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를 호령한 여인: 우씨 왕후
역사의 갈림길에 선 왕후
고구려 역사상 가장 격동적인 시기, 한 여인이 자신의 의지로 나라의 운명을 좌우했다.
고국천왕과 산상왕, 두 형제 왕의 아내이자 세 번째 왕인 동천왕의 왕태후로서 총 50여 년간 권력의 정점에 섰던 우씨 왕후(王后 于氏).
수많은 왕실 인물 속에서도 그녀가 오늘날까지 역사가들을 매료시키는 이유는, 그녀의 삶이 단순한 왕실 여인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후사 없이 남편이 죽자 닥쳐온 절체절명의 위기를 하룻밤의 담판으로 뒤집고, 자신의 손으로 다음 왕을 세운 정치적 승부사의 대서사시이다.
그녀의 파격적인 행보는 후대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극단적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당대 고구려의 관점에서는 소서노, 평강공주와 같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개척한 진취적인 여성이었다.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어 자신의 욕망과 정치적 신념에 따라 국가의 운명을 움직인 여인, 우씨 왕후의 드라마틱한 삶을 따라가 본다.
1. 첫 번째 왕후: 고국천왕의 아내
1. 왕후 우씨의 시작
우씨 왕후는 고구려 5부 중 하나인 연나부(椽那部) 출신의 귀족 우소(于素)의 딸이었다.
그녀가 제9대 왕 고국천왕의 왕후가 된 것은 당시 귀족 세력 간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정치적 결합이었다.
왕후라는 지위는 그녀 개인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문인 연나부의 정치적 입지를 굳건히 하는 강력한 기반이 되었다.
2. 예상치 못한 균열
평온하던 그녀의 삶은 197년, 남편 고국천왕이 후사(後嗣) 없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송두리째 흔들린다.
왕의 죽음은 그녀에게 개인적인 슬픔을 넘어, 왕후의 자리와 가문의 정치적 생명이 끝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의미했다.
왕을 잃은 왕후는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고국천왕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위기 속에서, 우씨 왕후는 운명에 순응하는 대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왕의 죽음을 철저히 비밀에 부친 채, 고구려의 역사를 바꿀 하룻밤의 담대한 행보를 시작한다.
2. 운명의 하룻밤: 왕위 계승자를 향한 담판
“왕후 우씨는 임금의 죽음을 비밀로 하여 밝히지 않고···”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산상왕
그날 밤, 우씨 왕후는 몰래 궁을 빠져나와 왕위 계승 서열 1순위였던 고국천왕의 첫째 동생 발기(發岐)를 찾아갔다.
그녀는 발기에게 은밀히 왕위를 제안하며 자신과 손을 잡을 것을 권했다.
하지만 왕의 죽음을 전혀 몰랐던 발기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는 아녀자가 밤늦게 돌아다니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다며 오히려 우씨 왕후를 꾸짖고 모욕을 주어 내쫓았다.
발기는 자신이 당연히 왕이 될 것이라 확신했기에, 굳이 형수인 우씨 왕후와 손을 잡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두 번째 선택: 연우와 손잡다
발기에게 심한 창피를 당한 우씨 왕후는 포기하지 않고 발길을 돌려 둘째 동생 연우(延優)에게 향했다.
연우의 반응은 발기와 극명하게 달랐다.
• 극진한 예우: 연우는 의관을 갖추고 문밖까지 나와 왕후를 극진히 맞이하며 잔치를 벌였다.
• 상징적 복종: 연우가 왕후를 위해 직접 고기를 썰다 손을 베이자, 우씨 왕후는 자신의 치마끈을 풀어 그의 상처를 감싸주었다.
당시 귀족을 위해 시종이 고기를 자르던 풍습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연우가 왕후에게 시종이 될 수도 있다는, 즉 기꺼이 그녀의 아래에 서겠다는 충성의 비언어적 맹세였다.
또한 "내가 당신을 선택했으니, 당신은 나의 남자가 되어 달라"는 정치적 결탁과 유혹의 상징이 된다.
• 동행 입궁: 잔치가 끝난 후, 우씨 왕후는 "밤이 깊어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길까 두려우니 그대가 나를 궁까지 데려다 달라"고 요청했고, 연우는 왕후의 손을 잡고 함께 궁으로 들어갔다.
이 만남을 통해 우씨 왕후는 연우야말로 자신과 함께할 파트너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연우와의 만남으로 차기 왕에 대한 결심을 굳힌 우씨 왕후.
이제 그녀는 자신의 선택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대담한 정치적 계략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3. 새로운 왕을 세우다: 대담한 정치적 승부수
1. 거짓된 왕의 유언
다음 날 아침, 우씨 왕후는 신하들을 모아놓고 선왕의 마지막 뜻이라며 폭탄선언을 했다.
