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프탑 코리안스(Rooftop Koreans): 생존의 옥상에서 시대의 아이콘이 되기까지
1. '루프탑 코리안스'라는 강렬한 이미지의 탄생
1992년 4월의 마지막 날들, 전 세계의 시선은 거대한 불길에 휩싸인 미국 로스앤젤레스(LA)로 향했습니다.
약탈과 방화, 무법천지가 된 거리 위로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외신 기자들의 렌즈에 포착된 기이하고도 강렬한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평범한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동양인 남성들이 소총과 권총으로 무장한 채, 상점 옥상의 낮은 난간 너머로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의 눈빛에는 분노보다는 오히려 무겁고도 차가운 절박함이 서려 있었습니다.
루프탑 코리안스 (Rooftop Koreans)
'루프탑 코리안스' 또는 '루프 코리안스(Roof Koreans)'는 1992년 LA 폭동 당시, 국가 공권력의 보호가 완전히 철수된 치안 공백 상황에서 자신의 생계 터전과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무장하고 상점 옥상에 올라간 한인 자경단을 일컫는 용어입니다.
이 명칭은 당시 한인 사회가 마주했던 '생존을 위한 처절한 응답'을 상징하며, 오늘날에는 미국 내 총기 소지 권리 논쟁과 소수계 정체성 담론에서 강력한 역사적 아이콘으로 소비되고 있습니다.
당시 옥상에 올라갔던 이들은 영웅이 되고 싶었던 전사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낮에는 채소를 다듬고 밤에는 장부를 정리하던 평범한 아버지들이자 이웃들이었습니다.
아메리칸 드림을 향해 낯선 땅에 뿌리 내리려던 이들이 왜 국가라는 사회적 계약이 파기된 자리에서 스스로 총을 들어야만 했는지, 우리는 그 옥상 위에서 무엇이 타오르고 있었는지 직시해야 합니다.
30년이 넘는 세월을 관통해 이 이미지가 현대 사회에 던지는 묵직한 화두를 추적해 보겠습니다.
2. 시대적 도화선: 폭발하기 직전의 도시, LA
1992년의 대폭발은 우연한 사고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수십 년간 축적된 인종적 차별, 경제적 불평등, 그리고 주류 사회의 무책임한 방관이 빚어낸 필연적인 비극이었습니다.
당시 한인 사회는 백인 주류 사회와 흑인 빈민층 사이에서 갈등의 완충지대 역할을 강요받는 이른바 '중간자적 소수민족(Middleman Minority)'의 위치에 놓여 있었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두 개의 비극적인 죽음과 그에 대한 사법부의 냉혹한 판결이었습니다.
하나는 국가 공권력의 잔혹성을 폭로했고, 다른 하나는 소수계 사이의 깊은 감정적 골을 만들었습니다.
1992 LA 폭동의 결정적 도화선: 구조적 모순의 대조
|
구분
|
로드니 킹(Rodney King) 사건
|
두순자(라타샤 할린스) 사건
|
|---|---|---|
|
사건의 본질
|
국가 권력의 폭력성: 백인 경찰들이 흑인 운전자 로드니 킹을 50여 차례 집단
폭행.
|
소수계 간의 비극적 오해: 한인 업주 두순자가 15세 흑인 소녀 라타샤를 절도로 오해해
실랑이 끝에 총격.
|
|
결정적 장면
|
인근 주민 조지 홀리데이가 자신의 발코니에서 비디오로 촬영.
(공교롭게도 영화 '터미네이터 2' 촬영지 인근)
|
상점 내 CCTV에 담긴, 1.79달러짜리 오렌지 주스를 두고 벌어진
실랑이와 뒷모습을 향한 총격.
|
|
사법부의 판결
|
무죄 평결(1992.4.29): 명백한 폭행 증거에도 불구하고 백인 위주의 배심원단은
경찰관들에게 무죄를 선고.
|
집행유예 판결(1991.11): 유죄가 인정되었으나 판사는 "정당방위의 측면이 있다"며 5년
보호관찰과 사회봉사만 선고.
|
|
사회적 파장
|
"사법 정의는 죽었다"는 분노가 흑인 사회를 넘어 미국 전역으로
확산.
|
흑인 사회 내에 "한인은 흑인 목숨을 오렌지 주스보다 못하게
여긴다"는 분노와 반한 감정 고착화.
|
|
폭동에서의 역할
|
폭동 발생의 직접적인 정치적 뇌관.
|
폭동의 분노 화살이 백인이 아닌 한인 사회로 향하게 만든 정서적 촉매제.
|
|
| 두순자 사건 |
백인 주류 사회는 흑인 사회의 빈곤과 차별에 대한 분노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대신, 그 접점에 있는 한인 사회를 '분풀이 대상'으로 배치했습니다.
