 상인들이 오가며 지속적인 교역과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는 문왕이 불필요한 대립을 피하고 동아시아 전체의 안정을 추구하는 균형 잡힌 외교가였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성공적인 외교 활동을 통해 문왕은 발해를 동아시아의 주요 행위자로 격상시켰다. 

그의 존호와 칭호들은 바로 그 격상된 위상의 상징이었다.


4. 인간 대흠무: 황상(皇上)의 영광과 아버지의 비애

강력한 군주로서 제국의 기틀을 다진 대흠무. 

그의 공적인 삶은 화려했지만, 그 이면에는 한 인간으로서의 고뇌와 슬픔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존호를 통해 드러나는 제왕적 영광과, 먼저 떠나보낸 딸들의 묘지명을 통해 드러나는 비통한 부성애는 인간 대흠무의 양면을 보여준다.


4.1.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

1980년 발굴된 정효공주 묘지명에는 문왕의 존호가 길게 기록되어 있다. 

이 존호는 그의 통치 이념과 위상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 대흥(大興)·보력(寶曆):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독자적인 연호다. 

이는 당의 연호를 쓰지 않고 독자적인 시간의 지배자가 되겠다는 선언으로, 제국으로서의 자주성을 만천하에 공표한 것이다. 

특이한 점은, 문왕이 재위 중 '대흥'에서 '보력'으로 연호를 바꾸었다가 다시 '대흥'으로 복귀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의 오랜 치세 동안 정치적 상황 변화에 따라 통치 이념을 재정비하려는 시도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 효감(孝感): 유교의 핵심 덕목인 '효'를 내세워 자신의 통치가 도덕적 정당성을 갖추었음을 강조했다.

• 금륜성법(金輪聖法): 스스로를 불교의 이상적인 군주인 '전륜성왕(轉輪聖王)'에 빗댄 표현이다. 

정복 군주로서 천하에 올바른 법을 펼치는 신성한 존재로 왕권을 신격화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더욱이 묘지명에는 신하들이 문왕을 황제를 부를 때 사용하는 칭호인 '황상(皇上)'이라 칭한 기록이 나온다. 

이는 발해가 대외적으로는 왕국(外王)을 표방했지만, 내부적으로는 황제국(內帝) 체제를 지향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증거다.


4.2. 딸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

천하를 호령하던 '황상'도 자식의 죽음 앞에서는 한 명의 슬픔에 잠긴 아버지일 뿐이었다. 

그는 둘째 딸 정혜공주(777년 사망)와 넷째 딸 정효공주(792년 사망)를 자신보다 먼저 떠나보내는 참척(慘慽)의 고통을 겪었다.


특히 정효공주가 죽었을 때의 슬픔은 묘지명에 절절하게 기록되어 있다.

"황상(皇上)이 조회를 파하고 크게 슬퍼했다(罷朝興慟)."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조회를 중단할 만큼 비통해했다는 이 짧은 구절에서, 딸을 잃은 아버지의 무너지는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천하를 손에 쥔 황제의 권위도 사랑하는 딸의 죽음 앞에서는 한낱 아버지의 슬픔일 뿐이었다. 

이미 태자 대굉림마저 일찍 여읜 그에게 사랑하는 딸들의 연이은 죽음은 개인적인 비극을 넘어, 후계 구도를 안정적으로 다질 심리적·시간적 여유마저 앗아갔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그의 말년과 사후의 정치적 혼란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5. 역사적 평가: 해동성국의 위대한 설계자

문왕 대흠무의 57년 치세는 발해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유산을 남겼다. 

그는 단순한 통치자가 아니었다. 

전쟁으로 세워진 나라에 제도의 뼈대를 세우고, 문화의 살을 붙여 '해동성국'이라는 거대한 건축물의 미래를 그린 '위대한 설계자'였다.


5.1. 남겨진 유산

문왕이 이룩한 업적은 세 가지 핵심적인 유산으로 정리할 수 있다.

1. 제도적 유산: 안정적인 3성 6부와 5경 체제를 확립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 기반을 마련했다.

이 기반 위에서 10대 선왕(宣王)은 영토를 최대로 확장하고 '해동성국'의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2. 문화적 유산: 유학과 불교를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시켜 발해 문화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이는 세련되고 수준 높은 귀족 문화를 꽃피우는 토양이 되었다.

3. 정체성의 유산: '고려국왕', '천손' 등의 칭호를 통해 고구려 계승 의식을 확고히 했다. 

이는 발해가 단순한 북방 민족의 국가가 아닌, 고구려의 역사적 정통성을 잇는 제국이라는 국가 정체성을 다진 것이다.


5.2. 빛과 그림자: 갑작스러운 죽음과 계승의 혼란

그러나 그의 오랜 통치가 남긴 빛 뒤에는 짙은 그림자도 있었다. 

793년 문왕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발해는 극심한 정치적 혼란에 휩싸였다. 

태자 대굉림이 이미 사망한 상태에서 후계 구도가 명확히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왕 사후, 그의 족제(族弟)인 대원의가 왕위를 찬탈했다가 살해당하고 손자인 성왕마저 요절하는 등 극심한 혼란이 시작되었다. 

이어진 강왕의 치세 이후에도 정왕, 희왕, 간왕이 단명하며 약 25년간 7명의 왕이 교체되는 극심한 불안정기가 선왕 대에 이르러서야 겨우 수습되었다. 

이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군주가 너무 오랜 기간 통치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전형적인 후계 문제로, 문왕의 치세가 남긴 유일한 오점이라 할 수 있다.


역사에 새겨진 이름, 문왕

사후의 일시적인 혼란에도 불구하고, 문왕 대흠무가 발해를 동아시아의 강력하고 문명화된 제국으로 올려놓은 가장 위대한 군주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는 무(武)의 시대를 마감하고 문(文)의 시대를 열었으며, 발해라는 국가의 정체성과 시스템을 완성했다. 

그가 다진 단단한 기반 위에서 발해는 200년 넘게 북방을 호령하는 강대국으로 존속할 수 있었다. 

역사에 새겨진 그의 이름, 문왕은 '해동성국'의 진정한 설계자로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이 글은 발해 문왕 대흠무의 생애와 통치를 다룬 여러 사료·연구·공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읽기 쉽게 서사 형식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연대·지명·관직·제도·외교 관계 등 핵심 정보는 현재 알려진 역사 연구 성과를 따르되, 일부 장면 묘사나 대사·심리는 이해와 몰입을 돕기 위한 서사적 각색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승에 가까운 내용이나 학계의 해석이 갈리는 부분은 필요에 따라 (전승)/(논쟁) 등으로 구분해 인식하려 했으며, 보다 엄밀한 근거와 세부 쟁점은 관련 논문·전문서를 함께 참고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글은 학술 논문이 아니라 “역사를 소재로 한 장편 읽을거리”에 가깝다는 점을 함께 기억해 주세요.


The essay follows how King Mun of Balhae, Dae Heummu, turned a war-forged kingdom into a structured civil empire. 

Succeeding his militant father, he chose law and learning over border wars, importing Tang codes and classics and building a Confucian state with the Three Secretariats, Six Ministries and a multi-capital system. 

Capital moves and routes to Tang, Silla and Japan tied a vast multiethnic realm together.

Calling himself Heaven’s grandson and using his own era names, he claimed imperial rank while balancing great-power diplomacy. 

Private grief over dead heirs darkens his long reign, and later succession chaos shows its limits, yet Mun endures as architect of Balhae’s rise as the “Flourishing Land in the 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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