한 편의 잘 짜인 정치극이었다.
"선왕(先王)께서 연우를 후계자로 삼으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이 한마디로 왕위 계승 서열 2순위였던 연우는 고구려 제10대 산상왕(山上王)으로 즉위했다.
우씨 왕후의 이 대담한 거짓말이 아무런 반발 없이 받아들여진 것은, 이미 그녀와 다수의 신하들 사이에 암묵적인 정치적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발기의 폭압적이고 잔인한 성품을 두려워했던 귀족 세력은, 차라리 우씨 왕후의 통제 아래 있는 연우를 지지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2. 왕위 계승의 정당성
정당한 계승자였던 발기 대신 연우가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명확했다.
우씨 왕후는 단순히 감정에 따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치밀한 정치적 계산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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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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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기 (發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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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 (延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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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 계승 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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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순위 (첫째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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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순위 (둘째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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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씨 왕후에 대한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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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담하고 무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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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진하고 협조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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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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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기반 거의 없음 (재상 을파소마저 외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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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씨 왕후와 연나부, 그리고 다수 신하들의 지지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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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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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압적이고 잔인한 성품으로 평가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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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씨 왕후에게 순종적인 태도를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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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의 즉위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갈등의 시작이었다.
모든 것을 빼앗긴 발기는 분노에 휩싸여 자신의 조국에 칼을 겨누는 비극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4. 피로 물든 왕좌: 형제의 난
1. 반역자가 된 왕자
왕위를 빼앗긴 발기는 즉각 군사를 이끌고 왕궁을 포위했다.
그는 연우를 향해 "자식까지 목 베어 죽일 것이다"라고 외치며 가차 없는 공격을 예고했다.
하지만 나라 사람들은 폭압적인 성품의 그를 따르지 않았고, 지지 세력 하나 없는 그는 고립되었다.
실제로 이후 역사 기록에서 연우의 가족에 대한 언급이 사라지는 것으로 보아, 발기가 끔찍한 협박을 실행에 옮겼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논쟁)
결국 발기는 최악의 선택을 한다.
고구려의 오랜 적국이었던 한나라 요동 태수 공손탁에게 찾아가 군사 3만을 빌려 조국을 공격한 것이다.
2. 비극의 종결자, 막냇동생 계수
산상왕은 막냇동생 계수(瀱須)를 보내 발기의 난을 진압하게 했다.
결국 전투에서 패하고 막다른 길에 몰린 발기는 자신을 추격해 온 동생 계수를 마주한다.
발기: "너가 차마 지금 늙은 형을 해칠 수 있겠느냐?"
계수: "당신은 한때의 분노로 자기 나라를 멸망시키려 하니, 죽은 후 무슨 면목으로 조상들을 보겠습니까?"
동생의 날카로운 질책에 기록에 따르면, 발기는 계수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극심한 수치심을 느꼈다.
"발기는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배반구(裴川: 지명)로 도망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自刎死)." — 《삼국사기》 권제16, 고구려본기 제4
계수는 비록 적이 되어 싸웠지만 형의 시신을 보고 슬퍼하며 거두어 주었다.
이후 계수가 돌아오자 산상왕(연우)은 승전보보다 형의 죽음을 슬퍼하는 계수를 꾸짖기도 했으나, 계수의 "형제는 바꿀 수 없는 천륜"이라는 말에 왕도 부끄러워하며 화해했다는 기록이 이어진다.
산상왕은 반역자였지만 형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러주며 길었던 내란을 마무리 지었다.
모든 정적을 제거하고 왕좌를 굳건히 한 산상왕과 우씨 왕후.
그들은 공식적으로 부부가 되면서, 그녀의 인생 2막이 화려하게 시작되었다.
5. 두 번째 왕후: 권력의 정점에서 마주한 아킬레스건
1. 형사취수(兄死娶嫂), 풍습인가 욕망인가
산상왕은 자신을 왕위에 올려준 형수 우씨를 다시 왕후로 맞이했다.
이는 당시 고구려와 부여 등에서 보편적이었던 형사취수(兄死娶嫂), 즉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는 풍습에 따른 것이었다.
이는 단순히 감정적 결합이 아닌, 남편을 잃은 여성의 생계를 보호하고 아내의 지참금을 포함한 가문의 재산이 밖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사회경제적 제도이기도 했다.
조선 시대 유학자들은 이를 두고 "그 행위가 개돼지만도 못하다"며 그녀를 음탕하다고 맹비난했지만, 이는 후대의 가치관으로 과거를 재단한 평가에 불과하다.