흑인 사회의 입장에서는 백인 자본이 빠져나간 빈민가에 들어와 리커스토어(Liquor Store)와 스왑밋(Swap Meet)을 운영하며 부를 축적하는 한인들이 자신들을 착취하는 '침입자'로 비춰졌습니다.
이러한 오해와 구조적 모순은 결국 4월 29일, 거대한 화염의 불꽃으로 타올랐습니다.
3. 4.29 폭동의 전개: 국가가 포기한 거리에 홀로 남겨진 이들
폭동이 시작되자마자 LA의 치안 시스템은 즉각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이 무너짐은 철저하게 '선별적'이었습니다.
당시 공권력의 행보는 국가가 시민 보호라는 기본 의무를 얼마나 노골적으로 포기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잔인한 증거였습니다.
• 공권력의 비겁한 회피: 폭동 첫날, LAPD 국장 데럴 게이츠(Daryl Gates)는 폭동 발생 보고를 받고도 기금 모금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습니다.
지휘부가 부재한 사이, 현장 경찰관들은 아무런 대응 지침을 받지 못한 채 서성거렸습니다.
당시 톰 브래들리 시장과 게이츠 국장 간의 이원화된 권력 구도는 효율적인 초기 진압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 선별적 방어선 구축: 경찰은 폭동이 확산되자 베벌리 힐즈(Beverly Hills)와 웨스트 할리우드 같은 백인 부유층 지역을 지키기 위한 견고한 '방패막이'를 쳤습니다.
반면, 한인타운으로 향하는 길목은 사실상 무방비로 개방되었습니다.
한인 상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911에 전화를 걸었을 때 돌아온 것은 "가만히 있으라"는 무책임한 명령과 "보험을 들었길 바란다"는 조소 섞인 방관뿐이었습니다.
데이터가 증명하는 비극의 규모
◦ 전체 재산 피해액(약 7억8억 5천만 달러) 중 40~50%가 한인 업소에 집중되었습니다.
◦ 약탈과 방화로 잿더미가 된 한인 업소는 무려 2,300여 곳에 달했습니다.
◦ LA 한인타운에서만 단 하룻밤 사이(폭동 둘째 날) 968건의 약탈이 신고되었습니다.
한인들은 불타는 상점 앞에서 절규하며 깨달았습니다.
자신들이 믿어왔던 '미국 시민으로서의 권리'는 허상이었으며, 국가라는 울타리 밖으로 내던져진 '투명인간'이었음을 말입니다.
소음과 총성, 그리고 코를 찌르는 불타는 냄새(Acrid smell of burning rubber and wood)는 당시를 겪은 한인들에게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시지 않는 트라우마로 남아 있습니다.
4. 옥상 위의 파수꾼: '루프탑 코리안스'의 사투와 군사적 배경
경찰이 버리고 떠난 거리에서, 한인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가장 극단적이면서도 유일한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이들이 옥상에 올라가 보여준 조직적이고 일사불란한 방어 태세는 당시 전 미국 사회를 경악게 했습니다.
평범한 식료품점 주인들이 어떻게 정규군에 가까운 전술적 움직임을 보여줄 수 있었을까요?
1. 라디오 방송을 통한 실시간 지휘: 한인 라디오 방송국은 폭동 기간 내내 긴급 상황을 전파하며 거대한 무선 지휘소 역할을 했습니다.
한인들은 라디오와 워키토키를 통해 폭도들의 이동 경로를 공유하고, 취약 지역에 자원봉사자들을 급파하는 등 현대판 '봉화' 시스템을 가동했습니다.
2. 의무 병역 경험이 만든 조직력: 당시 이민 1세대 남성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30개월 이상의 의무 병역을 마친 상태였습니다.
또한 시기적으로 월남전에 참전했을 가능성이 충분한 세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옥상에 초소를 설치하고(Observation Posts), 사격 범위를 계산한 화망(Crossfire)을 구성하며, 교대 근무 체계를 수립하는 등 병역 경험에서 우러나온 본능적인 방어 전술을 펼쳤습니다.
3. 비극적인 희생의 기록: 이 사투는 결코 낭만적인 무용담이 아니었습니다.
웨스턴과 3번가 근처 상점을 지키려던 18세 청년 이재성(Edward Song Lee) 군이 동료 자경단의 오인 사격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는 국가가 사라진 무법지대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형제가 형제를 지키려다 발생한 가장 가슴 아픈 비극이었습니다.
|
|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 당시 로스앤젤레스의 한국계 미국인들 |
루프탑 코리안스의 주요 방어 전략 3가지
1. 옥상 거점(Rooftop Vantage Points) 확보
◦ 효과: 고지대에서 넓은 시야를 확보하여 접근하는 폭도들에게 심리적 저항선을 형성하고 실제 약탈 시도를 저지함.