당대 고구려 사회에서 그들의 결혼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었다.
2. 치명적 약점: 후사가 없다
두 번째 왕후가 되어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쥔 우씨 왕후에게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바로 후사(後嗣)가 없는 것이었다.
산상왕과 재혼한 지 7년이 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하자, 이는 그녀의 권력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약점, 즉 '아킬레스건'이 되었다.
왕자 생산에 대한 압박 속에서 산상왕은 기이한 꿈을 꾸게 된다.
그리고 그 꿈은 현실이 되어, 우씨 왕후의 삶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킬 새로운 인물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었다.
6. 경쟁자의 등장: 주통촌의 여인
1. 왕의 꿈과 도망친 돼지
아들을 간절히 원했던 산상왕은 어느 날 꿈 이야기를 신하들에게 공론화한다.
"꿈에서 하늘이 말하기를, '내가 너의 작은 왕후(소후, 小后)를 통해 아들을 낳게 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는 우씨 왕후의 눈치를 보며 후궁을 들이지 못하던 산상왕이 명분을 만들기 위한 정치적 계산이었다.
얼마 후,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나 '주통촌'이라는 마을까지 도망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고구려에서 제수용 돼지가 특정 장소로 이끄는 것은 '하늘의 뜻'으로 해석되었다.
이 돼지를 '후녀(后女)'라는 여인이 잡아주었고, 이 소식을 들은 산상왕은 하늘의 계시를 명분 삼아 몰래 그녀를 찾아가 관계를 맺었다.
2. 왕후의 칼날과 태아의 방패
산상왕과 후녀의 관계를 알게 된 우씨 왕후는 분노에 휩싸여 병사를 보내 후녀를 죽이려 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 끝에 붙잡혀 목숨을 잃기 직전, 후녀는 병사들을 향해 절박하게 외쳤다.
"지금 내 뱃속에 아이가 있는데 실로 왕이 남겨준 몸이다. 내 몸은 죽일 수 있으나 왕의 아이도 죽일 수 있겠느냐?"
이 한마디에 병사들은 감히 칼을 쓰지 못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3. 정치적 합의와 새로운 왕자의 탄생
후녀의 임신 사실이 알려지자 우씨 왕후는 더 이상 그녀를 해칠 수 없었다.
결국 후녀는 궁에 들어와 소후(작은 왕후)가 되었다.
이는 우씨 왕후가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는 조건으로 산상왕과 맺은 '모종의 합의'였을 가능성이 높다.
209년, 마침내 아들 '교체(郊彘)'(훗날 동천왕)가 태어났다.
교체의 탄생은 우씨 왕후의 견고했던 권력 세계에 영구적인 균열을 냈다.
이제 그녀는 단순히 왕을 만드는 '킹메이커'를 넘어, 제거할 수 없는 경쟁자를 관리하며 장기적인 권력 구도를 설계해야 하는 '전략가'로 진화해야만 했다.
아들 교체가 다섯 살에 태자로 책봉되면서 왕실의 권력 구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들 교체의 탄생으로 권력의 일부를 내주었지만, 우씨 왕후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왕태후(王太后)가 되어 다시 한번 자신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증명한다.
7. 고구려의 대왕태후(大王太后): 끝나지 않은 권력
1. 세 번째 왕을 시험하다
227년 산상왕이 세상을 떠나고 후녀의 아들인 동천왕이 즉위하자, 우씨는 왕태후가 되었다.
그녀는 즉시 새로운 왕을 시험하며 자신의 위세를 과시했다.
• 첫 번째 시험: 왕이 사냥을 나가려 하자, 그가 탈 말의 갈기를 잘라버렸다.
• 두 번째 시험: 시종을 시켜 일부러 왕의 옷에 국을 쏟게 했다.
이는 아들의 어머니가 된 후녀 세력을 견제하고, 여전히 고구려의 최고 권력자는 자신임을 각인시키기 위한 우씨 왕후의 고도로 계산된 정치적 행위였다.
이러한 돌발 행동에도 불구하고 동천왕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대처했다.
말의 갈기를 보고, "말이 갈기가 없으니 불쌍하구나."라고 말하며, 시종에게는 "손이 데이지 않았느냐?"라며 인자하고 관대한 모습을 보여줬다.
2. 50여 년의 권세
우씨 왕후는 고국천왕의 왕후로 시작해 산상왕의 왕후, 그리고 동천왕의 왕태후에 이르기까지, 총 55년 가까이 3대에 걸쳐 고구려 왕실의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다.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은 그 어떤 왕보다 강력했다.
기나긴 권력의 여정 끝에 노년에 이른 우씨 왕후. 그녀의 마지막 선택은 고구려 역사에 전무후무한 파격적인 기록을 남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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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란이 되었던 드라마 우씨왕후 포스터 |
8. 마지막 선택과 엇갈린 평가
1. 파격적인 유언: "산상왕의 곁에 묻어달라"
234년, 죽음을 앞둔 우씨 왕후는 상식을 깨는 유언을 남긴다.
형사취수 풍습에 따르면 첫 남편인 고국천왕의 곁에 묻혀야 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직접 선택한 두 번째 남편 산상왕의 릉 옆에 묻어달라고 요청했다.
이 선택은 여러 의미를 담고 있다.
• 인간적인 정(情)의 표현: 정략결혼이었던 고국천왕과 달리,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고 함께 위기를 헤쳐나온 산상왕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었을 수 있다.
• 마지막 권력 과시: 죽는 순간까지 기존의 틀을 깨는 파격적인 행보로 자신의 영향력이 여전히 건재함을 증명하려 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그녀의 유언 때문에 무당의 꿈에 나타난 고국천왕이 분노하자, 그의 무덤 앞에 소나무를 일곱 겹으로 심어 가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2. 시대의 거울에 비친 두 얼굴
우씨 왕후에 대한 평가는 시대를 거치며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 고구려 시대의 관점
◦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개척한 진취적인 여성.
고구려 건국의 주역인 소서노나, 바보 온달을 장군으로 만든 평강공주의 계보를 잇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 조선 시대의 관점
◦ "그 행위가 개돼지만도 못하다"고 비난받은, 유교적 윤리를 거스른 음탕하고 부끄러움 없는 여인.
조선의 영조 임금은 그녀에 대한 기록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다"며 신하들에게 건너뛰라고 명할 정도였다.
우씨 왕후가 떠난 뒤에도 고구려의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오래 붙잡아 두었던 왕실의 긴장, 귀족의 계산, 국경의 압력은 더 선명한 얼굴로 다시 나타난다.
동천왕이 통치하던 때, 고구려는 결국 위(魏)의 대대적인 침입을 맞는다.
244년부터 245년에 걸친 전쟁에서 관구검(毌丘儉)의 군대가 들어와 수도 환도성이 함락되고, 왕이 옥저 방면까지 피신하는 극단적인 위기를 겪는다.
이 장면은 우씨 왕후의 삶을 다른 각도에서 다시 보게 만든다.
우씨 왕후는 “궁중의 권력”을 호령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왕실은 늘 밖으로는 요동과 중국 세력, 북방의 여러 집단과 맞닿아 있었다.
안에서 왕을 세우고 왕을 시험할 수 있었던 사람조차, 바깥에서 몰려오는 전쟁의 파도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우씨 왕후의 이야기는 한 여인의 ‘욕망’만으로 읽히지 않는다.
그녀가 끝까지 지키려 했던 것은, 어쩌면 “왕실이 무너지는 순간 귀족도 나라의 질서도 함께 무너진다”는 냉혹한 현실이었다.
그 현실을 아는 사람만이, 하룻밤에 왕을 바꿀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우씨 왕후는 한 시대의 가치관만으로 평가할 수 없는 입체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왕권과 귀족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고구려의 정치 시스템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이용한 거물이었다.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어 자신의 욕망과 정치적 신념에 따라 국가의 운명을 움직였으며, 한국 고대사에서 가장 강력하고 인상적인 여성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우씨 왕후(于氏 王后)의 행적을 중심으로, 《삼국사기》 등 현존 사료에 담긴 사건의 큰 흐름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서사형 전기입니다.
다만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 전개, 인물의 심리, 대사와 연결 문장은 서사적으로 다듬었습니다.
사료 해석이 갈릴 수 있는 부분은 (논쟁), 전해오는 이야기 성격이 강한 내용은 (전승)으로 구분해 이해를 돕고자 했습니다.
고대사는 기록의 공백과 표현 차이가 존재할 수 있으니, 연대·인용의 엄밀한 확인이 필요하다면 원문 사료와 연구서로 교차 확인을 권합니다.
This narrative biography follows Queen U (Woo-ssi), a powerful Goguryeo consort who shaped succession across three reigns.
After King Gogukcheon died without an heir (197), she kept the death secret, tested the elder prince Balgi, then backed the younger Yeonu, installing him as King Sansang.
Balgi’s revolt and appeal to the Liaodong strongman Gongsun Du showed how a palace crisis could invite foreign blades.
Later, a woman from Jutong village bore Prince Gyochae (future King Dongcheon).
As Queen Dowager, U asserted dominance by “testing” the new king, and at death (234) chose burial beside Sansang, leaving lasting deb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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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글의 흐름이 쉽고 흥미로워 순식간에 읽게 되네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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