◦ 한계: 야간 식별의 어려움으로 이재성 군 사례와 같은 동료 간 오인 사격 위험이 상존함.
2. 무전망을 통한 정보 우위 점유
◦ 효과: 약탈이 발생한 5번가와 웨스턴, 8번가와 옥스퍼드 등 주요 교차로의 상황을 실시간 공유하여 신속히 인원을 배치함.
◦ 한계: 경찰과의 공조가 전무했기에 정당방위와 불법 무장 자경단 사이의 법적 경계에서 위태로운 상황을 초래함.
3. 상호 방어 체계 구축(Mutual Defense)
◦ 효과: 내 상점뿐만 아니라 인근 블록 전체를 하나의 방어 구역으로 설정하여 최소 인원으로 최대 효과를 냄.
◦ 한계: 국가 공권력이 해야 할 일을 민간인이 수행하며 겪는 극도의 심리적 압박과 트라우마를 고스란히 떠안음.
|
| K1 총을 들고있는 한인 |
5. 언론의 왜곡과 '한·흑 갈등' 프레임의 고착화
폭동의 근본 원인은 백인 경찰의 폭력과 사법부의 불공정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국 주류 언론은 이 본질을 흐리기 위해 교묘한 전략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이 사건을 백인 대 흑인의 인종 차별 문제가 아닌, '한인 대 흑인'의 인종 전쟁으로 편집하여 내보내기 시작했습니다.
|
주류 언론의 프레임 (Frame)
|
숨겨진 구조적 진실 (Reality)
|
|---|---|
|
"분노한 흑인 vs 총 든 한인"
|
백인 우월주의 구조 내에서 발생한 '분할 통치(Divide and Rule)'의
전형적인 결과물.
|
|
"두순자 사건의 반복 노출"
|
흑인들의 정당한 분노를 백인 지배 계급이 아닌, 다른 소수계인
한인에게 전가하려는 의도적 선동.
|
|
"돈만 아는 수전노, 한인 상인"
|
한인은 흑인 커뮤니티의 빈곤을 해결할 권력이 없는 또 다른 피해자이자 사회적 약자였음.
|
|
"무법 천지의 한인 자경단"
|
국가가 보호 의무를 유기(Abandonment)한 상황에서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저항.
|
이러한 언론 보도는 흑인 사회에는 한인을 증오의 대상으로, 백인 사회에는 한인을 '질서의 수호자' 혹은 '무장한 동양인'이라는 이국적인 볼거리로 전락시켰습니다.
힙합 문화에서도 이러한 갈등은 표출되었습니다.
아이스 큐브(Ice Cube)는 'Black Korea'라는 곡에서 한인 상점을 노골적으로 공격했고, 반면 2Pac은 'Hellrazor'를 통해 라타샤 할린스를 애도하며 한인 사회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습니다.
언론과 대중문화가 합심하여 만든 이 프레임은 폭동 이후 수십 년간 한인 사회를 '인종 갈등의 주범'이라는 오명 속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6. 현대적 변용: 밈(Meme)이 된 역사와 총기 옹호론의 상징
시간이 흘러 루프탑 코리안스는 인터넷 공간에서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부활했습니다.
2014년 퍼거슨 시위와 'Black Lives Matter' 운동을 거치며, 이들의 이미지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강력한 '밈(Meme)'이 되어 소비되기 시작했습니다.
• 수정헌법 제2조(총기 소지권)의 아이콘: 미국 내 보수 정치권과 총기 옹호론자들은 이들을 "국가가 당신을 버릴 때, 오직 총만이 당신을 지킨다"는 논거의 완벽한 사례로 추앙합니다.
"You are your own first responder(당신 자신이 첫 번째 구조대원이다)"라는 구호와 함께 이들의 이미지는 굿즈와 티셔츠로 제작됩니다.
• 2025년 시위와 정치적 조롱: 최근 2025년 6월, LA 시내에서 이민세관단속국(ICE)의 단속에 반대하는 시위가 격화되자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는 SNS에 1992년 자경단 사진을 올리며 "Make Rooftop Koreans Great Again"이라는 문구를 게시했습니다.
이는 과거의 상처를 정치적 선동의 도구로 사용한 행위였습니다.
|
| Make Rooftop Koreans Great Again |
• 한인 사회의 절규: 이에 대해 LA 한인회는 즉각 긴급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33년 전의 트라우마를 조롱하지 말라"는 그들의 성명에는 여전히 총성과 불타는 냄새에 시달리는 피해자들의 고통이 담겨 있었습니다.
밈 뒤에 숨겨진 '죽음의 공포'는 거세된 채, 단순한 '강한 남자'의 이미지로 소비되는 현실에 한인 사회는 깊은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루프탑 코리안스의 현대적 소비 방식 분석
• 가시성 확보: 한인들이 더 이상 수동적인 피해자가 아닌, 강력한 의지를 가진 주체로 인식되는 계기.
• 역사적 맥락의 거세: 당시의 절박한 고통과 국가의 직무 유기라는 본질은 사라지고 '멋진 저항군' 이미지로만 남음.
• 정치적 도구화: 총기 규제 반대나 인종 간 갈등을 조장하려는 특정 정치 세력의 논거로 악용될 위험.
• 재발하는 트라우마: 당사자들에게는 생존의 사투였던 기억이 누군가의 '재미'나 '정치적 구호'로 쓰이는 것에 대한 심리적 고통.
7. 유산과 교훈: '재미한인(Korean-American)' 정체성의 재탄생
4.29 폭동은 한인 사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지만, 동시에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불러왔습니다.
한인들은 더 이상 이방인으로 남아 '돈만 버는 구경꾼'으로 살아서는 미국 사회에서 생존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정체성 패러다임의 전환: Before & After 4.29]
폭동 전 (The Age of Immigrants)
• 지향점: 개인의 경제적 성공, 자녀의 명문대 진학, 한국적 정체성 유지.
• 사회적 위치: 정치적 목소리가 없는 '투명인간', 언저리 더부살이.
• 사회 관계: 흑인/히스패닉 커뮤니티를 성공을 위한 발판으로만 인식, 타 민족과의 고립.
폭동 후 (The Birth of Korean-Americans)
• 지향점: 시민 참여, 정치력 신장, 다인종 사회에서의 공존과 권익 옹호.
• 사회적 위치: 미국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 제도권 내부에서의 영향력 확보.
• 사회 관계: 소수계 연대(Coalition)의 중요성 자각, 타 커뮤니티와의 대화 및 공동체 기여 시작.
폭동 이후 한인 사회는 유권자 등록 운동을 펼치고 시민참여센터(KACE) 등 다양한 시민단체를 결성하여 차세대 리더를 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옥상 위에 홀로 남지 않기 위해, 법과 제도라는 거대한 옥상을 직접 구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
폭동 당시 로드니 킹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카메라 앞에서 물었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살아갈 수 없나요?(Can we all get along?)"
|
| 우리 모두 함께 살아갈 수 없나요? |
이 질문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미국 사회, 그리고 우리 공동체 전체를 향해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루프탑 코리안스'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진정한 유산은 옥상 위의 총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국가가 부재한 자리에서 확인한 공동체의 처절한 힘이며, 그 고통의 기록을 딛고 일어선 '공존을 향한 각성'입니다.
오늘날 옥상 위의 그들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이웃과 진정으로 연결되어 있는가, 아니면 또 다른 비극이 닥쳤을 때 다시 홀로 옥상에 올라가야만 하는가.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는 것이 4.29의 역사가 우리에게 남긴 최종적인 화두입니다.
본글은 공개된 기록(언론 보도, 당시 영상·사진, 조사 보고서, 회고·인터뷰 등)에서 널리 알려진 흐름을 바탕으로 이해를 돕기 위해 서사적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다만 피해 규모, 특정 기관의 대응 방식, 개별 사건의 맥락과 책임 소재, “루프탑 코리안스”라는 용어의 사용 범위 등은 자료에 따라 수치·해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독자께서 필요하시면 핵심 수치와 인용 대목은 별도로 원자료를 대조해 확인하시길 권합니다.
특정 집단을 비난하거나 갈등을 조장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국가가 부재한 순간 공동체가 어떤 선택을 강요받는가”, “그 기억이 이후 어떻게 소비·왜곡되는가”를 성찰하기 위한 글입니다.
읽는 과정에서 불편함이나 감정적 부담이 생길 수 있으니, 컨디션에 맞춰 천천히 읽어주세요.
During the 1992 Los Angeles unrest, many Korean immigrant merchants in Koreatown faced a policing vacuum.
After the Rodney King verdict, violence spread; the earlier Latasha Harlins case and its light sentence helped steer anger toward Korean stores.
As protection seemed to prioritize wealthier districts, shopkeepers formed ad-hoc mutual defense: Korean radio and walkie-talkies relayed hotspots, and armed volunteers used rooftop vantage points to deter looting.
It was also tragic—Edward Song Lee died in friendly fire.
In later retellings, mainstream coverage often framed the crisis as Korean–Black conflict, masking deeper structural issues.
Decades on, “Rooftop Koreans” reappeared online as a meme and a symbol in U.S. gun-rights politics, while within the community 4.29 became a catalyst for civic organizing and political voice.
For survivors, the image carries trauma more than bravado.
.jpg)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